『사냥꾼, 목동, 비평가』 혼자 읽기

D-29
[미래의 주문(呪文)은 충분한 물질적 안전장치에 기반한 〈자기 조직화〉와 〈자기 책임〉, 〈자기 주도〉이다. 그런데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구축하고, 계획을 세우고, 자신이 하는 일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는 것은 조건이 많이 필요한 능력이다. 그런 기술을 배우거나, 아니 최소한 잘못된 교육으로 그런 기술을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만이 자신의 삶을 장악할 수 있다. 이런 조건하에서야만 좋은 정보를 얻고 스스로를 구축해 나갈 목적으로 디지털 수단을 활용하는 자의식 강한 새로운 시민 계층이 실제로 생겨날 수 있다. 게다가 미래의 인간적 사회에 대한 문제는 단순히 〈밑에서부터〉 결정될 사안이 아니다. 사회적 변화라는 것이 늘 그렇듯 스스로를 구축하는 시민은 의식 전환을 추진하는 국가 정책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큰 도움이 되는 것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 네트워크가 아니라, 폐쇄적인 시스템으로 작동하지 않는 소셜 네트워크이다. 데이터 스파이 기관들도 여러 형태의 교환을 위해 거대 플랫폼을 만들기는 하지만, 그들의 무대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상업적 이윤이다. 플랫폼은 그 자체로 사용자들의 이해관계와는 완전히 구분되는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소셜 네트워크 운영자들이 사용자들의 데이터로 하는 일에 사용자들이 동참하는 경우는 없다. 그들의 사업 모델은 투명함이 아니라 흑막이다. 그들의 힘은 그들이 벌써 오래전부터 관여하지 않는 행위자가 아니라,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는 행위자로 이해될 만큼 막강하다. 따라서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사람은 권력의 중심추가 정치 영역에서 기술 콘체른의 영역으로 이동하는 것에 기여한다. 그렇다면 자기 주도권은 내가 이러한 디지털 공간으로 들어갈지, 아니면 들어가지 않을지 결정하는 시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결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몹시 힘들게 느껴진다. 그 결과가 너무나도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의식 경작〉 ─ 키케로의 〈cultura animi〉(정신의 밭을 간다는 의미로 〈정신의 도야,〉 〈정신의 육성〉으로 번역할 수 있다.)라는 말에서 빌려 온 것이다 ─ 의 두 번째 지점은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일상적인 일과 상황의 가치를 예전처럼 다시 좀 더 높이 인정하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들어가자면 자신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전자 기기에서 나오는 삑삑거리는 소리와 새로운 이미지에 의지하지 말고 우리 주변의 사물 자체를 즐기라는 것이다. 언젠가 구글의 서배스천 스런 부사장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인간은 반복적인 일을 해선 안 된다. 그러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 아깝다.〉 이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하는 말인 듯싶다. 우리의 삶은 전적으로 반복적인 일로 이루어져 있고, 그런 일을 하는 것은 결코 아깝지 않다. 우리는 매일 먹고, 마시고, 자고, 이야기하고, 포옹하고, 요리하고, 함께 침대로 간다. 이런 반복되는 동형성과 일상적 제식(制式)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충만한 삶에 속한다. 이런 일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외적인 목표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그런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으로 돈을 벌지도 않는다. 카드를 치거나, 축구를 하거나, 정원을 가꾸거나, 어항 속의 물고기를 돌보거나, 개를 키우거나,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것은 생존에 꼭 필요한 일도 아니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우리를 부자로 만들지도 않는다. 물론 큰돈을 벌려고 카드를 치는 전문 노름꾼이나 개 사육사 같은 사람들은 다르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 모든 일은 우리 사회에서 성과로 인정받지도 않는다. 보험 제국을 건설하거나 위험한 농약을 전 세계에 파는 활동과는 반대로 말이다. 인간은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인정받는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되는 활동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오직 그 자체로만 목적이 있는 활동도 많다. 이마누엘 칸트는 2백 년도 더 전에 그런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예술의 본질로 규정했다.]
[인간은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인정받는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되는 활동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오직 그 자체로만 목적이 있는 활동도 많다. 이마누엘 칸트는 2백 년도 더 전에 그런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예술의 본질로 규정했다. 미래의 인간을 예술가로 표현한 오스카 와일드의 말도 같은 맥락이다. 21세기에도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일을 하는 것은 삶의 기술에 큰 몫을 차지한다. 유머와 알코올, 스포츠, 그리고 대부분의 섹스는 어떤 실용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삶의 행복을 높이는 데 기여할 때가 많다. 유토피아주의자라면 당연히 이 모든 것을 고려해야 한다. 모든 유토피아의 핵심에는 자발적 동기, 즉 자기 규정적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각양각색의 화려한 변주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것도 바로 이 자발적 동기다. 반면에 늘 쓸모 있는 일만을 하는 것은 저급한 동물의 특징이다. 개미는 매일 쓸모 있는 일만 한다. 생물학적으로 포기할 수 있는 것의 수많은 다양성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행복은 〈목적의 독재〉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우정은 비용-이익의 계산에 따라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식을 그런 계산으로 키우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당연히 자식에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건실한 삶에 도움이 되는 것만을 하라고 주입할 수 있다. 또한 더 많은 돈과 명성을 얻으려면 모든 분야에서 항상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교육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다 잘못되면 오스카 와일드가 말한 것처럼, 아이들은 오직 가격만 알 뿐 가치는 모르는 인간이 된다. 남들에게는 교향곡에 대한 충만한 기쁨이나 깊은 문학적 체험이 그들에게는 판매할 수 있는 콘텐츠가 된다(누군가 지적·감성적 교양이 없는 사람이라는 건 이 단어를 즐겨 사용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예를 들어 행복한 어린 시절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명성과 성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일까?]
[문화는 단순히 쓸모 있는 것 이상이다. 그리고 진보는 그 자체로 좋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인간성으로의 진보일 때 좋다. 바로 그 때문에 실리콘 밸리의 대표적 이데올로그들은 자신들의 사업 모델을 그런 진보로 포장해서 팔려고 무던히 애쓴다. 다시 말해 투명성과 무한한 소통, 인식적 한계의 완전한 극복을 진보로 찬양하기 바쁘다. 인간은 항상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으려고 하지 않았던가? 또한 제한된 인간 의식의 좁은 상자를 탈피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늘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원치 않고, 오히려 인간과 사물을 고이 지키고 돌보면서 그것들에 애정과 충심을 다한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서도 상당한 주의가 요구된다. 즉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에 대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입맛에 맞게 재단한 발언들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자의적인 주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삶에 대한 긴 안목과 실재적인 인간들의 욕망에 대한 명철한 인식이다. 그것도 끝없는 논쟁과 정치적 토론을 통해서 말이다. 어쨌든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는 것을 지키고 돌보는 것 역시 과거의 것을 버리고, 내던지고, 탈피하고, 방치하고, 폐기하고, 평가 절하하는 것만큼이나 인간의 욕망에 속하는 듯하다. 젊은이들은 태블릿 PC만큼 증조부가 썼던 소파를 사랑한다. 변화는 어떤 경우든 존재보다 더 가치 있지 않고, 단절도 연속성보다 결코 부가 가치가 더 높다고 할 수 없다. 19세기가 흐르는 동안 서유럽 사람들이 신을 점점 믿지 않는 대신 진보를 점점 숭배하게 되었다고 해서 진보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미래는 현재보다 본질적으로 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늦어도 프랑스의 실증주의자 오귀스트 콩트와 함께 19세기에 진보는 민간 신앙이 되었다. 브라질 국기에 적힌 〈질서와 진보Ordem e Progresso〉라는 글귀도 콩트의 철학에서 빌려 온 것이다.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더 뛰어난 것을 향한 열망이고, 진보는 그 목표이다. 이러한 흐름하에서 만족의 기본 상태는 종말을 고한다. 현재는 비본래적인 상태가 되고, 오직 미래만이 중요하다. 이런 식으로 현 상태에 대한 불만은 빅토리아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진보의 동력이 되었다. 고객의 만족은 결코 오래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고객은 새로운 상품을 구입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과거의 욕구 충족 사회는 이제 욕구를 일깨우는 사회가 되었다. 이런 사회에서 행복은 항상 미래에 있다. 이러한 특색이 일종의 더 높은 논리나 이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모든 민족들의 삶의 지혜, 특히 동아시아 철학은 그런 주장에 상반되는 면을 보여 준다. 오늘 하루의 가치를 인정하고 지키고 음미하는 것은 기독교뿐 아니라 고대의 지혜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많은 똑똑한 기기들이 모든 것, 예를 들어 걸음 수, 층계 수, 혈압, 맥박, 수면 시간, 칼로리, 기분, 일과, 생리 기간, 비타민, 간 수치 같은 것을 측정해 주는 사회에서 하루를 데이터 속에 있는 것과 다르게 보내기는 쉽지 않다. 줄기차게 자신을 측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중심 밖에서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사람은 자신을 존재하는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서 다룬다. 이 대목에서 마르틴 젤의 말이 떠오른다. 세계의 측정할 수 있는 측면은 세계가 아니라 단지 세계의 측정할 수 있는 측면일 뿐이다! 이 말을 우리의 맥락에 맞게 변주하자면, 측정할 수 있는 자아는 자아의 측정할 수 있는 측면일 뿐이지 자아 자체는 아니다. 기억 속에 있는 것 중에 데이터보다 지루한 것이 있을까?]
[건강하게 살고 싶은 것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망이다. 그런데 건강 문제에서 항상 가장 효율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효율성 추구는 자연에 의해 인간에게 본디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다. 자연은 효율적이지 않다. 자연의 본질은 오히려 탕진이다. 다윈도 영향을 끼친 빅토리아 시대의 일차원적인 인간상은 생물학적 자연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일방적으로 협소화시켰다. 카를 마르크스는 다윈과 같은 시대에 이미 그 부분을 간파했다. 그는 이렇게 슬쩍 비꼰다. 〈다윈이 영국 사회에 존재하는 분업과 경쟁, 새로운 시장의 개척, 《발명》, 맬서스식 《생존 투쟁》을 야수와 식물의 세계에서 다시 찾아낸 걸 보면 참 기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55 그러나 생물학자와 진화 심리학자들은 오늘날에도 자연 곳곳에 나름의 〈전략〉과 〈장점〉, 〈계산〉이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이런 것들을 추적해 보면 동물의 행동은 에너지를 절약하는 것에 그 목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전체로서의 자연은 그 자체로 무의미한, 거대한 에너지의 탕진임에도 말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보면 인간에게 주어진 최적화 사명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자기 최적화가 왜 개인이나 심지어 인간종의 목표여야 할까? 인간은 왜 기계처럼 표면이 매끈해지고 아무 냄새도 나지 않을 때까지 동물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할까? 실리콘 밸리의 디지털광들은 자기 몸과 건강한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세계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 그곳에서 더 만연한 위생 집착증과 생식 불능 망상을 생각해 보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자신을 갈고닦으며 인식과 미덕을 넓히라고 추천했지만, 인간이 실존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기껏해야 플로티노스의 밀교적 가르침 속에서나 발견된다. 여기서 목표는 기계가 아니라 천상의 일자(一者)*와의 융합이다.]
[세계가 미리 정해진 경로에 따라 움직인다는 허구 같은 이야기는 실리콘 밸리가 자신들의 미래 판타지를 인류사의 확정된 미래로 팔기 위해 내놓은 마케팅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적 유토피아는 그런 것에 현혹되지 않는다. 또 그것은 디지털 기술을 인간 발전의 목적이 아닌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보조 수단으로 여긴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육체적으로 결함이 있는 인간이 예부터 자신의 지능을 이용해 불편한 환경에서 벗어나고, 삶을 좀 덜 수고스럽게 하려고 노력해 온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가능한 한 많은 편리함과 안락함이 인간의 목표가 되지는 않았다. 편리함의 증가는 곧 행복의 감소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인간에게 더 이상 할 일이 남아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극단적인 편리함의 상태는 정지 상태이다. 인간은 꼼짝 않는 스톤피시나 거미, 폴립이 아니라 늘 움직이는 동물이다. 그런 동물로서의 인간이 단추 하나 누르고 터치 한 번 함으로써 더 이상 아무 할 일이 없게 될 때 가장 행복할 거라는 생각은 참으로 터무니없는 인간 해석이다. 따라서 인간적 유토피아는 미리 확정된 세계 경로를 전제하지 않고, 인간의 진정한 욕망에 초점을 맞춘다. 시간과 우리의 관계만큼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 주는 것은 없는 듯하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시간이 정말 빨라!〉 〈세상이 갈수록 빨리 돌아가는 것 같아!〉 이 두 문장은 오늘날 많은 인간들이 살면서 갖게 되는 감정 표현이다. 그게 사실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렇다면 우리 문화권의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주원인은 우리가 시간을 철저하게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우리에게 제공된 가능성들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부산하게 이리저리 쫓겨 다니며 늘 주어진 시간 안에 모든 일을 끝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일을 처리하려면 결국 우리는 시간 규범의 노예가 되고, 특정한 시간표를 만든다.]
[디지털 시대를 위한 유토피아는 여기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삶의 속도를 더한층 높이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위협이다. 미래 사회는 휴식 지대와 속도에서 벗어난 해방구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요구되는 것은 전속력으로 몰아붙이는 대신 인간을 이웃이나 환경과 연결시키는 관계들의 가치를 깨닫는 관심의 문화이다. 봇물처럼 자극이 넘치는 우리 사회에서 하르트무트 로자가 말한 그런 〈반향〉을 깨닫고 키우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이 필요하다. 이것을 아이들의 머릿속에 불어넣고 훈련시키는 것은 21세기 교육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다. 지적인 기계들은 지적인 사용을 요구한다. 그런 기계들을 정말 탁월하게 장악하는 것에는 스위치를 아예 꺼버리는 행위도 포함된다.]
[21세기 초의 문화는 〈즉석〉의 문화이다. 〈고객은 모든 것을 원합니다, 그것도 지금 당장. 고객은 게으르고 조급합니다.〉 이것은 무수한 강연장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그 강연자는 만일 자기 자식이 게으르고 조급하게 자란다면 행복할까? 그것도 예를 들어 도널드 트럼프만큼 생각이 게으르고 조급한 인간으로 자란다면? 분명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교육학자들에게는 악몽이나 다름없는 그런 것이 경제 영역에서는 아무 의문 없이 전제될 수 있을까? 우리가 교육적·사회적·정치적·윤리적 이유에서 거부한 이 빗나간 발전 상황을 경제적인 이유로 활용하는 것이 정말 필요할까? 모든 것을, 그것도 즉석에서 원하는 사람은 우리 시대의 거대한 변혁에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다. 관건은 장기적인 사고, 복잡한 과정에서의 결정력, 그리고 윤리적 태도이다. 이 모든 것을 훈련시키는 것은 우리 교육 제도의 중요한 사명이다. 우리 아이들이 미래의 도전들에 대처하기에는 몹시 불충분한 교육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선 다들 동의한다. 물론 일부 교사나 문화부 관료 같은 기존 제도의 몇몇 확고한 대변자들만 제외하면 말이다. 〈독일은 교육을 위해 더 많은 것을 해야 한다!〉 무슨 뜻일까? 단순화하면 여기에는 더 상반될 수 없어 보이는 두 입장이 충돌한다. 많은 경제 대표자들과 일부 대학 교육 전문가들에게 이 문제는 아주 간단하다. 디지털 사회에는 더 많은 디지털 노하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수업 시간에 디지털 기술이 점점 많이 투입될수록, 그리고 STEM 전공*이 더 적극적으로 장려될수록 아이들은 미래의 노동 시장에 더 적절하게 대비할 수 있다. 또한 기업가 정신을 조기에 훈련시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이 나중에 더 많이 창업할수록 학교의 상황은 점점 좋아진다.]
[이런 주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다. 최소한 첫눈에 볼 때는 말이다. 그러나 이 주장을 좀 더 유심히 살펴보면 그 교육 목표에 얼마나 조건이 많은지 알 수 있다. 첫째, 노동 시장의 요구에 정확히 부응하는 노동력을 준비시키는 것이 교육 제도의 사명임을 전제해야 한다. 둘째, 미래의 노동 시장이 정보 기술자와 기업가에 대한 추가적인 수요만 늘릴 뿐 전체적으로는 지금과 같은 모습을 유지할 거라는 전제도 필요하다. 이 모델에서는 디지털 혁명을 통한 좀 더 거대한 사회적 변혁은 일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여기서 말하는 교육의 목표는 주로 직업 교육에 국한된다. 두 번째 입장의 교육 목표는 다르다. 교육이란 가능한 한 많은 젊은이들에게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하는 데 그 목표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노동 사회와 성과 사회의 입장에서 추정되는 수요는 그들에게 최고의 척도가 아니다. 10년 후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정보 기술자가 필요할 거라는 진단이 맞을지 누가 알겠는가? 오히려 앞으로는 밀레니엄 프로젝트의 예측처럼 무엇보다 〈공감 직업〉에 대한 수요가 더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 시장과 관련한 단기적 공론(空論)에 교육의 초점을 맞추는 것은 부실하고 위험하다. 또한 가능한 한 많은 아이들이 사업으로 큰돈을 벌 수 있게 하는 것을 최고의 교육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는 분명 냉정한 비용-이익 계산으로 금전적 이득의 극대화를 노리는 사람이 소수일 때만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그렇지 않고 누구나 금전적 이득만을 최고로 친다면 누가 유치원 교사나 요양원의 간병인을 하려고 하겠는가? 교육 목표를 인격 형성보다 노동 시장에 맞추는 것은 근시안적이다. 우리에게는 디지털 경제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는 사람들만 필요한 게 아니라 우리의 가치와 수공업 기술을 보존하고, 남들을 위해 헌신하고, 전통을 육성하고, 자기 자신을 가꾸고, 대안적 사회 모델을 숙고하는 사람들도 필요하다.]
[긱스와 금융 투기꾼, 유튜브 스타, SNS상의 인플루언서들로만 이루어진 세계는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누군가 미래에 요리사나 친환경 농부, 사회사업가, 목수, 클래식 음악가가 되려고 한다고 해서, 그게 결점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교육 제도의 목표는 추정된 노동 시장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에게 미래 세계에 잘 대처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때 아이들은 기술을 장악하는 것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이것은 대개 가만히 내버려 둬도 알아서 습득한다), 기술이 점점 더 큰 역할을 하게 될 사회에서 스스로 방향을 정립해 나가는 법도 배워야 한다. 또한 인간으로서 개인으로서 자신을 이루는 것을 계발해 나가야 한다. 하지만 외부 자극에 즉각 굴복하는 사람, 한 가지 일에 장시간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 언어 능력을 키우지 못하는 사람, 욕구 충족이 미루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분명 그런 것을 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과 자신의 소망을 깨닫고 성찰하며, 자신과 타인에 대한 판단력을 담금질하고,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고, 자제력을 유지하고, 숙고 능력을 키우고, 스트레스 다루는 법을 익히는 것은 지금까지보다 미래에 훨씬 더 중요해질 것이다. 자극이 범람하는 세계에서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모든 문제에서 기술적인 차원의 대답에 만족하는 사람은 어느 시점부터는 더 이상 질문이 생기지 않는다. 우리 아이들의 내적 동기를 지키고 키우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지금껏 우리의 교육 제도는 정반대, 그러니까 외적 동기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은 누가 무슨 말을 해주든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공부한다. 그게 훗날 직업 선택에 도움이 되는 한 이런 제도의 비판가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고전적인 노동 세계에서 사람들은 외적 보상, 즉 돈을 위해 일했다. 그러나 이런 상태는 디지털화의 가속화 속에서 생업 노동이 전반적으로 사라지는 만큼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어쨌든 두 가지 점에서는 모든 교육 비판가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이제 학교에 들어가서 직업 교육을 받거나 대학에 진학하려는 사람은 평생 공부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내적 동기가 충분히 따라 주어야 한다. 그것은 명백하다. 게다가 창의력 없이는 헤쳐 나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나 〈창의력〉은 지극히 모호한 개념이다. 작곡가와 작가, 요리사, 소프트웨어 개발자만 창의적인 것이 아니라, 기민한 영리 추구자와 사기꾼, 마피아도 창의적이다. 도덕 없는 창의력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감성 교육 없는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이로써 미래에는 도덕이나 판단력 형성과 관련한 문제가 중요해진다. 디지털 기기들과 교류하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측정〉과 〈측정할 수 있는 것〉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것은 교육의 문제이다. 자신을 알고 싶은 사람은 단순히 자신의 걸음 수를 헤아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캐물어야 한다. 이때 무엇이 중요한지는 심리학자 게르트 기게렌처의 두 개념인 〈디지털 자제력〉과 〈디지털 위험성 인지 능력〉이 설명해 준다. 즉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가져다주는 이익은 높이고 해악은 줄이겠다는 목표하에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능숙하게 교류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미래의 학교에서는 성인들도 디지털 위험(예를 들면 운전 중에 휴대폰을 사용하는 것)을 가늠하고 심리적 관련성을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너무 많은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는 사람은 멀티태스킹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자신의 기억력을 해치고 만다. 또한 기억을 기계에다 맡기는 사람은 얼마 가지 않아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수록 지금은 잊힌 것이나 다름없는 고전적인 방법, 예를 들어 시를 암송하거나 기억력을 훈련하는 방법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미래에는 학교 밖에서도 기계의 도움 없이 무언가를 정확하게 기억해야 할 상황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적 유토피아는 인간들을 전반적으로 행복하게 하고, 그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모든 현대적 기술은 이런 측면에서 바라보고 평가되어야 한다. 이때 현대 기술은 인간을 자신에게 적응시키려 해서는 안 되고, 인간의 욕구에 방향을 맞추어야 한다. 생업 노동이 점점 줄어드는 세계에서 행복해지려면 인간은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자신의 계발에 쏟아부어야 한다. 이유는 분명하다. 디지털 기술 자체가 인간들에게 자신과 적절하게 교류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교육 제도와 관련해서는 아이들의 호기심과 내적 동기를 교육의 중심에 놓는 것이 과제로 설정되어야 한다. 아이들에게 충만한 삶을 살 능력을 갖추어 주기 위해서이다. 미래에는 생업 노동이 더 이상 그들 삶의 중심에 서 있지 않을 것이기에 더더욱 그런 교육이 필요하다.]
[미래에서 보면 2010년대는 참 특이한 시대였다. 사람들은 디지털 혁명의 쓰나미에 열광하거나 압도당했다. 나침반도 없고 방향 감각도 상실한 채, 디지털 거대 기업들이 약속하는 특정한 미래와 그들이 내세우는 필연적인 역사의 진로를 믿었다.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듯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방 국가들은 경제적 몰락의 형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 대열에 동참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다고 믿었다. 또한 사람들은 〈인터넷〉이 현실적 국가법과는 완전히 다른 법을 가진 가상 세계라고 생각했고, 현실 세계의 법칙이 여기서는 통용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다가 심지어 이 세상에는 진보가 여러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특정한 진보만 있다고 여겼다. 가령 1970년대의 사람들이 핵에너지가 더 나은 많은 가능성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우리가 나아갈 수밖에 없는 정해진 진보와 미래라고 믿었던 것처럼. 이런 형태의 믿음은 2010년대에 널리 퍼져 있었다. 거기에 의심을 품는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케케묵고, 세상 물정 모르는 기술과 진보의 적으로 치부되었다. 이는 원자력을 두고 벌어진 1970년대의 논의 과정과 다르지 않았다. 주류에 속하고 싶은 사람은 2018년에도 정신 나간 인간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그런 믿음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그래서 기껏해야 기술적 진보의 속도 조절이나 부르짖고, 교육과 판단력의 가치나 강조하고, 디지털 대기업의 투명성 강화만 요구했다. 디지털 경제가 존재하지 않고, 모든 디지털 사업 모델이 국민의 복리 증진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며, 인터넷의 본질이 권력의 문제이지 우리에게 주어진 필연적 환경이 아니라는 사실은 당시 차별적으로만 간간이 나올 뿐이었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할 수도 있다. 인공두뇌의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로 성숙해 가는 과정에서 문화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일까? 전 세계 사람들은 디지털 세계의 축복을 전반적으로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그 결과에 만족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렸고, 그것을 도로 닫을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그것에 적응하고, 평화롭게 사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시민들은 자신이 유저로 격하되고, 자신의 정보가 판매되더라도 반발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껏 디지털 기업들이 제공하는 것들을 즐겁게 이용해 왔고, 그것이 재미를 주는 한 허구적 가상 세계 속으로 기꺼이 들어갔다. 이것이 세상의 순리가 아닐까? 미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동구권의 붕괴 이후 예고했던 것처럼 자유 민주주의가 역사의 끝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테크노크라시와 자율적 기계 시대로 가는 도상의 중간 정거장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길은 앞서 말한 것처럼 자연법칙으로 미리 예정된 것이 아니다. 소위 인류의 예정된 길이라고 주장했던 다른 모든 길처럼 말이다. 가령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인류가 프로이센식 관료 국가로 이행될 거라고 예고했고, 카를 마르크스는 이른바 〈역사의 끝〉으로서 〈계급 없는 사회〉를 그린 바 있다. 그런데 이제 개인 정보의 자유로운 사용에 합법적인 길을 열어 주면 우리는 실리콘 밸리의 과점 기업들을 덩치가 점점 더 커지는 초강자로 키우는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고, 이 강자들은 우리의 사회적 시장 경제와 민주주의를 부드러운 방식으로 무력화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에 관한 우리 시대의 역설은 바로 다음에 있다. 시민의 자유를 전반적으로 보장하거나 복원하기 위해서는 개인 정보를 사용하는 기업의 자유를 대폭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이 문제에서 자유주의적인 입장을 취할수록 우리의 가치가 잠식되고, 우리의 자유가 파괴되는 일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물론 〈일반인들〉도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정보를 보호하는 방법과 관련해서 몇 가지 영리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 시중에는 『너희는 나를 잡지 못해! Mich kriegt ihr nicht!』 같은 제목의 책이 많이 나와 있는데, 이런 유의 책들에는 정보 괴물의 마수로부터 눈에 띄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요령과 기술이 적혀 있다. 그런데 그 방법이 간단하지 않다. 시간과 수고를 많이 들여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이런 방법을 쓰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게다가 다른 위험도 있다. 그런 방법을 쓰면 정보기관으로부터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숨길 게 있으니 숨으려고 한다고 생각할 테니까 말이다. 독일에서 누군가 자신의 정보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만으로 의심을 사는 것은 참으로 황당하다. 이 사안이 그렇게 복잡한지를 이보다 더 명확하게 보여 주는 것은 없는 듯하다. 기술적 진보가 축복으로 입증되려면 동시에 사회적 진보도 이루어져야 한다. 퇴행의 위험은 확인되는 순간 단순히 인지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싸워서 없애야 한다. 그것은 제반 사회 문제에 대한 수많은 사회 공학적 해결책으로서, 우리를 금치산자로 만들고 판단력을 잃게 만드는 위험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정보를 빼내 가는 스파이 행위에도 해당된다. 게다가 이 점에 대해서는 합의가 좀 더 쉬울 것 같은데, 과세 제도도 손봐야 한다. 디지털 시대의 사업 모델들이 세제(稅制)에서 사고 전환을 요구하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국제 세금 규정의 근본적인 개혁을 2018년 현재까지 방치해 오고 있다. 핵심은 가치 창출의 형태와 과세 지역을 밀접하게 연결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납세자는 자신이 돈을 번 곳에서 세금을 내야 한다. 그를 위해 유럽 연합에 필요한 것은 법인세 책정의 공통 근거이다.]
[다시 한번 떠올려 보자. 2014년 당시 독일 법무부 장관 하이코 마스는 디지털 콘체른들의 알고리즘을 강제로 공개하는 정책을 추진했고, 당시 경제부 장관 지크마어 가브리엘은 거대한 플랫폼 운영자들의 해체를 언급했다. 그러나 둘 다 시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런 움직임은 여전히 존재한다. 유럽 연합의 정보 보호 기본법은 중요한 발걸음이다. 바퀴는 오래전부터 계속 돌고 있다. 독일과 유럽 기업들이 멋대로 착취해서는 안 되는 개인 정보를 계속 탐하는 동안 실리콘 밸리는 그런 사업 모델에서 벗어나는 중에 있다. 무료 서비스 광고로 벌어들이는 수십억 유로의 수입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로봇카에서 사물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인공 지능과 관련한 많은 아이디어에 광고 수입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기껏해야 그것은 어차피 값을 치른 상품에 대한 부수입일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사업 모델에 대해서도 깊은 숙고와 대처가 필요하다. 유럽 연합의 국가들은 지금껏 빠른 네트워크 구축에 엄청난 돈을 투자하고도 왜 그것을 이용하는 업체들로부터 비용을 다시 거두어들일 생각을 하지 않는가? 송전선에는 돈을 내면서 왜 광케이블에는 돈을 내지 않는가? 그것은 〈자율〉 주행 자동차도 마찬가지이다. 독일 납세자들의 돈으로 건설한 도로를 이용하는 사람은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요금을 내야 한다. 외국 인터넷 콘체른들이 독일 인프라를 기반으로 돈을 번다면 왜 그런 시설을 무료로 이용하는가? 가령 구글이 자율 주행 자동차 서비스를 일정한 요금을 받고 독일 도시들에 제공한다면 왜 그에 대한 보상을 하지 않는가? 다시 말해 왜 통행세를 내지 않는가? 자치 단체나 납세자들이 수십억 유로를 들여 건설하고 관리하는 도로가 아닌가?]
[인류의 야심 찬 꿈과 악몽, 이 둘은 2018년에는 아주 가깝게 나란히 서 있었다. 그런데 제1차와 제2차 산업 혁명 때도 정확히 그러지 않았던가? 노동자의 운명은 경악스러웠고, 자본가는 그것을 문제로 보지 않았다. 마르크스조차 집단적 가난을 향해 계속 이렇게 진행될 거라고 믿었다. 노동자를 점점 빨라지는 속도에 맞춰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단순히 손이나 놀리는 존재로밖에 보지 않았던 제2차 산업 혁명 시기 등장한 테일러리즘의 냉소적 인간상도 떠오른다. 이런 상황에 언젠가는 변화가 찾아올까? 20세기 초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해방을 예견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역사의 목표로 오인한, 테일러리즘에 못지않은 냉소적 인간상으로 무장한 스탈린주의의 흡입력도 떠오른다. 그렇다면 〈디지털 테일러리즘〉, 즉 인간을 인간에 대한 정보와 그 정보의 효율적 착취로 환원시키는 시대가 왜 역사의 종착지여야 하는가? 새로운 테크놀로지와의 교류에서 수정 가능한 하나의 과도기가 아니라 말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미래 사회는 자유롭고 자율적인 인간들의 사회이다. 또한 삶의 작은 일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의미를 찾는 인간들의 사회이다. 사냥꾼으로서 미지의 새로운 체험을 찾든, 목동으로서 가족과 친구,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들을 돌보든, 혹은 비평가로서 사회에 대해 숙고하고 사색하든 상관없다. 또한 정원을 가꾸든, 거대 프로젝트를 추진하든, 이웃들을 격려하고 고무하든, 또는 이웃의 심신을 돌보든 전혀 상관없다. 삶은 오늘날보다 훨씬 많은 품위와 자유, 발전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곳은 남들에 의해 부추겨진 욕망과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구분할 줄 알고, 미래 세대의 비용으로 살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 넘치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이다. 의학은 점점 개선되고, 기대 수명은 높아지며, 매연을 내뿜는 교통은 소음 없이 굴러가는 교통으로 대체된다. 더 많은 식물과 더 많은 녹지, 더 많은 휴식과 고요, 명상이 이 세계 속으로 진입하고, 대신 삶의 배경에서는 지칠 줄 모르는 인공 지능 기계들이 인간의 복리를 위해 일한다. 노동 세계의 분주함과 스트레스는 말없이 일하는 기계들의 몫이다.]
[GAFA 같은 기업과 그 투자자들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아름다운 신세계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론은, 그 신세계가 그들의 약속과는 달리 경제적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리라는 데 있다. 한편으로 많은 사업 모델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순수한 미래 기업일 뿐이다. 승객 중개 서비스업체인 우버는 매년 약 10억 달러의 손실을 보지만, 그로 인해 세상을 매일 조금씩 더 낫게 만든다는 명목으로 이 기업에 많은 돈을 퍼부은 사우디아라비아나 골드만삭스 같은 투자자들이 크게 불안해하는 것 같지는 않다. 우버의 가치는 결산표상의 실질적인 손실이나 6백 억 달러로 추정되는 상상 금액에 있는 것이 아니라 투기꾼들의 희망에 있다. 디지털 경제에서 이런 기업이 우버 하나만은 아니다. 수많은 디지털 콘체른의 가치는 그것들의 약속에 신뢰를 보내는 〈미래 투자형 펀드〉나 벤처 캐피털 자금의 꿈을 먹고산다. 에어비앤비든, 윔두 Wimdu든, 아니면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전자 학습 영역이든 간에 실제로 수익이 나는 사업 모델은 거의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만일 막대한 자본의 유입을 가능케 하는 손쉬운 신용 대출 제도로 인해 경제적 거품이 생긴다면 2007~2009년의 세계 금융 위기는 분명 머지않아 엄청난 디지털 위기로 다시 찾아올 수 있다. 그럴수록 독일 같은 나라들이 디지털 소비재 경제에 너무 과하게 종속되지 않는 것이 더더욱 중요하다. 특히 모든 사람을 상대로 이윤에만 초점을 맞추는 서비스업에 말이다. 품질 좋은 전기톱, 나사, 산업용 섬유, 또는 여행용 트렁크를 제작하는 것은 미래에도 독일 경제의 중추로 남을 것이다. 반면에 실리콘 밸리가 우리에게 미리 그려 보인 총체적 테크노 영역으로의 길은 분명 경제적 이유 때문에 아무런 장애가 없는 곧은길이 될 수는 없다. 물론 사회적 평화를 위해 인구의 3분의 2를 가상 오락으로 진정시킬 수는 있겠으나, 그게 성공하더라도 인공 지능에 수천억 달러를 투자한 이들에게 수익금을 돌려줄 만큼 충분한 소비력이 생성되지는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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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누워서 쓰는 서평
무라카미 하루키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앨리슨 벡델 - 펀 홈시무라 타카코 - 방랑소년 1저메이카 킨케이드 - 루시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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