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꾼, 목동, 비평가』 혼자 읽기

D-29
[호모 하빌리스와 호모 에렉투스가 최초의 주먹 도끼를 사용한 이후 인간은 기술을 통해 가능한 많은 노동이 줄어들길 꿈꾸어 왔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과거의 세 차례 산업 혁명조차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생산성이 증가할수록 노동력은 점점 더 많이 필요해졌다. 노동의 수고가 줄고 적당한 노동으로 나아가는 진보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19세기에도 영국과 프랑스, 독일의 인구 80퍼센트는 고대 로마의 노예들보다 딱히 더 나은 삶을 살지 못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거의 아무런 권리를 누리지 못했고, 노동과 질병으로 이른 나이에 죽었다. 제2차 산업 혁명 이후 공장 노동자의 세계가 얼마나 참혹한지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스」가 잘 보여 준다. 노동자는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날 누가 과거의 그런 노동 세계를 애도할까? 19세기 말엽의 광산과 지옥 같은 제철소, 등골 휘는 밭일을 누가 아쉬워할까? 현재 사라지고 있는 수많은 지루한 사무직을 백 년 후에 누가 슬퍼할까? 또한 소란스럽고 악취 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현재의 도로 교통을 누가 안타까워할까?]
[적게 일하거나, 임금을 위해 일하지 않는 것은 희망찬 약속이지 저주가 아니다. 물론 그에 걸맞게 발전한 문화권에 사는 경우에만 말이다. 인간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노동 성과로만 판단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과 연결된 변하지 않는 속성이 아니다. 이는 윌리엄 페티, 존 로크, 더들리 노스, 조사이어 차일드 같은 사람들과 연결된 상당히 영국적인 개념이다. 수천 년 동안 인간 사회는 다른 미덕과 사회적 가치 평가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생산성의 훨씬 높은 단계에서 새로운 미덕의 개념을 찾아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디지털화는 단순히 우리가 익히 아는 길 위에서 펼쳐지는 경제 활동의 또 다른 효율성 증가가 아니다. 그것은 지난 250년 동안의 경제 활동에서 가장 큰 변화다. 그것도 세계사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변화이자 가치의 변화이고, 그와 동시에 현대적 개인의 자유를 향해 걷잡을 수 없이 펼쳐지는 전면적이고 범문화적인 공격이다. 우리의 사적 영역의 미래는 지금 백척간두에 서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이 걷잡을 수 없는 조종 가능성의 시대를 맞아 과연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아니, 정말 유지될 수나 있을까?]
[2014년 자신들의 〈디지털 의제〉를 소개한 세 명의 독일 장관도 괴물을 보지 못한 채 괴물의 발자국 안에서만 움직이는 연구자일 수 있다. 그 디지털 의제는 진정 어린 결정과 구체적인 계획 없이 시중에 떠도는 일반적인 이야기들만 담은 소심한 서류에 불과했다. 내부 보안이나 정보 보안, 정보 보호의 문제이건, 아니면 저작권이나 망 중립성의 문제이건 명확하게 결정을 내리는 건 아무것도 없고, 그저 막연한 표현으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정보기관을 위해서는 더 많은 정보의 습득을 바라고, 시민들을 위해서는 더 많은 익명성을 원했다. 망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유리 섬유 케이블을 더 많이 깔아야 한다는 계획에서만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 듯했다.]
[자유민주당(자민당 FDP)만 유일하게 독일 역사상 처음으로 디지털화를 선거 구호 ─ 〈디지털화가 모든 것을 바꾼다. 정치는 언제 변할 것인가?〉 ─ 로 내세웠다. 그런데 디지털화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뀔 거라는 이 의제에서도 정작 중요한 것은 빠진 느낌이다. 창업을 장려하고 광속 케이블을 까는 것으로는 사회적 변혁에 대한 충분한 대비가 되지 못한다. 훨씬 더 근본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디지털화가 모든 것을 바꾼다. 디지털화는 누가 바꿀까? 우리 사회에서 디지털 기기를 점점 더 많이 사용하고, 컴퓨터와 로봇에 작업을 시키며, 이것들을 연결해서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일이다. 그렇다면 이것 역시 인간이 하는 다른 일들처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디지털화가 우리 사회를 바꿀 거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떻게 바꿀지는 아직 정해져 있지 않다. 경제, 문화, 교육, 정치에서의 궤도 수정은 미확정 상태이지만, 그것이 단순히 기술이나 경제적 성질만 띠지 않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오스트리아의 유대계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시대를 초월하는 교훈을 남겼다. 〈모든 것을 바꾸지 않고는 무언가를 바꿀 수 없다.〉 이것은 일상의 경험을 통해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부부에게 아이가 생기거나, 자식이 장성해서 집을 나가게 되면 예전의 삶은 갑자기 확 바뀐다. 특정한 변화가 모든 것을 바꾼다. 기술적·경제적 혁명과 같은 변화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새 시대의 출발선상에 서 있다. 우리 정치인들은 이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을까? 서양 사회의 정치를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은 그들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에 가깝다. 과거에 선견지명이 있던 사람들은 서구 통합과 동방 정책, 유럽 연합과 유로를 추진했지만, 오늘날의 정치인들은 눈앞의 것만 본다. 남들이 망가뜨린 것을 수리하고, 대중 매체가 관심을 보이는 것에 논평만 하는 정치로는 미래상을 만들지 못한다. 정치인들은 정말 미련할 정도로 대중에게 사랑받기 위해 안달하고, 가능한 한 누구도 적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정작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어깨만 으쓱하고 만다. 게다가 거대한 변혁을 정치적 의제로 바꾸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정치인들은 경제적 수익만 노리는 사람들에게 디지털화를 맡기면 그 잠재력으로 기대하는 만큼 세계가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빈약하고 공허해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듯하다. 다시 말해 삶의 의미와 노동, 경험, 감정은 공허해지고, 놀라움과 진실성은 빈약해지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게다가 디지털화가 시장 규범을 위해 사회 규범의 범위를 축소시킬 우려가 있다는 사실도 그들은 깨닫지 못하는 듯하다. 이는 대학생이 너무 비싸게 구한 방을 친구들에게 무료로 빌려 주는 대신 인터넷에서 기한을 정해 되파는 것과는 다르다.]
[사회 심리학자들이 〈자기 효능감 Selbstwirksamkeit〉이라고 부르는 근본적인 경험은 인공 지능의 세상에서는 어떻게 될까?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나갈 능력이 스스로에게 있다고 믿고 의미를 부여하는 그 감정 말이다. 현재 이루어지는 디지털화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삶의 과정에서 소외될 위험이 존재하지 않을까? 정치인들은 직무상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그들의 일이 아니라서 그렇게 보는 게 아니다.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독일 정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커다란 변화를 회피하는 데만 주력해 왔다. 무언가를 바꾸려는 사람은 목표를 찾고, 무언가를 저지하려는 사람은 이유를 찾는다. 적어도 20년 전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독일인들은 이유가 목표를 일방적으로 압도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전략적 사고는 없어진 지 오래다. 전략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미래에 하나의 목표를 설정하고 단계적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독일을 지배하는 것은 전술뿐이다. 상황에 따라 유권자들에게 이익을 약속하는 단기적인 숙고만 존재하는 것이다. 전략에 대한 전술의 승리가 우리 나라를 마비시켰다. 우리는 그에 대한 책임을 현직 정치인들에게 돌리길 좋아하지만, 그것은 정치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고위급 정치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조차 구체적 실행 계획을 갖고 움직이는 것은 분명 아니다. 과거에는 날선 원석으로 시작한 이상주의자도 세월이 흐르면 차츰 시냇가의 조약돌처럼 둥글둥글해진다. 물론 정당이 제도화되면 현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지만, 그것이 거대한 마비 상태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정치인들도 오래전부터 정보의 홍수와 살인적인 시간 압박에 내맡겨져 있다.]
[2016년에 러시아 해커들이 미국 대통령 선거에 개입했다는 주장 ─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 은 그 당시에는 그저 하나의 고약한 스캔들에 그쳤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사이 우리는 모든 정부와 기업, 정보기관, 단체들이 선거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게 아주 쉽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기술적 환경에서는 선거라고 해서 특별한 것이 아니다. 개인들에 대해 하루 수십억 건씩 조작과 조종이 이루어지는 현실을 감안하면, 선거를 조작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소셜 네트워크는 사용자의 자극-반응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환경을 끊임없이 바꾸고, 그로써 결정과 소망, 선호, 의도를 조종한다. 2040년에는 이제 누구도 계몽주의의 가치든, 아니면 〈자기 판단력의 주인〉이라는 계몽주의의 격정적 인간상이든 더 이상 알지 못한다. 그것은 개인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도 필요하지 않고, 포스트 민주주의 post democracy를 위해서도 필요하지 않다. 여기서 포스트 민주주의란, 선거로 당선된 정치인들이 실제로는 아무 권력이 없음에도 겉으로만 민주주의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국가 형태를 말한다.]
[경제에 해당되는 것은 정치에도 해당된다. 즉 실제로 힘을 가진 사람은 거울 뒤 보이지 않는 곳에 서 있다.]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를 쓰면서 들었던 양심의 가책을 드러내지 않고는 작품을 끝낼 수 없었다. 그래서 결론 부분에서 자신이 〈썼던〉 모든 것들이 〈혼란스럽게 느껴진다〉라고 고백했다. 작가는 당시까지 인간의 공동생활을 설계한 책들 중에서 가장 현대적이고 인간적인 구상에 해당하는 이 짧은 책을 예언으로 끝맺지 않고, 오히려 이상 국가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으로 끝맺었다. 〈나는 이런 세계의 실현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소망할 뿐이다.〉 나는 토머스 모어의 이런 태도에 공감을 금치 못한다. 해답의 외피를 쓰고 나타나는 것이 현실에서는 하나의 문제일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낮에는 그렇게 단순하고 명료해 보이던 것이 한밤중에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면 불명확하고 혼란스러울 때는 또 얼마나 많던가! 커다란 염려와 낙담이 지배하던 국면은 2017년에서 2018년으로 넘어가는 흐린 이 겨울날에 봄날 같은 낙관주의로 바뀌었다. 한편에서는 내 제안이 너무 급진적이거나, 심지어 기술 적대적인 것으로 비칠 수 있다. 디지털 경제가 만들어 낼지도 모를 수십만 개의 새로운 직업을 내가 너무 과소평가한 것은 아닐까? 또는 미래 삶의 자유와 자율에 대한 염려를 지나치게 과장한 것은 아닐까? 반면에 반대편의 시각에서 보면 내 아이디어는 너무 약해 보일 수도 있다. 내 주장에서 금융 자본의 철폐는 어디에 있는가?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암호 화폐와 지역 화폐의 힘은 왜 언급되지 않았고, 돈의 종말은 어디로 갔으며, 무조건적인 최고 소득은 왜 빠뜨렸는가? 한쪽의 꿈이 항상 성공적인 자본주의로 향해 있다면 다른 쪽의 꿈은 그런 자본주의를 내일보다는 당장 오늘 없애고 싶어 한다.]
[〈우리는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어디에 있었는지도 안다. 또한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웬만큼 안다.〉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이 2011년에 했던 이 말은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불러일으켰다. 다른 문장도 지극히 중국적으로 들린다. 〈남들이 몰랐으면 하는 일이 있다면 어차피 하지 않는 게 좋다.〉 이후 이런 문장들은 계속 반복되지 않았고,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졌다. 그런데 2010년대에 벌써 미국에서 범죄자가 재범을 저지를 확률이 얼마나 되고, 형량이 얼마나 높아야 하는지를 알고리즘이 결정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수학적으로 저장된 한 인물의 과거에 대한 앎이 그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다. 개인은 더 이상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래서 심리적 복합성은 배제되고, 오직 수치로 판단되며 낙인찍힌다. 과거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과오를 저지른 사람은 어디에서도 취직을 하기 어려워진다.]
[사이언스 픽션 영화 속의 그 어떤 파렴치한 대형 투자자도 이렇게 솔직하고 대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본주의를 보장하고 민주주의를 철폐하는 기술적 매트릭스는 어디에 있는가? 기본적으로 틸은 그것을 위해 태평양상에 하나의 해양 공동체를 따로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 현재 일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 현실 도피적 판타지 없이도 그의 목표는 점점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꿈들이 번성하고 비민주적 사고 모델이 만연하면 그에 반대하는 안티유토피아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서구 세계의 정치적 논쟁에서 민주주의적 유토피아는 전반적으로 사라졌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조차 그들의 역사 예언이 그저 하나의 유토피아라는 사실에 저항했다. 그래서 그들의 어휘에서는 유토피아라는 말이 사라져 버렸다. 오늘날에도 유토피아는 어리석고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이나 제기하는 것으로 이해될 때가 많다. 기술이 아니라 사회와 관련한 유토피아일 때 말이다. 서유럽의 해적당* 같은 도깨비 현상도 그런 움직임에 기여했다. 자기모순과 유치한 전능함의 판타지에 사로잡힌 그들은 나타날 때보다 더 빨리 흩어졌다.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모피 사냥꾼, 무법자, 카우보이처럼 그들은 현실적인 힘을 가진 사람들이 〈불을 뿜으며 내달리는 말〉을 위해 궤도를 건설하고, 땅을 자기들끼리 나누어 가졌을 때 사라졌다. 서부 개척 시대가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것이 아니었듯이, 오늘날의 인터넷도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 2014년, 서유럽의 해적당들은 뼈아프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망의 권력은 망 안에서 자유롭게 뛰놀고 싶은 한 줌의 젊은이들이 아니라, 디지털 콘체른과 NSA가 갖고 있다는 것을. ]
[그러면 미래의 과세 제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제1차 산업 혁명 이후 〈기계세〉의 아이디어가 제기되었다. 다른 모든 것에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면 증기 기관과 트랙터, 미래의 컴퓨터와 로봇에도 과세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것은 한편으로는 괜찮은 생각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껏 어떤 시대에도 실현되지 못한 일이다. 왜냐하면 기계에 대한 부가 가치세는 기본적인 사회 안전망의 재원에 필요한 바로 그 부가 가치의 상승을 저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산업 국가들은 그것을 시행하지 않는데, 어느 한 국가만 혼자 독단적으로 시행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얼마 전에 빌 게이츠가 그 아이디어를 다시 소생시키기는 했지만, 복지 시스템에 재원을 마련하려고 그런 제안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동기는 인간이 디지털화의 급속한 발전을 감당해 내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에서 자신이 불러낸 유령들의 무서운 속도를 어떻게든 막아 보고자 하는 데 있었다. 마찬가지로 인기 있는 구상은 마이너스 소득세이다. 이것과 관련해서는 여러 버전이 독일에서 논의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울름의 지불 한계 모델과 튀링겐의 전직 주지사 디터 알트하우스가 주창한 시민 연대 배당금이 있다. 기본 소득은 소득세를 통해 재원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이때 모델에 따라 이자와 임대 수입, 배당금이 합산된다. 그런데 이 모델들은 대부분 기본 소득을 괴츠 베르너처럼 너무 적게, 그러니까 1천 유로 정도로 책정한다. 그렇다면 기존의 하르츠 Ⅳ 수급자들은 오히려 혜택이 줄어드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 대신 이 모델들은 수급자들의 근로 욕구를 자극할 수 있다는 매력적인 전망을 내걸고, 관료주의의 광범한 폐지를 약속한다.]
[무조건적인 기본 소득에 원칙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도 마이너스 소득세만큼은 선뜻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책으로 느끼는 듯하다. 그러나 수급자들에게 근로 의욕을 자극할 수 있다고 하는 바로 그 매력이 이 해결책의 약점이기도 하다. 마이너스 소득세는 1940년대에 생겨나서 1960년대에 밀턴 프리드먼이라는 저명한 대변자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고도로 발달한 산업 국가들에서 장차 생업 노동을 잃게 될 수백만 명의 입장에서 보면 이 아이디어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집에 불이 났는데 물컵으로 불을 끄려는 시도처럼 보이니까 말이다. 생업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든다면 생업 종사자들은 더 이상 자신의 노동으로 국가의 복지 시스템에 돈을 댈 수 없다. 게다가 기본 소득에 대한 회의론자들이 매력적으로 여기는 것, 다시 말해 생업 노동을 하지 않는 기본 소득 수급자들에게 근로 의욕을 자극할 거라는 생각 역시 디지털화로 굉장히 협소해진 노동 시장을 감안하면 별 의미 없는 관념에 불과하다. 전반적인 생업 노동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이해해야만 이 상황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마이너스 소득세의 옛 이념에는 이런 새로운 상황에 대한 어떤 해결책도 담겨 있지 않다.]
[그래서 미래에 좀 더 어울리는 구상들은 생업 노동을 통해 기본 소득의 재원을 마련하려는 계획에서 벗어났다. 소득 대신 소비에 과세하자는 괴츠 베르너의 제안, 천연자원, 특히 그중에서도 땅과 토지의 가치에 과세하자는 아이디어, 또 이산화탄소 세금이나 환경 부담 세금이 그런 구상에 속한다. 이 제안들은 각각 장점이 있고 충분히 숙고해 볼 만하다. 하지만 땅과 토지를 그다지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높은 세금을 납부할 수가 없고, 기업들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에 과세하자는 아이디어도 안타깝지만 현재의 독일 법 체제에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그렇다고 그것을 바꿀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최고의 아이디어만 남아 있다. 우리는 왜 금전 거래에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가? 금융 전문가이자 스위스의 전 부총리 오스발트 지크가 이끄는 한 연구 그룹이 제안한 모델을 생각해 보라. 그에 따르면 스위스의 지불 거래로 오가는 돈은 국내 총생산의 약 3백 배에 달한다고 한다. 만약 돈이 이동할 때마다 0.05퍼센트의 〈초미니 세금〉을 부과하면 스위스인들에게 매달 2천5백 프랑의 기본 소득을 지급할 재원은 쉽게 마련된다. 반면에 일반인들이 돈 거래로 부담하는 세금은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미하다. 그렇게 오가는 돈의 90퍼센트는 금융 시장, 특히 초단타 매매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융 거래세는 투기가 실물 경제에 대한 투자보다 낫다고 여기는 금융 시장의 움직임을 막는 방책으로 논의되기도 한다. 오늘날 금융 투기의 어마어마한 몸집을 고려하면 지극히 현실적인 걱정이다. 심지어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그런 세금이 있었다면 1930년대의 금융 거품과 증권 폭락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글로벌 금융 위기를 맞아 유럽 연합 집행 위원회가 2011년에 금융 거래세 구상을 다시 집어든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물론 다른 나라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금융 부문이 국가의 생명줄에 해당하는 영국은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2013년 그 계획이 수립되었을 때 유럽 연합 11개국이 동의했다. 하지만 금융 위기가 옛일이 되어 갈수록 그 구상 역시 점점 동력을 잃었다. 금융 산업계의 로비는 다시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거대 신문과 유력 잡지들의 경제면을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논거로 도배해 버렸다. 국민 경제에 끼치는 해악이 아무리 논리적으로 제기되어도 그 반대편에 있는 장점이 더 크게 부각되었다. 금융 거래세는 금융 시장을 안정시키고, 증권 거래소의 도박성을 줄여 준다. 그에 따른 패자는 극단적인 도박꾼들일 뿐 나머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귀담아들을 만한 유일한 반박은 국민 경제적 측면에서의 반박이 아니다. 그것은 금융 투기꾼들에게는 언제든 세금을 회피할 가능성이 충분히 열려 있는 것에 대한 염려이다. 하지만 그런 논리를 금융 거래세 도입의 반대 근거로 삼는 것은, 아무리 범죄와 전쟁을 벌여도 범죄는 다시 일어나기 마련이라는 이유로 전쟁을 포기하자는 말과 같다.]
[금융 거래세를 장차 시민들에게 기본 소득을 지급할 재원 마련의 방향에서 놓고 보면, 이전에 중구난방으로 의견이 갈라졌던 유럽 연합의 많은 국가들이 갑자기 한배를 탄다. 금융 산업에 대한 배려는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프랑스와 독일, 폴란드, 이탈리아에서 동일한 수준으로 제기되는 거대 문제 ─ 우리는 중산층의 사회적 몰락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격렬한 사회적 소요를 어떻게 예방할 것인가? ─ 이다. 이런 위협의 징조 속에서는 지금껏 유토피아적이라고 치부되었던 것이 빠른 속도로 가능해질 수 있다. 사회적 진보의 동력은 결코 더 나은 논거가 아니라 항상 격정과 현실적 재앙이었다. 이제는 그에 대한 계획이 수립되어야 한다. 그것도 현실에 쫓겨 허겁지겁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고 냉정한 계산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모든 금융 거래에 0.05퍼센트의 초미니 세금을 매기는 것이 스위스에서 무조건적인 기본 소득의 재원을 마련하는 데 충분하다면, 독일에서는 같은 조건으로 몇 퍼센트가 필요한지도 계산할 수 있다. 분명 스위스보다 퍼센티지가 높겠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거의 영향이 없을 정도로 낮을 것이다. 현실에 맞는 적절한 모델을 개발하는 것은 철학자의 과제가 아니라 경제학자의 몫이다. 이때 그들은 투기 세력에 의해 어떤 결과가 예상되는지도 계산해 내야 한다. 초미니 세금이 금융 투기의 도박판을 몇 퍼센트만 줄이더라도 ─ 이는 그 자체로 금융 시장의 안정을 위해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다 ─ 부자 나라들은 이런 식으로 얼마든지 기본 소득의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 전 세계 금융 파생 상품 거래의 총량은 6백조~7백조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전 세계 국내 총생산의 무려 10배에 이르는 금액이다. 그렇다면 무조건적인 기본 소득은 돈 때문에 할 수 없는 게 아니다. 금융 거래에 대한 초미니 세금은 최소한 중단기적으로는 최고의 아이디어이다. 어쨌든 국제 금융 경제가 오늘날과 같은 수준으로 유지될 경우에 말이다.]
[따라서 무조건적인 기본 소득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문제들 가운데 재원 마련은 가장 작은 문제이다. 훨씬 더 긴장감이 도는 것은 심리적 문제이다. 여기서는 현재와 미래의 인간상이 중심에 등장하고, 세계관을 비롯해 믿음의 원칙, 세속적인 선입견, 문화적 특성, 기질이 충돌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좌파들은 특히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는 생업 노동이 필요하다는 관념에 집착해 왔다. 하지만 여기서 〈인간〉이란 누구인가? 아우디의 개발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열린 전문가 토론회에서 한 기술자가 내게 인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인간이란 본디 〈문제 해결자〉로, 무언가가 최상의 상태가 아니면 항상 인간은 그것을 개선하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아우디에서 일하는 기술자들은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내 주변에는 무언가를 발명하는 것은 고사하고 무언가를 개선하겠다는 생각조차 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인간〉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다. 니체가 말했듯이 인간은 〈확정되지 않은 동물〉이다. 또한 철학자 카를 슈미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다!〉 인간은 너무 많은 부분이 자신이 살아가는 조건에 종속되어 있어서 명확하게 정의 내릴 수 없다. 중세의 유럽인들에게는 너무나 자명했던 것, 예를 들어 신의 섭리, 또는 신이 다스릴 천년 왕국이 곧 지상에 도래할 거라는 확고한 믿음은 우리가 여전히 같은 유럽인임에도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생소하기 짝이 없다. 〈인간〉이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돈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삶의 의미가 사라진다는 주장도 굉장히 잘못된 규정이다. 이 규정에 따르면 전업 주부, 연금 생활자, 유한마담, 왕의 자식, 밀림의 원주민, 마사이족 전사는 모두 불행한 인간으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다.]
[다만 현재 독일과 같은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업 노동을 잃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 스스로를 무척 못나고 쓸모없는 인간으로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인간학적 문제가 아니라 매우 현대적인 문제이다. 인간이 생업 노동으로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를 이루어 내야 한다는 것은 19세기의 농부나 공장 노동자들에게는 아주 낯선 문제였다. 우리가 자신의 재능을 계발하고, 창의력을 발휘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을 실현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고도로 현대화된 사회의 요구였다. 이 요구는 20세기가 흐르면서 서서히 생겨났는데, 그러다 지금은 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를 못난 인간으로 여기는 시류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생업 노동으로 그런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만일 그들이 자기실현이나 재능 발휘를 생업 노동과 연결시키지 않는 사회에 산다면, 그 자체가 분명 하나의 진보일 것이다. 그런데 작금의 사회에서 생업 노동의 상실은 동시에 사회적 인정의 상실, 즉 자존감의 타격을 의미한다. 이런 타격을 받은 사람은 스스로를 디지털 혁명의 패배자로 느낀다. 이들에게는 자기 삶을 창조할 능력이 누구에게나 본디부터 주어져 있다고 이야기하는 인문학 서적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기본 소득의 이념에서 바뀌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기존에 유지되던 관료 행정의 광범한 폐지로 인해 그전에 하르츠 Ⅳ 등급을 평가하던 그 사람들조차 실업자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이후 이들이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직업들, 예를 들어 소포 배달이나 콜센터 상담원 같은 직업들조차 일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사회적 인정을 더 받지는 못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평생 학습〉의 필요성을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것은 기껏해야 냉소를 부를 뿐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디지털 지하 경제가 엄청나게 성장한 나라는 다른 곳이 아닌 바로 남부 유럽이고, 그런 상황이 고전적 노동 사회의 위기를 가리고 있다. 특히 스페인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에어비앤비를 통해 세놓으면서도 사회 보험료는 전혀 내지 않는다. 게다가 예전에는 훌륭한 미풍양속이었던 행동, 예를 들어 누군가를 차에 함께 태우고 가거나 빈방을 단기간 동안 대학생에게 쓰게 하는 행동도 이제는 냉혹한 돈벌이 수단이 되었다. 공동체적 행동이 사업 아이디어가 되고, 실리콘 밸리의 긴 그림자가 일상의 도덕을 파괴한다. 이것은 결코 사회에 유익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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