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사회적 평화를 위해 인구의 3분의 2를 가상 오락으로 진정시킬 수는 있겠으나, 그게 성공하더라도 인공 지능에 수천억 달러를 투자한 이들에게 수익금을 돌려줄 만큼 충분한 소비력이 생성되지는 않을 듯하다. 어쨌든 소비에 의존한 디지털 경제는 엄청난 난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미래에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우리의 시스템을 지금까지의 방식으로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돈을 벌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옛 시스템의 그렇게 많은 수익자들이 선진 산업 국가에서 임박한 대량 실업을 과소평가하는 이유일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길이 이렇게 지속될 수 없음을 어렴풋이 깨닫는 순간, 필연적으로 근본적인 대안을 숙고할 이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현재 독일에서도 거대 경제 단체들은 그런 것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로써 두 번째 위기는 이미 거론되었다. 미래에도 많은 사람이 경제적으로 소비자로서 필요하겠지만, 단지 소비자의 기능으로서만 그럴 뿐이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노아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 Homo Deus』에서, 계몽주의의 자유로운 인간상이 군사적인 면뿐 아니라 경제적 면에서도 그것으로 이익을 기대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관철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고 많은 애를 썼다. 용병 부대가 국방의 의무에 자리를 내주고, 공장에서도 일할 인력이 필요해지자 국가는 국민에게 여러 권리를 부여하고, 인간을 개인으로 선포했다. 인간이 그 자체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라리의 이 테제를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 19세기 초 공장에서는 개인이 필요하지 않았고, 인권이 오직 제복을 입은 시민들의 동기 부여만을 위해 선포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최소한 도덕과 자본주의 경제가 자유주의 속에서 한시적으로나마 동맹을 맺었다는, 그러니까 미래에는 더 이상 필요 없어질 그런 식의 동맹을 맺었다는 하라리의 결론은 맞지 않을까? 만일 대중이 그들의 경제적 중요성을 상실하게 되면 인권과 자유는 계속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것들에 대한 도덕적인 논거가 충분할까?]
『사냥꾼, 목동, 비평가』 혼자 읽기
D-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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