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나에 의해서만 결정된 것이니 자네 악사들은 내 조율에 맞춰 연주해야 하며 단언컨대 경험상 말하노니 내게 저항해봐야 아무 소용도, 어떤 의미도 없으며"
<경고> 장에서 악장이 한 말을 읽고 이 소설이 전체주의의 부활에 대한 '경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난민이 유입하고 이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 그리고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현실로 인한 과거에 대한 향수-'카다르는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와 빵을 줬습니다만, 그 시절이 다시 와야한다는 뭐 그런 얘기는 아니지만 그때는 없는 게 없었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바'라고 뱅크하임의 귀향 열차의 승무원 헝가리인 차장은 생각합니다. 찾아보니 카다르 아노시는 헝가리 인민공화국의 사회노동당 서기장 겸 장관회의 주석으로 두 차례에 걸쳐 총리직을 역임한 인물이네요- 이런 상황에서 전체주의가 다시 부활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기 충분하겠죠. 마침 <잘난 당신을 쓰러뜨리고 말겠어> 장에서 교수가 '작은별'을 죽인 다음 머릿속에서 맴돈 문장이 '나치 돼지들, 너희는 결코 나를 못 이겨, 너희는 결코 나를 못 이겨'라는 문장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작은별'이 속한 오토바이족, 자칭 타칭 '향토방위군'으로 불리는 이들은 '질서'를 중요시하고 '정직과 이상'이라는 가치를 내세우지만 실상은 경찰서장과 결탁한 자경단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신뢰하고 기다리는 분이 바로 뱅크하임 남작입니다. 이는 <창백한, 너무도 창백한> 장에서 헝가리인 차장이 카다르 아노시를 그리워하는 것과 겹칩니다. 뱅크하임 남작은 네오나치들이 표면에 내세우는 과거의 영광을 상징하는 인물인 셈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틀을 만들고 소설을 읽으니 사실 좀 맥이 풀립니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는 뱅크하임 남작이 아르헨티나에서 귀향을 하고 귀향을 하면서 46년 전 사랑했던 마리에타를 생각하고 마리에타에게 편지를 쓰고 그 이후에 펼쳐질 이야기에 굉장히 몰입했고 뱅크하임의 어리숙해 보이는 행동 하나하나가 사랑스럽기까지 했는데 제가 만든 틀에 갖히는 순간 시시해져 버렸거든요. 다시 틀을 거두고 찬찬히 읽어봐야겠습니다. 머릿속이 어지럽네요.
[이 계절의 소설_봄]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함께 읽기
D-29

산머루
sunflower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니 저는 더 재미있네요. 역시 함께 읽으니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혼자 읽었다면 이런 식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을듯요. 처음에는 심하게 지루해던 책이 조금씩 흥미로워지고 있습니다.

금정연
흥미로운 관점이네요! 그렇게 본다면 남작이 '아르헨티나'에서 귀향했다는 것도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전범(나치)들이 남미라 도주했고, 그중 아르헨티나에 가장 많은 나치들이 숨어 지냈다고 하죠(아이히만 포함).
그런데 이 소설은 읽으면서 계속 느끼는 거지만, 어느 한 틀에 가둬지기를 거부하는 것 같아요. 저도 이 책을 읽을 때면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는데요. 화이팅입니다!

고양이라니
마리에타를 여성으로 생각하고 읽으면 약간 우스꽝스러운데, 그건 그거대로 잘 어울리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으로 생각하고 읽으면 마리에타의 행동은 제외하고 벵크하임 남작의 행동은 이해가 가요 너무 오랫동안 떠나있었는데도 돌아가고 싶은, 그 때의 향수가 부활하다니 끔찍한거죠...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헝가리가 저질렀던, 독일보다 더 잔인한, 만행이 생각나네요 이런 맥락에서 요즘 유럽 소설은 더 흥미진진한거 같습니다

금정연
확실히 문화나 정치사회적인 맥락을 생각하면서 보면 소설이 다르게 읽히는 것 같아요. 특히 이 소설은 다르게 읽을 여지가 훨씬 더 많은 것 같고요.

이룬
“ 400. 그의 옆에는 빈 의자가 있었는데, 그는 그 의자를 좀 더 가까이 당겼으며 추위에 몸을 떨었으나 움직이지는 않고서 빈 의자 옆에 앉은 채 쾨뢰시강 강둑에서 잎을 모조리 떨군 버드나무들을 테라스 위에서 내려다보다가 얼마 지나자 그에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바람이 버드나무의 길고 촘촘하고 헐벗은 가지를 흔들리게, 앞뒤로 흔들리게, 강의 얼음장 같은 물 위로 차갑게 하늘거리게 하는 광경뿐이었다. ”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노승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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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룬
누구라도 기차에서 선뜻 내리지 못했을, 정신없던 환영식이었습니다. 요란하고 소란한 중에 주인공은 실은 안중에도 없는 듯, 남작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닌지도 모르겠어요. 빈 의자를 곁에 두고 앉는 걸 보고서야 비로소 저도 한숨 돌립니다.
한 번에 읽어지는 페이지가 늘어나네요. 이쯤되니 마침표 없이도 전혀 숨이 차지 않고요🤣. <그는 도착할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말했으므로> 챕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금정연
확실히 읽어나가면서 속도가 붙는 소설 같습니다. 저도 점점 더 읽는 속도가 빨라지네요.

호디에
“ 이 시대는 자유가 아니라 치욕의 연대기에 불과하며 다시 한번 무신론자들이 득세했고 이는 개탄할 만한 일이니 그들이 실제로는 조금도 성공하지 못한 것은 용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요, 한 발 더 내디디는 용기, 신이 없다는 관념에서 그들이 실제로 '제시한' 조치를 취하는 용기, 이것이야말로 언제나 그들에게 결여된 것이었으니 그들은 비난받았으며 어쩌면 오늘날에도 일관성이 결여되었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바,(...) 그들에게 결여된 것은 용기였으니 그들은 비겁했고 이날까지도 여전히 비겁하며 참된 무신론자는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고 어쨌든 저 측은한 거렁뱅이들, 어제와 오늘의 무신론자들, 그들은 거창한 문장을 내뱉었고 자신들의 말 때문에 즉시 바지를 적시고 말았으나 그들이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그 중요성을, 자신들이 방금 발견한 것의 놀라운 중요성을 깨닫지도 못했기에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무가치한 일이기 때문이며ㅡ(후락) ”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p481,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노승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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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목조건물
유럽권 독자들에게 별점이 높다는 것이나 정치 상황에 대한 정보들이 혼자 읽었다면 몰랐을텐데 뜻밖이에요. 오해로 비롯되는 한바탕의 상황들이 재밌어요.


금정연
소설이 쓰여진 헝가리어는 물론이고, 다른 유럽 언어로 번역되었을 때의 느낌이 궁금해요. 과연 우리가 같은 소설을 읽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도요. 모든 번역에는 그런 면이 있지만, 이 소설은 특히 그런 생각을 하게 하네요.

조용한목조건물
390.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를 들여보내주는 것으로, 그 건물의 이름은 카지노였고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노승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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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00
[펌/그는 도착할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말했으므로]
남작이 숙소로 간 후 피곤해 서 완성되지 않은 침대에 눕는 모습이 정말 잘 묘사되어있어서 생생하게 느껴졌어요. 마치 오랜 비행 후 여행지에 밤에 도착했을 때의 기분이 떠오르는 것 같아요. 시장이 만찬에 데려가려고 할때 저도 피곤함이 같이 몰려왔어요 ㅋㅋ 스위트룸을 마련해준 걸 보고 편안..
남작은 마리에타를 만나는데 알아보지 못해요. 남작이 좀 모자란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남이 닿는 거를 끔찍이 싫어하고, 자신의 또래였던 마리에타가 늙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사기꾼인 단테를 믿고, '카지노'에 머무르기 위해 도박을 해 모든 돈을 날려버렸다는게.. 정상적인 사람 같지는 않네요.

금정연
앞서 친척 회의 할 때 '바보'라는 식의 표현이 몇 번 등장하기도 하고, 이번에 도 머리커와 대화하며 자신의 '질병'을 언급하는데, 확실히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뭔진 잘 모르겠지만요...

고양이라니
이 여정의 목적이 뭔가? 어딜가고 싶은거야? 그들는 우리가 고아라고 말하지만 버려지지 않아도 고아가 될 수 있어.
현대에 사는 우리는 버려지고, 좋았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이렇게 불안하게 붕뜬 채 살아야하는 걸까요? 어쩌다 보니 외국에서 조금 이동하면서 읽고 있어서 결국 인간의 삶이란 디아스포라인가... 벵크하임 남작이 마지막에 왜 돌아가고 싶어했는지 저도 절감하게 되네요.

금정연
외국에서 이동하며 읽으면 느낌이 또 다를 것 같아요. 그런데 이 두꺼운 책을 외국에서 이동 중에 읽으시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sophia80
“ 저 끔찍한 경적이, 저 너절한 농사꾼 여편네들이 마이크에 대고 악을 쓰는 <에비타>의 저 끔찍한 노래가 정말로 필요했는가, 저 모든 연설이, 그에게 걸맞지 않은 저 모든 요구가 필요했는가였던바 그들은 그를 대체 어떤 사람으로 여겼기게 가장 세련된 분위기에만 익숙한 그를 저렇게 몰아붙였을까, ”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p. 324,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노승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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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phia80
[펌/ 그는 도착할 것이다. 그가 내게 말했으므로]
남작이 왜 귀향을 하고자 했는지 그 이유를 이제서야 알 수 있어서 답답함이 조금 풀렸어요. 하지만 마리에타를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에는 저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 그래야 했을까요. 그런 행동이 마리에타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줬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남작'이라는 단어 때문에 소설을 읽기 전에 중세의 분위기를 머릿속에 떠올렸어요. 그 때문인지 아이폰이나 스마트폰 등의 단어가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머릿속에 있는 고정관념을 빨리 지워야 하는데 만연체 때문인지 쉽게 지워지지 않네요.
또한 남작의 생각은 안중에 없이 그의 돈을 탐내는 이들의 욕심이 저열하게 느껴지네요. 과연 누구를 위한 환영회였을까요. 치적을 내세우려는 관료들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비판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금정연
머리로는 분명 현대가 배경이라는 걸 아는데도 저 역시 스마트폰이나 문자 메시지 등이 나올 때면 놀라게 되네요. 단순히 남작의 돈을 탐내는 걸 넘어서 환영회에서 숫제 재산을 기부하라고 종용하는 장면이나 시장이 기자들에게 '그의 일정은 전적으로 그가 결정할 것이다 여러분은 민주주의에 익숙해져 있어서 낯설겠지만 그는 영주나 다름 없고 그가 하는 건 통치다'라는 요지의 말을 하는 장면에서는 약간 소름이 끼치기도 했어요.

projection
하지만 하긴 우리 모두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잖아, (p.440)
쫓아가면서 읽고 있는데 어쩐지 이 문장이 마음에 박히네요. 정말 스쳐 지나가는, 줄거리에 큰 영향을 주는 문장도 아닌 짧은 푸념일 뿐인데도 유독 시선이 오래 머무른 문장이에요. '하지만'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말이 이 위태롭고 불안한 작중 사람들의 심리를 어느 정도는 대변해주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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