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스토너를 생각했어요..
사실 엄청 정갈하고 도덕적으로 산 인생은 아닌데.. 묵묵히 1인 역할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산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의 저는.. 1인분 역할이라도 충실히 해내자.. 남에게 짐이 되지는 말자.. 이런 생각을 하거든요..
어떤 어려움이 생기면, 자연스레 회피하게 된다던지..우물쭈물하면서,, 남들이 먼저 해결해 주길...이렇게 할때가 있어요..(업무에서도 생활에서도)..
그래서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렇게 요즘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책 증정] Beyond Bookclub 11기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D-29

아린

아린

스토너내셔널 북 어워드 수상작가 존 윌리엄스의 장편소설. 2013년 영국 최대의 체인 서점인 '워터스톤'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도서이다. 1965년 미국에서 발표된 후, 오랜 시간 동안 독자들에게 잊힌 <스토너>는 유럽 출판계와 평론가, 독자들의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내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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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토끼
이런 글을 쓰기에 조금 부끄럽지만 저는 만화이자 애니메이션인 장송의 프리렌에 힘멜을 떠올렸어요 인류의 나침반이라기엔 좀 무리가 있을 것 같긴한데 작년에 본 해외 칼부림 사건을 막은 의인이 한 인터뷰에서 "힘멜이라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 였다는게 생각 났거든요. 애니를 모르시는 분을 위해 설명드리자면 힘멜은 마왕을 쓰러트린 용사로 현명하고 정의로운 사람이에요. 고결한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도 나오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지나치지 않는 캐릭터죠 저 인터뷰 멘트는 작품속에서도 명대사로 나와요 다른 캐릭터들이 옳은 일을 할때마다 힘멜이라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 하고 자신도 그 일을 묵묵히 해내거든요. 작품 속에서도 그리고 작품을 읽은 사람들에게도 옳은 일을 하게하는 그의 선함이 어떻게 보면 참 도덕적인 것 같아요.
연랍
저에게 ‘도덕적 나침반’ 같은 인물을 한 명 떠올려보자면, 아티쿠스 핀치(Atticus Finch)가 생각납니다. 그는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에 나오는 인물인데요, 대공황 시기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마을에서 흑인 피고인을 변호하는 백인 변호사입니다. 그가 도덕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단순히 ‘법을 지키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사회 전체 가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도 옳다고 믿는 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는 자녀들에게도 늘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라”고 가르치고, 말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그 가르침을 실천합니다.
공정함, 용기, 공감, 그리고 무엇보다 ‘옳은 일을 할 때 외롭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자세’가 저에게는 깊은 울림을 주었어요.
아티쿠스 핀치는 실존 인물은 아니지만,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이상적인 어른, 이상적인 인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 또한 스스로 어떤 선택을 할 때, 혹은 누군가를 판단하려 할 때, “아티쿠스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떠올려보곤 합니다.
팥앙금
마더 테레사 수녀입니다
사람은 덕을 쌓을수록 보상받고 싶고
누가 조금이라도 이걸 알아줬으면 좋겠고
나의 의가 아주 세련되게 포장되어 드러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이 분은 정말 한 명의 사람을 한 명의 신으로 대접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그의 필요를 돌보고 최대한 한명이라도 손 잡아주기 위해 고군분투하셨어요
밑바닥에서 꽃을 피어올린 그녀가
바로 성녀라고 추앙받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colre
도덕적이며 인생의 나침반으로서 생각난 인물은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입니다. 영화 속 히라야마는 미혼의 중년남성으로 자신만의 루틴 속에서 화장실 청소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 단순한 기본정보에서조차 인상적인 부분이 있는데요. 타인이 보기에 대단해보이지 않는 청소 일을 그는 대단히도 '장인'스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일에 대해 그가 언급하는 대사가 없음에도 그가 청소하는 장면에서 일에 대한 그의 책임감이 느껴집니다. 함께 일하는 청년, 청년의 애인, 조카에게 보여지는 어른스러움은 요즘어른처럼 보이기만하는 이들에게 느끼기 어려운 존경스러움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일상에는 나름의 루틴과 행복이 있어 보였습니다. 사실 30대 중반의 미혼남성인 저의 일상은 히라야마의 일상과 매우 닮아있습니다. 다만, 그가 갖고 있는 미덕에서 조금은 혹은 한참 모자른 수준이지만요. 그렇기 때문에 대단치 않아 보이는 저의 일을 조금 더 의미있게, 타인에게 조금은 본받을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되기에, 슬픈 것은 슬프고 좋은 것은 좋다고 표현할수 있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히라가야를 저만의 나침반으로 삼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옐로우잡채
드라마에서는 <스토브리그>의 백승수 단장, <나의 완벽한 비서>의 강지윤 대표, <중증외상센터>에서는 백강혁 의사.
실존 인물로는 이국종 의사, 나종호 교수 등이 떠오릅니다.
저는 주로 시스템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이를테면 최근 가수 휘성이 운명을 달리한 사건에 대해, 중독 재활 시설에 더 많은 예산을 보장해야 한다고 몇 년째 외쳐왔는데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속을 썩고 있는 나종호 교수처럼,
우리 사회에는 빛과 소금이 되는 약 1% 가량의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 의해 사회 시스템이 아슬아슬하게나마 유지되고 굴러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직장생활을 통해서도 직접 겪어봤습니다. 정작 그 회사에 필요한, 필수적인, 본질적인 일을 하는 인재들은 많이 쳐줘야 4%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나머지 중 10%는 본질을 아예 흐려버리는, 정치질을 하거나 못된 짓을 하는 최악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고, 나머지 86%는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소시민적인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기진 역학자가 쓴 <오십에 읽는 주역>이라는 책에는 그런 사람들을 소인이라고 부르더군요. 한때는 그 소인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제가 변화시키고 싶어서 진땀을 뺀 적이 있었지만, 쉽지 않았어요.
이제는 모든 개인은, 그러니까 나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의 소망복합체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나니까(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정의로운 선택을 하고자 하듯이, 타인들은 그냥 월급을 벌고 싶기만 할 수있다. 등등) 도저히, 시스템이 깨지고, 사회가 붕괴되는 그 순간에도,, 더이상은 타인들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일깨워줘야겠다는 생각은 안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근무하던 곳에서, 사회적 약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 소명을 밝히고 그들을 대신해서 싸우다가 직장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 (높은 직책의 사람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도, 그 순간이 되니 가차 없이 저를 자르더군요. 자신들도 부끄러웠는지 제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 사회적 약자가 당사자들의 가족이었다면, 윗선에서는 절대로 저에게 그런 처사를 하지 않았을텐데, 너무나도 아쉬운 순간이었습니다.
여하튼, 정의로운 사고, 결정, 행동을 추구하는 저에게는 조직사회를 경험하는 동안
무척이나 정의롭지못한 장면들을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횡령, 가스라이팅, 성폭력, 직무유기, 책임전가 등등.
그래서 저는 그 똥통 같은 사회 안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져버리지 않는 정의로운 인물들을 존경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책을 냄으로서 제가 하고 싶은 목소리를 낼 생각이지만,
제가 조직사회에서 잠시 물러나 지금의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도
곳곳에는 소리 없이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 나가고,
자신의 영역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일들을 해내는 많은 사람들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니스트 새클턴의 이야기는 예전에 알쓸신잡인가 어디에서 봤던 것 같은데.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 리더십 있는 인물들 덕에 오늘 제가 살 수 있는 것이라고 분명히 생각하기 때문이죠.
아무튼.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마지막 질문이었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비욘드
■■■■ 4부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
● 함께 읽기 기간 : 3월 18일(화) ~ 22일(토)
안녕하세요, 비욘드북클럽 11기 여러분. 드디어 마지막 4부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에 도착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지난 3주간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를 마주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깊이 고민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챕터를 통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해 함께 논의하며, 우리만의 답을 찾아가는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이번 북클럽에서는 단순히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우리 삶의 방향을 설정하고 미래를 만들어가는 데 중요한 깨달음을 얻어가시기를 바랬는데, 어떠셨을까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모두 다를 것입니다. 함께 고민하고 이야기하는 과정을 통해 각자의 답을 찾아갈 수 있 기를 바라며 마지막 장, 함께 읽겠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비욘드
4-1. 4부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어느 대목이었나요?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알려주셔도 좋습니다.
colre
4부의 경우 내용이 조금 어렵기도 했고, 챕터의 주제인 무엇을 추구해야하는지에 대한 가닥을 잡기가 어려워 특정 대목을 뽑기가 애매했다. 그래서 4부의 특정 대목을 찾기보다는 이 책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이 챕터가 이전까지 이야기했던처럼 한 개인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본인만의 올바른 관점이 필요하고 그것을 사물이나 상황 등 외적인 것을 바라보는데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아름다움과 같은 내면을 바라보는데도 사용하라는 면에서 책 전체의 큰 줄기가 완성되는 것 같아 그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옐로우잡채
저는 모든 챕터가 흥미로웠습니다. 먼저 14 챕터부터 기록해 볼게요.
<14. 아름다움을 내 안에서 찾아라>에서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153p)를 보면서 아름다움이 결코 고정돼 있지 않다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갔고. 역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그 모습 자체가 아름답다는 말(155p)에서 '아, 내가 틀린 게 아니었구나.' 하는 위안을 얻었습니다.
또 아름다움은 사람의 감정에 있다고 하였는데(156p) 제가 물리학을 전공했다가 심리학으로 전향한 배경에도, 나는 감정이 없는 자연과학적 대상 보다 감정이 있는 인간을 탐구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직업을 선택한 배경에도, 나는 감정이 있는 것을 많이 사랑한다는 것, 그래서 지금은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구나, 하는 자기 이해를 한 번 더 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 살면 집단주의나 전통주의 하위요소들을 강요받는 순간이 상당히 많은데 그럼에도 그 환경 속에서 온 힘을 다해 쫓고 있는 저의 사상, '인간은 모두 개별 경험과 배경을 갖는다.(161p)' 개별성, 개인화, 개인존중주의에 칸트 역시 힘을 실어주는 것 같아서 기뻤습니다. 故 이어령 교수가 한 말, "우리 모두는 각자의 길에서 천재성을 갖는다."고 했던 것도 기억이 났습니다.
옐로우잡채
<15. 사심을 버려라>챕터에서는 사심이 없다는 첫 문장의 의미가 뭘까 하는, 아리송한 마음을 갖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미적 판단을 규정하는 만족은 일체의 사심이 없다."
(165p) 예술 작품이 경매장에 오르면 그 순간 그 작품은 더 이상 미적 가치를 지닌 대상이 아니라 교환 가치만을 지닌 상품으로 전락하게 되고, 더 이상 그 작품을 감상하는 행위 또한 미적 가치를 느끼는 행위라 설명할 수가 없게 된다는 서술에서 조금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작품을 운 좋게 구매한 소유자는, 그가 느낄 쾌감은, 더 이상 미적 쾌감이 아니라 앞으로 생길지 모르는 수익에 대한 짜릿한 쾌감일 것이라는 점도 매우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혹여나 그 작품 구매자가 다시는, 그 작품을 판매할 생각이 없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죽게 되면 다시 또 교환 가치의 대상이 되어버려서, 다시 미적 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는 결말까지 인상깊었습니다. 그래서 어쨌건 169p의 내용처럼, 길가의 들꽃 한 송이, 해 질 녘 서쪽 바다로 넘어가는 태양, 시골에서 바라보는 별이 가득한 밤하늘들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구나. 결코 값을 지불하고 소유할 수 없으니, 우리는 비로소 한 톨의 사심이 없이,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게 된다, 즐기면 된다, 하는 것이였죠. 그러면서 문득, 나의 남편을 나는 미적 가치로? 교환 가치로? ㅋㅋ 말이 이상하지만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그래, 나는 적어도 이 사람 만큼은 배우자로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한의, 유일한 가치로서 바라보고 선택을 했구나. 그러나 배우자나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나는 어떻게 보는가? 내가 사람을 고용한다면 사심이 없을 수 있는가? 상품에 해당하는 연예인? 배우들은? 그들은 더 이상 미적 가치를 지닐 수 없게 되는 것인가? 그러면서 아니다, 배우들이 가진 직업은 직업 특성상 상품성을 띄는 것일 뿐이다, 고용자들은 그들은 직업시장에서만 그냥 교환 가치가 생길 뿐이다, 그것은 그냥 우리 인간들의 한 국면일 뿐이다. 전체의 한 부분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모두 고유의 미적 가치를 지닌다. 하는 식으로 생각이 흐르면서, 그럼 결국 인간은 미적 가치와 교환 가치를 동시에 지니는 존재이구나. 하는 잠정적 결말을 내어보기도 하였습니다. 아무튼 앞으로도, 제가 미적인 무언가를 향유할 때는, 그것을 교환 가치로 바라보려는 잣대가, 어느 틈을 타고 들어오려고 할 때, 예끼 이놈, 하고 물리쳐봐야지 하는 수상한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옐로우잡채
<17. 마음을 공유하라>에서는 한나 아렌트가 했던 말이 끌렸습니다.
나의 감정이 자신을 즐겁게 하는지 혹은 불쾌하게 하는지를 선택하는 결정 기준은 상상력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며 그들과 함께할 수 있게 하는 소통 가능성이라는 것. 소통 가능성이라. 새로운 데? 하면서.
곱씹고, 혹여나 반박할 여지가 있을까 돌려봤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맞는 말이네.' 싶었습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관계 속에서 윤리를 찾는다는 말, 을 그래서, 접수하였습니다.
옐로우잡채
<18. 타인을 사랑하라> 에서는 우선 강지은 작가님이 실수를 하신 게 조금 거슬렸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가 아니거든요.(191p) 햄릿, 오셀로, 리어왕, 멕베스. 이렇게가 4대 비극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타인의 고통에 상당히 민감한 저에게는,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 가장 고차원의 숭고미(192p)단락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그래 숭고한 것은 알겠어. 하지만 그 시간들을 사는 건 사실 너무 힘들어.' 하는 반발심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제가 죽고 나면, '옐로우잡채가 아름다웠던 이유는, 자신의 안락함과 쾌적함을 뛰어넘어, 인간의 아름다움을 보는 그 영혼에 있었지. 그것은 오직 인간의 숭고한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아룸다움이었어.'라고 추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막상 이 가장 고차원의 숭고미를 뿜어내며 삶을 살았던, 살고 있는, 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가슴에 수많은 비수들을 꽂아가며, 또는 세상과 맞서 써우며, 또는 처음부터 이상적일 수 없은 현실 논리에 주저 앉으며, 마치, 예수님이 될 수 없지만 단단히, 예수님의 뒤를 이을 사람인 것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산을 기어 오르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맞이할 것이라는 확신을 떠올렸습니다.

하금
공통감은 어떻게 가능한가, 파트에서 제일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책에서 짚어준대로 우리 사회는 공통감으로 (사실 그 감각에 중독 된 것처럼 그 감각을 거의 유일한 원동력으로 삼고) 움직이고 있는데, 칸트가 제시한 세 가지 준칙은 거의 지켜지지 않는 것 같아서요. 그중에서도 ‘스스로 생각하라‘가 가장 어려운 준칙 같습니다. 미디어가 우리의 시각을 통해 사고를 지배하는 듯 하니까요. 그렇다보니 자연스레 2번과 3번은 거의 지켜질 수 없는 명제처럼 느껴집니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데 어떻게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고 나의 모순을 바로잡을 수 있겠어요. 결국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의 회복이 모든 갈등을 바로잡는 시작점이겠거니 생각이 들었습니다.

달빛개츠비
4부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아름다움을 외부가 아닌 내 안에서 찾으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아름다움이나 가치를 외적인 기준이나 사회의 시선에서 판단하곤 하잖아요. 하지만 저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그 모습 자체가 아름답다’고 말하면서, 결국 진짜 아름다움은 ‘내가 얼마나 나답게 살아가고 있는가’에서 비롯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이 저에겐 단순한 미적 기준을 넘어서, 삶의 방향성에 대한 통찰로 다가왔어요.
또 ‘사심 없이 감상하라’는 말도 인상 깊었습니다. 들꽃 하나, 해질녘의 태양, 별이 가득한 밤하늘처럼, 소유할 수 없기에 오히려 순수하게 감상할 수 있는 것들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말. 무언가를 ‘가져야’ 의미 있는 것이 되는 이 시대에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 같았어요. 저는 이걸 인간관계에도 적용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Alice2023
결국 저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아름다움이었군요. 다만 보기에 예쁜 심미적 아름다움이 아니고
사심이나 사욕은 없으되 인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아름다운 영혼을 보려고 하는 숭고미를 추구하자는 모습이 마치 불교와도 통하는 것 같았어요. 인문학이 사람의 무늬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더니 뭔가 오랜만에 따뜻한 결론을 보는 것 같다고 할까요. 그리고 4부에 소개된 초발심이라는 개념도 불교에 있는 개념이라는데 역시 모든 학문과 종교의 끝은 하나인가 봅니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며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어요. 10대의 미성숙한 전두엽으로 광기에 이른 풋풋한 첫사랑이지만 그들이 만약 결혼해서 아이들 낳고 살았다면 40대에도 뜨거운 사랑을 해고 있을까요 ^^

아린
저는 숭고미 부분을 읽고 조금 제 자신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항상 손에 쥐고 사는 게 익숙한 저에게 손에 쥐고 있는 힘을 좀 내려 놓으라는 말이 말이예요.
사실 어제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한테 듣고는 이 부분을 읽게 되어 더 생각하게 된 거 같아요.
쥐고 있으면 본인이 더 잘 가지고 있을 거 같지만 그렇지 않다고. 본인이 좀 더 자유로워지려면 양손의 힘을 좀 풀어내라라는 말을 듣고..
내가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 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연랍
칸트의 미적 가치에 대한 분석이 흥미로웠습니다. ㅇ{술품에서는 사심을 버릴 수 있습니다. 미술품은 사용가치는 크게 없는물건입니다. 그런데 예술, 디자인 이라는 것이 이런 사용가치가 없는 것들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건물은 예술과 사용성이 혼재된 사례입니다. 사심 없이 아름답다고 할 수있는 건물은 대개 사용가치는 좋 지 못합니다. 왜 이리 건물들이 네모모양 일색이냐고 한다면 그게 가장 사용하기에 좋기 때문입니다. 특이한 건물들은 짓기도 어렵거니와 그 사용성도 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다면 건축주는 어떤 관점을 더 우선시해야할까? 칸트가 말한대로 이 기준도 건축주 자신에게 있을 것 입니다.
팥앙금
아름다움의 기준점을 정말 내면이 장악할 수 있는지 4부를 읽으며 고민했습니다. 봐야 인지하고 관점이 생기는데 먼저 내 안에서 정립하고 밖을 보고 판단하는게 가능한지에 대해서요. 이제는 여행조차 sns핫플을 즐겨찾기로 추가해 좌표 찍듯이 완수하는 시대에 인간의 개별화가 꽃피울 수 있으려면 무엇을 먼저 거절해야하는지 역으로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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