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그라운드》 혼자 읽기

D-29
표현만은 무척 간단하더군요. “이제는 다른 사람과, 예를 들면 가족들과 한자리에 앉아 식사를 즐길 수 있는 기회를 갖기가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이죠. 요컨대 이런 말이었습니다. 일어날 수 없다, 말도 할 수 없다, 의식도 거의 없다. 그 말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차라리 시즈코는 그 자리에서 죽는 게 나았어! 저애는 그렇다 치고 너희들 고생이 말이 아니야.”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저도 그때가 제일 가슴이 아팠습니다. 동생이 사고를 당한 일도 물론 가슴 아프지요. 그러나 그보다 부모님이 그런 생각을 하신다는 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 차라리 그때 죽는 게 나았다는 어머니의 말을 들었을 때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시즈코가 쓰러지고 열흘 정도 지났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아직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이쪽에서 말을 하면 알아들을 정도는 됩니다. 의사의 말로는 자신의 가족관계(아버지, 어머니, 오빠, 올케, 조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지 확실치 않다고 합니다. 요컨대 인간관계에 관한 인식이 아직 완전하지 못한 것 같다는 거지요. 나는 늘 “오빠가 왔어”라고 말하기 때문에 제가 가면 오빠라는 사실은 아는 듯합니다. 그러나 오빠와 자신의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기억도 거의 다 잃어버린 것 같으니까요.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입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음식은 콧구멍을 통해 직접 위 속으로 넣어줍니다. 목 근육이 굳어버렸지요. 성대에는 이상이 없지만 그것을 움직이는 근육이 굳었습니다. 의사의 말로는 재활치료의 최종 목표는 자신의 발로 걸어서 병실을 걸어나가는 것이라 합니다. 실제로 시즈코가 그 단계까지 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여하튼 그것이 목표라고 합니다. 저는 병원과 의사를 믿고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가족의 일이니까요. 하지만 무엇보다 아내에게 미안합니다. 저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당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미안합니다. 동생에게 아무 일도 없었더라면 함께 여행도 다니고 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시즈코가 우리 말을 알아들었을 때는 정말 기뻤습니다. 처음에는 “우─” 하는 소리뿐이었지만 정말 끝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같이 있던 간호사도 다행이라며 같이 울었습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시즈코는 그때 “아, 우” 하는 소리를 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눈물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갑자기 변해버린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의사에게 물어보았더니 머릿속의 감정은 처음에는 울음과 외침의 형태로 불안정하게 표출된다고 하더군요. 그게 첫걸음이라고요.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사건 전날 밤, 가족들과 식사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런 걸 행복이라고 하는 거야”라고.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고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 정말 사소한 행복이지요. 그런데 하루가 지난 다음 날 그 터무니없는 사람들 때문에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우리 가족의 그 사소한 행복마저도 빼앗아간 놈들입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사건 직후 제가 병원의 기둥과 벽에다 마구 발길질과 주먹질을 해댔던 모양입니다. 그때는 옴진리교의 범행이라는 사실을 몰랐지만 정말 화가 치밀어서 상대가 누구든 정말 가만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에 손이 아파서 아내에게 “왜 여기가 아프지? 이상한데?” 하고 말했더니, “당신이 벽에다 주먹질을 했으니까 그렇죠”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서야 그때의 일이 어렴풋이 생각났습니다. 그 정도로 화가 났던 겁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증 장애를 가진 동생의 모습을 낯선 타인에게 보인다는 것이 가족으로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아니, 그보다 남에게 그 모습을 보이는 걸 넘어 이렇게 문장으로 바꾸어 세상에 알리는 것은 가족으로서 결코 마음 편한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글을 쓰는 일에 한 사람의 작가로서 막중한 책임을 느끼고 있다. 그 가족에 대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시즈코 씨 본인에 대해서.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하야시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많은 일을 생각하게 했다. 그동안 하야시 야스오가 우산 끝으로 찔러 터뜨린 사린 봉지 때문에 피해를 입고 인생이 바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경험을 극명하게 들어왔기 때문이다. 자료를 몇 번이나 면밀히 검토하면서 사건 당일 하야시 야스오가 취했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의 사실로서 머릿속에 선명하게 재현해보았다. 그러면서 그의 행동과 사린 봉지와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머릿속에 하나하나 연결해왔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물론 하야시 야스오가 체포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인생이 원래대로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1995년 3월 20일에 그 사건 현장에서 훼손되고 상실된 것들 대부분은 아마도 회복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사건은 정리되어야 한다. 그의 체포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그러니 ‘최후의 한 사람이 잡혀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마땅한데도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몸에서 힘이 쪽 빠져버리는 듯한 허무감이 들 뿐이었다. 오히려 ‘지금부터 새로운 싸움이 시작될 것’이라는 절절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아마도 오랜 취재 생활 속에서 피해자들의 시점으로 사물을 바라보려는 ‘시도’가 습관화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기쁨 같은 감정은 전혀 일지 않았다.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허무감과 아릿한 통증이 위벽을 긁는 산처럼 은밀히 솟구쳐오를 뿐이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시즈코 씨는 대부분의 기억을 잃은 상태다. 애석하게도 사건 이전의 기억을 거의 떠올릴 수 없다. 담당의사는 초등학생 수준의 지능이라고 한다. 그러나 ‘초등학생 수준’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인지 다쓰오 씨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사고의 전체적인 수준의 문제인지, 사고회로를 말하는 것인지, 또는 잃어버린 지식과 상식의 문제인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인공호흡기에 의존할 때 목을 절개한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 구멍은 지금도 직경 일 센티미터 정도의 둥근 금속으로 막혀 있다. 그것은 그녀가 넘을 뻔했던 죽음의 문턱을 보여주는 표정 없는 흔적이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오빠가 천천히 휠체어를 밀어 시즈코 씨를 병실에서 라운지까지 데리고 나왔다. 몸집이 작은 여성이었다. 머리는 짧게 깎았다. 오빠를 많이 닮았다. 표정에서 감정은 읽어낼 수 없었지만 볼은 약간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혈색은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이다. 눈 주위가 방금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보이지만 겉으로는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 같다. 만일 코에 꽂힌 한 개의 플라스틱 튜브만 아니라면 아무도 그녀를 신체에 이상이 있는 사람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양쪽 눈꺼풀은 활짝 열려 있지 않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미약하지만 강렬한 빛을 발하는 눈동자다. 처음으로 내가 느낀 것은 그 빛이었다. 처참한 상황에 처한 그녀가 거의 정상적인 사람으로 내 눈에 비친 것도 바로 그 눈빛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그 발음을 정확하게 표기하면 “안오아”이다. 그러나 전후 맥락을 통해서 금방 그것이 간호사를 가리키는 말임을 유추해낼 수 있다. 대답도 빠르다. 주저하지도 않는다. 뇌 속의 논리회로가 신속하고 순조롭게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혀와 턱의 움직임이 두뇌회로를 따라가지 못할 뿐이다. 처음 얼마간 시즈코 씨는 내 앞에서 긴장하고 부끄러움을 타는 것 같았다. 나는 느끼지 못했지만, 오빠인 다쓰오 씨가 시즈코의 태도가 평소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해서 알 수 있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낀 점은 예스와 노를 결정하는 것이 무척 빠르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결코 초등학생이 할 수 없는 일이다. 많은 일들에 대해 그녀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대답을 망설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역시 부끄러워하는 구석은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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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코 씨는 파자마 위에 목까지 단추를 단 핑크색 면가운을 입고 있었다. 무릎 위에는 얇은 모포가 놓여 있고 어깨에도 숄이 걸쳐져 있다. 그 아래로 뻣뻣한 오른손이 비죽 나와 있다. 다쓰오 씨는 곁에서 때로 그 손을 잡기도 하고 쓰다듬기도 한다. 그 손을 통해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시즈코 씨도 웃는다. 그녀는 정말 활짝 웃는다. 이렇게 활짝 웃는 사람은 또 없겠다 싶게 활짝 웃는다. 물론 얼굴의 근육이 그렇게밖에 움직여주지 않기 때문에 활짝 웃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즈코 씨는 원래 그렇게 웃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상상해본다. 왜냐하면 그 웃음이 그녀의 얼굴과 너무도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오빠가 그런 식으로 동생을 놀리면 동생은 그렇게 웃어 보였을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그러나 다쓰오 씨에게는 하루걸러 병원에 들르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는 차로 회사와 병원을 오간다. 편도 약 오십 분. 이 차는 회사의 호의 덕에 퇴근 후에도 다쓰오 씨가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 그가 입원한 동생을 위해 병원을 오간다는 사실을 알고 회사 측에서 배려해준 것이다. 그 배려에 대해 다쓰오 씨는 깊이 감사하고 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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