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억압은 용납이 안 된다
나는 윤석열이 계엄을 저지르고 뻔뻔하게
구는 것보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아니 내가
도저히 용납 안 되는 것은 자기를 억압하는 것에 반대해서
일어났다면서 자기도 결국은 자기를 따르지 않는
개인을 똑같이 억압한다는 것에 있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해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려는 시도를
나는 이 사회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모습인 사회의 다양성과
개인의 개성을 말살하고 사람들을 한 줄로 세우는
획일화 음모, 자기들만 좋은 그런 독재 정권을
연장하려 했던 것이 가장 용서가 안 되는 것이다.
계엄 포고령에도 나와 있듯이 언론과 출판을 막아
입틀막시켜 오로지 자기들 목소리만 내겠다는 것이고
그건 또 계엄의 성공과 실패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는 방증이다.
이처럼 개인의 억압은 계엄 치하 때나 가능한
민주주의 척도에도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삐딱하게 보기
D-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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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이미 물들어서 인지 문학가들에게 만연한 것을 비판하면서도 결국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인간은 거의 비슷한 존재들일 수밖에 없어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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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가 더 중요하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만 가지고는 현실을 살지 못한다. 견뎌내질 못하는 것이다. 너무 허무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뭔가 거기에 인간만의 의미를 두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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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주제 없이 그냥 쓰는 거라고 하지만 그 쓰는 자체도 주제없음을 내세우는 어떤 주제가 있어 쓰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정신 적용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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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너무 아끼지 마라
교과서에 실린 시에서 “이 시에서 주제를 찾아라.” 하는 것에
반대하더라도 결국 돌아오는 건 주제를 찾아라, 하는 것이다.
누구나 의대에 가는 것을 반대하고 연구원이 되라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돈이 되는 곳에
사람이 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자연스러운 흐름에 반기를 들어도 결국
잠재적으로는 그도 그걸 인정하게 된다.
그래 인간과 인간 사회에선 동물과 비슷하기에
기대하거나 뭔가 자기 이상에 대해 희망을
함부로 가지면 그 순진함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 세상에서 돌아가는 것을 막을 게 아니라
일단은 인정하고 그 틈을 노려 이상을 펼치든지 아니면
사회는 그냥 그렇게 돌아가게 놔두고 자기만의 가상을
만들어 거기서 자기 이상을 펴는 게 훨씬 더 나을 수 있다.
현실에 살짝 한 발을 들여놓고 이상에 더 지분이
많은 발을 들여놓고 현실을 살아내면서
그 위로를 이상 공간에서 받는 식이다.
이렇게 되는 건 인간도 동물이라 먹고 사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무 현실에 대해 좌절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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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다른 인간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이순신 동상으로 상징되는 것 때문에 뭔가 이순신은 범인이 아닌 것으로 되어 버렸다. 연예인을 우상화하는 것하고 같다. 그들은 그래서 죄를 지으면 안 된다. 항상 모범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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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것인데도 곁가지로 흘러 논리를 위한 논리에(말장난) 갇혀 거기에 흥미를 갖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니까 결국 글의 장수 채우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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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써놓은 걸 관념투성이라고 비난하지만 정작 자신도 관념 속으로 빠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결국 다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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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사회의 주류를 비판하지만 결국 자신도 그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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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과 현실은 괴리가 크다
이미 사회에 만연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주장을
비판하고 “인간은 개인적 동물이다.”라고 새롭게
주장하지만 사회인의 속은 모르겠으나 현실에서
개인적 동물보다는 사회적 동물 모습이 더 많이
눈에 띄는 것도 사실이고 그 새로운 주장자조차
이미 이런 주류에 물이 들어
그걸 전제로 논리를 이어 나간다.
뭐든 사회에 만연한 것을 한 개인이 고치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까 못마땅한 것을 실컷 헐뜯을 수는 있다.
그리고 자기는 반대되는 주장을 펼 수는 있지만
그게 그의 말대로 바뀌기는 쉽지 않다.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것하고 그것을 굳이
가리려고 하는 사회에 만연한 모습은
충분히 다를 수 있다.
그 잠재의식을 겉으로 꺼내놓으라고 해도
그걸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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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를 타파하라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라는 영화를 보면
광화문에 늠름하게 서 있는 이순신 장군 같은
위엄 있는 이순신이 아니라 그야말로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한, 인간 이순신이 등장한다.
광화문 광장의 이미지가 벗겨져 오히려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온다.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이 유튜브에 나와 자기의
진실을 밝히려는 계기로 삼은 것도 대통령과
그 계엄 가담자들이 자기처럼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용기를 내서 나왔다고 한다.
그들에 대한 이미지가 벗겨졌기 때문이다.
한 연예인이 추천하는 책이 지금 베스트셀러
1위를 달리며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그래서 지금 한강의 책은 뒤로 밀려나 있다.
그는 아마도 가수로선 알아줄 순 있어도
헤비한 독자로선 그렇게까지 사람들이 읽는
책에 영향을 줄 만큼 그 분야 전문가는 아닐 것이다.
이미지가 씌워진 것이다.
이상형 이성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 첫눈에 반할 때는 상대의 이미지가 최고조로
달한 순간일 것이다.
그러나 드디어 그와 사귀게 되면서 그의 정점에 있던
이미지는 차츰 벗겨져 나와 같은 인간이 되고
우리 사이는 매너리즘에 빠지고
권태기로 접어들어 결국에 이젠 그 이미지가
아니라서 헤어지는 수순만 남게 된다.
나는 그 이미지 때문에 그를 좋아했던 것인데
이젠 그게 아니니 좋아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이미지에만 현혹되면 상대의 진짜를 영영 못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자기가 아끼는 아이돌은 뭐든 모범적이어야 해서
그들은 함부로 행동을 못 한다.
이미지에 살고 이미지에 죽기 때문이다.
밉보여 이미지가 추락하는 순간, 자기 연기 인생도
나락(奈落)으로 떨어질 일만 남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기로 먹고사는 연예인은
자기 개인 생활이 아예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미지가 뭐라고, 한 연예인의 이미지를 난도질해
그 고통으로 아직 못다 한 인생을 포기하게 되었다.
상대가 사라져야만 배당금이 많이
할당되는 오징어 게임이다.
그들은 또 다음 이미지 파괴(타파가 아님)의
대상을 찾아 나선다.
언론의 무분별한 알권리 지상주의(至上主義), 유튜버 폭로,
악플러, 인터넷 괴롭힘(Cyber Bullying)의
조회수 장사가 그 원인이다.
이미지화된 게 진실인가 아니면 그도
우리처럼 한 인간인가.
후자일 것이다.
이미지는 한낱 껍데기에 불과하다.
이렇게 이미지로만 살면 그 이미지에 씌워진 사람도
이미지를 유지하느라 자기 삶이 없어 고달프고,
그 이미지에 열광하는 나도 그의 진짜를
못 보게 되어 결국 둘 다 불행할 따름이다.
베일에 싸인 이미지를 벗겨버려야 모두가 편하고 행복하다.
자기 실체와도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를 과감히 타파하고
본체와 케이스가 일치하도록 노력할 때
우리는 보다 당당하고 건강하게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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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주의를 주장하지만 뮨학도 결국 어떤 목적이 있어야 한다. 어쩌면 이는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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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을 경멸하지만 문학이 사회에 안 참여하고 유미주의만을 고수할 때 이는 사회로부터 외면만 받 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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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간 사이에서의 문학은 사회적 효용이 없으면 계속 살아남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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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세상의 진리
인간은 자연 속의 다른 동물이나 식물처럼-무슨 인간이라고
영혼이 있는 게 아니라-한낱 티끌에 불과하다.
다른 생 물처럼 인간도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천당과 극락도 없다. 바로 무(無)다.
영원히 흐르는, 변화하는 자연의 흐름 속의
잘 보이지 않는 먼지에 불과하다.
망망대해(茫茫大海)에 잠시 이는 잔물결에 불과하다.
이 세상에서 진리가 있다면 영원히 흐르는
변화, 그 자체뿐이다.
또 하나의 진리를 들라면 인간 세상엔 절대적인
진리는 없고 뭐든 상대적이란 것이다.
이걸 깨닫지 못하니까 인간은 늘 불안하고
고독하고 허무한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인간은 달관(達觀)의 경지에 올라
뭐든 느긋해질 수 있다.
이런 걸 기반으로 내 의견(意見)을 보태자면 그나마 현실이
불안하고 고독하고 허무하더라도 자기가 가지고 태어난 것을
맘껏 실현할 수는 있다. 거기서 나름대로 행복을 찾는
것이고 사회는 개인의 자유로운 자아실현을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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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영원하리
예전에 사랑방에서 할머니가 옛날이야기를 해주면
잠 오는 눈을 비벼가며 귀를 쫑긋 세우고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며 열심히 들었다.
어느 이야긴 너무 무서워 꿈에 나타날까 겁나
늦은 시간엔, 이야기해주러
마실 오는 할머니를 피해 달아나곤 했다.
이런 이야기나 소설 같은 문학은 주인공의 얼굴,
주변 배경들에 독자의 상상력이 참여해서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편다.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는 그걸 막는다.
주인공의 모습과 그 배경이 구체적으로
시청자 앞에 드러난다.
그래 소설이 영화화되면 원작보다 못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바로 독자의 상상적 참여를 애초부터 차단해서 그런 것이다.
또한 작가가 초창기에 상상의 나래는 펴는 작품을
생산하다가도 종교에 귀의하고부터는 그 틀에서
벗어나질 못해 신의 계시만 읊조리는 경우가 흔하다.
어떤 독자는 작가가 그 틀을 만든다고 해서 종교에
귀의하고부터는 다시는 그의 소설을 읽지 않 는 경우도 흔하다.
영화가 TV가 등장하면서 소설 같은 이야기는
곧 종말을 맞이할 거라고 하는데 이런 독자의 상상적 참여
때문에, 그 어떤 매체도 이를 대신할 수 없어
소설의 수명은 영원할 거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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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여인숙을 전전하며 아들과 함께 여행하며 인생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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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늙으면 더 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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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소하고 어려 운 이론은 자세히 봐도 잘 모른다. 실은 얻는 게 없다. 그들은 그냥 쓰기 위해 쓰는 경우도 있다. 일부러 어렵게 쓴다. 그러니 얻는 게 없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애초부터 얻을 게 없었던 것이다. 그냥 그러려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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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는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더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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