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에도 이어서 읽는 보르헤스의 일곱 번째 책입니다. 민음사 논픽션 전집판으로는 두 번째 책을 읽습니다. 함께 읽을 분들은 참여해주세요😀
『영원성의 역사』는 총 2부로 나뉘어 있으며, 이 모임에서는 1부에 수록된 20편의 글을 먼저 읽습니다. 하루나 이틀에 걸쳐 한 편의 글을 읽는 모임입니다. 목차는 이렇습니다.
[1부]
⏤ 서문 13
⏤ 가우초 시 15
⏤ 종말 직전 단계의 현실에 대한 견해 56
⏤ 독자의 미신적인 윤리 64
⏤ 또 다른 휘트먼 71
⏤ 카발라에 대한 옹호 77
⏤ 가짜 바실리데스에 대한 옹호 84
⏤ 문학에서 상정하는 현실 93
⏤ 영화 평 104
⏤ 서사 기법과 주술 112
⏤ 폴 그루삭 127
⏤ 지옥의 존속 132
⏤ 호메로스 서사시의 번역본 141
⏤ 아킬레우스와 거북의 영원한 경주 153
⏤ 월트 휘트먼에 관한 노트 163
⏤ 거북의 변모 175
⏤ 『부바르와 페퀴셰』에 대한 옹호 187
⏤ 플로베르와 본보기가 된 운명 196
⏤ 아르헨티나 작가와 전통 204
⏤ 평론 220
※ 한 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제 짤막한 감상을 남기겠습니다. 대화하실 때는 단편별로 [이 대화에 답하기] 기능을 활용해서 대화 타래를 엮어가요.
※ 지나간 글꼭지에 대한 언급도 얼마든 가능합니다. 나눠놓은 기간에 구애하지 마시고 [게시판] 기능을 활용해서 언제든 대화 타래에 동참해주세요.
※ 제 아이디를 탭 하고 [만든 모임]을 보시면 이전에 열렸던 모임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대략적인 방향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모임에 대한 의견도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 참여 인원이 없어도 25/2/11에 시작하겠습니다.
(11) [보르헤스 읽기] 『영원성의 역사』 1부 같이 읽어요
D-29

russist모임지기의 말
도로
반갑습니다

russist
반갑습니다😀

부엉선생
반갑습니다~ 좋은 이야기 나눌수 있으면 좋겠네요!

russist
네 재밌는 이야기 많이 해주세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서문 & 가우초 시] 서문은 별 말이 필요할 것 같지 않아서 그냥 넘기고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가우초 문학이 계승되고 발전된 역사를, 나아가 에르난데스의 ⟪마르틴 피에로⟫의 걸출함 다룹니다.
이전에 한번 가우초를 한번 언급한 적이 있으니 간단히만 말하자면, 남아메리카 전역에 걸쳐 활동하던 목동으로서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를 보여주는 독특한 집단입니다. 가우초들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민족의 정신적 선조라고 할 만하며, 그런 만큼 문학으로도 많이 다루어졌습니다. 민족주의와 토착적인 것을 말할 때 빼놓고 언급하는 것이 드넓은 팜파스와 가우초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르헤스의 주장에 따르면, 가우초 문학은 가우초에 의해서 쓰여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발사였던 바르톨로메 이달고가 아메리카에 가우초 문학을 최초로 들여온 '아담'이라는 겁니다.
이후, 보르헤스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패러디한 에스타니슬라오 델 캄포의 ⟪파우스토⟫를 논합니다. 델 캄포 역시 군인이었고 지방의 고위 관료이자 작가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역시 가우초가 아니었지만 가우초 문학을 계승했던 인물로 일컬어집니다. 흥미롭게도 이때부터 가우초 문학은 역설적으로 '가우초'에서 떨어져 나오게 됩니다. 당대 비평가들이 ⟪파우스토⟫에 나오는 수많은 세부사항이 가우초의 현실과 부합하지 않으며, "무지와 오류"로 점철돼 있다고 비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이를테면 경주마가 분홍색털로 물들었다고 묘사한 부분을 두고 당시 크리오요 기병은 분홍색 말을 타지 않는다거나, 말에 재갈을 물리는 것은 아르헨티나의 방식이 아니라 미국의 방식이라고 반박하는 식입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이런 비평가들의 지적이 "지방색에 관한 논쟁"이라고 일축합니다.
제 생각에, 보르헤스는 ⟪파우스토⟫로 촉발된 논쟁을 지켜보면서,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지방색'과 '고유함'에 과도하게 천착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추측컨대, 현 아메리카 대륙의 언어부터가 이미 자신의 선조를 죽인 정복자의 언어와 떼려야 뗄 수 없으며, 그리하여 자신들의 역사부터가 이미 '고유함'으로부터 멀어져 있다고 한다면, “시 속의 즐거움과 우정을 고찰하는 것이 주는 기쁨”에 비하면 지방색에 관한 논쟁은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요. 어쩌면 보르헤스의 작품 전반에서 드러나는 '원본-가본', '진품-모방품', '원작-패러디'의 관계는 그가 나고자란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자연스럽다고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의 연장선에서, 보르헤스는 가우초 문학에서 ⟪마르틴 피에로⟫가 왜 중요한지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가우초 문학은 민족주의자들에 의해서 민족주의적 가치를 지지해주는 근거였겠지만, ⟪마르틴 피에로⟫에 이르러서는 민족주의가 쇠퇴해가는 흐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라는 겁니다. 보르헤스는 ⟪마르틴 피에로⟫를 단테의 ⟪신곡⟫과 비교하며 그 성취를 서사시의 성취로 보는 주장에 반박합니다. ⟪마르틴 피에로⟫는 유럽적인 서사시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유엘라에 따르면 이 성취는 민족적인 것도 아니고 인종적인 것도 아니며, 다만 지난 세기의 쇠퇴를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마르틴 피에로⟫에서는 "지방적 색채가 처음으로 사라지는 우리 시대의 전환기"(48쪽)가 담겨 있단 겁니다. 그리하여 ⟪마르틴 피에로⟫는 고유함과 지방색에 천착하는 과거로의 복권이 아니라, "화자의 소멸이고, 그에 대한 현재 시점의 노스텔지어"(49쪽)인 것이죠.
요약하자면, 보르헤스는 ⟪마르틴 피에로⟫에서 서사시라는 장르로 '회귀'를 본 것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장르로의 '이행'을 보았습니다. 마르틴 피에로는 도스토옙스키, 졸라, 버틀러, 플로베르, 모파상의 세기에 진입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아스카수비의 작품 속 인물들이 무덤덤한 모습, 순수함과 강인함, 모험을 좋아하면서도 결코 놀라지 않는 영웅적 여행객의 면모를 보였다면, 에르난데스의 ⟪마르틴 피에로⟫에서는 전자와 구분되는, 뻔뻔스럽고 악덕스럽고 개인적으로 고뇌하는 면모가 드러납니다. 보르헤스가 보기에, 이런 인물의 특성은 소설적 조건입니다.

russist
“ 이제 우리는 가우초 시학의 모든 영웅 중에서 피에로가 가장 전통에 부합하지 않은 개인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것이다. 예술은 항상 개인적이고 구체적이기를 선호한다. 예술은 플라토닉한 것이 아니다. ”
『영원성의 역사』 1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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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
“ “⟪마르틴 피에로⟫의 경우는 민족적인 것도 인종적인 것도 아니며, 결코 민중으로서 우리의 기원과 관련이 있는 것도, 그렇다고 정치적으로 성립된 국가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지난 세기의 마지막 30년간은 쇠퇴의 시기로, 이런 형태의 지방적 색채가 처음으로 사라지는 우리 시대의 전환기였다. 이 작품은 당시 자신을 절멸시키는 사회적 분위기 앞에서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가우초의 고난에 가득 찬 삶을 다루고 있다.” ”
『영원성의 역사』 4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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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
“ 나는 소설에 대해 언급하였다. 오래된 서사시는 소설 이전의 형태를 의미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에르난데스의 작품을 원시적인 형태로 분류하는 것은 우연을 가장한 방식으로 이 작품을 고갈시키는 태도이며, 연구의 모든 가능성을 무화시키려는 시도일 뿐이다 주인공의 영웅적인 면모, 신에 대한 봉헌, 영웅이 처한 정치적 상황을 들어 서사시로 구분하려는 시도는 맞지 않는다. 이러한 요소들은 바로 소설적 조건이다. ”
『영원성의 역사』 54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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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종말 직전 단계의 현실에 대한 견해] 보르헤스는 여러 학자와 사상가의 주장을 빌려, 그들이 인간이야말로 "시간의 유일한 거주자이자 예견자인 동시에 역사적인 존재"라고 했던 것을 먼저 살펴봅니다. 폴란드의 논리학자인 코르지브스키(Alfrred Korzybski)는 우리 삶이 길이와 넓이와 깊이라는 삼차원으로 이뤄져 있다고 주장하면서, 식물이 일차원적 길이의 삶을, 동물이 이차원적 넓이의 삶을 산다면, 인간은 삼차원적 깊이의 삶을 산다고 했습니다. 여기에다가 아르헨티나의 시인이자 외교관이었던 베르나데스는 살을 붙입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식물의 정태적 생존과 동물의 동태적 생존을 넘어선다"면서, 인간은 에너지를 독차지하는 동식물과 비교하면 시간을 독차지했다는 겁니다. 보르헤스가 보기에 이는 루돌프 슈타이너의 주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되며, 그는 인간이 자의식을 지닌 시간의 주인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형이상학자 가스파르 마르틴 역시 인간이 공간을 확장하려하기보다는 깊어지기를 바라야 한다고 말하면서, 인간이 "시간을 축적하는 자신의 고유한 과업"을 회복하길 바란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이 일련의 주장들을 두고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잘라 말합니다. 왜냐면 공간과 시간은 서로 비교가 불가능한 두 가지 개념이기 때문이죠. 보르헤스가 보기에 공간은 "시간의 에피소드 중 하나"이며, "공간은 시간 안에 속해 있는 것"(61쪽)입니다. 인간이 공간을 축적해온 것은 시간을 축적해온 것과 다른 일이 아니며, 공간의 축적이야말로 시간을 축적하고자 했던 인간 고유의 과업을 실현할 한 방도라는 겁니다. 따라서 공간을 버리고 시간을 축적하며, 시간 안에서 깊어져야 한다는 생각이야말로 이 글의 제목이 말하는 "종말 직전 단계의 현실"관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요. 보르헤스는 이렇듯 다른 모든 것과 유리된 공간 속에서 역사를 상상하는 것은 재앙이며, 인간은 그 속에서 유령과 다름없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햄릿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를 간접 인용하면서 글을 끝맺습니다. 잠시 해당 대사를 살펴보겠습니다.
"I could be bounded in a nutshell and count myself a king of infinite space—were it not that I have bad dreams."
번역하면 "나는 호두껍데기 속에 갇혀서도 나 자신을 무한 공간의 왕으로 생각할 수 있다네⏤내가 악몽을 꾸지만 않는다면 말야" 정도가 될 겁니다. 이 대사는 정말 너무 유명해서, 대중매체와 예술작품을 가리지 않고 숱하게 인용되었습니다. 현실의 제약 속에서도 인간 정신의 자유로움을 행한다는 의미에서 말이죠.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 대사는 섬세하게 읽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앞쪽의 '무한 공간의 왕'을 말하는 부분이 아니라, 대쉬 이후에 나오는 조건부의 가정형을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보르헤스가 이 글에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도 그 부분일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한공간의 왕 - 도널드 콕세터, 기하학을 구한 사나이<무한 공간의 왕>은 대칭 시리즈 중 첫 번째 책으로 20세기의 위대한 기하학자, 도널드 콕세터의 전기이다. 도널드 콕세터는 20세기 최고의 기하학자로, 반시각적 부르바키 운동에 대응하여 기하학을 지키기 위해 애써왔으며, 고전기하학과 현대기하학을 결합시킨 선구자이자 개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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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
“ 인간이라는 종 전체가 오로지 청각이나 촉각을 통해 현실을 받아들인다고 상상해 보자. 시각, 촉각, 미각을 인지하는 능력과 이러한 감각이 규정되는 공간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자. 이에 따른 필연적인 전개로, 나머지 감각이 기록하고 있는 것을 더 섬세하게 인지하는 어떤 감각을 상상해 보자. 이러한 재앙을 상상하면 상상 속의 인간은 지금의 우리에게는 유령이나 다를 바 없이 느껴지지만, 이들은 여전히 역사를 만들어 가려고 애쓸 것이다. 인류는 공간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망각할 것이다. 앞도 보이지 않고 육신도 없는 그런 삶도 지금 우리의 삶과 마찬가지로 열정적이고 또 절실할 것이다. 나는 우리만큼 의욕적이고 다정하며 즉흥적일 가상의 인류가 저 유명한 호두 껍데기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 가상의 인류는 모든 공간의 밖에 있으며 어느 공간에도 없을 것이 분명하다. ”
『영원성의 역사』 62-6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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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독자의 미신적인 윤리] 문체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신적인 윤리를 짚어보는 글입니다. 문체란 단순히 가독성의 유무로 판단되는 것도 아니고, 간결성의 미덕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며, 명사와 형용사가 결합되어서 놀라움을 주는 것도 아니라고 보르헤스는 말합니다. 그런 것들은 "글의 구조적 효과보다는 구성 요소의 배치에만 관심을 쏟는"(65쪽) 것인데, "문체에 대한 이 자부심은 완성도에 대한 자부심이라는 더 한심한 자부심으로 부풀려지기 마련"(67쪽)이라는 것이 보르헤스의 생각입니다.
이 완성도에 대한 자부심이란, 플로베르의 소위 '일물일어설'과 비슷한 주장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너무 유명한 말입니다만, 플로베르는 '단어 하나만 달라져도 다 무너지는 글'의 중요성을 역설했었고, 이는 오늘날까지 많은 작가가 인용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퇴고의 역할이 스틱스 강물이 아킬레우스의 몸에 미친 영향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플로베르가 말한, '단어 하나만 달라져도 다 무너지는 글'은 완벽함의 증거가 아니라 되레 "가장 위태로운 글"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설명에서는 해방감마저 느껴집니다. 생각해보면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은 완벽함에 대한 우리의 환상을 반영하며, 완벽함이란 불가능한 완벽을 갈망하는 인간의 강박을 되비추는 왜곡된 거울상이 아닐까 합니다. 보르헤스는 이 글의 말미에서, 다 쓰고 나서 자기가 쓴 글을 소리내어 읽어본다는 익히 알려진 방법도 그다지 옹호하지 않습니다. 이미 문학이란 묵독의 시대를 예언하고 있었으며, 자기 고유의 장점과 싸우며, 심지어는 그 자신의 소멸을 사랑할 뿐 아니라, 종말마저 자초하는 예술이라는 겁니다.
비슷하지만 좀 다른 얘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언젠가 보르헤스는 한 인터뷰에서 이류 시인은 최고로 잘 쓴 시만 모아서 시집을 출간하는 법이라고 말했습니다(정확한 워딩은 아닙니다). 이 말은 전체 음악을 조율하는 '템포'에 관한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옷 입는 걸 정말 좋아해서, 영화를 볼 때도 인물들이 뭘 입고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유심히 봅니다. 제가 한 말은 아니지만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영화 ⟪리플리⟫는 멋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텍스트이며, 영화에서 최고로 멋진 사람은 아래위 피스로 빼 입은 맷 데이먼이 아니라 다 풀어 헤치고 나오는 주드로라는 겁니다. 칼처럼 빼 입은 사람은 아무리 잘 차려 입어도 2등이라는 거죠. 일본의 야스쿠니가 아닌 와비사비(わびさび) 정신이고, 20세기 리바이스 정신을 계승하는 오사카 파이브의 빈티지 파이브 포켓 셀비지 데님인 겁니다. 군더더기와 우연함과 불완전함을, 아킬레우스의 뒤꿈치를 재현하고 있는 겁니다.

리플리호텔보이이자 피아노 연주로 생활하는 톰 리플리 (맷 데이먼). 어느날 대학 재킷을 빌려입고 피아노 연주 대역을 하다 선박 부호 그린리프의 제의를 받는다. 이태리에서 빈둥대는 아들 디키 그린리프 (주 드로)를 데려오면 천달러를 주겠다는 것. 디키가 좋아하는 재즈도 공부하면서 연구한 톰은 이태리로 가 디키를 만나는데 상류사회의 화려함과 디키의 연인 마지 (기네스 팰트로)에게도 호감을 느낀다. 그러나 계약기간은 점차 만료되어 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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