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보르헤스 읽기] 『영원성의 역사』 1부 같이 읽어요

D-29
밀턴의 시는 천당과 지옥과 세상과 혼돈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일리아스⟫다. 반면에 플로베르는 이전의 모델을 모방하거나 극복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모든 사물은 각기 한 가지 방식으로 말할 수 있으며, 이런 방식을 찾는 것이 작가의 의무라고 여겼다.
영원성의 역사 20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이런 운명은 여전히 본보기가 되고 있다. 바이런의 운명이 낭만주의자들에게 그랬듯이 말이다. 플로베르의 기법을 모방한 작품이 ⟪늙은 부인들의 이야기⟫와 ⟪사촌 바질리오⟫이다. 플로베르의 운명은 신비스럽고 장려하고 다양하게 반복되었다. 말라르메의 운명에서(“세상 만물은 한 권의 책이 되기 위해 존재한다.”라는 말라르메의 플로베르의 신념을 구현하고 있다.), 무어의 운명에서, 헨리 제임스의 운명에서, ⟪율리시즈⟫를 직조한 복잡하고 무궁한 아일랜드인의 운명에서 반복되었다.
영원성의 역사 202-20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아르헨티나 작가와 전통] 20세기 초 '가우초 시'를 바라보는 당대 작가들의 '전통'을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글입니다. 이전 모임에서 다뤘던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에서도 말했지만, 가우초 시는 가우초가 아닌 이들에 의해서 집필됐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가우초 시가 특별해질 수 있는 이유라고 보르헤스는 줄곧 주장해왔습니다. 이 글에서도 마찬가진데요, 호세 에르난데스의 ⟪마르틴 피에로⟫에서는 가우초가 등장하지만 에르난데스는 애초에 가우초가 아니었기에 정확한 스페인어를 구사하지 않았고, 지역색에 천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마르틴 피에로⟫는 아르헨티나의 호메로스가 되지 않고 그만의 아르헨티나성을 보여줄 수 있었던 거라고 보르헤스는 말합니다. 문학에서 전통이란 단순히 지역색을 드러내고 그것을 전경화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전통은 당연한 것을 당연한 형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그것을 투명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늘 드는 예시이지만 드라마 속 광역수사대 형사들 입에서 터져나오는 "광수대"라는 단어는 사춘기 아들과 불화를 겪는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버카충"이라는 단어처럼 궁색하고 우스꽝스럽습니다. 기본적으로 혀에서 헛도는 말인 겁니다. 익숙한 척 다가갔다가 끝내 멀어지게 만드는 말인 것입니다(일찍이 사르트르는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유대인들이 '정확한' 불어만 쓰는 이유는 불어가 그들의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가장 지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원래는 괴테의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주장의 번안입니다). 하지만 이 말을 인용하는 사람들도 '가장 지역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저 한국 작품에서 호랑이가 나오고, 복고풍의 의복을 입은 특정 시기의 인물을 내세우거나, 그도 아니면 사극이면 모두 지역적인가요? 상투를 틀고 저고리를 입히고 버선을 신기고 갓을 쓴 사람을 내세우면 한국적인 것이 될까요? 그건 너무 안일한 해석입니다. 보르헤스의 말대로 우리가 미국적이거나 유럽적인 것을 집적적으로 내세워서 보여주더라도 그것이 한국적인 맥락에 있다면, 한국이 타문화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서 소화했는지 보여줬다는 점에서 '지역색으로서 한국적임'을 부러 드러내지 않고도 한국성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보르헤스는 고유한 아르헨티나, 즉 지역색에 빠질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르헨티나에서 과도하게 스페인을 덜어내려고 시도할 필요도 없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스페인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모든 서구 문화를 다루는 것이 아르헨티나의 힘이 될거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르헨티나는 서구 문화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서구 문화에 특별히 헌신해야 할 의무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유럽의 유대인들이 서구 문화에 살고 있으면서도 서구에 헌신해야 할 의무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혁신할 수 있었던 것처럼, 또, 영국에 사는 아일랜드 출신의 사상가들이 영국을 누리면서도 영국적인 미신에서 자유로웠기에 사상계를 혁신했던 것처럼요. 1954년에 출판된 수필집 ⟪아메리카의 원죄⟫에서 엑토르 무레나는 아르헨티나인이 유럽의 소재나 기법을 추구하는 것은 환상이거나 잘못된 생각이고, 아르헨티나는 유럽과 단절되어 본질적으로 혼자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재밌게도 이런 주장에서 일본을 '왜색'으로 배척해온 지난 역사가 떠올랐습니다. 지면상 여기서 다 얘기하기는 힘들지만, 한국이 식민지 역사를 겪었기에 그들의 만행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한국이 일본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정치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분열된 대상, 즉 일본과 북한과 다르기만 하면, 반대로 하기만 하면 스스로 한국적인 것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야말로 나이브합니다. 그런 주장은 물리적으로 연결돼 있을 뿐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현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인지적 부조화를 일으키게 돼 있습니다. 길게 설명할 것도 없습니다. 자신을 '무언가가 아닌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이 가장 후진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가 아니게 됨'으로써 바로 서는 게 아니라 스스로 '무언가가 됨'으로써 바로 서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저는 술담배를 하지 않고, 바람을 피지 않고, 지각을 안 해요'라고 자신을 소개한다면, 저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감도 못 잡을 것 같습니다.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소개할 때도 이 말은 똑같이 적용됩니다. '최소한 무언가는 아닌 것'으로, 금기로써 정의된 문화는 극도로 밋밋할 뿐 아니라 폭력을 내재한 문화입니다. 자아와 전통은 반사이익으로 채워지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고유한 문화와 전통이란, 그 나라가 영향받은 전통과 문화 모두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 안에 우연히 자리 잡은 것,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것, 그 모든 것이 저절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이질적인 뭔가가 들어와서 익숙하게 자리를 잡았다면 그건 이질적인 것을 우리 안에 녹여낼 수 있을 정도로 우리가 건강하다는 사실을 방증합니다. 그만큼 이쪽이 넓고 넉넉하다는 증거이며, 다른 것을 우리 안에 뿌리내리도록 토양과 햇빛과 물을 내어준 힘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때는 일본 사람들이 왜 이렇게 미국 문화를 동경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캠핑 문화를 가져와서 미국보다 더한 헤비듀티 문화로 만든 것이 웃겼습니다. 광산에서 금은 안 캐고 빈티리 리바이스 청바지 캐서, 왜 실 단위로 뜯어서 분석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진격의 거인⟫ 속 인물들은 유럽인이나 미국인의 외형과 이름을 가진 채 유상한 일본어를 구사합니다. 더 이전에 2000년에 만들어진 극장판 ⟨뱀파이어 헌터 D⟩는 지금 봐도 어떻게 가능한가 싶은 작화 퀄리티를 보여주는데, 심지어 이 애니메이션은 중세 유럽의 판타지 세계관을 배경으로 합니다. 예전에는 이상했지만 지금은 조금 이해할 것도 같습니다. 그건 좋은 것을 알아보는 안목과 취향, 거리낌없이 타문화를 모방하고 흡수할 수 있는 문화적 능력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격의 거인 크로니클거인의 침공으로 인해 인류를 지키는 커다란 벽이 무너진다. 그날부터 모든 거인을 없애리라 맹세하고 그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 시작한 엘런 예거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뱀파이어 헌터 D: 블러드러스트먼 미래, 마지막 전쟁 이후 마침내 뱀파이어들이 밤을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점차 소멸해가고, 일부 남은 뱀파이어들만이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한다. 사람들의 피해가 늘어감과 동시에 이러한 뱀파이어들을 잡기 위한 뱀파이어 헌터들이 탄생한다. 이 가운데 뱀파이어와 인간의 혼혈인 D는 뛰어난 사냥 솜씨와 출중한 외모, 그리고 알 수 없는 신비감으로 인해 사람들 입에 회자된다. 그러던 어느 날 존 엘본이라는 지주의 어여쁜 어린 딸, 샤를로트가 뱀파이어에게 납치된다. 존 엘본은 그녀를 되찾기 위해 최고의 헌터 D를 고용한다. 추적의 와중에 D는 샤를로트를 납치한 뱀하이에가 단 한번도 인간을 해친 적이 없는 귀족 뱀파이어 마이어 링크이며, 샤를로트를 태운 마이어의 마차가 오래 전 소멸한 것으로 알려진 뱀파이어 여왕 '카밀리아'의 성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제 헌터 D와 마이어, 그리고 샤를로트를 호위하려는 괴수들의 목숨을 건 대격전이 시작되는데...
헤비듀티계절이 바뀌고 패션계에 새로운 아이템이 등장하면, 그리고 그 아이템이 무엇이든 어딘가 튼튼하면서 기능적이라면, 홍보 문구에 ‘헤비듀티’라는 말이 붙곤 한다. 이 책은 패션을 넘어 일상에 '헤비듀티'라는 용어를 정착시킨 고바야시 야스히코가 1977년에 출간한 『헤비듀티의 책(ヘビ?デュ?ティ?の本)』의 복각판(2013년, 산과계곡사)을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헤비듀티의 유래를 시작으로 지은이가 전 세계를 취재하면서 고르고 고른 ‘진짜’들을 하나하나 소개
아메토라: 일본은 어떻게 아메리칸 스타일을 구원했는가미국 아이비리그 패션의 열성적인 모방자를 넘어서 언젠가부터 미국 및 글로벌 패션을 주도하게 된 현대 일본의 패션 역사를 밝혀 쓴 『아메토라: 일본은 어떻게 아메리칸 스타일을 구원했는가(Ametora: How Japan Saved American Style)』 2판이 출간되었다. 『아메토라』 2판에서 저자 W. 데이비드 막스(W. David Marx)는 그동안 진행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책의 본문을 소폭 수정할 뿐만 아니라, 새로 쓴 「후기」를 통해
게다가 문학 창조의 목적에 대한 이전의 모든 토론은, 계획과 의도가 무척 중요하다고 상정하는 잘못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례로 키플링의 경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키플링은 일생 동안 특정 정치적 이념에 따라서 작품을 썼습니다. 작품이 선전 수단이 되기를 바랐지만, 생애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작품의 진정한 본질을 작가가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스위프트를 예로 들었습니다. 스위프트는 ⟪걸리버 여행기⟫를 쓸 때 인류에 대한 고발장을 작성하고 싶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아동 도서를 남겼다고 말입니다. 플라톤은 시인이란 뮤즈의 대필자이며, 자석이 철 반지를 끌어당기듯이 자신의 의지와 목적에 반하도록 이끈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재차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전 세계가 우리의 유산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소재를 다룰 수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인이 되고자 아르헨티나적인 것에 매달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르헨티나인이라는 것은 타고난 운명이며,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아르헨티나인이기 때문입니다. 또 아르헨티나인이라는 것은 우리의 가장이고 가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예술 창조라는 의도적인 꿈에 우리를 내맡긴다면, 우리는 아르헨티나인이 될 것이며, 훌륭한 작가, 적어도 괜찮은 작가가 될 것입니다.
영원성의 역사 218-21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평론] 보르헤스가 얼마나 다방면에 섬세한 촉수를 드리우고 있었던지를 알 수 있는 글들입니다. 소설 뿐 아니라 수학, 철학, 역사, 영화에도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이 글에서는 시간, 사후세계, 자유 의지, 심지어는 영화 더빙에 대한 자신의 견해도 간략히 풀어놓고 있습니다. 이로써 1부 마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마트라에 예언의 대가가 되려는 응시자가 있었다. 시험관이 응시자에게 시험 합격 여부를 물었다. 응시자는 대답하기를 불합격하면······. 이제 이런 식의 대답이 무한히 계속되리라고 예감할 수 있다.
영원성의 역사 225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더빙을 옹호하는 사람치고 운명론이나 결정론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이러한 더빙이 발전의 불가피한 결과이며, 머지않아 우리는 더빙된 영화를 보느냐 아니면 영화를 아예 보지 않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전세계적인 영화의 쇠퇴를 고려하면, 두 번째 선택지도 가슴 아픈 일은 아니다. 최근의 쓰레기 같은 영화를 보면 영화가 일종의 불쾌한 낙원이라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관광은 실망의 예술"이라고 스티븐슨이 말한 바 있는데, 이런 정의는 영화에 해당될 뿐만 아니라, 안타깝지만 소위 삶이라고 부르는 뒤로 미룰 수도 없는 지속적인 활동에도 종종 해당된다.
영원성의 역사 24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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