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보르헤스 읽기] 『영원성의 역사』 1부 같이 읽어요

D-29
화제로 지정된 대화
[윌트 휘트먼에 관한 노트] 앞서 ⟨또 다른 휘트먼⟩에서 보르헤스는 시인 휘트먼이 미국을 집약한 상징이라고 치켜올린 바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도 휘트먼에 대한 애정을 가감없이 드러냅니다. 시인으로서 휘트먼의 위대함이란, "지적 유기체"로서 '풀잎' 같은 인물로 자신을 창조해낸 것이라고 보르헤스는 적고 있습니다. 즉 휘트먼은 비범해지기보다는 범상해지려고 노력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위대해졌다는 것인데요, 윌리엄 베크포드나 폴 발레리가 자신의 작품 안에서 내세운 낭만적인 영웅과는 달리, 휘트먼은 시 속에서 또 다른 등장인물로서 '휘트먼'을 창조해냈으며, 뭇사람과 자신의 차이를 강조하기보다는 모든 이와 같아지려고 노력했다는 것이죠. 발자크는 "천재는 모든 사람과 비슷하지만 천재와 비슷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한 적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서 영감을 얻을 정도로 범상함에 매달리면서도 정작 그란 사람은 대체가 불가능해지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발자크의 천재상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이 아마 휘트먼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생각은 굉장한 자유를 줍니다. 생각해보세요. 남들과 한사코 다르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은 남들처럼 '다름'에만 집착한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로는 지극히 평범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 몰개성하게 개성만 추구한다고도 표현합니다.) 반면, 휘트먼은 "다른 모든 인간들과 비슷해지기를"(167쪽) 원합니다. 이런 면에서 휘트먼의 ⟪풀잎⟫은 모든 존재가 하나의 통일된 신성의 일부라는 범신론과도 이어지며, 모든 것이 본디 하나이며 각각은 모든 것이라는 생각으로 흘러갑니다. 이때 헤라이클레이토스의 67번째 구절에서도 보듯, 모순되는 것은 한데 있어도 불편하지 않습니다(“신은 낮이자 밤이고, 겨울이자 여름이며, 전쟁이자 평화이고, 풍족함이자 배고픔이라”). 범신론적인 세계관 안에서 보르헤스는 휘트먼과 그리스 철학자 플로티노스, 페르시아의 신비주의자 아타르의 사례를 연결짓고 있는 것인데요, 제가 보기에 이러한 사고관은 훗날 "모든 각도에서 본 지구의 모든 지점들이 뒤섞이지 않고 있는 곳"인 알레프로 이어지는 게 아닌가 합니다. 과연 휘트먼은 알레프적인 영웅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즈음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범상함 없이는 비범함도 불가능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인플루언서가 넘칩니다. 그러나 인플루언서는 '유명한 걸로 유명한 사람'이라는 우스개에는 날카로운 진실이 담겨 있다는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분명 오늘날 유명한 사람은 많아졌지만, 꼭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비범함이 늘어났는지는 의문입니다. 모두 몰개성하게 개성을 탐닉하는 곳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다들 밋밋하게 보입니다. 격자형으로 구획된 인스타그램의 추천 피드 속 화려함처럼요. 인스타그램 광고나 틱톡의 영상들 자체는 매우 흥미롭고 독창적인 것 같지만, 다 보고 나면 공허하고 기분이 옹졸해지는 걸 피할 길이 없습니다. 피상적인 차별점만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인플루언서 마케팅은 필연적으로 '자아 장사'로 이어지곤 합니다. 자아 장사꾼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첫째라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그런 조언은 추구해야 할 결론을 선취해서 전제로 삼으라고 권하고 있기에 애초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 조언은 '나'를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인생이며, '나'를 모르고 '인생'을 모르기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은폐하기에 유해하기까지 합니다. 제가 봤을 때 자신을 알아간다고 했을 때의 '앎'은 단언하고 결론내리는 앎이 아닙니다. 결론을 충분히 유예하면서 시간을 쏟는 그 행위 자체에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 관한 한, 살아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으며, 이를 보르헤스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더 용인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원칙을 도서관에서 발췌하는 것이 아니라, 생생한 경험에 적용하는 경우에서다.” 보르헤스가 말하는 휘트먼이 가장 좋은 예입니다. 그는 스스로 범상해짐으로써 그렇게 했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헨리 밀러의 ⟪그리스 기행: 마루시의 거상⟫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리스 기행 : 마루시의 거상은행나무 위대한 생각 12권. 영미문학사상 가장 문제적인 작가 헨리 밀러가 남긴 기행문학. 헨리 밀러는 소설 작품들 외에도 서구 문명, 특히 미국 문화를 신랄히 비판한 무수한 산문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저작이 <그리스 기행>이다.
공고라는 중요한 책은 실제로 중요한 주제를 담지 않은 책임을 간파한 첫 번째 사람이다.
영원성의 역사 164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카침발리스가 풀어내고 있는 이야기는 하찮은 에피소드로 시작해서 미완성 소설로 끝나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가 미완성이 되는 것은 기운 또는 공간 또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공교롭게도 그가 졸음이 와서 한숨 자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그의 다른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토마스 만의 끈기와 솜씨가 없는 나로서는 문자화하기가 불가능한 작품이었는데, 며칠 동안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소재가 아주 특이한 탓은 아니었다. 우리 앞에 넓게 펼쳐져 있는 바다를 그가 자유로이 사용해서 아주 굉장한 곁가지를 만들어내고, 가장 하잘것없는 부분에 꼼꼼히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야기를 하는 재주에서 듣는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몹시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끝나기 한참 전에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자신의 상념 속에 빠져버린다고 항상 생각했다. 내가 들은 최고의 이야기들은 요점이 없었고, 최고의 책은 도무지 플롯이 기억나지 않으며, 최고의 사람들과는 어떤 결실도 맺지 못한다. 몇 번이나 경험한 일인데도 내가 아는 몇몇 사람들의 경우 인사를 나누고 몇 분도 안 돼서 함께 끝없는 항해에 나서게 되는 것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감정과 궤적 면에서 그 여행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뼈가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듯 노련한 몽상가가 자연스레 빠져들어 가는 깊은 꿈뿐이다. 이처럼 감각을 초월하는 경험을 한 뒤 나는 끊어진 가닥을 다시 잡으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되살려낼 때가 자주 있었다. 하지만 그 반짝거리는 지점과 본토 사이에는 항상 도저히 지나갈 수 없는 허공이 있었다. 예술가의 마법이 포탄 구덩이와 수렁과 철망의 방해를 받은 일종의 무인 지대였다.
그리스 기행 : 마루시의 거상 105쪽, 헨리 밀러 지음, 김승욱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거북의 변모] 앞서 살펴본 ⟨아킬레우스와 거북의 영원한 경주⟩의 보론이라고 할 만한 글입니다. 이 글에서는 제논의 역설에서 출발한 아킬레우스와 거북이가 역사 속에서 사상가들에게 어떻게 변주되어왔는지를 살펴봅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을 논한다는 자체가 이미 역설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 보르헤스의 글 곳곳에서 은근히 드러납니다. 따라서 무한에 관한 논의는 변주되어 온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경주처럼 끝이 없고, 또 끝이 없을 것입니다. 앞서 한번 언급한 적이 있듯이, 제논의 역설은 스승이었던 파르메니데스의 ‘일자(一者)’를 귀류법적으로 논증하기 위해서 고안해낸 것이었습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은 플라톤에 이르러서 이데아론에 영향을 미쳤는데, 훗날 아리스토텔레스는 제논의 명제를 논박함으로써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우회적으로 반박합니다. 무한 소급을 활용한 것으로서, 훗날 '제3인간 논증'으로도 일컬어진다고 합니다. 먼저 개별적인 두 인간에게서 '인류'라는 영원한 원형을 발견해냅니다. 그런 뒤에 이 인류와 또 다른 개별적인 인간 한 명 사이에서 일반적인 속성을 도출해내는 것입니다. 이를 제3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면, 비슷한 방식으로 거듭 제4원형, 제5원형 같은 일련의 원형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입니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엘레아의 제논은 운동과 수에 반하여 무한 소급에 호소했고, 제논의 역설을 반박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에 반하여 무한 소급에 호소했다.”(179쪽) 엘레아의 제논은 운동과 수에 반하여 무한 소급에 호소해서 일자론에 힘을 보태었고, 여기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증거되는데, 다시 아리스토텔레스가 똑같은 무한 소급에 호소하여 이데아론을 반박한 것입니다. 이 꼬리에 꼬리를 문 세계의 뱀 우로보로스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그만의 논의를 확장해 나갑니다. 보르헤스의 글에서는 제논의 역설을 제 나름으로 변모시킨 여러 사상가들의 사례가 언급되고 있는데, 무언가를 정의하는 언어를 다시 정의하는 식으로 논의가 무한히 지연되고 있습니다. 특정 단어의 뜻을 몰라서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다가 그 정의에서 다시 모르는 단어가 나와서 끊임없이 사전을 순환하며 의미가 지연되는 '사전 순환', '사전 재귀'의 오류 같은 것이 반복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소개된 루이스 캐럴의 삼단논법에서 제2전제와 결론 사이에서 '주기적인 간극'을 끼워넣는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말미에서는 보르헤스는 다양한 변모 사례를 살펴보다가, '말의 배열'과 '우주'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세계는 의지가 만든 것"을 인용하면서 관념론에 근거하여 "예술은 항상 눈에 보이는 비현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앞서 역설에 관한 논의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동참한다는 것은 "세계가 환영 같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글의 마지막 한 문단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마치 놀란 감독이 ⟪메멘토⟫와 ⟪인셉션⟫의 마지막 장면을 만들면서 염두에 뒀을 것만 같은 구절입니다. 결국 이 영화들이 말하는 바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것이며, 이 두 영화는 근원적으로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을 혼동해선 안 됩니다. 환상은 언제나 환상을 꾸는 주체를 상정하며, 그 주체는 현실에 발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환상이라는 단어 자체가 현실이라는 강한 콘트라스트 없이는 성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환상이 현실로 범람한다'는 상투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언제나 현실에 아부하고,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에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은 가상이 아닌 현실의 중요성입니다.
메멘토전직 보험 수사관이었던 레너드에게 기억이란 없다. 자신의 아내가 강간당하고 살해되던 날의 충격으로 기억을 10분 이상 지속시키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이름이 레너드 셸비 라는 것과 아내가 강간당하고 살해당했다는 것, 그리고 범인은 존 G 라는 것이 전부. 레너드는 자신의 가정을 파탄 낸 범인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 메모와 문신을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진실에 다가갈수록 자신의 기억, 주위 사람들에 대한 의심이 갈수록 커져만 가는데...
인셉션타인의 꿈에 들어가 생각을 훔치는 특수 보안요원 코브. 그를 이용해 라이벌 기업의 정보를 빼내고자 하는 사이토는 코브에게 생각을 훔치는 것이 아닌, 생각을 심는 ‘인셉션’ 작전을 제안한다. 성공 조건으로 국제적인 수배자가 되어있는 코브의 신분을 바꿔주겠다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고,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최강의 팀을 구성, 표적인 피셔에게 접근해서 ‘인셉션’ 작전을 실행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건들과 마주하게 되는데… 꿈 VS 현실! 시간, 규칙, 타이밍 모든 것이 완벽해야만 하는, 단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는 ‘인셉션’ 작전이 시작된다!
노발리스는 기억할 만한 말을 남겼다. “주술사의 최고봉은 자신에게 주술을 걸어서 자기가 만든 환영마저도 저절로 출현했다고 여기는 주술사일 텐데, 그게 바로 우리가 아닐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리(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온전한 신성)는 세계를 꿈꾼다. 우리는 이 세계가 공간적으로는 굳건하고 신비하고 가시적이고 편재적이기를 꿈꾸고, 시간적으로는 견고하기를 꿈꾸지만, 세계라는 건축물에 비이성이라는 영원한 실금이 나 있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기에 우리의 꿈이 거짓임을 안다.
영원성의 역사 186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한편, 루이스 캐럴의 삼단논법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a), b), c) 부분의 전제와 결론 부분 번역이 좀 이상해서 원문을 찾아보니 좀 달랐습니다. 아마 이렇게 옮기는 편이 더 명료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제시해봅니다. a) 제삼의 것과 동일한 두 가지는 서로 동일하다. b) 이 삼각형의 두 변은 MN으로 동일하다. z) 이 삼각형의 두 변은 서로 동일하다. 이 삼단논법을 제 나름으로 이해한 대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처음 보면 조금 이상해 보일 겁니다. 왜냐하면 전제 a가 필요 없이도, 두 번째 전제 b만으로 z라는 결론이 도출될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삼각형의 두 변이 MN으로 동일하면 이 삼각형의 두 변은 동일하다'라는 당연한 동어반복처럼 들리는 겁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제논의 역설이 바탕하고 있는 논리란, 무한히 면밀해 지는 데 그 핵심이 있습니다. a라는 전제는 '서로'와 '동일하다'라는 일견 당연해 보이는 부사어와 서술어의 의미가 논리적으로 무엇인지 규명해주기에 필수적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반에 A라는 학생과 B라는 학생이 있는 상황입니다. a) 수학을 잘하는 사람들은 서로 친구다. b) A 학생은 수학을 잘하고, B 학생도 수학을 잘한다. z) 결론적으로, A와 B는 친구다. 여기서 a라는 대전제가 없으면 b만으로는 z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친구가 무엇인지에 대한 전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전제 b와 z사이를 무한히 벌림으로써 결론을 지연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예시는 아닐 수 있으며,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니 참고만 바랍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부바르와 페퀴셰에 대한 옹호] 플로베르의 미완성 소설이자 유작인 ⟪부바르와 페퀴셰⟫의 가치를 보르헤스 나름으로 옹호하는 글입니다. 이 소설은 플로베르가 죽은 이듬해인 1881년에 출간되었는데,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백과사전'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구상 자체는 약 10년 전부터 해왔으나, 글쓰기가 고통스러워서 집필과 중단과 재개를 반복했지만 끝끝내 완성에 이르지는 못한 소설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부바르와 페퀴셰라는 두 필경사가 농사가 실패한 원일을 알아보려고 책을 펼쳤다가, 책에 빠져서 책으로만 세상을 배우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보르헤스의 글에서 보듯, 당시 반응은 석연치 않았습니다. 소설은 두 바보의 무용한 노력으로 점철돼 있으며, 그것은 다름 아닌 플로베르의 노력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플로베르는 이 소설을 위해서 농학, 교육학, 의학, 물리학, 형이상학을 다룬 1500여 편의 연구물을 읽었다고 합니다. 플로베르의 이전 작품들에서 보듯, 그는 세상에 대한 호오가 뚜렷한 사람이었고, 자신이 싫어하고 혐오하는 인간형을 조롱하고 멸시하려고 등장인물로 내세웠지만, 끝끝내 그 혐오해 마지않는 인간 유형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에 이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부바르와 페퀴셰⟫도 마찬가지고요. 보르헤스는 이를 '꿈꾸는 자가 현재 자기가 꿈을 꾸고 있으며, 자기 꿈의 형식들이 바로 자신임을 깨닫는 순간'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보르헤스는 훗날 단편 ⟨원형의 폐허⟩나 ⟨칼의 형상⟩에서 이런 순간들을 재현하기에 이릅니다. 소설이 지적 활동의 무용함을 직접적으로 조준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지식인이 대다수였던 당시 평단의 반응은 날이 서 있습니다. 혹자는 부바르와 페퀴셰라는 두 바보의 실패를 인류 지성사에 등장했던 거인들의 실패와 대등하게 보는 것은 오류라고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부바르와 페퀴셰⟫가 '다분히 의도적으로 단순하게 쓰여졌음'을 첫 문장에서부터 강조하며, 플로베르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바르와 페퀴셰가 바보이기 때문에 바보들의 실패는 '바보들만의 실패'로 끝나게 될 거라는 비판은 가당치 않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두 인물이라는 전제를 비판함으로써 소설 전체를 비판하는 것은 작품에 내재한 '논리'를 비판하는 것인데, 이는 플로베르의 소설이 본디 '미학적인 것'임을 간과하고 있기에 그릇되다고 말합니다. 플로베르가 살았던 19세기는 과학적 진리가 인류를 증진하고 구원해주리라고 믿었던 시대였고, 그는 당대의 희망을 자신의 소설로써 의심했습니다. 여기에는 진리를 추구하는 행위에는 무용하게도 끝이 없을 것이라는 플로베르의 인식도 한몫했습니다. 당대의 사람들이 과학적 진리에 대한 희망은 잠정적인 '결론'에 대한 환상이며, 그것이야말로 "광기 중에서 가장 무익하고 치명적인 광기"라는 것이 플로베르의 생각이었습니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과학은 무한한 공간에서 팽창하는 유한한 구체(esfera)'이며, 확장될 때마다 미지를 더 넓게 포괄하나, 미지는 고갈되지 않을 것이라고요. 나아가 예술은 필연적으로 상징이며, '가장 거대한 구체조차 무한 속에서는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고요. 공교롭게도 보르헤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물리학자 존 휠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무지의 바다에 둘러싸인 섬에 산다. 우리 지식의 섬이 넓어지면 무지의 해변 또한 넓어진다." 그리하여 플로베르가 만년에 두 바보를 내세워 이뤄낸 성취란 다름다닌 사실주의 소설의 죽음이라고, 보르헤스는 적습니다. ⟪부바르와 페퀴셰⟫는 볼테르와 스위프트와 동양의 우화를 뒷배경으로 둔 채, 곧 도래할 카프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갑니다. 한편, 보르헤스의 마지막 단락은 약간 모호하게 읽힙니다. 어쩌면 플로베르가 내세운 두 바보는 존 휠러의 말을 자신들의 구체적인 행위로써, 그 실패로써 한 발 앞서 예증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두 바보의 실패는 예견된 것이었고, 플로베르의 소설은 미완으로 끝남으로써 잠정적으로 완성될 운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미완성으로 마무리 된 카프카의 ⟪성⟫처럼요.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두 바보의 실패는 플로베르가 전달하고자 한 바가 적확하게 전달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실패함으로써 성공한 소설은 성서의 불완전한 필사본이 되고 있습니다. 소설은 현실은 대속함으로써 현실을 구원합니다. 이 구원은 은밀하고 투명해서 아무도 스스로 구원된 줄을 모를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다음 글인 ⟨플로베르와 본보기가 된 운명⟩으로 이어집니다.
[세트] 부바르와 페퀴셰 1~2 - 전2권
픽션들<픽션들>은 2백 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얇은 책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엄청난 상상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그 상상은 심심풀이 환상이 아니라 삶과 세상의 미궁에 대한 깊은 통찰과 독창적인 사유로 이루어진 상상이다. <픽션들>은 20세기 문학에서 돋보이는 큰 별이다.
실재란 무엇인가 - 양자물리학의 의미를 밝히는 끝없는 여정양자물리학에서 말하는 기이한 효과를 왜 일상에서는 보지 못할까? 저자는 간단한 질문에서 시작하는 한편, ‘실재’를 둘러싼 쟁점을 소개한다. 그 과정에서 ‘코펜하겐 해석’에 맞서 소신을 굽히지 않은 데이비드 봄, 휴 에버렛, 존 스튜어트 벨과 같은 물리학자들의 일화를 다룬다.
여기에 또 다른 열쇠가 있을지도 모른다. 스위프트가 인류의 열망을 조롱하려고 그 열망을 소인족과 유인원에게 부여했다면, 플로베르는 그로테스크한 두 인물에게 부여한다. 만약 세계사가 부바르와 페퀴셰의 역사라면, 그 세계사를 구성하는 모든 것은 우스꽝스럽고 무의미하다.
영원성의 역사 195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플로베르와 본보기가 된 운명] 이어서 얘기하면, 결국 플로베르는 문학사에서 "새로운 종의 첫 번째 아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종이란 다름아닌 '산문'이라는 장르입니다. 보르헤스의 설명에 따르면, 플로베르 이전에 문인이란 호메로스에서 베르길리우스, 베르길리우스에서 밀턴으로 이어지는 영웅시를 쓰는 시인이었습니다. 하지만 플로베르는 "운문은 무엇보다 고대의 문학의 형식"이라고 말하면서, 운문에서 율격의 조합은 고갈된 반면 산문은 그렇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플로베르는 스스로 "소설의 호메로스"가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17세기 밀턴이 이미 창조된 운문의 아담인 호메로스를 좇았다면, 플로베르에게는 좇아갈 산문의 아담이 없었고 다만 자신이 아담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가 주창한 일물일어설은 그런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보르헤스의 주장입니다. 보르헤스는 앞서 ⟨독자의 미신적인 윤리⟩에서 일물일어설을 비판했지만, 그건 엄밀히 말해서 플로베르의 곡진한 시도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플로베르의 진의를 미신처럼 추종한 추종자들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알다시피 플로베르는 산문에서 문체와 형식을 강조했습니다. 이전까지 산문에서는 문체와 형식보다 주제가 더 앞에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일례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플로베르의 작품들과 구분됩니다. 무엇보다 세르반테스의 소설에서는 세르반테스가 뒤로 물러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저자임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불완전한 번역본을 필사하고 있음을 주장하면서 작가로서 자신을 뒤로 물렸고, 보르헤스의 설명처럼 등장인물인 돈키호테와 산초 판자는 세르반테스보다 생생합니다. 하지만 플로베르에 이르러서 "플로베르의 주인공은 그 누구도 플로베르보다 생생하지 않"습니다. 플로베르는 무시받고자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무시받고자 하는 의지에 힘입어서 유명세를 얻게 된 작가라는 것이죠. 그렇게 플로베르는 오늘날 자신의 작품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분투하는, 스타일리쉬한 산문 작가로서 호메로스, 최초의 아담이 되었습니다. 산문가의 라이터스블록은 플로베르라는 원형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재미있고 보르헤스다운 해석입니다.
밀턴의 시는 천당과 지옥과 세상과 혼돈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일리아스⟫다. 반면에 플로베르는 이전의 모델을 모방하거나 극복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모든 사물은 각기 한 가지 방식으로 말할 수 있으며, 이런 방식을 찾는 것이 작가의 의무라고 여겼다.
영원성의 역사 20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이런 운명은 여전히 본보기가 되고 있다. 바이런의 운명이 낭만주의자들에게 그랬듯이 말이다. 플로베르의 기법을 모방한 작품이 ⟪늙은 부인들의 이야기⟫와 ⟪사촌 바질리오⟫이다. 플로베르의 운명은 신비스럽고 장려하고 다양하게 반복되었다. 말라르메의 운명에서(“세상 만물은 한 권의 책이 되기 위해 존재한다.”라는 말라르메의 플로베르의 신념을 구현하고 있다.), 무어의 운명에서, 헨리 제임스의 운명에서, ⟪율리시즈⟫를 직조한 복잡하고 무궁한 아일랜드인의 운명에서 반복되었다.
영원성의 역사 202-20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아르헨티나 작가와 전통] 20세기 초 '가우초 시'를 바라보는 당대 작가들의 '전통'을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글입니다. 이전 모임에서 다뤘던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에서도 말했지만, 가우초 시는 가우초가 아닌 이들에 의해서 집필됐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가우초 시가 특별해질 수 있는 이유라고 보르헤스는 줄곧 주장해왔습니다. 이 글에서도 마찬가진데요, 호세 에르난데스의 ⟪마르틴 피에로⟫에서는 가우초가 등장하지만 에르난데스는 애초에 가우초가 아니었기에 정확한 스페인어를 구사하지 않았고, 지역색에 천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마르틴 피에로⟫는 아르헨티나의 호메로스가 되지 않고 그만의 아르헨티나성을 보여줄 수 있었던 거라고 보르헤스는 말합니다. 문학에서 전통이란 단순히 지역색을 드러내고 그것을 전경화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전통은 당연한 것을 당연한 형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그것을 투명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늘 드는 예시이지만 드라마 속 광역수사대 형사들 입에서 터져나오는 "광수대"라는 단어는 사춘기 아들과 불화를 겪는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버카충"이라는 단어처럼 궁색하고 우스꽝스럽습니다. 기본적으로 혀에서 헛도는 말인 겁니다. 익숙한 척 다가갔다가 끝내 멀어지게 만드는 말인 것입니다(일찍이 사르트르는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유대인들이 '정확한' 불어만 쓰는 이유는 불어가 그들의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가장 지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원래는 괴테의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주장의 번안입니다). 하지만 이 말을 인용하는 사람들도 '가장 지역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저 한국 작품에서 호랑이가 나오고, 복고풍의 의복을 입은 특정 시기의 인물을 내세우거나, 그도 아니면 사극이면 모두 지역적인가요? 상투를 틀고 저고리를 입히고 버선을 신기고 갓을 쓴 사람을 내세우면 한국적인 것이 될까요? 그건 너무 안일한 해석입니다. 보르헤스의 말대로 우리가 미국적이거나 유럽적인 것을 집적적으로 내세워서 보여주더라도 그것이 한국적인 맥락에 있다면, 한국이 타문화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서 소화했는지 보여줬다는 점에서 '지역색으로서 한국적임'을 부러 드러내지 않고도 한국성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보르헤스는 고유한 아르헨티나, 즉 지역색에 빠질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르헨티나에서 과도하게 스페인을 덜어내려고 시도할 필요도 없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스페인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모든 서구 문화를 다루는 것이 아르헨티나의 힘이 될거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르헨티나는 서구 문화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서구 문화에 특별히 헌신해야 할 의무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유럽의 유대인들이 서구 문화에 살고 있으면서도 서구에 헌신해야 할 의무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혁신할 수 있었던 것처럼, 또, 영국에 사는 아일랜드 출신의 사상가들이 영국을 누리면서도 영국적인 미신에서 자유로웠기에 사상계를 혁신했던 것처럼요. 1954년에 출판된 수필집 ⟪아메리카의 원죄⟫에서 엑토르 무레나는 아르헨티나인이 유럽의 소재나 기법을 추구하는 것은 환상이거나 잘못된 생각이고, 아르헨티나는 유럽과 단절되어 본질적으로 혼자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재밌게도 이런 주장에서 일본을 '왜색'으로 배척해온 지난 역사가 떠올랐습니다. 지면상 여기서 다 얘기하기는 힘들지만, 한국이 식민지 역사를 겪었기에 그들의 만행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한국이 일본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정치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분열된 대상, 즉 일본과 북한과 다르기만 하면, 반대로 하기만 하면 스스로 한국적인 것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야말로 나이브합니다. 그런 주장은 물리적으로 연결돼 있을 뿐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현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인지적 부조화를 일으키게 돼 있습니다. 길게 설명할 것도 없습니다. 자신을 '무언가가 아닌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이 가장 후진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가 아니게 됨'으로써 바로 서는 게 아니라 스스로 '무언가가 됨'으로써 바로 서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저는 술담배를 하지 않고, 바람을 피지 않고, 지각을 안 해요'라고 자신을 소개한다면, 저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감도 못 잡을 것 같습니다.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소개할 때도 이 말은 똑같이 적용됩니다. '최소한 무언가는 아닌 것'으로, 금기로써 정의된 문화는 극도로 밋밋할 뿐 아니라 폭력을 내재한 문화입니다. 자아와 전통은 반사이익으로 채워지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고유한 문화와 전통이란, 그 나라가 영향받은 전통과 문화 모두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 안에 우연히 자리 잡은 것,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것, 그 모든 것이 저절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이질적인 뭔가가 들어와서 익숙하게 자리를 잡았다면 그건 이질적인 것을 우리 안에 녹여낼 수 있을 정도로 우리가 건강하다는 사실을 방증합니다. 그만큼 이쪽이 넓고 넉넉하다는 증거이며, 다른 것을 우리 안에 뿌리내리도록 토양과 햇빛과 물을 내어준 힘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때는 일본 사람들이 왜 이렇게 미국 문화를 동경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캠핑 문화를 가져와서 미국보다 더한 헤비듀티 문화로 만든 것이 웃겼습니다. 광산에서 금은 안 캐고 빈티리 리바이스 청바지 캐서, 왜 실 단위로 뜯어서 분석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진격의 거인⟫ 속 인물들은 유럽인이나 미국인의 외형과 이름을 가진 채 유상한 일본어를 구사합니다. 더 이전에 2000년에 만들어진 극장판 ⟨뱀파이어 헌터 D⟩는 지금 봐도 어떻게 가능한가 싶은 작화 퀄리티를 보여주는데, 심지어 이 애니메이션은 중세 유럽의 판타지 세계관을 배경으로 합니다. 예전에는 이상했지만 지금은 조금 이해할 것도 같습니다. 그건 좋은 것을 알아보는 안목과 취향, 거리낌없이 타문화를 모방하고 흡수할 수 있는 문화적 능력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격의 거인 크로니클거인의 침공으로 인해 인류를 지키는 커다란 벽이 무너진다. 그날부터 모든 거인을 없애리라 맹세하고 그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 시작한 엘런 예거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뱀파이어 헌터 D: 블러드러스트먼 미래, 마지막 전쟁 이후 마침내 뱀파이어들이 밤을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점차 소멸해가고, 일부 남은 뱀파이어들만이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한다. 사람들의 피해가 늘어감과 동시에 이러한 뱀파이어들을 잡기 위한 뱀파이어 헌터들이 탄생한다. 이 가운데 뱀파이어와 인간의 혼혈인 D는 뛰어난 사냥 솜씨와 출중한 외모, 그리고 알 수 없는 신비감으로 인해 사람들 입에 회자된다. 그러던 어느 날 존 엘본이라는 지주의 어여쁜 어린 딸, 샤를로트가 뱀파이어에게 납치된다. 존 엘본은 그녀를 되찾기 위해 최고의 헌터 D를 고용한다. 추적의 와중에 D는 샤를로트를 납치한 뱀하이에가 단 한번도 인간을 해친 적이 없는 귀족 뱀파이어 마이어 링크이며, 샤를로트를 태운 마이어의 마차가 오래 전 소멸한 것으로 알려진 뱀파이어 여왕 '카밀리아'의 성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제 헌터 D와 마이어, 그리고 샤를로트를 호위하려는 괴수들의 목숨을 건 대격전이 시작되는데...
헤비듀티계절이 바뀌고 패션계에 새로운 아이템이 등장하면, 그리고 그 아이템이 무엇이든 어딘가 튼튼하면서 기능적이라면, 홍보 문구에 ‘헤비듀티’라는 말이 붙곤 한다. 이 책은 패션을 넘어 일상에 '헤비듀티'라는 용어를 정착시킨 고바야시 야스히코가 1977년에 출간한 『헤비듀티의 책(ヘビ?デュ?ティ?の本)』의 복각판(2013년, 산과계곡사)을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헤비듀티의 유래를 시작으로 지은이가 전 세계를 취재하면서 고르고 고른 ‘진짜’들을 하나하나 소개
아메토라: 일본은 어떻게 아메리칸 스타일을 구원했는가미국 아이비리그 패션의 열성적인 모방자를 넘어서 언젠가부터 미국 및 글로벌 패션을 주도하게 된 현대 일본의 패션 역사를 밝혀 쓴 『아메토라: 일본은 어떻게 아메리칸 스타일을 구원했는가(Ametora: How Japan Saved American Style)』 2판이 출간되었다. 『아메토라』 2판에서 저자 W. 데이비드 막스(W. David Marx)는 그동안 진행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책의 본문을 소폭 수정할 뿐만 아니라, 새로 쓴 「후기」를 통해
게다가 문학 창조의 목적에 대한 이전의 모든 토론은, 계획과 의도가 무척 중요하다고 상정하는 잘못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례로 키플링의 경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키플링은 일생 동안 특정 정치적 이념에 따라서 작품을 썼습니다. 작품이 선전 수단이 되기를 바랐지만, 생애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작품의 진정한 본질을 작가가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스위프트를 예로 들었습니다. 스위프트는 ⟪걸리버 여행기⟫를 쓸 때 인류에 대한 고발장을 작성하고 싶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아동 도서를 남겼다고 말입니다. 플라톤은 시인이란 뮤즈의 대필자이며, 자석이 철 반지를 끌어당기듯이 자신의 의지와 목적에 반하도록 이끈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재차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전 세계가 우리의 유산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소재를 다룰 수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인이 되고자 아르헨티나적인 것에 매달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르헨티나인이라는 것은 타고난 운명이며,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아르헨티나인이기 때문입니다. 또 아르헨티나인이라는 것은 우리의 가장이고 가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예술 창조라는 의도적인 꿈에 우리를 내맡긴다면, 우리는 아르헨티나인이 될 것이며, 훌륭한 작가, 적어도 괜찮은 작가가 될 것입니다.
영원성의 역사 218-21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평론] 보르헤스가 얼마나 다방면에 섬세한 촉수를 드리우고 있었던지를 알 수 있는 글들입니다. 소설 뿐 아니라 수학, 철학, 역사, 영화에도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이 글에서는 시간, 사후세계, 자유 의지, 심지어는 영화 더빙에 대한 자신의 견해도 간략히 풀어놓고 있습니다. 이로써 1부 마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마트라에 예언의 대가가 되려는 응시자가 있었다. 시험관이 응시자에게 시험 합격 여부를 물었다. 응시자는 대답하기를 불합격하면······. 이제 이런 식의 대답이 무한히 계속되리라고 예감할 수 있다.
영원성의 역사 225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더빙을 옹호하는 사람치고 운명론이나 결정론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이러한 더빙이 발전의 불가피한 결과이며, 머지않아 우리는 더빙된 영화를 보느냐 아니면 영화를 아예 보지 않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전세계적인 영화의 쇠퇴를 고려하면, 두 번째 선택지도 가슴 아픈 일은 아니다. 최근의 쓰레기 같은 영화를 보면 영화가 일종의 불쾌한 낙원이라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관광은 실망의 예술"이라고 스티븐슨이 말한 바 있는데, 이런 정의는 영화에 해당될 뿐만 아니라, 안타깝지만 소위 삶이라고 부르는 뒤로 미룰 수도 없는 지속적인 활동에도 종종 해당된다.
영원성의 역사 24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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