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보르헤스 읽기] 『영원성의 역사』 1부 같이 읽어요

D-29
화제로 지정된 대화
[서사기법과 주술] '소설에서 인과 관계란 무엇이며, 어때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보르헤스의 답변이라고 할 만한 글입니다. 여기서 인과 관계가 소설 '안에서' 설득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소설은 현실에서 출발했지만 다시 현실로 오롯이 환원되지 않는 무언가를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소설의 인과 관계를 신경쓴다는 것은, 현실의 논리를 염두에 두면서도, 그것이 비껴나간 자리에서 마술적이고 주술적인 사건을 허용할 수도 있다는 새로운 논리와도 연결됩니다. 이 글에서 보르헤스가 말하고자 했던 바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마술적'이고 '주술적'이라는 표현도 언제나 의심해봐야 합니다. 잠시 샛길로 빠져 보겠습니다. 저는 '라틴아메리카'의 문학과 작가를 논할 때, 흔히들 최상급 수사처럼 상투적으로 언급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이 그닥 반갑지 않습니다. 지면상 길게 논하긴 어렵지만, 그건 '라틴' 아메리카라는 명칭만큼이나 특정 관점이 숨어있는 표현입니다. 이를테면, 마술사는 자기가 시연하는 마술을 당연한 현실이라고 믿어야만 관객에게 자기 행위를 오롯이 전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마술은 쇼의 형태를 빌리지만, 모든 마술이 쇼잉(showing)인 것은 아니며 두잉(doing)으로서 마술도 있단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는 '마술'이라는 별칭을 붙여야만 이해되는 사건이 당사자들에게는 당연한 현실이자 일상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우리도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이를테면 한국 사람들은 'soul'이 'spirit'과는 미묘하게 다른 '귀신(鬼神)'이라는 개념을 단번에 이해하며, 그것을 정초와 가을 한가운데서 의례로써 매번 받아들입니다. 이 귀신은 악의로 똘똘 뭉친 악마나 악령, 사령과는 뉘앙스가 다르며, 뭇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 보일 때도 악령과는 달리 '억울함'이나 '사연'이나 '내력'을 갖고 나타난다고 전해집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의례로써, 우리 안에 내재한 신화로써 이해하며, 마술이라고 별스럽게 부르지 않습니다. 좀더 익숙한 얘기도 있습니다. 한국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체기가 느껴지면, 손발가락 끄트머리로 피를 모아서 첫마디를 실로 친친 동여맨 뒤에 손발톱 윗부분을 바늘로 쿡 찔러 체증을 가시게 했습니다. 오늘날 과학이 아닌 과학주의를 광신하는 사람들은 이 방법이 전근대적인 민간요법이거나 과학적 근거가 전무한 낭설, 혹은 해봐야 플라시보의 한 사례라고 말합니다. 오랜 세월 우리에게 현실이었던 것을 한사코 부정하고서 말입니다(여기서 현실이란 현재가 아니라 귀신을 본 사람이 공공연히 존재했던 당시의 맥락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손따기'가 한의학의 응급 치료법인 지락(刺絡)법 중 하나이며, 그 정확한 기전이 어떤 것인지를 논증할 생각은 없습니다. 설령 그 기전이 밝혀지지 않았고 과학적으로 낭설임이 훗날 밝혀졌다고 해도,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겠습니다. 외려 중요한 것은 오늘의 현실이 아닌 당시의 현실에서 사람들이 손을 따서 체증을 가시게 했다는 것이고, 소설에서는 얼마든지 이 독특한 인과 관계를 바탕으로 상상을 얽어나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르헤스가 지나가듯 언급한 “무기연고(weaponsalve)”만큼이나 매력적인 인과 관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여기서 현실의 반박 불가능한 논리와 근거를 설득하려는 게 아니라, 무한히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소설에서'의 인과 관계를 논하고 있습니다. 이 인과 관계는 철저히 한 편의 소설 안에서 보호되고 통용되는 것이어서, 오늘날의 과학적 발견이 과거의 사실 관계를 논파하거나 단죄하는 수단이 되지 못합니다. 이를 보르헤스는 "주술은 인과성의 모순이 아니라 인과성의 왕관 혹은 악몽"이라고 말하는 한편, 소설에서 주술적인 인과성이야말로 유일하게 진실된 것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따라서 소설의 세계에서는 상처가 아니라 상처를 낸 칼에 연고를 바르고, 주술사의 팔뚝 밑에 상처를 내어 피를 흘려서 기우제를 지내고, 밀랍인형을 괴롭혀서 원수에게 위해를 가하며, 손끝을 실로 동여매어 바늘로 찔러서 트림을 짜내어도 됩니다. 어디 그뿐일까요. 반인반수의 신비로운 몸을 상상하면서 디오니소스적인 삶을 예찬하고, 지친 선원을 홀리는 무한히 매력적인 세이렌의 노래 속에서 미지를 항해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생각하는 몇 가지 예시입니다. 마르케즈의 장편 소설 ⟪사랑과 다른 악마들⟫이 배경으로 삼는 세계에서는 죽은 시신에서도 머리카락과 손톱이 계속해서 자라납니다. 이 마법같은 사건이 벌어지는 세계에서, 사제와 소녀의 사랑은 더욱 절절하고 사실적으로 느껴집니다. 만일 이를 두고 과학적 사실 관계를 지적하면서, '시신은 몸이 부패하면서 살점을 점차 소실하기 때문에 머리카락이나 손톱이 자라나는 듯 보였을 것'이라고 지적한다면, 그야말로 바보임을 자인하는 겁니다. 하나 더,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나온 8부작 드라마 ⟪백년의 고독⟫은 마르케스의 동명 소설이 원작입니다. 작중 초반에 우르슐라는 새끼 돼지가 어린 아이로 변하는 꿈을 꿉니다. 한국사람들은 이를 아주 쉽게 '태몽'으로 이해합니다만, 사실 태몽은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익숙지 않은 개념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술적 암시가 담긴 예지몽이라거나 한갓 악몽에 불과한 것이 우리에 이르러서는 자연스럽게 '태몽'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이렇듯 제가 좋아하는 소설의 세계에서, 산 자와 망자는 이승과 저승처럼 철저히 분리된 세계에 살지 않고 때론 공존하며, 그 경계는 흐려져 있습니다. 보르헤스도 적었듯, 켄타우로스가 인간의 몸과 짐슴의 몸이 합쳐진 존재이듯, 이렇게 주술과 현실의 접합부는 "떡갈나무 잎으로 만든 테"로 가려져 있습니다. 그 테를 우리는 소설의 인과 관계라고 부르기로 한 게 아닐까요.
사랑과 다른 악마들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1994년작. 광견병에 걸린 개에게 물린 후 악마에 씌었다는 오해를 받고 수녀원에 감금된 열두 살 소녀와 그녀에게 엑소시즘을 행하라는 명을 받은 서른여섯 살 신부의 금지된 사랑을 종교적 억압과 시대적 광기 속에 순수하고 아름답게 그려냈다.
백년의 고독 1중남미 문학과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 작품은 첫 출간하자마자 세계적인 작품이 되었고, 마르케스에게 노벨상을 안겨주었다. 민음사에서 나온 번역판은 아르헨티나에서 처음 출판된 판본(1967)을 바탕으로 스페인어 전공자인 조구호 씨가 완역한 것이다.
이처럼 터무니없고 우스운 예를 모두 열거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내가 제시한 예만으로도 주술은 인과성의 모순이 아니라 인과성의 왕관 혹은 악몽이라는 점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기적은 천문학자의 세계에서 그렇듯이 이 세계에서도 낯설지 않다. 모든 자연법칙이 이 세계를 지배하며, 상상의 법칙 또한 이 세계를 지배한다. 미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탄환과 죽음 사이에만 필연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밀랍 인형을 학대한다거나 거울이 깨진다거나 소금을 엎지른다거나 식탁에 열세 명이 둘러앉는 것과도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영원성의 역사 12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폴 그루삭] 폴 그루삭(Paul-François Groussac)은 프랑스 태생의 아르헨티나 작가이자 평론가이자, 국립도서관 관장이었습니다. 1884년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아르헨티나 공화국의 수도가 되고 자체 관할권을 갖게 된 이듬해 1885년에 폴 그루삭은 국립도서관 관장으로 취임했고, 44년 뒤 죽을 때까지 자리를 유지했습니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도서관 문화를 크게 증진했던 인물로 일컬어집니다. 취임 당시 3만 5천 권에 불과했던 장서량은 그가 사망한 1929년에 이르러서는 26만 권이 넘었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는 서가의 운영 체계를 마련하고 진귀한 필사본 콜렉션을 구축하는 한편, 당대의 도서관 발전사를 분석한 책도 집필했습니다. 보르헤스는 폴 그루삭이 죽었을 당시 부고기사를 썼을 정도로 생전 그의 업적을 높이 샀습니다. 이 글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보르헤스와 폴 그루삭은 전기적으로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폴 그루삭의 44년 재임에는 비할 바가 되지 않지만, 보르헤스 또한 근 2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국립도서관 관장 자리를 유지하면서 도서관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재임 기간 동안 정치적으로 격변을 겪었고 정권이 바뀌어 이해 관계가 달라지면서 위치를 위협받기도 했지만 꾸준히 도서관의 가치와 문화를 전파하는 데 힘 썼으며, 그래서인지 둘 다 시력이 크게 저하되어서는 임기가 끝날 무렵에는 완전히 실명했다는 점도 같습니다. 단, 이 글에서도 보듯, 폴 그루삭이 생전 작가로서 보여준 스타일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평론가로서 폴 그루삭은 워낙 신랄하게 말하고 상대의 기를 죽이기까지 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편, 오늘날 아르헨티나의 신규 국립도서관이 건립된 역사는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수십년간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다가 1992년에 이르러서 완공되었다는 것인데, 중간에 포기될 뻔한 사업이 좌초되지 않고 성사되었다는 것을 보면, 오늘날 잊혀져가는 우리 주변의 도서관이 떠오르면서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어느 나라이고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따라서 작가가 탄압받고 도서관과 그를 둘러싼 문화가 위축되는 것은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르헨티나에서는 '더 나은 도서관 문화를 만들고 싶다'는 그 최초의 의지가 끊기지 않고 결국 시간 속에서 자신을 구현해내기에 이르렀던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진정 제가 부러워하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독자보다 구매자를, 도서관이라는 역사적 가치보다는 방문객 숫자에 집착하는 이즈음의 현실은 야속하기만 합니다. 이런 현실이 개선되기 위해서는 책은 상품의 외형을 띨 뿐 상품의 논리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결국 미래 세대를 위한 정신적 공공재가 되어야 한다는 합의 위에서 어떤 논의가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 처음 듣는 이야기일본의 대표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가 던지는 책 이야기. 종이책과 전자책, 도서관과 사서, 학교 교육, 출판계, 독립서점 등 책을 둘러싼 이제껏 접하지 못했던 이야깃거리를 총망라한다. 깊은 성찰을 토대로 한 선생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즐거운 화두가 된다.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 소설을 읽을 수 없는 이유는 절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상상력이 없어서, 열정이 없어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영원성의 역사 12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지옥의 존속] 먼저, 보르헤스는 지옥에 대한 견해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맥이 빠지게 된 이유를 설명합니다. 유황불과 죄인의 비명으로 가득한 지옥의 이미지는 저 엄혹했던 중세 시대의 종교 재판을 연상케 한다는 겁니다. 2세기 카르타고 출신의 테르툴리아누스는 지옥의 영벌이 "가장 거창한 구경거리"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흔히들 이런 지옥을 묘사할 때, 그 고통이 '영원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보르헤스에게 "영원이라는 속성은 소름끼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성으로서 '불멸'이란 인간에게는 귀속될 수 없는 속성이며, 오직 하느님의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지옥의 영벌은 악을 영원하게 만들기 때문에 언어도단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인류는 지옥의 고통이 '영원함'을 옹호하려고 갖은 논리를 만들어냈다고, 보르헤스는 설명합니다. 고통의 영원성으로 인해 교리가 강화되고, 하느님이라는 존재의 무한함이 증거되며, 나아가 우리의 자유의지가 그 영원함을 원한다는 논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보르헤스는 그것이 반종교적인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옥은 현 체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징벌 공간으로 상상되었습니다. 질서를 지키지 않았을 시에 가게 될 공간을 최대한 엄혹하게 묘사함으로써 현 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공고히 해야 할 체제란 종교적 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종교에 대한 권위가 점차 약화되면서, 지옥에 대한 상상력도 점차 바뀌게 되었습니다. 점차 지옥은 상상의 종교적 구금 시설이 아닌, 현실의 한 귀퉁이로 자리를 옮겨옵니다. 영화 ⟪무간도⟫의 지옥을 보십시오. 결말부에서 인물은 살아서 고통받는 현실의 지옥을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자연히 오늘의 지옥의 모습은 어떤지 궁리해보게 됩니다. 이 글 뒤에 덧붙인 [후기]에 대한 제 작은 감상을 적어 보겠습니다. 얼마 전, 직장인이 많은 역 인근의 대로변을 특이하게 개조한 1톤 포터가 서행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트럭 적재함에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운전석 위쪽 부분에는 확성기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조수석에는 한 중년 남성이 마이크로 자기 정치적 의견을 토로하고 있었는데, 그는 정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자기가 알고 있는 진짜 진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 주장인즉, 사람들이 너무 모르고 있고, 속고 있으며, 자신이 아는 진짜 진실을 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은 한편으로는 괴기스럽고, 그 방식은 폭력적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진실 안에서는 용기있는 진실의 담지자였겠지만, 대로변을 지나던 직장인 중 하나였던 저에겐 자폐적인 진실에 피폭된 환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진짜 현실'을 말했고, 스스로 계몽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그 남자는 '나는 진짜 진실을 알고 꿈에서 깨어났다'는 또 하나의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또 하나의 꿈에서 깨어나면 그는 무엇이 될지 궁금해졌습니다. 스스로 계몽되었다는 꿈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어쩜 현실이야말로 또 하나의 지옥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스스로 계몽되었다고 믿는 그 꿈 역시도 행복한 지옥이긴 매한가지일 겁니다.
무간도홍콩 경찰의 비밀 요원인 진영인(양조위). 경찰학교에서 훈련을 받다가 발탁된 그는 범죄 조직 삼합회에 잠입하여 10년째 조직원을 위장한 스파이로 살아가고 있다. 전과 8범에 2번의 형기를 치른 완벽한 범죄자가 되어 있는 그는 현재 보스 한침이 가장 신임하는 심복이기도 하다. 삼합회의 숨은 조직원 유건명(유덕화). 18살 때부터 경찰에 잠입해 스파이로 활동해온 그는 현재 경찰 내에서 가장 뛰어난 강력반 요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경찰로서의 경력이 벌써 10년째에 이르는 그는 이제 그만 조직원으로서의 신분을 버리고 싶어한다.
"고통은 무한해야 한다. 왜냐하면 무한한 존재인 하느님의 위엄을 해치는 죄가 무한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지나치게 많은 것을 증명하고 있어서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가벼운 죄는 없으며 그 어떤 죄도 용서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하나 덧붙이자면 이 주장은 학문적 경박성의 완벽한 사례이며, 속임수는 '무한한'이라는 단어의 다의성에 있다. 이 단어를 주(主)에 적용할 때는 '무조건'을 의미한다. 그리고 내가 이해한 바로 이 단어를 죄에 적용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게다가 죄가 하나라고 할지라도 이는 무한한 존재인 하느님에 대한 폭거이므로 무한하다는 주장은 하느님이 성스럽기 때문에 성스럽다거나 호랑이가 낸 상처는 반드시 줄무늬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영원성의 역사 13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단순한 정보를 나열한 이런 글에서는 꿈 이야기도 할 수 있다. 나는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꿈을 깬 곳은 낯선 방이었다.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한 줄기 빛이 들어와 철제 침대 발치와 딱딱한 의자와 닫힌 방문과 창문과 빈 탁자를 비추고 있었다. 나는 두려운 생각이 들어 '여기가 어디지?' 하고 생각하다가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누구지?'라고 생각했지만 이 역시 알 수 없었다. 두려움이 증폭됐다. 그리고 이런 암담한 깨어남이 바로 지옥이고, 운명을 알 수 없는 이런 깨어남이 나의 영원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진짜로 깨어났다. 온몸을 떨면서.
영원성의 역사 140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호메로스 서사시의 번역본] 번역에 대한 보르헤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글입니다. 흔히들 번역이라고 하면 원문의 언어를 그저 다른 언어로 옮긴 것이며, 원문에 비해 열등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한 언어로 쓰여진 작품이 다른 언어로 옮겨지기 위해서는 어떤 '판단'과 '필요'가 요구되는데, 이러한 판단과 필요성이 언급되는 작품은 이미 일정 부분 검증된 책이라는 말도 되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 책이나 번역되지는 않으며, 번역이야말로 '번역되어야 할 작품'에 대한 기준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부차적인 행위가 아니라 이미 주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번역은 크든 작든 모국어라는 감옥에서 빠져나와 있습니다. 본문에서 보르헤스가 스페인어로 쓰인 ⟪돈키호테⟫를 언급한 것에서 보듯, 모국어로 쓰인 걸출한 작품은 오히려 아무 변화도 없는 것입니다. 반면 외국어로 쓰인 번역본은 모국어가 아니기에 끊임없이 변화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시대에 따라서 달리 번역됩니다. 끊임없이 열려 있다고 할 수 있죠. 그리스어를 모르는 모든 이에게 ⟪오디세이아⟫가 그러하듯이요. 한편, 보르헤스에게 번역은 '결정본'을 맹종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텍스트를 섬세하게 읽는 방식이며, 지금 '여기'의 현실을 과거에 반영하는 수단입니다. 보르헤스가 이 글을 썼던 시점으로부터 지금은 무려 한 세기 가까이 흘렀지만, 이 글은 오늘에 와서 더욱 풍성한 논의를 이끌어낼 최신의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이즈음도 번역 얘기만 하면 오역 논란이 끊이질 않고, 그에 뒤따라서 어김없이 원전에 대비되는 번역의 열등함이 논의되고, 역설적이게도 '우리 것'에 천착하면서 폐쇄적이고 자조적인 의견이 터져나오며, '조악한 번역본을 보지 않고 원서를 찾아봤다'는 말이 자기 학식이나 어학 능력을 은근히 뽐내는 포즈가 되고 있는 것은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보르헤스의 말대로, 번역이 열등하다고 믿는 것은 미신이며 어설픈 경험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오히려 번역이야말로 "언어적인 것의 무수한 반향"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원문이 깔고 앉은 텍스트라는 본질에 더욱 가까이 다가섭니다. 보르헤스 역시 무수한 번역본 사이에서 우뚝 선 '결정본'이라는 것은 "종교적 확신"일 뿐이며, 애초에 텍스트는 반향적인 것이기에, 늘상 말해온 '영원의 책'의 관점에선, 원본이든 번역본이든 모두 불완전한 초고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호메로스의 서사시 번역본이 그토록 분분한 이유는 원본이 방대해서도 아니며, 번역자마다 역량차가 있어서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보다는 "호메로스와 관련된 것 그리고 언어와 관련된 것"을 파악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는 일찍이 보르헤스가 단편 소설에서 삐에르 메나르라는 저자를 앞세워 말했던 것처럼, 시대가 다르고 저자(번역자)가 다르고, 국적이 다르고, 이 모든 것을 둘러싼 상황이 다르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원본에 담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시대와 사람들"을 번역하려고 할 때 모두 불충분하며, 다만 번역자들은 그 나름으로 원본의 '의도'를 파하악하려고 할 뿐인데 그렇게 본다면 모든 번역은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란 말일까요? 애매모호하긴 하지만 보르헤스는 이 '번역은 본디 불가능하다'와 '모든 번역이 가능하다' 사이에서 "버틀러의 차분한 번역"에 수줍게 손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픽션들'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권. 기호학, 해체주의, 후기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20세기 주요 현대 사상을 견인한 선구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대표작. 1941년 발표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과 1944년 발표한 '기교들'에 수록된 열일곱 편의 단편 소설을 모은 소설집으로, 일생 동안 단 한 편의 장편 소설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단편 전문 작가 보르헤스의 문학적 정수를 보여 준다.
번역본이 열등하다는 미신(이탈리아의 유명한 금언에서 유래한 말이다.)은 어설픈 경험에서 연유한 것이다. 훌륭한 텍스트 치고 불변하고 완벽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텍스트는 없다. 다만 여기에는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수없이 들여다봐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흄은 인과 관계라는 일상적인 관념과 연속을 동일한 것으로 여겼다. 좋은 영화는 다시 보면 더 좋게 보이듯이, 우리는 반복에 불과한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명한 책은 사실 첫 독서가 재독이다. 이미 그 책의 내용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펼쳐 보기 때문이다. "고전은 여러 번 읽어라."라는 격언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한 것이다.
영원성의 역사 142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아킬레우스와 거북의 영원한 경주] 이번에는 '아킬레우스의 거북이'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제논이 제기한 역설 문제를 살펴봅니다. 해당 문제는 너무 유명해서 따로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역사적으로 이 역설 문제를 둘러싼 수많은 논박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궤변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이 문제가 이끌어낸 논의는 매우 풍성하며, 일견 간단해 보이는 이 문제를 섬세하게 논파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당대의 내로라 하는 천재들이 이 역설 문제에 뛰어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또 다른 크고 작은 오류를 범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고등학교 수학에서 흔히 '무한', '극한'으로 간단히 설명하는 개념도 이 문제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실무한(potential infinity)과 가무한(actual infinity) 개념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해에 도움이 되는 배경 설명을 좀 하자면, 제논은 자신의 스승인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역설 문제를 제기했다고 전해집니다. 간단히 말하면, 파르메니데스는 후일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영향을 미친 학자로서 '사유하는 것은 존재와 동일한 것'이라고 보았으며,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는 없다"라는 주장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는 일견 당연한 동어반복처럼 읽히지만, 여기서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있음'과 '없음'은 '존재', 즉 '일자(一者)’에 대한 논의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는 이후 서구 철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 '부동'하며, '자기동일적'일 뿐 아니라, '충만한 구(球)’의 특성을 지닌다고 일컬어집니다. 제논의 역설은 바로 이 '일자'를 증명하기 위해서 수학적인 귀류법을 활용한 것으로, 일종의 반대 명제인 '운동하며 끊임없이 나아가는 존재'로서 아킬레우스의 거북이, 날아가는 화살 따위의 역설 문제를 내세웠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좀더 설명해보면, 우리에게는 ⟪자유론⟫으로 더 유명한 존 스튜어트 밀은 1843년 ⟪논리학체계⟫라는 책에서 제논의 역설을 논박한 적이 있습니다. 밀은 제논이 전제에서는 '영원'을 '무한히 긴 시간을 의미한다'라고 말해놓고, 결론에서는 '유한한 시간을 무한히 분할한다는 의미'로 썼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를 가무한과 실무한으로 설명하면, 자연수의 수열(1,2,3··· n, ···)처럼 생성하는 무한을 전제해놓고서는 '무한한 분할이 유한한 전체를 이루는' 실무한의 예시를 들었다는 겁니다. 베르그송 역시 제논의 역설을 반박하면서, "공간만이 자의적인 해체와 재구성 방식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망각"했으며, 그리하여 운동은 불가분함에도 "운동과 공간을 혼동"해서 논증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나아가 보르헤스는 버틀런트 러셀을 들어, '부분은 전체보다 작지 않음'이 어떻게 증명되고 있는지를 살핀 후, 이 역시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다른 견해도 소개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제논의 역설이 옳고 그른지 하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논의 역설을 논박하는 과정에서 '무한'과 '연속성'에 대한 우리의 사유가 증대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글 말미의 두 문단은 제 입장에서는 의뭉스러움으로 가득합니다. 보르헤스는 '무한'이라는 개념이 오늘날 '현실로서 시간과 공간'에 위협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무한이 현실을 위협하는 위험한 개념이기 때문에 이를 논하는 사람은 목숨을 위협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보르헤스는 말미에 오늘날 '제논의 역설'이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단서를 붙이고 있습니다. "단 우리가 시간과 공간의 관념성을 받아들일 때는 예외"라는 것입니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결국 우리는 제논의 역설을 잠재우기 위해 관념론을 받아들여야 하며, "지각된 것의 구체적인 증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인즉, 공간과 시간은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인간의 인식에 의해 구성된 관념이라는 철학적 입장을 보르헤스는 지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훗날 공교롭게도 보르헤스가 쓴 단편 ⟨파란 호랑이들⟩에는 무한히 쪼개어지며, 증식되는 것처럼 보이는 돌멩이(calculus)가 나옵니다. 그 단편을 읽어보면 이 글이 좀더 이해하기 수월하리라고 봅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보르헤스의 소설은 때로 한 페이지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짧은분량에 현실과 환상을 뒤섞고 시간 또는 존재와 같은 우주론적 주제를 형상화함으로써 고도로 지적인 특성을 보인다.
달리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서 첨언합니다. 중간 부분에서, 존 스튜어트 밀이 제논의 역설을 지적한 내용을 두고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느끼기에 스튜어트 밀의 야심찬 논박은 역설의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 역설의 "문제는 상상조차 쉽지 않다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는 원근법적으로 작아질 뿐 아니라 극미한 장소를 점유해야 하기 때문에 작아져야 한다는 것이 보르헤스의 설명입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했을 때 보르헤스의 이러한 견해 역시 모호한 부분이 있습니다. 수학적인 점과 존재를 뒤섞어서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학적인 점은 공간을 점유하지 않지만 위치는 특정할 수 있는 가상적이고 관념적인 대상인데, 그것을 너무 쉽게 공간 속의 '한 존재'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를 존재로 볼 것인지, 수학적인 점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서 이 문제는 또 달라지게 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물론 보르헤스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수학적인 점과 존재를 혼동하는 오류를 숨겨놓았을 수도 있습니다. 글 전체의 흐름으로 봤을 때도, 역설 문제는 오류에 오류를 거듭하면서 그와 관련된 논의를 풍성하게 이끌어냈으니까요.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달리 오류는 한갓 흠결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논의를 열고 대화에 동참하게 하는 우아한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윌트 휘트먼에 관한 노트] 앞서 ⟨또 다른 휘트먼⟩에서 보르헤스는 시인 휘트먼이 미국을 집약한 상징이라고 치켜올린 바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도 휘트먼에 대한 애정을 가감없이 드러냅니다. 시인으로서 휘트먼의 위대함이란, "지적 유기체"로서 '풀잎' 같은 인물로 자신을 창조해낸 것이라고 보르헤스는 적고 있습니다. 즉 휘트먼은 비범해지기보다는 범상해지려고 노력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위대해졌다는 것인데요, 윌리엄 베크포드나 폴 발레리가 자신의 작품 안에서 내세운 낭만적인 영웅과는 달리, 휘트먼은 시 속에서 또 다른 등장인물로서 '휘트먼'을 창조해냈으며, 뭇사람과 자신의 차이를 강조하기보다는 모든 이와 같아지려고 노력했다는 것이죠. 발자크는 "천재는 모든 사람과 비슷하지만 천재와 비슷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한 적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서 영감을 얻을 정도로 범상함에 매달리면서도 정작 그란 사람은 대체가 불가능해지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발자크의 천재상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이 아마 휘트먼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생각은 굉장한 자유를 줍니다. 생각해보세요. 남들과 한사코 다르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은 남들처럼 '다름'에만 집착한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로는 지극히 평범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 몰개성하게 개성만 추구한다고도 표현합니다.) 반면, 휘트먼은 "다른 모든 인간들과 비슷해지기를"(167쪽) 원합니다. 이런 면에서 휘트먼의 ⟪풀잎⟫은 모든 존재가 하나의 통일된 신성의 일부라는 범신론과도 이어지며, 모든 것이 본디 하나이며 각각은 모든 것이라는 생각으로 흘러갑니다. 이때 헤라이클레이토스의 67번째 구절에서도 보듯, 모순되는 것은 한데 있어도 불편하지 않습니다(“신은 낮이자 밤이고, 겨울이자 여름이며, 전쟁이자 평화이고, 풍족함이자 배고픔이라”). 범신론적인 세계관 안에서 보르헤스는 휘트먼과 그리스 철학자 플로티노스, 페르시아의 신비주의자 아타르의 사례를 연결짓고 있는 것인데요, 제가 보기에 이러한 사고관은 훗날 "모든 각도에서 본 지구의 모든 지점들이 뒤섞이지 않고 있는 곳"인 알레프로 이어지는 게 아닌가 합니다. 과연 휘트먼은 알레프적인 영웅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즈음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범상함 없이는 비범함도 불가능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인플루언서가 넘칩니다. 그러나 인플루언서는 '유명한 걸로 유명한 사람'이라는 우스개에는 날카로운 진실이 담겨 있다는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분명 오늘날 유명한 사람은 많아졌지만, 꼭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비범함이 늘어났는지는 의문입니다. 모두 몰개성하게 개성을 탐닉하는 곳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다들 밋밋하게 보입니다. 격자형으로 구획된 인스타그램의 추천 피드 속 화려함처럼요. 인스타그램 광고나 틱톡의 영상들 자체는 매우 흥미롭고 독창적인 것 같지만, 다 보고 나면 공허하고 기분이 옹졸해지는 걸 피할 길이 없습니다. 피상적인 차별점만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인플루언서 마케팅은 필연적으로 '자아 장사'로 이어지곤 합니다. 자아 장사꾼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첫째라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그런 조언은 추구해야 할 결론을 선취해서 전제로 삼으라고 권하고 있기에 애초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 조언은 '나'를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인생이며, '나'를 모르고 '인생'을 모르기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은폐하기에 유해하기까지 합니다. 제가 봤을 때 자신을 알아간다고 했을 때의 '앎'은 단언하고 결론내리는 앎이 아닙니다. 결론을 충분히 유예하면서 시간을 쏟는 그 행위 자체에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 관한 한, 살아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으며, 이를 보르헤스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더 용인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원칙을 도서관에서 발췌하는 것이 아니라, 생생한 경험에 적용하는 경우에서다.” 보르헤스가 말하는 휘트먼이 가장 좋은 예입니다. 그는 스스로 범상해짐으로써 그렇게 했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헨리 밀러의 ⟪그리스 기행: 마루시의 거상⟫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리스 기행 : 마루시의 거상은행나무 위대한 생각 12권. 영미문학사상 가장 문제적인 작가 헨리 밀러가 남긴 기행문학. 헨리 밀러는 소설 작품들 외에도 서구 문명, 특히 미국 문화를 신랄히 비판한 무수한 산문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저작이 <그리스 기행>이다.
공고라는 중요한 책은 실제로 중요한 주제를 담지 않은 책임을 간파한 첫 번째 사람이다.
영원성의 역사 164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카침발리스가 풀어내고 있는 이야기는 하찮은 에피소드로 시작해서 미완성 소설로 끝나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가 미완성이 되는 것은 기운 또는 공간 또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공교롭게도 그가 졸음이 와서 한숨 자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그의 다른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토마스 만의 끈기와 솜씨가 없는 나로서는 문자화하기가 불가능한 작품이었는데, 며칠 동안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소재가 아주 특이한 탓은 아니었다. 우리 앞에 넓게 펼쳐져 있는 바다를 그가 자유로이 사용해서 아주 굉장한 곁가지를 만들어내고, 가장 하잘것없는 부분에 꼼꼼히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야기를 하는 재주에서 듣는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몹시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끝나기 한참 전에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자신의 상념 속에 빠져버린다고 항상 생각했다. 내가 들은 최고의 이야기들은 요점이 없었고, 최고의 책은 도무지 플롯이 기억나지 않으며, 최고의 사람들과는 어떤 결실도 맺지 못한다. 몇 번이나 경험한 일인데도 내가 아는 몇몇 사람들의 경우 인사를 나누고 몇 분도 안 돼서 함께 끝없는 항해에 나서게 되는 것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감정과 궤적 면에서 그 여행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뼈가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듯 노련한 몽상가가 자연스레 빠져들어 가는 깊은 꿈뿐이다. 이처럼 감각을 초월하는 경험을 한 뒤 나는 끊어진 가닥을 다시 잡으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되살려낼 때가 자주 있었다. 하지만 그 반짝거리는 지점과 본토 사이에는 항상 도저히 지나갈 수 없는 허공이 있었다. 예술가의 마법이 포탄 구덩이와 수렁과 철망의 방해를 받은 일종의 무인 지대였다.
그리스 기행 : 마루시의 거상 105쪽, 헨리 밀러 지음, 김승욱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거북의 변모] 앞서 살펴본 ⟨아킬레우스와 거북의 영원한 경주⟩의 보론이라고 할 만한 글입니다. 이 글에서는 제논의 역설에서 출발한 아킬레우스와 거북이가 역사 속에서 사상가들에게 어떻게 변주되어왔는지를 살펴봅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을 논한다는 자체가 이미 역설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 보르헤스의 글 곳곳에서 은근히 드러납니다. 따라서 무한에 관한 논의는 변주되어 온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경주처럼 끝이 없고, 또 끝이 없을 것입니다. 앞서 한번 언급한 적이 있듯이, 제논의 역설은 스승이었던 파르메니데스의 ‘일자(一者)’를 귀류법적으로 논증하기 위해서 고안해낸 것이었습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은 플라톤에 이르러서 이데아론에 영향을 미쳤는데, 훗날 아리스토텔레스는 제논의 명제를 논박함으로써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우회적으로 반박합니다. 무한 소급을 활용한 것으로서, 훗날 '제3인간 논증'으로도 일컬어진다고 합니다. 먼저 개별적인 두 인간에게서 '인류'라는 영원한 원형을 발견해냅니다. 그런 뒤에 이 인류와 또 다른 개별적인 인간 한 명 사이에서 일반적인 속성을 도출해내는 것입니다. 이를 제3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면, 비슷한 방식으로 거듭 제4원형, 제5원형 같은 일련의 원형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입니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엘레아의 제논은 운동과 수에 반하여 무한 소급에 호소했고, 제논의 역설을 반박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에 반하여 무한 소급에 호소했다.”(179쪽) 엘레아의 제논은 운동과 수에 반하여 무한 소급에 호소해서 일자론에 힘을 보태었고, 여기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증거되는데, 다시 아리스토텔레스가 똑같은 무한 소급에 호소하여 이데아론을 반박한 것입니다. 이 꼬리에 꼬리를 문 세계의 뱀 우로보로스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그만의 논의를 확장해 나갑니다. 보르헤스의 글에서는 제논의 역설을 제 나름으로 변모시킨 여러 사상가들의 사례가 언급되고 있는데, 무언가를 정의하는 언어를 다시 정의하는 식으로 논의가 무한히 지연되고 있습니다. 특정 단어의 뜻을 몰라서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다가 그 정의에서 다시 모르는 단어가 나와서 끊임없이 사전을 순환하며 의미가 지연되는 '사전 순환', '사전 재귀'의 오류 같은 것이 반복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소개된 루이스 캐럴의 삼단논법에서 제2전제와 결론 사이에서 '주기적인 간극'을 끼워넣는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말미에서는 보르헤스는 다양한 변모 사례를 살펴보다가, '말의 배열'과 '우주'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세계는 의지가 만든 것"을 인용하면서 관념론에 근거하여 "예술은 항상 눈에 보이는 비현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앞서 역설에 관한 논의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동참한다는 것은 "세계가 환영 같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글의 마지막 한 문단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마치 놀란 감독이 ⟪메멘토⟫와 ⟪인셉션⟫의 마지막 장면을 만들면서 염두에 뒀을 것만 같은 구절입니다. 결국 이 영화들이 말하는 바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것이며, 이 두 영화는 근원적으로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을 혼동해선 안 됩니다. 환상은 언제나 환상을 꾸는 주체를 상정하며, 그 주체는 현실에 발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환상이라는 단어 자체가 현실이라는 강한 콘트라스트 없이는 성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환상이 현실로 범람한다'는 상투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언제나 현실에 아부하고,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에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은 가상이 아닌 현실의 중요성입니다.
메멘토전직 보험 수사관이었던 레너드에게 기억이란 없다. 자신의 아내가 강간당하고 살해되던 날의 충격으로 기억을 10분 이상 지속시키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이름이 레너드 셸비 라는 것과 아내가 강간당하고 살해당했다는 것, 그리고 범인은 존 G 라는 것이 전부. 레너드는 자신의 가정을 파탄 낸 범인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 메모와 문신을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진실에 다가갈수록 자신의 기억, 주위 사람들에 대한 의심이 갈수록 커져만 가는데...
인셉션타인의 꿈에 들어가 생각을 훔치는 특수 보안요원 코브. 그를 이용해 라이벌 기업의 정보를 빼내고자 하는 사이토는 코브에게 생각을 훔치는 것이 아닌, 생각을 심는 ‘인셉션’ 작전을 제안한다. 성공 조건으로 국제적인 수배자가 되어있는 코브의 신분을 바꿔주겠다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고,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최강의 팀을 구성, 표적인 피셔에게 접근해서 ‘인셉션’ 작전을 실행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건들과 마주하게 되는데… 꿈 VS 현실! 시간, 규칙, 타이밍 모든 것이 완벽해야만 하는, 단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는 ‘인셉션’ 작전이 시작된다!
노발리스는 기억할 만한 말을 남겼다. “주술사의 최고봉은 자신에게 주술을 걸어서 자기가 만든 환영마저도 저절로 출현했다고 여기는 주술사일 텐데, 그게 바로 우리가 아닐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리(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온전한 신성)는 세계를 꿈꾼다. 우리는 이 세계가 공간적으로는 굳건하고 신비하고 가시적이고 편재적이기를 꿈꾸고, 시간적으로는 견고하기를 꿈꾸지만, 세계라는 건축물에 비이성이라는 영원한 실금이 나 있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기에 우리의 꿈이 거짓임을 안다.
영원성의 역사 186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한편, 루이스 캐럴의 삼단논법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a), b), c) 부분의 전제와 결론 부분 번역이 좀 이상해서 원문을 찾아보니 좀 달랐습니다. 아마 이렇게 옮기는 편이 더 명료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제시해봅니다. a) 제삼의 것과 동일한 두 가지는 서로 동일하다. b) 이 삼각형의 두 변은 MN으로 동일하다. z) 이 삼각형의 두 변은 서로 동일하다. 이 삼단논법을 제 나름으로 이해한 대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처음 보면 조금 이상해 보일 겁니다. 왜냐하면 전제 a가 필요 없이도, 두 번째 전제 b만으로 z라는 결론이 도출될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삼각형의 두 변이 MN으로 동일하면 이 삼각형의 두 변은 동일하다'라는 당연한 동어반복처럼 들리는 겁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제논의 역설이 바탕하고 있는 논리란, 무한히 면밀해 지는 데 그 핵심이 있습니다. a라는 전제는 '서로'와 '동일하다'라는 일견 당연해 보이는 부사어와 서술어의 의미가 논리적으로 무엇인지 규명해주기에 필수적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반에 A라는 학생과 B라는 학생이 있는 상황입니다. a) 수학을 잘하는 사람들은 서로 친구다. b) A 학생은 수학을 잘하고, B 학생도 수학을 잘한다. z) 결론적으로, A와 B는 친구다. 여기서 a라는 대전제가 없으면 b만으로는 z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친구가 무엇인지에 대한 전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전제 b와 z사이를 무한히 벌림으로써 결론을 지연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예시는 아닐 수 있으며,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니 참고만 바랍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부바르와 페퀴셰에 대한 옹호] 플로베르의 미완성 소설이자 유작인 ⟪부바르와 페퀴셰⟫의 가치를 보르헤스 나름으로 옹호하는 글입니다. 이 소설은 플로베르가 죽은 이듬해인 1881년에 출간되었는데,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백과사전'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구상 자체는 약 10년 전부터 해왔으나, 글쓰기가 고통스러워서 집필과 중단과 재개를 반복했지만 끝끝내 완성에 이르지는 못한 소설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부바르와 페퀴셰라는 두 필경사가 농사가 실패한 원일을 알아보려고 책을 펼쳤다가, 책에 빠져서 책으로만 세상을 배우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보르헤스의 글에서 보듯, 당시 반응은 석연치 않았습니다. 소설은 두 바보의 무용한 노력으로 점철돼 있으며, 그것은 다름 아닌 플로베르의 노력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플로베르는 이 소설을 위해서 농학, 교육학, 의학, 물리학, 형이상학을 다룬 1500여 편의 연구물을 읽었다고 합니다. 플로베르의 이전 작품들에서 보듯, 그는 세상에 대한 호오가 뚜렷한 사람이었고, 자신이 싫어하고 혐오하는 인간형을 조롱하고 멸시하려고 등장인물로 내세웠지만, 끝끝내 그 혐오해 마지않는 인간 유형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에 이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부바르와 페퀴셰⟫도 마찬가지고요. 보르헤스는 이를 '꿈꾸는 자가 현재 자기가 꿈을 꾸고 있으며, 자기 꿈의 형식들이 바로 자신임을 깨닫는 순간'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보르헤스는 훗날 단편 ⟨원형의 폐허⟩나 ⟨칼의 형상⟩에서 이런 순간들을 재현하기에 이릅니다. 소설이 지적 활동의 무용함을 직접적으로 조준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지식인이 대다수였던 당시 평단의 반응은 날이 서 있습니다. 혹자는 부바르와 페퀴셰라는 두 바보의 실패를 인류 지성사에 등장했던 거인들의 실패와 대등하게 보는 것은 오류라고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부바르와 페퀴셰⟫가 '다분히 의도적으로 단순하게 쓰여졌음'을 첫 문장에서부터 강조하며, 플로베르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바르와 페퀴셰가 바보이기 때문에 바보들의 실패는 '바보들만의 실패'로 끝나게 될 거라는 비판은 가당치 않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두 인물이라는 전제를 비판함으로써 소설 전체를 비판하는 것은 작품에 내재한 '논리'를 비판하는 것인데, 이는 플로베르의 소설이 본디 '미학적인 것'임을 간과하고 있기에 그릇되다고 말합니다. 플로베르가 살았던 19세기는 과학적 진리가 인류를 증진하고 구원해주리라고 믿었던 시대였고, 그는 당대의 희망을 자신의 소설로써 의심했습니다. 여기에는 진리를 추구하는 행위에는 무용하게도 끝이 없을 것이라는 플로베르의 인식도 한몫했습니다. 당대의 사람들이 과학적 진리에 대한 희망은 잠정적인 '결론'에 대한 환상이며, 그것이야말로 "광기 중에서 가장 무익하고 치명적인 광기"라는 것이 플로베르의 생각이었습니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과학은 무한한 공간에서 팽창하는 유한한 구체(esfera)'이며, 확장될 때마다 미지를 더 넓게 포괄하나, 미지는 고갈되지 않을 것이라고요. 나아가 예술은 필연적으로 상징이며, '가장 거대한 구체조차 무한 속에서는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고요. 공교롭게도 보르헤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물리학자 존 휠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무지의 바다에 둘러싸인 섬에 산다. 우리 지식의 섬이 넓어지면 무지의 해변 또한 넓어진다." 그리하여 플로베르가 만년에 두 바보를 내세워 이뤄낸 성취란 다름다닌 사실주의 소설의 죽음이라고, 보르헤스는 적습니다. ⟪부바르와 페퀴셰⟫는 볼테르와 스위프트와 동양의 우화를 뒷배경으로 둔 채, 곧 도래할 카프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갑니다. 한편, 보르헤스의 마지막 단락은 약간 모호하게 읽힙니다. 어쩌면 플로베르가 내세운 두 바보는 존 휠러의 말을 자신들의 구체적인 행위로써, 그 실패로써 한 발 앞서 예증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두 바보의 실패는 예견된 것이었고, 플로베르의 소설은 미완으로 끝남으로써 잠정적으로 완성될 운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미완성으로 마무리 된 카프카의 ⟪성⟫처럼요.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두 바보의 실패는 플로베르가 전달하고자 한 바가 적확하게 전달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실패함으로써 성공한 소설은 성서의 불완전한 필사본이 되고 있습니다. 소설은 현실은 대속함으로써 현실을 구원합니다. 이 구원은 은밀하고 투명해서 아무도 스스로 구원된 줄을 모를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다음 글인 ⟨플로베르와 본보기가 된 운명⟩으로 이어집니다.
[세트] 부바르와 페퀴셰 1~2 - 전2권
픽션들<픽션들>은 2백 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얇은 책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엄청난 상상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그 상상은 심심풀이 환상이 아니라 삶과 세상의 미궁에 대한 깊은 통찰과 독창적인 사유로 이루어진 상상이다. <픽션들>은 20세기 문학에서 돋보이는 큰 별이다.
실재란 무엇인가 - 양자물리학의 의미를 밝히는 끝없는 여정양자물리학에서 말하는 기이한 효과를 왜 일상에서는 보지 못할까? 저자는 간단한 질문에서 시작하는 한편, ‘실재’를 둘러싼 쟁점을 소개한다. 그 과정에서 ‘코펜하겐 해석’에 맞서 소신을 굽히지 않은 데이비드 봄, 휴 에버렛, 존 스튜어트 벨과 같은 물리학자들의 일화를 다룬다.
여기에 또 다른 열쇠가 있을지도 모른다. 스위프트가 인류의 열망을 조롱하려고 그 열망을 소인족과 유인원에게 부여했다면, 플로베르는 그로테스크한 두 인물에게 부여한다. 만약 세계사가 부바르와 페퀴셰의 역사라면, 그 세계사를 구성하는 모든 것은 우스꽝스럽고 무의미하다.
영원성의 역사 195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플로베르와 본보기가 된 운명] 이어서 얘기하면, 결국 플로베르는 문학사에서 "새로운 종의 첫 번째 아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종이란 다름아닌 '산문'이라는 장르입니다. 보르헤스의 설명에 따르면, 플로베르 이전에 문인이란 호메로스에서 베르길리우스, 베르길리우스에서 밀턴으로 이어지는 영웅시를 쓰는 시인이었습니다. 하지만 플로베르는 "운문은 무엇보다 고대의 문학의 형식"이라고 말하면서, 운문에서 율격의 조합은 고갈된 반면 산문은 그렇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플로베르는 스스로 "소설의 호메로스"가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17세기 밀턴이 이미 창조된 운문의 아담인 호메로스를 좇았다면, 플로베르에게는 좇아갈 산문의 아담이 없었고 다만 자신이 아담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가 주창한 일물일어설은 그런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보르헤스의 주장입니다. 보르헤스는 앞서 ⟨독자의 미신적인 윤리⟩에서 일물일어설을 비판했지만, 그건 엄밀히 말해서 플로베르의 곡진한 시도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플로베르의 진의를 미신처럼 추종한 추종자들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알다시피 플로베르는 산문에서 문체와 형식을 강조했습니다. 이전까지 산문에서는 문체와 형식보다 주제가 더 앞에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일례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플로베르의 작품들과 구분됩니다. 무엇보다 세르반테스의 소설에서는 세르반테스가 뒤로 물러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저자임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불완전한 번역본을 필사하고 있음을 주장하면서 작가로서 자신을 뒤로 물렸고, 보르헤스의 설명처럼 등장인물인 돈키호테와 산초 판자는 세르반테스보다 생생합니다. 하지만 플로베르에 이르러서 "플로베르의 주인공은 그 누구도 플로베르보다 생생하지 않"습니다. 플로베르는 무시받고자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무시받고자 하는 의지에 힘입어서 유명세를 얻게 된 작가라는 것이죠. 그렇게 플로베르는 오늘날 자신의 작품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분투하는, 스타일리쉬한 산문 작가로서 호메로스, 최초의 아담이 되었습니다. 산문가의 라이터스블록은 플로베르라는 원형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재미있고 보르헤스다운 해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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