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기법과 주술] '소설에서 인과 관계란 무엇이며, 어때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보르헤스의 답변이라고 할 만한 글입니다. 여기서 인과 관계가 소설 '안에서' 설득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소설은 현실에서 출발했지만 다시 현실로 오롯이 환원되지 않는 무언가를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소설의 인과 관계를 신경쓴다는 것은, 현실의 논리를 염두에 두면서도, 그것이 비껴나간 자리에서 마술적이고 주술적인 사건을 허용할 수도 있다는 새로운 논리와도 연결됩니다. 이 글에서 보르헤스가 말하고자 했던 바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마술적'이고 '주술적'이라는 표현도 언제나 의심해봐야 합니다.
잠시 샛길로 빠져 보겠습니다. 저는 '라틴아메리카'의 문학과 작가를 논할 때, 흔히들 최상급 수사처럼 상투적으로 언급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이 그닥 반갑지 않습니다. 지면상 길게 논하긴 어렵지만, 그건 '라틴' 아메리카라는 명칭만큼이나 특정 관점이 숨어있는 표현입니다. 이를테면, 마술사는 자기가 시연하는 마술을 당연한 현실이라고 믿어야만 관객에게 자기 행위를 오롯이 전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마술은 쇼의 형태를 빌리지만, 모든 마술이 쇼잉(showing)인 것은 아니며 두잉(doing)으로서 마술도 있단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는 '마술'이라는 별칭을 붙여야만 이해되는 사건이 당사자들에게는 당연한 현실이자 일상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우리도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이를테면 한국 사람들은 'soul'이 'spirit'과는 미묘하게 다른 '귀신(鬼神)'이라는 개념을 단번에 이해하며, 그것을 정초와 가을 한가운데서 의례로써 매번 받아들입니다. 이 귀신은 악의로 똘똘 뭉친 악마나 악령, 사령과는 뉘앙스가 다르며, 뭇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 보일 때도 악령과는 달리 '억울함'이나 '사연'이나 '내력'을 갖고 나타난다고 전해집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의례로써, 우리 안에 내재한 신화로써 이해하며, 마술이라고 별스럽게 부르지 않습니다.
좀더 익숙한 얘기도 있습니다. 한국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체기가 느껴지면, 손발가락 끄트머리로 피를 모아서 첫마디를 실로 친친 동여맨 뒤에 손발톱 윗부분을 바늘로 쿡 찔러 체증을 가시게 했습니다. 오늘날 과학이 아닌 과학주의를 광신하는 사람들은 이 방법이 전근대적인 민간요법이거나 과학적 근거가 전무한 낭설, 혹은 해봐야 플라시보의 한 사례라고 말합니다. 오랜 세월 우리에게 현실이었던 것을 한사코 부정하고서 말입니다(여기서 현실이란 현재가 아니라 귀신을 본 사람이 공공연히 존재했던 당시의 맥락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손따기'가 한의학의 응급 치료법인 지락(刺絡)법 중 하나이며, 그 정확한 기전이 어떤 것인지를 논증할 생각은 없습니다. 설령 그 기전이 밝혀지지 않았고 과학적으로 낭설임이 훗날 밝혀졌다고 해도,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겠습니다. 외려 중요한 것은 오늘의 현실이 아닌 당시의 현실에서 사람들이 손을 따서 체증을 가시게 했다는 것이고, 소설에서는 얼마든지 이 독특한 인과 관계를 바탕으로 상상을 얽어나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르헤스가 지나가듯 언급한 “무기연고(weaponsalve)”만큼이나 매력적인 인과 관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여기서 현실의 반박 불가능한 논리와 근거를 설득하려는 게 아니라, 무한히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소설에서'의 인과 관계를 논하고 있습니다. 이 인과 관계는 철저히 한 편의 소설 안에서 보호되고 통용되는 것이어서, 오늘날의 과학적 발견이 과거의 사실 관계를 논파하거나 단죄하는 수단이 되지 못합니다. 이를 보르헤스는 "주술은 인과성의 모순이 아니라 인과성의 왕관 혹은 악몽"이라고 말하는 한편, 소설에서 주술적인 인과성이야말로 유일하게 진실된 것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따라서 소설의 세계에서는 상처가 아니라 상처를 낸 칼에 연고를 바르고, 주술사의 팔뚝 밑에 상처를 내어 피를 흘려서 기우제를 지내고, 밀랍인형을 괴롭혀서 원수에게 위해를 가하며, 손끝을 실로 동여매어 바늘로 찔러서 트림을 짜내어도 됩니다. 어디 그뿐일까요. 반인반수의 신비로운 몸을 상상하면서 디오니소스적인 삶을 예찬하고, 지친 선원을 홀리는 무한히 매력적인 세이렌의 노래 속에서 미지를 항해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생각하는 몇 가지 예시입니다. 마르케즈의 장편 소설 ⟪사랑과 다른 악마들⟫이 배경으로 삼는 세계에서는 죽은 시신에서도 머리카락과 손톱이 계속해서 자라납니다. 이 마법같은 사건이 벌어지는 세계에서, 사제와 소녀의 사랑은 더욱 절절하고 사실적으로 느껴집니다. 만일 이를 두고 과학적 사실 관계를 지적하면서, '시신은 몸이 부패하면서 살점을 점차 소실하기 때문에 머리카락이나 손톱이 자라나는 듯 보였을 것'이라고 지적한다면, 그야말로 바보임을 자인하는 겁니다. 하나 더,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나온 8부작 드라마 ⟪백년의 고독⟫은 마르케스의 동명 소설이 원작입니다. 작중 초반에 우르슐라는 새끼 돼지가 어린 아이로 변하는 꿈을 꿉니다. 한국사람들은 이를 아주 쉽게 '태몽'으로 이해합니다만, 사실 태몽은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익숙지 않은 개념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술적 암시가 담긴 예지몽이라거나 한갓 악몽에 불과한 것이 우리에 이르러서는 자연스럽게 '태몽'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이렇듯 제가 좋아하는 소설의 세계에서, 산 자와 망자는 이승과 저승처럼 철저히 분리된 세계에 살지 않고 때론 공존하며, 그 경계는 흐려져 있습니다. 보르헤스도 적었듯, 켄타우로스가 인간의 몸과 짐슴의 몸이 합쳐진 존재이듯, 이렇게 주술과 현실의 접합부는 "떡갈나무 잎으로 만든 테"로 가려져 있습니다. 그 테를 우리는 소설의 인과 관계라고 부르기로 한 게 아닐까요.

사랑과 다른 악마들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1994년작. 광견병에 걸린 개에게 물린 후 악마에 씌었다는 오해를 받고 수녀원에 감금된 열두 살 소녀와 그녀에게 엑소시즘을 행하라는 명을 받은 서른여섯 살 신부의 금지된 사랑을 종교적 억압과 시대적 광기 속에 순수하고 아름답게 그려냈다.

백년의 고독 1중남미 문학과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 작품은 첫 출간하자마자 세계적인 작품이 되었고, 마르케스에게 노벨상을 안겨주었다. 민음사에서 나온 번역판은 아르헨티나에서 처음 출판된 판본(1967)을 바탕으로 스페인어 전공자인 조구호 씨가 완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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