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보르헤스 읽기] 『영원성의 역사』 1부 같이 읽어요

D-29
아무리 이름 없고 변변찮은 시인일지라도, 완벽한 소네트를 조각하려고 시도하지 않은 시인은 없을 것이다. 남들 눈에는 시시하게 보일지라도 시인은 불후의 명성을 보장해 주고 세월의 풍상도 경의를 표하는 기념비적 작품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그런 완벽한 소네트 말이다. 보통 이런 소네트는 불필요한 단어를 삽입하지 않지만, 실은 시 전체가 불필요한 단어다. 바꿔 말해서 찌꺼기 같은 작품, 쓸모없는 작품이다.
영원성의 역사 67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또 다른 휘트먼] 보르헤스가 시인 휘트먼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드러낸 글입니다. 마지막 단락에서 언급한 "두 바다 사이에 있는 나라"는 태평양과 대서양 사이에 놓인, 거대한 칠면조 다리 형상의 아메리카 대륙을 의미할 겁니다. 역사로 보나 문화로 보나 아메리카는 '만들어진' 나라이며 '수입된 것'들로 넘쳐나는 곳입니다. 그곳은 본토임과 동시에 유럽적인 것들의 부산물로 쌓아올린 성입니다. 그 '본디 있던 것'들과 '만들어지고 수입된 것'들이 한 데 뒤섞인 형태에서 오는 특유의 역동성이 휘트먼과 같은 강인함을 만들어냅니다. 숲이 바다처럼 우연하고 무한한 듯이 펼쳐져 있는 광대한 나라. 미국과 그런 미국을 집약한 상징인 휘트먼에 대한 옹호는 보르헤스 자신이 몸담은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열정일 겁니다. 한편, 보르헤스는 휘트먼이 "열거가 가장 오래된 시작법"임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봤을 때 참 좋은 시에는 매력적인 열거가 있고, 그 열거는 사물 전체를 '등'으로 퉁치지 않고 하나씩 명명하려는 섬세함이 숨어 있습니다. 좋은 산문에도 이러한 열거가 있습니다. 조르주 페렉은 시도 산문도 아닌 글을 쓰면서, 자신이 왜 열거하고 있는지를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공간의 종류들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 조르주 페렉 선집 6권. 1974년에 페렉이 ‘생전에’ 출간한 유일한 에세이로, ‘공간’에 관한 진진한 질문과 명상이 담긴 책이다. 평생 여러 공간을 떠돌며 사는 우리에게 이 책은 우리를 둘러싼 여러 겹의 공간을 목록화하고 마비된 일상의 사유에 새로운 질문들로 지각의 문을 연다.
이따금씩, 어쩌면 조금은 체계적인 관심을 갖고 거리를 관찰하기. (···) 보고 있는 것을 기록하기. 일어나고 있는 것 중 주목할 만한 것. 우리는 주목할 만한 것을 볼 줄 아는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는가? 아무것도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지 못한다. 우리는 보는 법을 모른다. 거의 어리석을 정도로, 더 천천히 접근해야 한다. 흥미롭지 않은 것, 가장 분명한 것, 가장 평범한 것,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찍기 위해 노력하기. (···) 카페들. 카페가 몇 개나 있을까? 하나, 둘, 셋, 넷. 왜 이 카페를 선택했을까? 내가 이곳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햇빛이 비치기 때문이고, 담뱃가게를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상점들: 골동품가게, 옷가게, 하이파이오디오가게 등. ‘등’이라고 말하지도, 쓰지도 않기. 그로테스크하거나 쓸데없거나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주제를 고갈시키기 위해 노력하기. 나는 아직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았고, 오래전부터 알아봐왔던 것을 알아보았을 뿐이다. 더 평범하게 보도록 다짐하기.
공간의 종류들 83쪽,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카발레에 대한 옹호] 잘 몰라서 카발라에 대해서 찾아보았습니다만, 맥이 잡히는 설명이 잘 없어서 일단 제가 이해한대로 써 보겠습니다. 지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카발라는 유대교 신비주의 사상으로서, 히브리어 ‘카발(קבל)’에서 명칭이 유래합니다. 그 의미는 '구전 토라(구약성서의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의 신비, 곧 입에서 입으로 전래된 비밀스러운 지혜와 믿음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유대교 신비주의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정확한 설명이 없어서 이해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앞서 설명에서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 '문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을 후세에 전한 것'이라는 의미가 카발라에는 있습니다. 이슬람교도는 그 특유의 과장법으로 '쿠란의 원본'은 "언어 이전, 창조 이전의 것"이라고까지 표현하기도 합니다. 보르헤스는 이 글에서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인 '성령'으로서 이러한 카발라를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보르헤스 역시 '성령'을 언급하는 순간 우리는 '신비'를 접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구술한 존재는 일반적인 신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이라는 것인데, 비록 오늘날 많은 이들이 삼위일체를 미신으로 치부한다고 해도 바로 여기에서 '신비'가 비롯되기에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세 위격이 수레바퀴의 톱니처럼 맞물려 돌아가기에 예수는 단순한 '사건'이나 역사의 뭇 '위인'들과 구별되고 있다고, 저는 읽었습니다. 한편, 카발라주의자들은 창세기의 신성성을 믿었다고 하는데요, 이 신성성은 일체의 우연성을 배제하려는 시도 속에서 얻어졌다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여기서부터 설명이 매우 흥미로운데요, 저널리즘의 글쓰기로 대표되는 일반적인 글은 '의미'를 중시합니다. 그렇기에 의미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문단의 길이'나 '소리' 따위의 무수한 우연이 끼어들도록 허용하게 됩니다. 운문도 처지는 마찬가집니다. 운문에서는 오히려 '소리'를 중시하는 과정에서 그 의미에 우연함이 끼어들도록 허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쪽이든 우연이 끼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죠. 바로 이 지점에서 보르헤스는 성경과 코란을 기술한 저자들을 상상하는데요, 그들은 일체의 우연을 배제하려고 했으며 그리하여 하느님께 근접하고자 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카발라주의자는 "하느님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한 자 한 자 불러주어 받아적었다고" 전제하고 상상했기에 오늘날 성경은 "절대적인 텍스트가 되며, 그곳에 우연이 끼어들 여지는 산술적으로 0"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개념과는 별개로 하나로 된 세 가지 위격이라는 특성은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삼위일체를 믿음의 필수 조건으로 간주하면 근본적인 신비는 풀리지 않지만 그 의도와 용도는 드러난다. 삼위일체(적어도 이위일체)를 포기하면 예수는 우리의 기도를 영원히, 끊임없이 들어주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일시적인 대리인, 역사적 사건이 되어 버린다. 만약 성자와 성부가 아니라면, 구원은 하느님이 직접 행한 역사(役事)가 아니다. 성자가 영원하지 않다면 예수가 인간의 몸으로 내려와 십자가에 못 박힌 희생도 영원한 것이 아니다. 제레미 테일러는 "무한한 시대에 걸쳐 타락한 영혼을 구속할 수 있는 것은 무한한 탁월함밖에 없었다"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삼위일체의 교리는 정당화될 수 있다.
영원성의 역사 79-80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문학에서 상정하는 현실] 문학이 어떤 장치를 이용해서 소위 '핍진함'을 구현하는지를 설명하는 글입니다. 보르헤스는 그러기 위해서 작가적 원형을 낭만주의자와 고전주의자로 구분한 뒤에, 각각의 사례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낭만주의자들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한다면, 고전주의자들은 도리어 표현을 배제하려고 한다는 것이 보르헤스의 설명입니다. 이를테면, 뭇역사가의 서술에서도 보듯, 고전주의자들은 "구체적인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추상화하고 일반화"합니다. 여기서 글에 생동감을 부여해야 하는 쪽은 오히려 독자이며, 이런 글은 표현적(expressive)이지 않습니다. "현실을 기록할 뿐 재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보르헤스는 이것이 일종의 "부정확함"에 기대는 것이며, 여기서 역설적이게도 핍진함이 얻어집니다. 이 부정확함이야말로 "우리가 복잡한 상태를 즉시 개념으로 단순화"할 때 일어나는 것이며, 지극히 인간된 불완전함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의 전능함과 대비되는 것이기에 인간에 관한 문학을 다룰 때 오히려 핍진함이 됩니다. 문학에서 화자가 이런저런 세부사항을 말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데요, 그에 따라서 핍진함을 얻거나 잃기도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만일 한 인물이 연인에게서 "너 어제 뭐했길래 전화도 안 받았어"라며, 어제 행적을 추궁받는다고 해봅시다. 그가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집에 오자마자 피곤해서 잤어"라고 하는 대신에 과도하게 디테일을 남발하면서 삼거리 포차에 늘어선 상호의 세세한 위치와 배열과 그날 술자리에서 있었던 테이블의 광경과 대화 내용을 줄줄이 열거한다면, 상대는 아마 부아가 치밀 겁니다. 극중의 핍진함도 잃을 거고요. 거기에는 '술을 마시고 피곤해서 집에 오자마자 잠을 자는' 인간된 망각, 불완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전주의자들은 이렇듯 인간된 '부정확함'이 역설적이게도 핍진함으로 역전된다는 것을 알았으며, 보르헤스는 그런 고전주의자들의 경향성을 보면서 "침묵의 지배"라는 비유를 발견하기에 이릅니다. "문학이 지나치게 개성에 함몰된 나머지, 개성을 부정하거나 경시하는 것조차 '개성적이 되는' 교묘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98쪽)는 것이 보르헤스의 설명입니다. 결과적으로 고전주의자가 현실을 상정하는 방법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번째는 “포괄적으로 전달”(general notification/notificación general)하는 것으로서, 앞서 말한 “추상화하고 일반화”하는 서술을 뜻합니다. 세르반테스의 글이 좋은 예시죠. 두번째는 보다 복잡한 현실을 암시한 뒤에, 그로 인해 파생된 결과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앨프리드 테니슨의 영웅시 ⟨아서왕의 죽음⟩의 도입부가 가장 좋은 예시입니다. 이는 언어적 기교를 활용하는 것이어서 문학이라는 장르적 특수성이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보르헤스가 가장 어렵고 효과적이라고 말하는 "정황의 창조", 즉 “함축적인 의미를 띤 간결한 세부 사항을 늘어놓는 전개”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세번째 방법은 웰스와 디포의 소설 뿐만 아니라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보르헤스는 이 세번째 방법이 훌륭하기는 하나 타 장르에서도 가능하단 점에서 ‘문학적 엄격성은 비교적 떨어진다’(less strictly literary/menos estrictamente literario)고 단서를 달고 있습니다. 세번째 방법의 예시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견 흐름과 무관해보이지만 흐름에 교묘한 방식으로 일조하는 세부사항을 삽입하는 것인데, 이는 우리가 '리얼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의 요체이기도 합니다. 제임스 우드는 문학적 세부사항을 다음처럼 우아하게 표현했습니다.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제임스 우드는 영국 출신의 소설가이자 평론가이다. 이 책은 그의 네번째 책으로 소설 애호가와 작가 지망생을 위한 세심한 입문서라 할 수 있다. 그는 유려한 글솜씨, 센스 있는 논평, 해박한 문학적 지식 등으로 영미와 유럽의 수많은 고전과 당대 소설을 적절히 인용하면서 픽션의 작동 원리를 친절하고 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문학과 삶의 차이는 삶이 두루뭉술하게 세부사항으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우리를 그 세부사항에 주목하도록 거의 이끌지 않는 반면, 문학은 우리에게 세부사항을 알아차리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어머니가 나에게 키스하기 직전 당신 입술을 닦으시는 모습, 디젤엔진이 맥없이 공회전하고 있을 때 런던 택시가 드르륵거리는 소리, 오래된 가죽 재킷에 고기 조각의 지방 줄무늬 같은 흰 줄이 가 있는 모양, 갓 내린 눈이 발밑에서 ‘뽀드득’거리는 느낌, 아기의 팔이 너무도 통통해서 끈으로 묶어놓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 등을 알아차리는 법을 문학은 가르쳐준다. 이 지도과정은 변증법적이다. 문학이 우리를 좀더 삶을 잘 알아차리는 사람으로 만들면, 우리는 삶 자체에서 실습하게 되고, 그리하여 이것이 우리를 문학의 세부사항을 좀더 잘 읽는 독자로 만들면, 그것이 이번에는 우리를 삶을 좀더 잘 읽는 사람으로 만든다. 이런 과정이 이어지는 것이다.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76쪽, 제임스 우드 지음, 설준규.설연지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영화 평] 말 그대로 1932년 즈음에 보르헤스가 보았던 영화에 대한 짤막한 평입니다. 관련 영화들의 원문을 구글링해보시면 퍼블릭 도메인으로 풀린 영상을 찾아보실 수도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아도, 영화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그 내용을 유추해보는 것도 재밌을 겁니다.
킹 비더의 가장 최근작은 한때 표현주의를 추구하던 엘마 라이스가 쓴 동명의 희곡을 각색한 ⟨거리의 풍경⟩이라는 작품인데, '표준'처럼 보이지 않겠다는 부정적인 열정 하나로 만든 영화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지나치게 간략해서 만족스럽지 못하다. 예를 들어 고상한 주인공이 있는데, 악당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낭만적인 커플이 있는데 법률적, 종교적으로 결합이 금지되어 있다. 과하게 원기 왕성한 허풍쟁이 이탈리아인이 있는데, 작품에서 담당한 양념 역할이 지나쳐서 다른 배우도 비현실성에 물든다. 진짜처럼 보이는 인물도 있고, 가짜처럼 보이는 인물도 있다. 본질적으로 사실적인 작품이라기보다는 실패하거나 어정쩡한 낭만주의 작품인 것이다.
영원성의 역사 11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서사기법과 주술] '소설에서 인과 관계란 무엇이며, 어때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보르헤스의 답변이라고 할 만한 글입니다. 여기서 인과 관계가 소설 '안에서' 설득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소설은 현실에서 출발했지만 다시 현실로 오롯이 환원되지 않는 무언가를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소설의 인과 관계를 신경쓴다는 것은, 현실의 논리를 염두에 두면서도, 그것이 비껴나간 자리에서 마술적이고 주술적인 사건을 허용할 수도 있다는 새로운 논리와도 연결됩니다. 이 글에서 보르헤스가 말하고자 했던 바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마술적'이고 '주술적'이라는 표현도 언제나 의심해봐야 합니다. 잠시 샛길로 빠져 보겠습니다. 저는 '라틴아메리카'의 문학과 작가를 논할 때, 흔히들 최상급 수사처럼 상투적으로 언급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이 그닥 반갑지 않습니다. 지면상 길게 논하긴 어렵지만, 그건 '라틴' 아메리카라는 명칭만큼이나 특정 관점이 숨어있는 표현입니다. 이를테면, 마술사는 자기가 시연하는 마술을 당연한 현실이라고 믿어야만 관객에게 자기 행위를 오롯이 전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마술은 쇼의 형태를 빌리지만, 모든 마술이 쇼잉(showing)인 것은 아니며 두잉(doing)으로서 마술도 있단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는 '마술'이라는 별칭을 붙여야만 이해되는 사건이 당사자들에게는 당연한 현실이자 일상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우리도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이를테면 한국 사람들은 'soul'이 'spirit'과는 미묘하게 다른 '귀신(鬼神)'이라는 개념을 단번에 이해하며, 그것을 정초와 가을 한가운데서 의례로써 매번 받아들입니다. 이 귀신은 악의로 똘똘 뭉친 악마나 악령, 사령과는 뉘앙스가 다르며, 뭇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 보일 때도 악령과는 달리 '억울함'이나 '사연'이나 '내력'을 갖고 나타난다고 전해집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의례로써, 우리 안에 내재한 신화로써 이해하며, 마술이라고 별스럽게 부르지 않습니다. 좀더 익숙한 얘기도 있습니다. 한국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체기가 느껴지면, 손발가락 끄트머리로 피를 모아서 첫마디를 실로 친친 동여맨 뒤에 손발톱 윗부분을 바늘로 쿡 찔러 체증을 가시게 했습니다. 오늘날 과학이 아닌 과학주의를 광신하는 사람들은 이 방법이 전근대적인 민간요법이거나 과학적 근거가 전무한 낭설, 혹은 해봐야 플라시보의 한 사례라고 말합니다. 오랜 세월 우리에게 현실이었던 것을 한사코 부정하고서 말입니다(여기서 현실이란 현재가 아니라 귀신을 본 사람이 공공연히 존재했던 당시의 맥락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손따기'가 한의학의 응급 치료법인 지락(刺絡)법 중 하나이며, 그 정확한 기전이 어떤 것인지를 논증할 생각은 없습니다. 설령 그 기전이 밝혀지지 않았고 과학적으로 낭설임이 훗날 밝혀졌다고 해도,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겠습니다. 외려 중요한 것은 오늘의 현실이 아닌 당시의 현실에서 사람들이 손을 따서 체증을 가시게 했다는 것이고, 소설에서는 얼마든지 이 독특한 인과 관계를 바탕으로 상상을 얽어나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르헤스가 지나가듯 언급한 “무기연고(weaponsalve)”만큼이나 매력적인 인과 관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여기서 현실의 반박 불가능한 논리와 근거를 설득하려는 게 아니라, 무한히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소설에서'의 인과 관계를 논하고 있습니다. 이 인과 관계는 철저히 한 편의 소설 안에서 보호되고 통용되는 것이어서, 오늘날의 과학적 발견이 과거의 사실 관계를 논파하거나 단죄하는 수단이 되지 못합니다. 이를 보르헤스는 "주술은 인과성의 모순이 아니라 인과성의 왕관 혹은 악몽"이라고 말하는 한편, 소설에서 주술적인 인과성이야말로 유일하게 진실된 것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따라서 소설의 세계에서는 상처가 아니라 상처를 낸 칼에 연고를 바르고, 주술사의 팔뚝 밑에 상처를 내어 피를 흘려서 기우제를 지내고, 밀랍인형을 괴롭혀서 원수에게 위해를 가하며, 손끝을 실로 동여매어 바늘로 찔러서 트림을 짜내어도 됩니다. 어디 그뿐일까요. 반인반수의 신비로운 몸을 상상하면서 디오니소스적인 삶을 예찬하고, 지친 선원을 홀리는 무한히 매력적인 세이렌의 노래 속에서 미지를 항해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생각하는 몇 가지 예시입니다. 마르케즈의 장편 소설 ⟪사랑과 다른 악마들⟫이 배경으로 삼는 세계에서는 죽은 시신에서도 머리카락과 손톱이 계속해서 자라납니다. 이 마법같은 사건이 벌어지는 세계에서, 사제와 소녀의 사랑은 더욱 절절하고 사실적으로 느껴집니다. 만일 이를 두고 과학적 사실 관계를 지적하면서, '시신은 몸이 부패하면서 살점을 점차 소실하기 때문에 머리카락이나 손톱이 자라나는 듯 보였을 것'이라고 지적한다면, 그야말로 바보임을 자인하는 겁니다. 하나 더,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나온 8부작 드라마 ⟪백년의 고독⟫은 마르케스의 동명 소설이 원작입니다. 작중 초반에 우르슐라는 새끼 돼지가 어린 아이로 변하는 꿈을 꿉니다. 한국사람들은 이를 아주 쉽게 '태몽'으로 이해합니다만, 사실 태몽은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익숙지 않은 개념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술적 암시가 담긴 예지몽이라거나 한갓 악몽에 불과한 것이 우리에 이르러서는 자연스럽게 '태몽'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이렇듯 제가 좋아하는 소설의 세계에서, 산 자와 망자는 이승과 저승처럼 철저히 분리된 세계에 살지 않고 때론 공존하며, 그 경계는 흐려져 있습니다. 보르헤스도 적었듯, 켄타우로스가 인간의 몸과 짐슴의 몸이 합쳐진 존재이듯, 이렇게 주술과 현실의 접합부는 "떡갈나무 잎으로 만든 테"로 가려져 있습니다. 그 테를 우리는 소설의 인과 관계라고 부르기로 한 게 아닐까요.
사랑과 다른 악마들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1994년작. 광견병에 걸린 개에게 물린 후 악마에 씌었다는 오해를 받고 수녀원에 감금된 열두 살 소녀와 그녀에게 엑소시즘을 행하라는 명을 받은 서른여섯 살 신부의 금지된 사랑을 종교적 억압과 시대적 광기 속에 순수하고 아름답게 그려냈다.
백년의 고독 1중남미 문학과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 작품은 첫 출간하자마자 세계적인 작품이 되었고, 마르케스에게 노벨상을 안겨주었다. 민음사에서 나온 번역판은 아르헨티나에서 처음 출판된 판본(1967)을 바탕으로 스페인어 전공자인 조구호 씨가 완역한 것이다.
이처럼 터무니없고 우스운 예를 모두 열거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내가 제시한 예만으로도 주술은 인과성의 모순이 아니라 인과성의 왕관 혹은 악몽이라는 점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기적은 천문학자의 세계에서 그렇듯이 이 세계에서도 낯설지 않다. 모든 자연법칙이 이 세계를 지배하며, 상상의 법칙 또한 이 세계를 지배한다. 미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탄환과 죽음 사이에만 필연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밀랍 인형을 학대한다거나 거울이 깨진다거나 소금을 엎지른다거나 식탁에 열세 명이 둘러앉는 것과도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영원성의 역사 12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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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그루삭] 폴 그루삭(Paul-François Groussac)은 프랑스 태생의 아르헨티나 작가이자 평론가이자, 국립도서관 관장이었습니다. 1884년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아르헨티나 공화국의 수도가 되고 자체 관할권을 갖게 된 이듬해 1885년에 폴 그루삭은 국립도서관 관장으로 취임했고, 44년 뒤 죽을 때까지 자리를 유지했습니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도서관 문화를 크게 증진했던 인물로 일컬어집니다. 취임 당시 3만 5천 권에 불과했던 장서량은 그가 사망한 1929년에 이르러서는 26만 권이 넘었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는 서가의 운영 체계를 마련하고 진귀한 필사본 콜렉션을 구축하는 한편, 당대의 도서관 발전사를 분석한 책도 집필했습니다. 보르헤스는 폴 그루삭이 죽었을 당시 부고기사를 썼을 정도로 생전 그의 업적을 높이 샀습니다. 이 글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보르헤스와 폴 그루삭은 전기적으로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폴 그루삭의 44년 재임에는 비할 바가 되지 않지만, 보르헤스 또한 근 2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국립도서관 관장 자리를 유지하면서 도서관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재임 기간 동안 정치적으로 격변을 겪었고 정권이 바뀌어 이해 관계가 달라지면서 위치를 위협받기도 했지만 꾸준히 도서관의 가치와 문화를 전파하는 데 힘 썼으며, 그래서인지 둘 다 시력이 크게 저하되어서는 임기가 끝날 무렵에는 완전히 실명했다는 점도 같습니다. 단, 이 글에서도 보듯, 폴 그루삭이 생전 작가로서 보여준 스타일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평론가로서 폴 그루삭은 워낙 신랄하게 말하고 상대의 기를 죽이기까지 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편, 오늘날 아르헨티나의 신규 국립도서관이 건립된 역사는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수십년간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다가 1992년에 이르러서 완공되었다는 것인데, 중간에 포기될 뻔한 사업이 좌초되지 않고 성사되었다는 것을 보면, 오늘날 잊혀져가는 우리 주변의 도서관이 떠오르면서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어느 나라이고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따라서 작가가 탄압받고 도서관과 그를 둘러싼 문화가 위축되는 것은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르헨티나에서는 '더 나은 도서관 문화를 만들고 싶다'는 그 최초의 의지가 끊기지 않고 결국 시간 속에서 자신을 구현해내기에 이르렀던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진정 제가 부러워하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독자보다 구매자를, 도서관이라는 역사적 가치보다는 방문객 숫자에 집착하는 이즈음의 현실은 야속하기만 합니다. 이런 현실이 개선되기 위해서는 책은 상품의 외형을 띨 뿐 상품의 논리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결국 미래 세대를 위한 정신적 공공재가 되어야 한다는 합의 위에서 어떤 논의가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 처음 듣는 이야기일본의 대표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가 던지는 책 이야기. 종이책과 전자책, 도서관과 사서, 학교 교육, 출판계, 독립서점 등 책을 둘러싼 이제껏 접하지 못했던 이야깃거리를 총망라한다. 깊은 성찰을 토대로 한 선생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즐거운 화두가 된다.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 소설을 읽을 수 없는 이유는 절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상상력이 없어서, 열정이 없어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영원성의 역사 12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지옥의 존속] 먼저, 보르헤스는 지옥에 대한 견해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맥이 빠지게 된 이유를 설명합니다. 유황불과 죄인의 비명으로 가득한 지옥의 이미지는 저 엄혹했던 중세 시대의 종교 재판을 연상케 한다는 겁니다. 2세기 카르타고 출신의 테르툴리아누스는 지옥의 영벌이 "가장 거창한 구경거리"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흔히들 이런 지옥을 묘사할 때, 그 고통이 '영원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보르헤스에게 "영원이라는 속성은 소름끼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성으로서 '불멸'이란 인간에게는 귀속될 수 없는 속성이며, 오직 하느님의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지옥의 영벌은 악을 영원하게 만들기 때문에 언어도단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인류는 지옥의 고통이 '영원함'을 옹호하려고 갖은 논리를 만들어냈다고, 보르헤스는 설명합니다. 고통의 영원성으로 인해 교리가 강화되고, 하느님이라는 존재의 무한함이 증거되며, 나아가 우리의 자유의지가 그 영원함을 원한다는 논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보르헤스는 그것이 반종교적인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옥은 현 체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징벌 공간으로 상상되었습니다. 질서를 지키지 않았을 시에 가게 될 공간을 최대한 엄혹하게 묘사함으로써 현 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공고히 해야 할 체제란 종교적 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종교에 대한 권위가 점차 약화되면서, 지옥에 대한 상상력도 점차 바뀌게 되었습니다. 점차 지옥은 상상의 종교적 구금 시설이 아닌, 현실의 한 귀퉁이로 자리를 옮겨옵니다. 영화 ⟪무간도⟫의 지옥을 보십시오. 결말부에서 인물은 살아서 고통받는 현실의 지옥을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자연히 오늘의 지옥의 모습은 어떤지 궁리해보게 됩니다. 이 글 뒤에 덧붙인 [후기]에 대한 제 작은 감상을 적어 보겠습니다. 얼마 전, 직장인이 많은 역 인근의 대로변을 특이하게 개조한 1톤 포터가 서행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트럭 적재함에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운전석 위쪽 부분에는 확성기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조수석에는 한 중년 남성이 마이크로 자기 정치적 의견을 토로하고 있었는데, 그는 정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자기가 알고 있는 진짜 진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 주장인즉, 사람들이 너무 모르고 있고, 속고 있으며, 자신이 아는 진짜 진실을 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은 한편으로는 괴기스럽고, 그 방식은 폭력적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진실 안에서는 용기있는 진실의 담지자였겠지만, 대로변을 지나던 직장인 중 하나였던 저에겐 자폐적인 진실에 피폭된 환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진짜 현실'을 말했고, 스스로 계몽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그 남자는 '나는 진짜 진실을 알고 꿈에서 깨어났다'는 또 하나의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또 하나의 꿈에서 깨어나면 그는 무엇이 될지 궁금해졌습니다. 스스로 계몽되었다는 꿈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어쩜 현실이야말로 또 하나의 지옥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스스로 계몽되었다고 믿는 그 꿈 역시도 행복한 지옥이긴 매한가지일 겁니다.
무간도홍콩 경찰의 비밀 요원인 진영인(양조위). 경찰학교에서 훈련을 받다가 발탁된 그는 범죄 조직 삼합회에 잠입하여 10년째 조직원을 위장한 스파이로 살아가고 있다. 전과 8범에 2번의 형기를 치른 완벽한 범죄자가 되어 있는 그는 현재 보스 한침이 가장 신임하는 심복이기도 하다. 삼합회의 숨은 조직원 유건명(유덕화). 18살 때부터 경찰에 잠입해 스파이로 활동해온 그는 현재 경찰 내에서 가장 뛰어난 강력반 요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경찰로서의 경력이 벌써 10년째에 이르는 그는 이제 그만 조직원으로서의 신분을 버리고 싶어한다.
"고통은 무한해야 한다. 왜냐하면 무한한 존재인 하느님의 위엄을 해치는 죄가 무한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지나치게 많은 것을 증명하고 있어서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가벼운 죄는 없으며 그 어떤 죄도 용서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하나 덧붙이자면 이 주장은 학문적 경박성의 완벽한 사례이며, 속임수는 '무한한'이라는 단어의 다의성에 있다. 이 단어를 주(主)에 적용할 때는 '무조건'을 의미한다. 그리고 내가 이해한 바로 이 단어를 죄에 적용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게다가 죄가 하나라고 할지라도 이는 무한한 존재인 하느님에 대한 폭거이므로 무한하다는 주장은 하느님이 성스럽기 때문에 성스럽다거나 호랑이가 낸 상처는 반드시 줄무늬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영원성의 역사 13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단순한 정보를 나열한 이런 글에서는 꿈 이야기도 할 수 있다. 나는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꿈을 깬 곳은 낯선 방이었다.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한 줄기 빛이 들어와 철제 침대 발치와 딱딱한 의자와 닫힌 방문과 창문과 빈 탁자를 비추고 있었다. 나는 두려운 생각이 들어 '여기가 어디지?' 하고 생각하다가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누구지?'라고 생각했지만 이 역시 알 수 없었다. 두려움이 증폭됐다. 그리고 이런 암담한 깨어남이 바로 지옥이고, 운명을 알 수 없는 이런 깨어남이 나의 영원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진짜로 깨어났다. 온몸을 떨면서.
영원성의 역사 140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호메로스 서사시의 번역본] 번역에 대한 보르헤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글입니다. 흔히들 번역이라고 하면 원문의 언어를 그저 다른 언어로 옮긴 것이며, 원문에 비해 열등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한 언어로 쓰여진 작품이 다른 언어로 옮겨지기 위해서는 어떤 '판단'과 '필요'가 요구되는데, 이러한 판단과 필요성이 언급되는 작품은 이미 일정 부분 검증된 책이라는 말도 되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 책이나 번역되지는 않으며, 번역이야말로 '번역되어야 할 작품'에 대한 기준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부차적인 행위가 아니라 이미 주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번역은 크든 작든 모국어라는 감옥에서 빠져나와 있습니다. 본문에서 보르헤스가 스페인어로 쓰인 ⟪돈키호테⟫를 언급한 것에서 보듯, 모국어로 쓰인 걸출한 작품은 오히려 아무 변화도 없는 것입니다. 반면 외국어로 쓰인 번역본은 모국어가 아니기에 끊임없이 변화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시대에 따라서 달리 번역됩니다. 끊임없이 열려 있다고 할 수 있죠. 그리스어를 모르는 모든 이에게 ⟪오디세이아⟫가 그러하듯이요. 한편, 보르헤스에게 번역은 '결정본'을 맹종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텍스트를 섬세하게 읽는 방식이며, 지금 '여기'의 현실을 과거에 반영하는 수단입니다. 보르헤스가 이 글을 썼던 시점으로부터 지금은 무려 한 세기 가까이 흘렀지만, 이 글은 오늘에 와서 더욱 풍성한 논의를 이끌어낼 최신의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이즈음도 번역 얘기만 하면 오역 논란이 끊이질 않고, 그에 뒤따라서 어김없이 원전에 대비되는 번역의 열등함이 논의되고, 역설적이게도 '우리 것'에 천착하면서 폐쇄적이고 자조적인 의견이 터져나오며, '조악한 번역본을 보지 않고 원서를 찾아봤다'는 말이 자기 학식이나 어학 능력을 은근히 뽐내는 포즈가 되고 있는 것은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보르헤스의 말대로, 번역이 열등하다고 믿는 것은 미신이며 어설픈 경험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오히려 번역이야말로 "언어적인 것의 무수한 반향"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원문이 깔고 앉은 텍스트라는 본질에 더욱 가까이 다가섭니다. 보르헤스 역시 무수한 번역본 사이에서 우뚝 선 '결정본'이라는 것은 "종교적 확신"일 뿐이며, 애초에 텍스트는 반향적인 것이기에, 늘상 말해온 '영원의 책'의 관점에선, 원본이든 번역본이든 모두 불완전한 초고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호메로스의 서사시 번역본이 그토록 분분한 이유는 원본이 방대해서도 아니며, 번역자마다 역량차가 있어서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보다는 "호메로스와 관련된 것 그리고 언어와 관련된 것"을 파악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는 일찍이 보르헤스가 단편 소설에서 삐에르 메나르라는 저자를 앞세워 말했던 것처럼, 시대가 다르고 저자(번역자)가 다르고, 국적이 다르고, 이 모든 것을 둘러싼 상황이 다르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원본에 담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시대와 사람들"을 번역하려고 할 때 모두 불충분하며, 다만 번역자들은 그 나름으로 원본의 '의도'를 파하악하려고 할 뿐인데 그렇게 본다면 모든 번역은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란 말일까요? 애매모호하긴 하지만 보르헤스는 이 '번역은 본디 불가능하다'와 '모든 번역이 가능하다' 사이에서 "버틀러의 차분한 번역"에 수줍게 손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픽션들'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권. 기호학, 해체주의, 후기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20세기 주요 현대 사상을 견인한 선구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대표작. 1941년 발표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과 1944년 발표한 '기교들'에 수록된 열일곱 편의 단편 소설을 모은 소설집으로, 일생 동안 단 한 편의 장편 소설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단편 전문 작가 보르헤스의 문학적 정수를 보여 준다.
번역본이 열등하다는 미신(이탈리아의 유명한 금언에서 유래한 말이다.)은 어설픈 경험에서 연유한 것이다. 훌륭한 텍스트 치고 불변하고 완벽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텍스트는 없다. 다만 여기에는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수없이 들여다봐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흄은 인과 관계라는 일상적인 관념과 연속을 동일한 것으로 여겼다. 좋은 영화는 다시 보면 더 좋게 보이듯이, 우리는 반복에 불과한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명한 책은 사실 첫 독서가 재독이다. 이미 그 책의 내용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펼쳐 보기 때문이다. "고전은 여러 번 읽어라."라는 격언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한 것이다.
영원성의 역사 142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병규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아킬레우스와 거북의 영원한 경주] 이번에는 '아킬레우스의 거북이'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제논이 제기한 역설 문제를 살펴봅니다. 해당 문제는 너무 유명해서 따로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역사적으로 이 역설 문제를 둘러싼 수많은 논박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궤변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이 문제가 이끌어낸 논의는 매우 풍성하며, 일견 간단해 보이는 이 문제를 섬세하게 논파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당대의 내로라 하는 천재들이 이 역설 문제에 뛰어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또 다른 크고 작은 오류를 범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고등학교 수학에서 흔히 '무한', '극한'으로 간단히 설명하는 개념도 이 문제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실무한(potential infinity)과 가무한(actual infinity) 개념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해에 도움이 되는 배경 설명을 좀 하자면, 제논은 자신의 스승인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역설 문제를 제기했다고 전해집니다. 간단히 말하면, 파르메니데스는 후일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영향을 미친 학자로서 '사유하는 것은 존재와 동일한 것'이라고 보았으며,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는 없다"라는 주장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는 일견 당연한 동어반복처럼 읽히지만, 여기서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있음'과 '없음'은 '존재', 즉 '일자(一者)’에 대한 논의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는 이후 서구 철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 '부동'하며, '자기동일적'일 뿐 아니라, '충만한 구(球)’의 특성을 지닌다고 일컬어집니다. 제논의 역설은 바로 이 '일자'를 증명하기 위해서 수학적인 귀류법을 활용한 것으로, 일종의 반대 명제인 '운동하며 끊임없이 나아가는 존재'로서 아킬레우스의 거북이, 날아가는 화살 따위의 역설 문제를 내세웠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좀더 설명해보면, 우리에게는 ⟪자유론⟫으로 더 유명한 존 스튜어트 밀은 1843년 ⟪논리학체계⟫라는 책에서 제논의 역설을 논박한 적이 있습니다. 밀은 제논이 전제에서는 '영원'을 '무한히 긴 시간을 의미한다'라고 말해놓고, 결론에서는 '유한한 시간을 무한히 분할한다는 의미'로 썼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를 가무한과 실무한으로 설명하면, 자연수의 수열(1,2,3··· n, ···)처럼 생성하는 무한을 전제해놓고서는 '무한한 분할이 유한한 전체를 이루는' 실무한의 예시를 들었다는 겁니다. 베르그송 역시 제논의 역설을 반박하면서, "공간만이 자의적인 해체와 재구성 방식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망각"했으며, 그리하여 운동은 불가분함에도 "운동과 공간을 혼동"해서 논증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나아가 보르헤스는 버틀런트 러셀을 들어, '부분은 전체보다 작지 않음'이 어떻게 증명되고 있는지를 살핀 후, 이 역시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다른 견해도 소개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제논의 역설이 옳고 그른지 하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논의 역설을 논박하는 과정에서 '무한'과 '연속성'에 대한 우리의 사유가 증대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글 말미의 두 문단은 제 입장에서는 의뭉스러움으로 가득합니다. 보르헤스는 '무한'이라는 개념이 오늘날 '현실로서 시간과 공간'에 위협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무한이 현실을 위협하는 위험한 개념이기 때문에 이를 논하는 사람은 목숨을 위협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보르헤스는 말미에 오늘날 '제논의 역설'이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단서를 붙이고 있습니다. "단 우리가 시간과 공간의 관념성을 받아들일 때는 예외"라는 것입니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결국 우리는 제논의 역설을 잠재우기 위해 관념론을 받아들여야 하며, "지각된 것의 구체적인 증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인즉, 공간과 시간은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인간의 인식에 의해 구성된 관념이라는 철학적 입장을 보르헤스는 지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훗날 공교롭게도 보르헤스가 쓴 단편 ⟨파란 호랑이들⟩에는 무한히 쪼개어지며, 증식되는 것처럼 보이는 돌멩이(calculus)가 나옵니다. 그 단편을 읽어보면 이 글이 좀더 이해하기 수월하리라고 봅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보르헤스의 소설은 때로 한 페이지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짧은분량에 현실과 환상을 뒤섞고 시간 또는 존재와 같은 우주론적 주제를 형상화함으로써 고도로 지적인 특성을 보인다.
달리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서 첨언합니다. 중간 부분에서, 존 스튜어트 밀이 제논의 역설을 지적한 내용을 두고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느끼기에 스튜어트 밀의 야심찬 논박은 역설의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 역설의 "문제는 상상조차 쉽지 않다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는 원근법적으로 작아질 뿐 아니라 극미한 장소를 점유해야 하기 때문에 작아져야 한다는 것이 보르헤스의 설명입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했을 때 보르헤스의 이러한 견해 역시 모호한 부분이 있습니다. 수학적인 점과 존재를 뒤섞어서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학적인 점은 공간을 점유하지 않지만 위치는 특정할 수 있는 가상적이고 관념적인 대상인데, 그것을 너무 쉽게 공간 속의 '한 존재'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를 존재로 볼 것인지, 수학적인 점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서 이 문제는 또 달라지게 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물론 보르헤스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수학적인 점과 존재를 혼동하는 오류를 숨겨놓았을 수도 있습니다. 글 전체의 흐름으로 봤을 때도, 역설 문제는 오류에 오류를 거듭하면서 그와 관련된 논의를 풍성하게 이끌어냈으니까요.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달리 오류는 한갓 흠결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논의를 열고 대화에 동참하게 하는 우아한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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