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책 챌린지] 2. 재난, 그 이후

D-29
390~391쪽, [그의 도덕적 명료성이 그제야 되돌아왔다. 메모리얼에서 그가 모르핀과 미다졸람을 주사했던 바로 그 환자들이 바로 이곳까지 왔다면, 그들은 기껏해야 고통을 받다 죽어버렸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해도 되나요?” 재난 이후 원래는 도덕적인 차원이었던 이 질문이 틸에게는 법적인 차원으로 변모했으며, 그로서는 확신의 가격을 결가의 대가로 치른 셈이 되고 말았다.]
400쪽,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법 집행기관 공무원들도 비극에 대처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입맛 떨어지는 농담을 주고받을 때가 있었다.] 기자도 비슷합니다.
407쪽, [복도 저편의 간호사실에 있는 상자 안에는 접이식 부리가 달린 금속제 후두경이 들어 있었다. 포는 이 도구로 환자의 입을 벌리고, 이 도구를 입안으로 집어넣어 혀를 옆으로 제치고, 다른 손으로 호흡용 튜브를 꺾어 환자의 목구멍에 집어넣곤 했다. 여기에는 그녀가 생명을 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하려고 노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었다. 대중이 그녀의 이름을 알기 전에 그녀가 이런 증거를 내보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시먼스의 저지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런 걱정은 불과 며칠 뒤에 현실이 되었다.]
411쪽, [포는 항상 이들과 함께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가 수술을 할 수 없으며, 한동안 멀리 떠나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었다. 허리케인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관한 질문이 나왔다. 그녀는 자기 경험이 정말로 끔찍했고, 거기에 있지 않았던 사람은 절대로, 결코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브렌다에게 말했다. 즉 말로는 결코 다 설명할 수 없다고 말이다.]
26쪽, [하지만 이곳을 메모리얼 메디컬 센터라고 부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뱁티스트(침례교)'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곳은 본래 '서던 뱁티스트 병원'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장소의 행정 명칭과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이름, 둘 중에 어떤 것이 더 힘을 가지고 있을까요. 침례교라는 명칭이 카트리나로 발생하게 될 수해의 비유로 기능하는 연출에서 작가의 의도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여담이지만 토니 모리슨의 글에서 이러한 기법이 때때로 발견되더라고요. 특히 '솔로몬의 노래'에서)
아, 침례교와 수해를 연결 지을 생각은 못해봤네요. 대단하십니다. 저는 서울 강북구가 고향이고, 마포구처럼 역사가 오래된 동네에서 산 기간이 꽤 되어서, 행정 명칭보다는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이름이 저한테는 더 강하게 다가옵니다. 마포구 같은 곳은 자기가 사는 동네의 정식 행정 명칭이 뭔지도 상당히 헷갈립니다. 행정동도 있고 법정동도 있고 해서...
『솔로몬의 노래』 좋은가요? 어릴 때(아마도 토니 모리슨이 노벨문학상 받은 직후에) 『빌러비드』 읽다가 그만두고 이후 펼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다시 도전해보고 싶기는 한데... 그런데 제가 읽었던 책은 분명히 ‘비러브드’로 기억하는데... 그새 번역 제목이 ‘빌러비드’로 바뀌었나 봅니다.
샐린저의 말처럼 어떤 작가는 친구가 되고 싶게 만든다면 토니 모리슨은 배우고 싶게 만드는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솔로몬의 노래'는 '빌러비드'보다 서사 구조도 어렵고, 이야기가 묘사하는 공간도 방대해서 읽기 훨씬 어려웠어요. 그렇지만 모리슨은 제가 아는 그 누구보다 인간의 고통을 합당하게 제시하는 사람이라 말씀드리고 싶네요. 제가 느슨한 공동체주의에 관심이 있어서 그런가 한 인간의 삶이 역사에서(모리슨의 경우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겪은 상처의 역사겠지요?) 종속되지도 분리되지도 않고 흐름 속에서 발현한 듯한 모리슨의 글이 좋았고, 그래서 '솔로몬의 노래'가 좋았습니다. 제가 사람이 좀 구닥다리라 아직 소설에도 목표와 기능이 존재한다고 믿는데, 제 경우에는 인간성의 재현이 소설의 끝에 있기를 바라고, 재현의 방식이 개인적인 것을(모호한 표현 죄송합니다) 넘어설 때 환희를 느끼고는 합니다.
겨울꿈님 작가 영업 너무 잘하시네요. 저는 솔직히 토니 모리슨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새 학기에 사귀고 싶은 동급생이나 그 아래서 배워보고 싶은 선생님보다는 가능하면 미루고 싶은 숙제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거든요. (얼마 전까지 조너선 프랜즌이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이제 겨울꿈님 글 읽고 나니 안 읽을 수는 없겠다 싶네요. 『솔로몬의 노래』보다 『빌러비드』가 좀 더 읽기 수월하다는 정보 감사합니다. ^^
여담이지만 '솔로몬의 노래'라는 제목도 성서의 아가서에서 따왔더군요. ('재난, 그 이후'의 사적인 명명을 성서에서 따오신 것을 보고 덧붙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노래』가 『빌러비드』보다 더 먼저 쓴 작품이군요. 모리슨의 세 번째 소설이고. 작업 초기부터 걸작을 펑펑 써내는 작가들을 보면 신기합니다.
이 병원 이름이 원래는 ‘서던 뱁티스트 병원’이었다가,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피해를 입을 때에는 ‘메모리얼 메디컬 센터’였다가, 이후 ‘악스너 뱁티스트 메디컬 센터(Ochsner Baptist Medical Center)’로 이름을 바꿨다고 하네요. ‘침례’라는 이름을 병원에 다시 쓴 명명자의 의도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히 그때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강렬한 인상을 받기는 했을 거 같아요. 물에 잠겨 정화된다는 상징이 너무 강력해서, 셰리 핑크 저자도 책 제목으로 관련 문구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저는 문득 창세기 노아의 방주 부분에서 한 구절을 따와서 제목을 짓는 건 어땠을까 싶기도 하네요. 아니면 한국어로는 어차피 별 의미 없지만 영어 숙어를 활용해서 ‘Coming Hell or High Water’ 같은 제목도 상상해 봅니다. ‘Five Days at Memorial’도 건조하니 좋지만.
꽤나 매력적인 제목인데 카트리나 재해를 빈곤과 인종적 측면에서 분석한, 다른 책에서 먼저 선점해 간 것 같네요. <Come Hell or High Water: Hurricane Katrina and the Color of Disaster>(2007) 아마존에 있는 책이었습니다.
제목을 다시 한번 씁니다. 「Come Hell or High Water: Hurricane Katrina and the Color of Disaster」 처음에 제목을 화살괄호를 써서 표시하니 마치 쓰지 않은 것처럼 전부 날아가버리네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아마 홑화살괄호라고 부르는 꺾쇠 안의 영문자들을 html 명령어로 인식하는 모양이에요. 꺾쇠를 많이 쓰게 될 것 같은 사이트이니 빠른 시일 내에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런 덴장... 어쩐지 너무 멋있는 문구더라니... Color of Disaster라는 표현도 멋진데요.
54쪽 [실제로 서던 뱁티스트 병원은 인종통합정책을 맨 마지막에 가서야 받아들인 남부의 병원 가운데 하나였다...(중략)...1966년 이 병원의 성명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병원의 운영 조건과 상태를 지시하는 정부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남아 있어야만 비로소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더 잘 봉사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바이다."] 다른 인종에 관한 미국 남부 지역의 반감이 어디에서 오는지 궁금하게 되네요. (앵무새 죽이기였는지 파수꾼이었는지 헷갈리지만) 남북전쟁에 나선 남부인의 대부분이 노예를 소유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연방 정부가 지시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싸웠다는 하퍼 리의 진술을 생각해보면 이 사람들은 변화를 지독하게 싫어하는 게 아닐까란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니 이러한 모습이 하수, 배수 시스템을 정비하지 않은 행정 체계의 태도와도 비슷하네요.
노예 해방 이전 시대의 정서가 수백 년째 내려오는 걸까요? 공장이 발달한 북부와 달리 남부에서는 목화 산업이 노예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아니면 미국의 경제 중심이 북부로 이동하고 남부가 소외되면서, 자기들의 전통에 대한 자존심이 기묘하게 과거의 편견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걸까요?
105쪽 [JCAHO가 2000년대 들어 새로운 비상 기준을 제안하자, 미국 전역의 병원 중역진들은 이에 저항했으며, 자칫 값비싸고 보조금도 없는 의무사항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세요!" JCAHO 관리들에게 보내는 이들의 메시지는 딱 이런 식이었다. "우리도 나름의 대비는 하고 있으니까."] 제 앎이 부족해서 제대로 된 답을 못하겠지만, 이 페이지의 수세적인 발화와 비슷한 태도와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전통이라는 단어를 이끌어낸다면, 자기 본위의 차원이 아닌 외부의 작용이 변화를 이끌어내는데 대한 반발 역시 작용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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