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책 챌린지] 2. 재난, 그 이후

D-29
208쪽, [재난에서 비롯된 스트레스 때문에 사람들의 시야도 좁아져서, 마치 이들은 다른 사람의 경험은 믿지 않고 오로지 자기 경험만 믿는 듯했다. 거듭해서 윈은 다른 사람들도 메모리얼 내부에서 벌어진 상황의 중대성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는 징후를 목격했다. 이날 아침 일찍, 여성 외래 환자 한 명이 어찌어찌 홍수를 건너 병원으로 와서 화학 치료 예약이 되어 있다고 말했다. 병원 주위의 경사진 땅 위로는 이미 2미터 가까이 물이 차올라 있었다.]
212쪽, [캐런 윈은 이미 병원에 모인 사람들만 해도 자기네 능력 한도를 넘어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문 앞에서 돌려보낸 사람들 거의 모두가 흑인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거절 행위에 어떤 인종 차별주의 낌새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반면, 킹은 무엇보다 거절당한 사람 대부분이 자기와 똑같이 검은 피부를 가졌다는 사실에 기분이 상한 상태였다.]
214쪽, 개들을 안락사시킨 뒤 벌어진 상황. [롤피가 죽고 나서 울고 있던 쿡의 아내와 딸을 본 호러스 볼츠는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다. 유잉 쿡은 특유의 퉁명스러운 말투로 방금 있었던 일을 설명했으며, 자신의 슬픔을 감추기 위해서 일부러 웃음까지 터뜨렸는데, 볼츠의 눈에는 그야말로 악마 같은 웃음이 아닐 수 없었다.]
제가 저렇게 위악을 떠는 습관이 있거든요. 너무 슬퍼서 상황을 감당할 수가 없을 때. 위악이라도 떨지 않으면 무너질 거 같아서 그러는데, 오해를 많이 받겠지요.
218쪽, [똑같이 파란색 문양의 환자복을 입고 있다보니, 쿡이 보기에는 이들이 마치 교회 성가대원 같았다. 도움의 손길은 너무 느리게 오고 있었다. 떠나야 할 사람이 너무 많다보니, 결국 성공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이것이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었고, 쿡의 눈에는 두 가지 선택의 여지밖에 없었다. 즉 이들의 죽음을 재촉하느냐, 이들을 버려두고 떠나느냐였다. 이것이 핵심 문제였다. 하지만 환자를 그냥 놓아두고 떠날 수야 없었다. 인도적인 선택은 오히려 환자의 눈을 감기는 것인 듯했다.]
224쪽, [병원 내 화장실은 더럽기 짝이 없었다. 이미 막힌 변기를 사람들이 계속 사용하다보니, 오물이 바닥으로 흘러 넘쳤다. 청소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자원봉사자들의 열의조차 화장실 문 앞에서는 주춤거리고 물러서는 듯했다.] 오 노...
225~226쪽, [한 남자 환자는 밤이 되었는데도 휠체어에 계속 앉아 있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내일 아침에 맨 먼저 떠날 수 있도록 대열의 맨 앞에 있고 싶었는데, 휠체어에 앉아 있으면 언제라도 움직일 채비가 되어 있으니 좀 더 유리하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242쪽, [“그들에게는 식량이 없고, 버젓한 환경, 즉 쉼터가 없기 때문에, 급기야 원초적인 약육강식의 인간 본능이 기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259쪽, [멀더릭은 나이 많은 그 여자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환자의 등에 깐 패드를 벗겨내고, 오물을 닦기 시작했다. 여자는 울었다. 기저귀와 깨끗한 침구가 부족한 상황에 더위까지 겹치면서, 환자들을 건조하고 깨끗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간호사들의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말았다. 환자의 피부가 쓸려 있었다. 멀더릭은 환자의 엉덩이에서도 빨간 종기를 새로 발견했다. 간이침대 위에서 땀을 흘리며 계속 누워 있다보니, 피부가 결국 터져버린 것 같았다. 멀더릭이 아무리 살살 만져도 환자는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
264쪽, [코커럼은 자기들이 이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일이 사실상 고문이나 다름없는 고통의 과정을 겪게 하는 것이므로, 거의 범죄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276쪽, [십대 자녀를 데려온 간호사 2명은 꼭 나가야 한다고 울면서 하소연했다. 이곳에는 아직 돌봐야 할 환자가 있지 않느냐고 간호부장이 말하자, 간호사들은 도리어 그녀에게 욕을 했다. 다른 간호사들은 이미 떠나라는 허락을 받은 바 있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안 된단 말인가?]
300~301쪽, [2층의 환자들이 줄줄이 죽어나가면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다른 사람들 역시 익명의 간호사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주사를 맞은 환자들과 친숙했던 몇몇 간호사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생존해 있었다면 끝까지 안전하게 구조되지 못하리라고 볼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고 생각했다. 한 직원은 마치 환자들에게 이런 주사를 놓는 일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뭔가 비현실적인, 그리고 아직 생각이 여물지 못한 사람들로 간주했다. 2층을 이리저리 배회하는 다른 직원 대부분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비록 끔찍하기는 해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313~315쪽, [다른 어디보다 많은 환자가 사망한 병원이 바로 메모리얼이었지만, 홍수 지역 주변의 다른 보건 시설에서도 끔찍한 이야기들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세인트버나드 패리시에서 무너진 제방 근처에 있던 단층짜리 요양원 세인트리타스에서는 무려 30명 이상의 환자가 익사한 것이 분명했다. 폭풍 직전에 시설 대피와 관련해 재촉을 받았던 운영자 부부도 종적을 알 수가 없었다.]
342쪽, [루이지애나 주의 법률에서 규정한 2급 살인에는, 살인하려는 구체적인 의도를 가지고 범한 살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카트리나 직후의 어수선한 상황이다보니, 굳이 사형 판결을 목표로 삼지 말자고, 따라서 굳이 1급 살인 혐의를 씌울 필요까지는 없다는 데 모두가 동의하는 듯했다. 이보다는 경미한 ‘의도 없는 살인(故殺)’, 또는 방조 살인 혐의는 언제라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참고: 고살 : 고살(故殺, manslaughter)은 영미법에서 살인에 대한 분류이다. manslaughter는 우발적 살인과 과실치사를 포함하며 처음부터 살인의 의도가 있었던 모살(murder)과 구분된다. 대한민국의 법학계에서는 고살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원래 한국어 단어 고살의 정의엔 과실치사가 포함되지 않으므로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C%82%B4
한자로 ‘故殺’이라고 적어 놓고 ‘의도 없는 살인’이라고 앞에 나와 있는 게 의아했는데, 고살이라는 단어 자체가 정확한 번역이 아니군요.
343쪽, [섀퍼가 가장 충격을 받은 부분은 그곳에 풍기는 죽음의 냄새였다. 병원 어디에서나 그 냄새가 났다. 한번 맡으면 결코 잊지 못할 법한 냄새였다.]
아이티 지진이나 인도네시아 쓰나미 재난 이후 구호현장에 관련한 기사를 읽으면 항상 나오는게 그 냄새에 대한 내용이었네요. 현장에서 미처 수습되지 못한 부패한 시신들에서 풍겨오는 시큼하고 비릿하고 지독한, 한번 맡으면 잊지 못하는 그런 냄새에 대한 내용이요. 그 냄새들이 몸에 달라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던 그런 강렬했던 묘사들이 기억납니다. 궁금하긴 한데 절대 맡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럴 일이 없었으면 하고요.
동아일보 입사 동기 기자가 인도네시아 쓰나미 때 출장을 가서 르포 기사를 쓰고 왔어요. 그 형도 시신의 악취 이야기를 하더군요. 저는 대구 지하철 사고 때 취재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제 후각 경험은 특별한 게 없네요. 쪽방촌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현장 쪽의 냄새가 더 기억이 강하게 납니다.
프롤로그부터 7장까지 1부에서는 의사와 간호사들의 관점에서 쭉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러다 2부 8장에서부터 수사관의 시선으로 사건을 다시 보게 되는데, 이러한 관점 전환이 독자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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