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기름> 51p의 “이제 뭘 하지?”와 413p의 “이제 뭘 하고 살지?”가 대응되는 것처럼,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도 대응됩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 소설의 핵심입니다. <피와 기름>은 “초월적인 심판도 구원도 없이 부서지고 상처입은 세계에서, 연합으로부터 벗어나 분열된 각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겠느냐”를 묻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며 살아가겠느냐’는 질문은 필연적으로 ‘믿음-소망-사랑’의 결속체로부터 그 원천을 찾을 수밖에 없고, 동시에 “이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세계로부터 벗어난다는 것, 세계가 새로워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라는 질문과도 관계맺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실존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역사철학의 한 테제로 읽을 만합니다.
이 체제 자체를 엎어야 한다고, 그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80억이 된다면 인간 사회는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7:20-21과 마태 6:10을 역사철학적 테제로 전유하자면, 아버지의 나라가 지상에 임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가 될 것입니다(80억 명이 동시에 탐욕을 내려놓고 서로를 사랑한다면 자본주의니 사민주의니를 논할 것도 없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80억의 규모까지는 아니더라도, 세계의 일부는 언제나 그처럼 믿음에 따른 격렬한 변화를 겪곤 합니다. 프랑스 혁명이라든지, 소련의 수립이라든지 하는 일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 이러한 변화는 “타락한 시대가 끝나고 새 시대가 열린다”는 소망-믿음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종말론적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종말론적 희망(공산국가의 연대체가 수립되었으니 새로운 시대가 열리리라는)은 또다른 종말론적 희망으로 대체되기 마련이며(고르바초프의 소련 개방처럼), 이러한 역학은 세계 역사가 세계 심판이라는 실러의 말에 드러납니다.]
한편 세상에는 일상에 그런대로 만족하는 사람, 혹은 현 체제 내에서 충분한 바를 누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종말을 결코 바라지 않거나 떨떠름해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가 어느 정도는 바뀌어야 한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일종의 개량주의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거니와 지금의 세상에 속한 것 중 어느 무엇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물론 종말을 찬성할 것인데, 찬성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찬가지로 반대할 수도 있는데, 반대하지 않을 이유 또한 마땅치 않기 때문입니다.
완독한 분이라면 각각의 분파가 어디에 대응되는지 깨달으실 것입니다.
<피와 기름>은 어쨌거나 마지막 유형의 사람이 세계를 통과하며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 법을 이해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뭘 하고 살 것이냐’는 질문은 그 구조의 핵심 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51p의 “이제 뭘 하지?”와 413p의 “이제 뭘 하고 살지?”를 다시 언급하자면, ‘하다’와 ‘하다-살다’의 차이는 꽤 중요한 것입니다. 순간순간의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행위와 삶의 방식으로서의 행위 사이에는 명백한 질적 차이가 존재하지요.
[박소해의 장르살롱] 23. 단요 작가의 신학 스릴러 <피와 기름>
D-29

단요

siouxsie
오! 역시 작가님의 답변도 책처럼 명료하네요.
글에서 표현하신 걸 대입해 보면, 전 개량주의자에 가깝네요. ^^
전 인간이란 종이 전부 다른 종으로 바뀌지 않는 이상, 전복되어 봤자 또 다시 비슷한 착취와 불의한 구조로 돌아갈 것 같아(역사가 항상 그랬듯이), 그냥 수선하면서 사는 쪽이 더 마음에 듭니다. 전복되면 제 삶도 너무 힘들어질 것 같고요.
작가님이 어렸을 때 읽으셨다는 종교관련 자료들은 저도 읽어 보고 싶은데, 가서 받으면 바로 포교활동 들어올 거 같아서 그냥 지나칩니다. 대신 교회 다닐 적에 '주보' 맨 뒤에 한국의 사이비종교의 역사와 분파에 대한 내용은 목사님 설교시간에 설교 안 듣고 열심히 읽었어요. 읽었지만 다 까먹었고요. ^^;; 지금은 무신론자까 지는 아니지만(초월자가 있다고 믿으려고 노력중입니다.) 교회는 더 이상 가지 않습니다.
질문은 드리고 싶은데, 책을 읽으면서 드는 의문은 별로 없었습니다. 책을 완벽히 소화한 상태가 아닌 것도 있고, 위에 답변도 명확히 해 주셔서, 쉽지는 않지만 제 나름대로 이해해 보려고 노력중입니다. 다른 책들을 읽으면서 작가님의 세계관에 더 다가가려고요! 2025년의 시작에 이렇게 좋은 책을 읽다니~이런 훌륭한 책이 장르소설로만 제에발 국한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단요
여기에 대해 개인적인 첨언을 덧붙이자면, 그 잡지는 00년대 초중순 이후로 사실상 껍데기만 남아 있고 실질적인 명맥이 끊긴 상태입니다. 그건 너무 당연하게도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기쁜 소식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들은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에 박제된 유산이지 지금 이 시점에 현재진행형으로 지속되는 무언가는 아닙니다.
그리고 동시에 저는 이런 생각도 합니다. 저를 주류 신학에 발 붙이지 못하게끔 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종교사적 지식이었는데, 그러니까, 저는 니케아 공의회가 결의되기 전에 아리우스파와 비아리우스파가 어떤 식으로 엎치락뒤치락 했는지를 압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펠라기우스를 쫓아낸 데에 어떤 정치권력이 작용했는지를 알고, 그 쫓아냄으로 인해 자유의지의 문제가 신학의 큰 도전 중 하나로 붙박였다는 것을 압니다(그리고 이 대결이 알미니안과 칼뱅파의 긴장을 통해 다시 재현된다는 것도 압니다). 그리고 또 이런저런 "사람들이 서로 합의하여 정하거나 합의되지 않아 다투는" 문제로 인해 위그노들을 죽이고, 도나투스파들을 박해하고, 재침례파들을 물에 빠트려 죽이고, 그러다가도 살아남은 쪽들은 한 계파로 자리매김하고, 그런 일이 역사 속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것을 보면 저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교주 1인을 섬기며 축재와 불의에 가담하게 되는 믿음, 믿는 자들이 곤궁해지는 믿음은 악하다! 그건 확실하다. 그러나 솔직히, 그런 방식으로 어긋난 교파가 아닌 이상, 다 연차 쌓이고 나와바리 생기면 목소리 커지게 된다 … 지금은 취급이 영 아니지만 200년만 더 지나 보면 Adventism 교파들도 그럭저럭 이단 딱지 뗄 것이다. 가톨릭이 위그노 단체로 때려죽일 때는 칼뱅파가 이단이었고 당장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개신교들 실컷 이단 취급 받았는데 … 2차 바티칸 공의회와 에큐메니컬이 … 애초에 1세기로 돌아가면 원시 기독교는 유대교의 이단 컬트 … 중얼중얼"
그 점에서 저는 그 잡지가 JMS, 안상홍, 천부교, 구원파 이런 것들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만 확실히 해두고 싶습니다(그러니까, '한국의 사이비종교' 로 분류되는 착취자들과는 같이 놓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미국에 본산을 둔 것이기도 하고, 잡지 자체도 미국 내수용이라는 느낌이 강했고 … ). 비록 현대적인 측면에서는 괴팍한 면이 있긴 했지만(이중 몇몇은 상당히 괴팍했다는 점은 인정하겠습니다) 좋은 점도 확실히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교주를 우상화하거나 강제로 금전을 갈취하는 부류가 아니었고, 돈을 내면 구원받는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반대로 공교육을 잘 받고 정직하게 살며 이웃을 돕고 정부에 세금을 따박따박 내라고 가르쳤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잡지는 장애가 걸림돌이나 개인 행동에 대한 벌이 아니라 '우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장애 있는 사람들 역시 이 사회 속에서 가치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의료 기술이 그들을 도우며 사회적 도움과 주변의 지지 또한 필요하다고도 말해 주었습니다(저는 어릴 때 사고를 당해서 후유증으로 장애가 남았는데, 어쨌든 그것은 어린 시절의 저한테 좋은 이야기였습니다). 종말이 가까웠으니 경건함을 유지하고 사치와 탐욕을 부리지 말며 항상 높은 도덕적 기준을 고수하며 살아라, 서로 미워하거나 다투지 말아라 … 참 좋은 말입니다. 저는 그 점에서 종말이 정말로 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 정도입니다.
뜻밖에도 설명이 길어졌는데 당혹스러운 답변이 아니길 바랄 따름입니다. 호평에 대해서는 감사드립니다.
만렙토끼
작가님의 답변이 길고 자세하고, 또 작가님의 생각을 담고 있어서 또 하나의 책을 읽는 기분이였어요! 제겐 조금 어려운 부분 들도 있지만🤣 모임이 끝나고도 메모해두고 느긋하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Henry
작가님의 답을 읽으면서 질문하길 참 잘했다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나 속속들이 생각을 밀어넣고 주워섬긴 문장과 단어들이 만들어낸 생각이라니요! 살되 무엇을 혹은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는 그 실존에 대한 이야기로 <피와 기름>을 읽어냄이 그르지않은 방향이었구나 안도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그리고 아직"의 간극이 주는 긴장감이, 언급하신 누가복음 17:20-21과 마태복음 6:10에 대입해보면 그렇게 이미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 (신의 영향력의 도달하는 시간과 공간)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을, 작가님은 <피와 기 름>으로 펼쳐보인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종말론자이기에 지금 여기의 소중함이 크고도 큽니다. 그래서 또 다른 의미로 <피와 기름>은 꽤나 많은 물음표를 제 머리 속에 남기는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 드립니다.

박소해
헨리님이 종말론자셨군요. 새로운 정보입니다. ( 수첩을 열어 헨리 님 이름 밑에 첩보를 업데이트한다)

Henry
ㅎㅎ 첩보로 분류되는군요^^

박소해
헨리 님에 대한 새 정보는 언제나 첩보입니다. 🤭

Henry
그럼 가끔 첩보를 흘려보도록(?) 하겠습니다.^^;

siouxsie
평범한 인간인 게 뻔해도, 원하는 이야기만 들을 수 있다면 덜컥 믿어버리는 게 사람 심리야.
『피와 기름』 102p, 단요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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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로 지정된 대화
밍묭
[사전질문]
결말에 대한 작가님의 해석이 궁금해요. 이 소설의 결말은 해피일까요 아니면 새드일까요? 책을 덮은 이후에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에 대해 작가님의 생각이 궁금 합니다!

단요
위 Henry님의 질문에 대한 응답이 이 질문에 대한 선제적인 답변이 될 것 같습니다. 우혁은 체제의 전복과 개량 중에서 후자를 택하고, (개인의 실천으로서의) 개량의 방편을 확정합니다. 그러니까 이 타협적인 엔딩은, 읽는 이 각자가 이 세상을 좋게 보느냐 나쁘게 보느냐에 따라 평이 갈릴 만한 것입니다. ⓐ 이 착취적이고 불의한 구조가 싫지만 엎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굴종한 것이다, 우혁이는 패배했으며 이 세계는 여전히 상처입고 있다 ⓑ 자본주의는 전례없는 풍요를 가져왔으니 개개인은 그냥 돈 벌고 살면서 적당히 주변 사람 돕는 게 옳다, 우혁이는 성공했으며 이 세계에는 화평이 왔다 …… 중에서 어떤 관점을 택할지는 개인의 자유겠 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이야기는 414p에서 끝났고, 이후에 작중 인물 개개인이 어떻게 될지, 작중의 세계가 어떻게 될지는 생각해본 바가 없습니다. 저는 인물을 사건 및 배경과 맞물리며 테마를 매개적으로 드러내는 톱니바퀴로 생각하는 편입니다. 소설이 세계의 일부를 건져내 만들어낸 모형정원이라면, 핵심은, 그 모형정원이 세계의 어떤 부분을 비추느냐일 것입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김뿌인
[사전 질문]
이 책의 1. 기획 배경이나 시발점이 궁금해요. (이러한 이야기를 써야지 라는 생각이라던가 영감을 줬던 것 등)
2. 주인공을 도박 중독자로 설정하신 것에 대한 이유가 궁금해요.

단요
1번의 경우, 앞선 질문들(특히 밥심님의 것)에 대한 응답이 마찬가지의 답이 될 것 같습니다.
2번의 경우,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말씀드리자면, 그게 쓰기에 가장 간편한 인물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평범한 회사원이나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년, 성수동을 들락거리는 대학생의 세계는 잘 모르고, 잘 모르기 때문에 그냥 제 세계에 속하는 것들을 씁니다.
한편 해설을 곁들이자면, 기독교적 신의 세계와 금융의 세계는(작중의 언어를 빌리자면, 맘몬의 통치는) 어떤 의미로든 인과와 섭리의 세계입니다. 주식시장의 붕괴와 혼돈 속에서조차 여전히 어떠한 질서가 작용하며, 마찬가지로 신학적 관점에서는 지금 이 시대의 난국 또한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과와 섭리의 세계 이전에는, 파괴적인 혼돈으로서의 자연이 존재합니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의 논평을 빌리자면, “냉정하게 말하면 자연은 희생의 순환이고 종교는 인간을 그러한 현실과 화해시키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때 도박판이란 ‘끊임없는 우주의 순환 고리’를 파멸적인 형태로 구현해놓은 장소입니다. 아무런 인과도 섭리도 없이 확률적으로 잃고, 따고, 잃고, 땁니다. 격렬한 에너지가 지나간 후에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다시 나타나서 새로운 에너지를 쏟아내고, 똑같은 일이 거듭됩니다. 즉 도박중독자란 (신과 맘몬 양측에 대하여) 그들의 통치 질서-주권을 부정하는 신성모독자고, 원시적인 자연의 사제(어쨌거나 최우혁에게 있어 도박은 성과 속을 교차시킴으로써 기적의 순간을 재현하는 수단입니다)인 셈입니다. 조강현이 최우혁에게 한 말(172p)에는 이러한 역학이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siouxsie
“ 사람은 오직 실체만을 알아보는 상태로 태어났다가 나이가 들어서는 추상과 이상이야말로 실체를 규정하는 요인임을 깨닫게 된다. 이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어디에도 없는 것이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고 믿음으로써 허상과 실체를 바꿔치는 기예다. 따라서 믿을 사람이라면 기적을 보기 전에 이미 믿으며 믿지 않을 사람은 무엇을 목격하든 삿된 생각을 품게 된다. ”
『피와 기름』 261p, 단요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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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아비현
거대한 십자로는 낮의 소요 사태가 환각이기라도 했던 것 처럼 뻔뻔하게 정돈 되어 있었다.
『피와 기름』 P50, 단요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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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아비현
그동안 우혁은 자신이 정신증의 마수에 사로잡혔을 가능성과 환각에 진실이 담겼을 가능성을 견주어보았다.
『피와 기름』 P138, 단요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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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심
질의에 대한 단요 작가님의 정성스러운 답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평범한 직장인 세계에서 살아 온 제가 잘 모르던 신학의 세계를 <피와 기름>을 통해 피상적으로나마, 어렵지 않게, 그것도 재밌게(저에게는 제일 중요한 요소입니다) 접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피와 기름>에 이어 단요 작가님의 다른 작품들도 차근차근 읽어나갈까 합니다. 작가님의 건필을 기원하겠습니다.
독서 중에 문장 수집을 조금 했습니다. 인상적인 문구들이 수집한 것보다 훨씬 많았지만 사실 책을 읽으면서 문장들을 옮겨 적는 행위에도 상당한 노력이 들어 저 같이 게으른 사람은 최소한으로 문장을 모으게 됩니다. 독서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남기고 싶다는 의미에서 올려둡니다.
밥심
“ <피와 기름>
19쪽
온종일 똑같은 혈관을 맴돌며, 심장에서 출발해 심장으로 되돌아오는 삶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49쪽
기분 나쁜 일과 그냥 나쁜 일이 있다면, 차라리 후자를 택하고 싶었다.
98 쪽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과 절실히 바라는 것이 있다고 치면, 인간은 대개 후자를 고르지 않습니까?
183 쪽
기술이 발전하고 국가 시스템이 정교해 지는 동안 ‘임박한 종말’의 뉘앙스는 희미해졌으며 신비와 영성도 힘을 잃었다. 대신 맘몬의 권세가, 돈의 힘이 종교의 자리를 꿰찼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와 금융이야말로 예수의 뜻이란 말인가?
186 쪽
돈은 즉흥적인 욕망과 친절을 표현하기에 좋을지라도, 정의와 공의를 드러내기엔 부족함이 있는 수단 이기 때문입니다.
191쪽
자신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느껴본 적도 없었다. 그는 종종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척했지만 결정권을 쥔 것은 기분이었다. 충동이었다. 바타유나 베르그송 같은 사상가들의 논지를 빌리더라도, 그런 고찰은 현학적인 정당화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냥 심장이 시켜서 한 것이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텐데 거기에 어려운 말을 덧씌워봤자…
198쪽
저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구분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인간은 좋은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에서 수많은 악이 기인한다고 봅니다. 악은 불행을 낳고, 불행은 다시 악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호오를 분별하며 자신에게 족한 것을 사랑하는 습성은 인간 행위의 원천이자 선행의 동력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의 정체입니다…
236쪽
돈은 인간성의 표현이므로 원죄의 등가물이라는 겁니다. 자율성과, 좋고 나쁨을 분별하여 사랑하는 마음과, 풍부한 욕망같은 가치들이 돈을 타고 흐릅니다. 그리고 이 흐름은 고삐가 풀리는 순간부터 몹시도 인간적이며 자율적인 방식으로 비인간성과 부자유를 강요하게 되지요. 이러한 모순적인 굴레가 세계를 옥죄고 무너뜨립니다. 자유는 좋습니다. 그러나 자유를 줄 것이라면 무엇이 좋거나 나쁘다 하는 기준점 또한 명확히 세워야만 합니다. 그럼으로써 인의를 쾌락에 앞세울 유인을 제공해야 합니다.
271쪽
나는 신을 믿어서가 아니라 삶의 지침을 위해 종교를 가졌다.
349 쪽
실체 너머로 부터 시작되는 믿음만이 실체를 바꿀 수 있으며 그것은 충동과 완전히 다른 유형의 힘이라는 사실.
353 쪽
당연하게도 삶이 순탄한 것은 진정한 문제가 유예 되고 있기 때문이다.
399 쪽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믿는다는 건 정말 신기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405 쪽
인의와 통치는 분명 다르다. 단순히 다르기만 한 수준이 아니라 종종 모순되기까지 한다. 또한 돈과 욕망의 흐름에는 곧잘 통치가 필요하다.
410 쪽
인간이 무언가를 사랑하고 바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끔찍한 일이다.
411 쪽
지상을 가만히 내려다 보는 태도야말로 최고의 형벌일 수 있다. 세상은 이미 그리고 아직 지옥 같다. ”
『피와 기름』 단요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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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로 지정된 대화

바닿늘
@래빗홀 @단요
우와....
답변의 수준이..
굉장히 굉장합니다.(?)
보면서 감탄했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나중 질문을 드려도 될런지요..?
혹시 추구하는 사상이 있으신가요??
마음대로 추측하건데..
왠지 적극 추구하는 스타일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틀렸다면 많이 죄송합니다. ^^;;;)
그래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
이라도 있다면 알고 싶습니다.
질문하는 입장에서 ~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상
혹은 시스템들을 생각나는대로
적어본다면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자유주의, 자연주의, 평화주의
법치주의, 민주주의 ...
이런 질문은 원래 의도적으로
하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한 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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