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되게 어려운 질문이네요.
현재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술을 익히는데 드는 비용이 엄청나다보니 향후 상대적 경제적 불평등은 더 가속될테고요. 그런데 이렇게 특정 직종으로만 자본이 몰리게 된다면 그에 부합하지 못하는 계층이 절대적 빈곤층이 될 가능성은 없을까요? 하여간, 그로 인한 사회 불안정에 대한 비용은 어떻게 될지 생각을 더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좋은 주제 감사합니다.
<권력과 진보> 함께 읽기
D-29
햐쿠

존르카레라이스
언급하신 가능성도 있을 것 같아요. 여러 SF 작품들에서 독재국가에 맞먹는 지배적인 기업과 절대 빈곤층으로 몰락한 다수로 이루어진 미래 사회를 그리는데 바로 그런 세계가 아닐까 합니다. 유사한 설정의 많은 작품이 나온다는 건 그만큼 사람들이 그런 우려를 갖고 있기 때문이겠죠? 저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특히 AI 는 여러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GoHo
기술의 진보가 절대빈곤을 해소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과거보다 기술의 진보는 대단한 속도감으로 달리고 있는데 절대빈곤이 해소된 것은 아닌 것 같고..
절대빈곤 계층은 기술 접근성의 격차로 인한 사회적 빈곤까지 얹고 사는 것 같아서요..
기술의 진보가 소수에게 집중되는 것을 도덕적인 잣대로 따질수는 없겠지만..
사회적 접근성 및 혜택이 과연 공평했는가의 문제가 밑바탕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집중을 '당연'하다고 생각해 경제적 불평등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불평등에 대한 책임을 지우거나 수용하라고만 하는 것은 도덕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존르카레라이스
질문의 전제부터 검토하셨네요. 네 말씀하신대로 절대빈곤이 해소된 것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인류가 발전함에 따라 절대빈곤이 감소하고 있다고 볼 증거는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절대빈곤의 감소가 기술의 진보 때문인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다시 물어볼 수 있고, @GoHo 님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자들도 아마 @GoHo 님처럼 기술 진보가 절대빈곤을 개선한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는 기술 진보만으로는 절대빈곤을 개선한다고 볼 수 없다이겠지요. 이를테면, ‘기술의 진보가 문제를 발생시키거나 악화시킬 수도 있다. 기술의 진보 후에 절대 빈곤이 개선되었다면 그것은 기술 진보의 혜택이 다수에게 공유되도록 하는 적극적인 ‘선택’이 있었고 이것이 주요한 요인이다.’ 라고 말이죠.
GoHo
절대빈곤을 감소시키는데 기술 진보가 기여한 바가 있겠지만..
기줄진보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으로 절대빈곤이 곤고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절대빈곤에 놓여 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인 교육조차 불가능 하거나 매우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고, 게다가 기술 활용이나 접근성도 낮기 때문에 경제활동에서 기회와 선택의 폭은 오히려 더더욱 좁아질수 있다고 봅니다.
예전에 비하면 유사한 경제활동에 더 높은 학력자들과 기술 진보의 결과물들이(로봇, AI..)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요.
절대빈곤을 벗어날 희망을 그들이 쉽게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보다.. '도덕적'이라는 것에 방점을 두어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절대빈곤 해소의 기여로 기술 진보가 소수에게 집중될 수 있겠지만 그것이 '당연하다는 생각'..
절대빈곤 해소에 도움을 받고 있으니 '경제적 불평등은 수용하라거나 감내하라고 짐지우는 것'..
(어떠한 불평등도 당연한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암튼.. 이런 인식은 도덕적이지 않은 것 같다는 이야기였습니다.. ^^;

존르카레라이스
부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GoHo 님의 생각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 (그리고 이제보니 제가 질문에서 위에는 절대빈곤 개선이라고 썼다가 아래에서는 절대빈곤 해소라고 잘못 썼네요.)
제가 이해한 바로는 두 가지 포인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절대빈곤층은 교육과 기회를 포함한 기술 접근성이 낮기 때문에 기술 진보의 혜택이 소수에게 집중되는 사회에서는 오히려 절대 빈곤이 심화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이 소수에게 집중되는 것을 당연시하고 감내를 요구하는 것은 도덕적이지 않다는 점으로 이해했습니다.
먼저 첫번째 포인트와 관련해서, @햐쿠 님이 말씀하신 부분과도 유사한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러한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 공감하고, 만약 그렇다면 기술 진보에 의해 야기된 경제적 불평등을 견제하는 과제는 훨씬 더 중요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책에서 “1960년대에는 25~54세 미국 남성 중 노동시장에서벗어나 있는 사람, 즉 장기 실업자이거나 일자리를 구하고 있지 않은 사람의 비중이 약 6퍼센트에 불과했지만 오늘날 이 숫자는 약 12퍼센트나 된다. 대학을 나오지 못한 남성들이 괜찮은 보수를 주는 일자리를 구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 것이 주요인이었다.” 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이 비율이 점점 증가한다면 절대 빈곤이 심화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도 듭니다.

존르카레라이스
두번째 포인트와 관련해서 드는 생각으로 제 질문이 좀 더 명료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아래 비슷해보이는 주장에 대해 우리의 도덕적인 직관이 다른 것 같습니다.
A) 기술 진보에 의해 경제적 불평등이 발생한 것은 도덕적이지 않다.
B) 기술 진보에 의해 경제적 불평등을 당연시하는 것은 도덕적이지 않다.
C) 기술 진보에 의해 경제적 불평등을 감내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도덕적이지 않다.
B), C)는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의식적 행위자를 가정한 반면에, A)는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현상입니다.
질문이 명료하도록 A를 조금 바꿔보면,
A’) 의사결정자들에 의해 기술 진보가 경제적 불평등을 발생하게 된 것은 도덕적이지 않다.
-> 저자들의 입장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것이, 적어도 저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키지 않도록 의사결정을 하는 선택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 프랭크퍼트는 경제적 불평등 자체가 도덕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불평등이 그것이 일부사람들로 하여금 ‘충분함’을 갖지 못하게 만드는 한에서만 도덕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A’)에 대해서도 만약 의사결정권자들의 결정이 ‘충분함’을 더 많은사람에게 제공한다면, 경제적 불평등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용인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도덕적이지 않다고 주장한 경우에 그 이유는 단순히 경제적 불평등이 발생해서가 아니라 일부사람들로 하여금 ‘충분함’을 갖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할 것 같습니다.
-> 참고로 프랭크퍼트는 경제적 폭식(economic gluttony) 개념을 들어 과도한 부의 집중을 비판합니다. 단순히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는 것을 문제 삼지는 않지만, 일부가 과도하게 경제적 자원을 점유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충분함’을 확보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특권층이 다른 이들의 ‘충분함’ 확보를 방해하지 않는지 검토하라고 제안합니다.
이번 기회에 생각해보면서 어떻게 질문을 좀 더 명료하게 할지 또 그에 대한 제 의견이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GoHo
'경제적 폭식'도 '경제적 불평등'을 야기할 것 같은데..
미묘하게 견해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에 대해서는 제가 직접 저자의 책을 읽어봐야 겠지요..ㅎ
배울 수 있어 감사합니다~~^^bb
햐쿠
2장
그가 가장 좋아한 경구 중 하나는 특히 생시몽적이었다. “재능 있는 사람들이 늘 나타날 것이다.” 레셉스에게 이 말은 어떤 문제가 생겨나더라도 뛰어난 사람이 기술적 해법을 찾아내리라는 의미였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모두가 전적으로 명백하게 인식하게 될 지점까지 자신이 모두를 데리고만 간다면 말이다.
권력과 진보 | 대런 애쓰모글루, 사이먼 존슨, 김승진 저
2장까지 읽으면서 Project management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비전과 기술이 있어도 열린 마음으로 프로젝트를 바라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교훈도 얻었습니다.
책읽을맛
“ 31쪽
생산성의 이들이 사회에서 어떻게 공유되는냐는 테크놀로지가 정확히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리고 경영자가 노동자를 대우하는 규칙, 규범, 기대가 그 사회에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에 달려있다.
41쪽
공유된 번영은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노동의 한계생산성을 높이고 테크놀로지의 이득이 기업과 노동자 사이에 분배될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
51쪽
강력한 지배층의 비전에 갇히지 않으려면 대안적인 권력을 가지고 지배 권력에 대항할 방법을 찾아야하며, 더 포용적인 비전으로 이기적인 비전에 저항하는 방법을 차아야한다. 그런데 아타깝게도 인공지능의 시대에 그렇게 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
『권력과 진보 - 기술과 번영을 둘러싼 천년의 쟁투』 대런 아세모글루.사이먼 존슨 지음, 김승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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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 "거대 금융은 좋은 것"이라는 레토릭이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진 것은 은행가들과 그들에게 동의하는 사람들이 그 방향으로 스토리를 짜고 질문을 구성하고 증거를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
『권력과 진보 - 기술과 번영을 둘러싼 천년의 쟁투』 p.126, 대런 아세모글루.사이먼 존슨 지음, 김승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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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진실이 있고 아이디어가 존재하기보단 아이디어에 맞춰진 새로운 진실이 탄생한다는 말을 이렇게 이해하기 쉽게 말할 수 있구나, 싶어서 이 문장만 몇 번 반복해서 읽었어요. 번역이 원문의 간결하고 분명한 매력을 잘 살려주는 것 같아요. 가볍지 않은 주제인데 쉽게 읽히네요.

하금
“ 사회적으로 강력한 사람들은 그들의 아이디어가 (그리고 많은 경우에 그들의 이해관계도) 중요하다고 스스로를 확신 시키고, 다른 사람들의 견해와 고통을 합당하게 무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
『권력과 진보 - 기술과 번영을 둘러싼 천년의 쟁투』 p.139, 대런 아세모글루.사이먼 존슨 지음, 김승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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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로 지정된 대화

존르카레라이스
오늘은 1라운드의 마지막 날입니다. 다들 2장까지 잘 읽으셨나요?
기대보다 많은 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신 덕분에 저는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1장이 조금 딱딱하게 느껴졌다면, 2장은 흥미로운 옛날이야기나 교훈을 주는 우화처럼 다가옵니다. 기술이 왜곡된 비전과 결합할 때 어떤 비극을 낳을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주죠. (한편으로는 레셉스의 능력과 야망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제 궁금한 것은, 어떻게 이러한 왜곡된 비전이 그토록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2장을 마무리하면서 저자들은 이 물음을 다룰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연일 각국의 뉴스를 장식하는 테크 기업 수장들의 행보를 보면, 그들의 비전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그들이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대중을 설득하여 자신의 비전을 확산시켜 왔는지 궁금증을 가지면서, 다음 라운드로 넘어가겠습니다.
<2라운드 일정>
=> 6일차 (2월 7일) ~ 10일차 (2월 11일): 3장, 4장

존르카레라이스
“ 레셉스를 이끄는 비전은 그가 굳게 믿고 있던 세 가지 신조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첫째는 19세기판 테크노-낙관주의였다. ... 레셉스는 그 과정에서 어떤 장애물이 나타나든지 간에 과학과 기술이 달려와서 구제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둘째는 시장에 대한 믿음이었다. 규모가 아무리 큰 프로젝트라도 민간 자본으로 자금을 충당할 수 있으며, 프로젝트에서 나오는 수 익으로 투자자들이 이득을 얻으면 이것 또한 공공선에 복무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터였다. 셋째는 그가 보지 않은 사각지대와 관련이 있는데, 레셉스는 유럽의 우선순위에만 관심을 두었을 뿐 비유럽인의 운명은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
『권력과 진보 - 기술과 번영을 둘러싼 천년의 쟁투』 p. 68, 대런 아세모글루.사이먼 존슨 지음, 김승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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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르카레라이스
“ 파나마 운하의 재앙을 야기한 것은 페르디낭 드 레셉스의 비전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비전은 어떻게 해서 그토록 지배적인 비전이 될 수 있었을까? 왜 레셉스의 견해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무릅쓰면서 돈과 목숨을 걸만큼 설득력이 있었을까? 답은 사회적 권력에, 특히 수만 명의 소액 투자자를 설득할 수 있었던 힘에 있다 ”
『권력과 진보 - 기술과 번영을 둘러싼 천년의 쟁투』 3장 p. 107, 대런 아세모글루.사이먼 존슨 지음, 김승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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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 더 놀랍게도, 피실험자가 자신의 지위가 더 높다고 인식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가령, 돈이 더 적은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 보게 하는 식으로) 속임수 등 비윤리적인 행동을 촉발할 수 있었다.
(중략) 켈트너의 연구는 무엇이 용인될 수 있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또 무엇이 공공선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자기 설득“이 중요한 요인임을 말해준다. 부유하고 저명한 사람들은 자신이 마땅히 가져야 할 몫을 가져가는 것이라거나 심지어는 탐욕이 도리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
『권력과 진보 - 기술과 번영을 둘러싼 천년의 쟁투』 p.140, 대런 아세모글루.사이먼 존슨 지음, 김승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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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우리는 가용한 지식을 구체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테크놀로지로 어떻게 전환시킬지 상상하는 방식이라고 비전을 정의했다.
『권력과 진보 - 기술과 번영을 둘러싼 천년의 쟁투』 p.141, 대런 아세모글루.사이먼 존슨 지음, 김승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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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 미래를 재구성하는 길은 길항 권력을 창출하는 것이고, 특히 다양한 목소리와 이해관계와 관점이 지배적인 비전에 맞서 균형추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폭넓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고 의제 설정에 다양한 아이디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로를 열어줄 제도를 일굼으로써, 우리는 소수만 누리는 의제 설정의 독점을 깨트릴 수 있다. ”
『권력과 진보 - 기술과 번영을 둘러싼 천년의 쟁투』 p.143, 대런 아세모글루.사이먼 존슨 지음, 김승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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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Ho
“ 어떤 아이디어가 너무 엉뚱하거나 너무 시대를 앞서가는 것으로 여겨져 제쳐질지, 아니면 그럴법하고 설득력 있게 보일지는 그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개인과 집단의 지배적인 믿음에 크게 좌우된다. p116 ”
『권력과 진보 - 기술과 번영을 둘러싼 천년의 쟁투』 대런 아세모글루.사이먼 존슨 지음, 김승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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