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을 다 읽었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내용들이 설명되어 있는데 흥미로워 보입니다.
<권력과 진보> 함께 읽기
D-29

루나84

존르카레라이스
네, 2장부터는 1장에서 제시된 저자들의 관점이 타당한지 역사적 사례를 통해 실증적으로 검토합니다. 물론, 저자들은 이러한 사례를 분석한 결과로 1장에서와 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지만, 사례를 다르게 해석할 여지도 있을 수 있으니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책에서 다루는 역사적 사례 자체가 극적일 뿐만 아니라 저자들의 서술도 흥미진진하여 2장부터는 책이 더 잘 넘어갑니다.

하금
“ 이와 같은 좁은 의미에서의 권력은 투입이 얼마가 되었든 산출에 더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능력, 듣고 있기보다는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어느 면에서 이것은 무언가를 배우지 않아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을 수 있는 능력이다. ”
『권력과 진보 - 기술과 번영을 둘러싼 천년의 쟁투』 p.106 (3장 설득 권력, 칼 도이치 『정부의 신경망』인용), 대런 아세모글루.사이먼 존슨 지음, 김승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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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매 장의 시작마다 인용 되는 글들이 짧지만 강렬하네요. 듣기보다는 말하기가 시민으로 갖추어야하는 태도겠구나, 하는 생각이 반복적으로 듭니다.

존르카레라이스
저는 거칠게 질문을 던졌지만, 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Harry Frankfurt)는 좀 더 정교한 논증으로 경제적 불평등 자체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단순한 불평등 보다는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데 충분한 자원을 갖고 있는지 여부(충분성 원칙)이고, 충분한 수준 이상의 자원을 가진다면 다른 사람이 더 많이 가진 것은 도덕적 문제가 아니다고 논증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정책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중요한 것은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적절한 삶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입니다.
몇 해 전에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이 분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의 <자유로서의 발전>을 그믐에서 했습니다. 책에서 이러한 주장을 접했고 당시 모임에 참여하신 @장맥주 님께서 논의를 풍부하게 해주셨습니다. 관련하여 그때 모임에서 논의했던 것과 @장맥주 님께서 쓰신 칼럼의 링크를 첨부합니다. (현재 모임에 참여하지 않아 @장맥주 님 멘션은 안되네요.)
https://gmeum.com/meet/345?talkId=16129
https://v.daum.net/v/k8VpLaljQw?f=p

평등은 없다 - 문제는 불평등이 아니라 빈곤이다《개소리에 대하여》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른 정치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의 경제 불평등 분석서이다. 프랭크퍼트 교수는 이 도발적인 책을 통해 “사회정의의 목표는 경제적 평등을 달성하거나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 아니며, 우리에게는 빈곤을 완전히 제거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자유로서의 발전아시아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경제학의 ‘마더 테레사’, 아마티아 센. 그가 평생에 걸쳐 추구한 웅대한 문제의식의 결정판으로서, 민주주의와 자유의 확장이야말로 진정한 발전의 목표임을 실증적으로 밝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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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심
얼마 전 <좋은 불평등> 이라는 책으로 그믐에서 모임이 있었습니다. 국내의 불평등 지표의 통계치 변화를 대상으로 불평등이 과연 나쁘기만 한 것인가에 대해 연구한 결과를 쓴 책으로 참고하셔도 좋을 듯 합니다.

좋은 불평등 - 글로벌 자본주의 변동으로 보는 한국 불평등 30년‘일반시민을 위한 한국경제 불평등 교과서’를 목표로 집필된 책이다. ‘시민을 위한 불평등 교과서’를 목표로 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대통 령과 국회의원 등 정책 결정권자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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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르카레라이스
아 모임을 했었군요. 장바구니에 넣어두고 까먹고 있었는데, 다음에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GoHo
“ AI의 주된 영향이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풍요를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데이터를 통제하고 기업의 핵심 의사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에게로 이동시키는 것이면 어떻게 하는가? p54 ”
『권력과 진보 - 기술과 번영을 둘러싼 천년의 쟁투』 대런 아세모글루.사이먼 존슨 지음, 김승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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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로 지정된 대화

존르카레라이스
1라운드 4일차입니다. 책 재밌게 읽고 있으신가요?
여러분께 책과 관련하여 질문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저자들은 기술의 진보가 가질 수 있는 위험성으로 경제적 불평등을 야기한다는 점에 특히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경제적 불평등이 꼭 나쁜 것일까요?
여러 실증 연구에 따르면 절대 빈곤과 기대 수명은 기술의 진보와 함께 꾸준히 개선되었습니다. 그 원인을 모두 기술 진보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기술 진보 없이는 불가능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상대 빈곤과 같은 경제적 불평등이 발생하더라도 절대 빈곤을 해소한다는 점에서 기술의 진보가 소수에게 집중되는 것을 도덕적으로 문제 삼아서는 안되지 않을까?
어딘가 기시감이 있는 논리인가요?
저자들은 어떻게 답할까요, 또 여러분들이라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하금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생기는 거부감은 아마 우리가 미디어에서, 혹은 주변에서 목격한 불우한 이웃의 삶이 인간다움을 유지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사회적 문제에 예민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각종 미디어에서 양극화 된 삶의 형태를 쉽게 볼 수 있죠.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단어를 향한 불쾌감은 표현이 내포하고 있는 악함보다는 슈퍼리치와 불우 이웃간의 시각적, 심리적 괴리를 향한 불쾌감이 아닐까 싶습니다.
혹은 '불평등'이라는 말로 인한 불쾌감일 수도 있죠. 평등, 즉 차별 없이 같은 상태가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도덕적 선이라고 배워왔는데 그 앞에 '불'이 붙어 그 학습 된 선을 부정 형태니까요. 저는 기술의 진보가 불러오는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현상에 정말 '불평등'을 붙일 수 있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자유 시장 경제에서 경쟁은 불가피한 것이고, 그 경쟁의 결과에 따라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 참가상을 수상하는 것이 평등하지 못한 과정이고 결과인가?" 하는 의문이 들거든요. '불평등'보다 더 잘 어울리는 말이 있지 않을까요? 대안이 될 수 있는 표현이나 보다 정돈 된 말로 표현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지금 제 한계는 딱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줄이자면 저는 '경제적 불평등'을 향한 대다수의 불쾌감은 1. 경제적 최하층에 있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합의 된 '인간다운 삶'을 스스로 영위할 수 있다 2. 상대적 경제적 상층에 있는 사람들의 이익은 상대적 하층의 이익을 불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방식으로 착취할 수 없다. 이 두 가지 전제가 당연한 사회라면 사라질거라고 생각해요. 결국 기술 뿐만이 아니라 정책적으로, 제도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사회의 변화가 따라야한다는 거겠죠.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이었는데 친구들하고 이야기 나눠보다 좋을 주제 같아요. 첨부해주신 책과 링크도 함께 확인해보겠습니다. 이런 토론도 곁들일 수 있고, 정말 즐거운 독서네요!

존르카레라이스
@하금 먼저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불쾌감이 어디서 올 지 생각해보는 것도 좋은 접근이네요. 공감합니다. 특히 언급하신 '1. 경제적 최하층에 있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합의된 '인간다운 삶'을 스스로 영위할 수 있다.' 부분은 제가 위에서 언급한 아마르티아 센의 <자유로서의 발전>에서 국가의 발전 정도를 자유의 증진정도로 보자는 제안과 맞닿아 있는 것 같네요. 여기서 센이 말한 자유가 '인간다운 삶'과 유사한 면이 있거든요.
책 잘 읽고 계신 것 같은데 앞으로도 즐거운 독서 모임하도록 질문거리를 또 생각해볼게요 ㅎㅎ. 감사합니다.
햐쿠
이게 되게 어려운 질문이네요.
현재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술을 익히는데 드는 비용이 엄청나다보니 향후 상대적 경제적 불평등은 더 가속될테고요. 그런데 이렇게 특정 직종으로만 자본이 몰리게 된다면 그에 부합하지 못하는 계층이 절대적 빈곤층이 될 가능성은 없을까요? 하여간, 그로 인한 사회 불안정에 대한 비용은 어떻게 될지 생각을 더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좋은 주제 감사합니다.

존르카레라이스
언급하신 가능성도 있을 것 같아요. 여러 SF 작품들에서 독재국가에 맞먹는 지배적인 기업과 절대 빈곤층으로 몰락한 다수로 이루어진 미래 사회를 그리는데 바로 그런 세계가 아닐까 합니다. 유사한 설정의 많은 작품이 나온다는 건 그만큼 사람들이 그런 우려를 갖고 있기 때문이겠죠? 저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특히 AI 는 여러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GoHo
기술의 진보가 절대빈곤을 해소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과거보다 기술의 진보는 대단한 속도감으로 달리고 있는데 절대빈곤이 해소된 것은 아닌 것 같고..
절대빈곤 계층은 기술 접근성의 격차로 인한 사회적 빈곤까지 얹고 사는 것 같아서요..
기술의 진보가 소수에게 집중되는 것을 도덕적인 잣대로 따질수는 없겠지만..
사회적 접근성 및 혜택이 과연 공평했는가의 문제가 밑바탕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집중을 '당연'하다고 생각해 경제적 불평등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불평등에 대한 책임을 지우거나 수용하라고만 하는 것은 도덕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존르카레라이스
질문의 전제부터 검토하셨네요. 네 말씀하신대로 절대빈곤이 해소된 것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인류가 발전함에 따라 절대빈곤이 감소하고 있다고 볼 증거는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절대빈곤의 감소가 기술의 진보 때문인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다시 물어볼 수 있고, @GoHo 님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자들도 아마 @GoHo 님처럼 기술 진보가 절대빈곤을 개선한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는 기술 진보만으로는 절대빈곤을 개선한다고 볼 수 없다이겠지요. 이를테면, ‘기술의 진보가 문제를 발생시키거나 악화시킬 수도 있다. 기술의 진보 후에 절대 빈곤이 개선되었다면 그것은 기술 진보의 혜택이 다수에게 공유되도록 하는 적극적인 ‘선택’이 있었고 이것이 주요한 요인이다.’ 라고 말이죠.
GoHo
절대빈곤을 감소시키는데 기술 진보가 기여한 바가 있겠지만..
기줄진보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으로 절대빈곤이 곤고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절대빈곤에 놓여 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인 교육조차 불가능 하거나 매우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고, 게다가 기술 활용이나 접근성도 낮기 때문에 경제활동에서 기회와 선택의 폭은 오히려 더더욱 좁아질수 있다고 봅니다.
예전에 비하면 유사한 경제활동에 더 높은 학력자들과 기술 진보의 결과물들이(로봇, AI..)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요.
절대빈곤을 벗어날 희망을 그들이 쉽게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보다.. '도덕적'이라는 것에 방점을 두어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절대빈곤 해소의 기여로 기술 진보가 소수에게 집중될 수 있겠지만 그것이 '당연하다는 생각'..
절대빈곤 해소에 도움을 받고 있으니 '경제적 불평 등은 수용하라거나 감내하라고 짐지우는 것'..
(어떠한 불평등도 당연한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암튼.. 이런 인식은 도덕적이지 않은 것 같다는 이야기였습니다.. ^^;

존르카레라이스
부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GoHo 님의 생각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 (그리고 이제보니 제가 질문에서 위에는 절대빈곤 개선이라고 썼다가 아래에서는 절대빈곤 해소라고 잘못 썼네요.)
제가 이해한 바로는 두 가지 포인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절대빈곤층은 교육과 기회를 포함한 기술 접근성이 낮기 때문에 기술 진보의 혜택이 소수에게 집중되는 사회에서는 오히려 절대 빈곤이 심화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이 소수에게 집중되는 것을 당연시하고 감내를 요구하는 것은 도덕적이지 않다는 점으로 이해했습니다.
먼저 첫번째 포인트와 관련해서, @햐쿠 님이 말씀하신 부분과도 유사한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러한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 공감하고, 만약 그렇다면 기술 진보에 의해 야기된 경제적 불평등을 견제하는 과제는 훨씬 더 중요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책에서 “1960년대에는 25~54세 미국 남성 중 노동시장에서벗어나 있는 사람, 즉 장기 실업자이거나 일자리를 구하고 있지 않은 사람의 비중이 약 6퍼센트에 불과했지만 오늘날 이 숫자는 약 12퍼센트나 된다. 대학을 나오지 못한 남성들이 괜찮은 보수를 주는 일자리를 구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 것이 주요인이었다.” 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이 비율이 점점 증가한다면 절대 빈곤이 심화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도 듭니다.

존르카레라이스
두번째 포인트와 관련해서 드는 생각으로 제 질문이 좀 더 명료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아래 비슷해보이는 주장에 대해 우리의 도덕적인 직관이 다른 것 같습니다.
A) 기술 진보에 의해 경제적 불평등이 발생한 것은 도덕적이지 않다.
B) 기술 진보에 의해 경제적 불평등을 당연시하는 것은 도덕적이지 않다.
C) 기술 진보에 의해 경제적 불평등을 감내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도덕적이지 않다.
B), C)는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의식적 행위자를 가정한 반면에, A)는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현상입니다.
질문이 명료하도록 A를 조금 바꿔보면,
A’) 의사결정자들에 의해 기술 진보가 경제적 불평등을 발생하게 된 것은 도덕적이지 않다.
-> 저자들의 입장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것이, 적어도 저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키지 않도록 의사결정을 하는 선택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 프랭크퍼트는 경제적 불평등 자체가 도덕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불평등이 그것이 일부사람들로 하여금 ‘충분함’을 갖지 못하게 만드는 한에서만 도덕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A’)에 대해서도 만약 의사결정권자들의 결정이 ‘충분함’을 더 많은사람에게 제공한다면, 경제적 불평등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용인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도덕적이지 않다고 주장한 경우에 그 이유는 단순히 경제적 불평등이 발생해서가 아니라 일부사람들로 하여금 ‘충분함’을 갖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할 것 같습니다.
-> 참고로 프랭크퍼트는 경제적 폭식(economic gluttony) 개념을 들어 과도한 부의 집중을 비판합니다. 단순히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는 것을 문제 삼지는 않지만, 일부가 과도하게 경제적 자원을 점유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충분함’을 확보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특권층이 다른 이들의 ‘충분함’ 확보를 방해하지 않는지 검토하라고 제안합니다.
이번 기회에 생각해보면서 어떻게 질문을 좀 더 명료하게 할지 또 그에 대한 제 의견이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GoHo
'경제적 폭식'도 '경제적 불평등'을 야기할 것 같은데..
미묘하게 견해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에 대해서는 제가 직접 저자의 책을 읽어봐야 겠지요..ㅎ
배울 수 있어 감사합니다~~^^bb
햐쿠
2장
그가 가장 좋아한 경구 중 하나는 특히 생시몽적이었다. “재능 있는 사람들이 늘 나타날 것이다.” 레셉스에게 이 말은 어떤 문제가 생겨나더라도 뛰어난 사람이 기술적 해법을 찾아내리라는 의미였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모두가 전적으로 명백하게 인식하게 될 지점까지 자신이 모두를 데리고만 간다면 말이다.
권력과 진보 | 대런 애쓰모글루, 사이먼 존슨, 김승진 저
2장까지 읽으면서 Project management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비전과 기술이 있어도 열린 마음으로 프로젝트를 바라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교훈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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