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균형의 문제요. 무절제한 성장은 결국 끝없는 굶주림을 가져오는 거요. 당신은 지구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보지 못했지만. <나>는 보았소.
『키리냐가』 p386, 마이크 레스닉 지음, 최용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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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깃털이 갓 난 새가 날개를 시험해 보는 게 유익하듯이, 젊은이가 권위에 도전해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보는 일도 유익한 것이다.
『키리냐가』 p.322, 마이크 레스닉 지음, 최용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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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 키리냐가는 완전히 다른 두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자기 삶에 만족하며 생각할 필요를 못 느끼는 부류와 우리가 힘들여 만든 사회로부터 멀어지기만 하는 생각을 해내는 부류로. 상상력이 없는 쪽은 결코 우화를 만들 수가 없었으며, 상상력이 있는 쪽은 키리냐가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채 외래의 생각을 수용하는 자신들만의 우화를 만들었다. ”
『키리냐가』 p.355, 마이크 레스닉 지음, 최용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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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키리냐가는 성장이 <필요하지> 않소! 당신들이 유토피아를 얻었을 때 <내일은 또 뭘 바꿀까?>라고 말하지는 않을 거요.」
『키리냐가』 p.392, 마이크 레스닉 지음, 최용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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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도 이곳 키리냐가를 키쿠유족을 위한 땅으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오! 그리고 유토피아에 대한 내 정의가 당신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에 여기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 오. 왜 <당신>이 떠나지 않는 거요, 코리바?」 ”
『키리냐가』 p.394, 마이크 레스닉 지음, 최용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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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 「유럽인은 사바나를 보며 도시를 상상하지만 키쿠유는 같은 사바나를 보면서 샴바를 생각하오. 또 유럽인은 코끼리를 보며 상아로 만든 장신구를 생각하지만, 키쿠유는 마을 사람들이 먹을 음식물로 또는 작물의 피해를 생각하오. 그럼에도 그 둘은 같은 땅과 동물을 보고 있는 것이오.」 ”
『키리냐가』 p.340, 마이크 레스닉 지음, 최용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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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일정대로 이번 주 금요일까지는 7장, 8장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에필로그와 결말까지 포함하는 관계로 혹시 책을 아직 읽고 계신 분들은 새로 올라오는 글들을 읽기 전에 유념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후 남는 일정은 감상의 시간이긴 하나 완독하신 분들은 먼저 느낀 점이나 생각을 자유롭게 올리셔도 됩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은화
전 도서관 대출기한이 오늘까지여서 책을 반납했습니다. 그저께부터 반납하기 전까지 7,8장과 에필로그를 다시 한 번 읽었어요. 3,4장이 외부에서 온 위기를 다루었고, 5,6장이 내부에서 싹트는 불화였다면 7,8장은 코리바 자신이 가장 아끼던 사람 그리고 자신이 세운 사회에게 배반 당하면서 몰락하는 얘기입니다.
개인적으로는 8장보다는 7장이 더 인상 깊었는데요. 8장은 키리냐가 사회가 속속들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묘사하는 장으로서 코리바의 일방적인 좌절감, 실패를 느낄 수 있는데 비해 7장은 코리바와 은데미의 첨예한 갈등과 생각의 차이 때문에 더 생각할 거리가 많았습니다. 7장은 특히 거짓과 허구에 기반을 둔 우화의 진실과, 역사와 사건에 기반을 둔 정보로서의 사실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에 대해 묻는 장이라고 느꼈어요.
1) 사실과 진실에 대한 은데미와 코리바의 견해 중 어느 쪽에 더 공감, 찬성하거나 반대하시나요. 또는 둘 모두 맞거나 틀렸다고 생각하시나요.
-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여 깨닫고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정보로서의 '사실'은 의미가 없다고 보는 코리바
- 거짓과 허구에 기반을 둔 '진실'은 아무리 값지더라도 결국 가짜에 불과하다고 보는 은데미
2) 8장에서 코리바는 키리냐가를 떠나기 전에 키만티에게 자신이 마을에 어떤 존재로 기억될 지를 묻습니다. 코리바는 키리냐가에 필요악이었을까요? 사회를 망가뜨리고 발전을 막은 장애물이었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우려처럼 무너지는 전통을 지키려고 노력한 마지막 키쿠유였을까요?
3) 에필로그의 결말에 대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코리바는 진정한 유토피아를 찾아낸 것일까요. 아니면 그저 현실로부터 도피한 것일까요.
엘데의짐승
1. 저는 둘 다 모두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둘 다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맞았기 때문에 실패했고 둘 다 틀렸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는 실패한 걸로 저는 보았습니다. 둘 다 자신들의 신념에 따른 행동의 결과를 가져간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입니다.
2. 결과적으로는 장애물이자, 숨은 악?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코리바가 그간 해 왔던 모든 행동이 부정되어버리고 더 이상 이 마을에 필요없는 존재라고 인식해 버린 것 같아서요.
3. 위에도 썼지만 결국 가장 불행한 사람은 코리바였어요... 행복한 삶의 마감이 되길 응원했습니다.
책을 읽고 느낀점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저는
1. 유토피아라는 것이 과연 존재 할까? 라는 질문에 그것은 계속 변한다, 사람들의 생각이 팽창하고 변화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며 계속 그 이상향은 변한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류가 걸어온 모습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고요. 그 과정에서 도덕적, 윤리적 딜레마를 어떻게 풀 것인가에서 코리바는 오로지 자신의 지식과 신념으로만 키리냐가를 만들어나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최근 우리사회를 많이 떠올리게 한 부분은 역시 리더십입니다. 한가지 신념에 매몰된 사람이 독재적 리더십을 고수할 때의 위험성, 융통성 없고 타협없는 문화적 정체성 그리고 사회발전의 필요성을 가진 세력과의 충돌은 결국 고립과 내부 갈등으로 치닫는 모습은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전통의 보존과 발전, 리더십, 타협, 이해, 진실, 공존... 이런 단어로 이 책을 마무리 합니다.
바빠서 단원별로 깊이 참여하지 못해 아쉽네요. 그래도 좋은 책 소개 받아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은화
1번 물음에 대해 전 코리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지만, 은데미의 주장에 더 공감이 갑니다. 코리바의 주장은 수면 아래에 <키리냐가 주민들은 정보를 접하고 올바로 판단할 능력이 없어서 오히려 왜곡된 하찮은 정보만 알게 될 뿐이다>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마치 7장 초반의 말을 잃게 된 동물들의 우화처럼 그는 주민들이 생각하는 힘이 없다고 보고 정보를 접할 기회 자체를 막았죠.
그런데 오히려 주민들을 그런 상태로 만든 것은 코리바 본인이라고 봅니다. 코리바는 은데미와 사람들이 사실을 통해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끌어내 '이해하기를' 원했죠. 주민들이 서구문명의 기술적 편리함만 보지 말고 그것들이 나중에 불러올 다른 사회 문제들을 생각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코리바 자신도 서구사회에서 먼저 지식을 배우고 그들과 생활하면서 서구인과 현대문명의 문제점을 접한 뒤에 자기판단력, 생각과 주관을 형성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진실과 사실이 항상 같지는 않지만 완전히 분리할 수도 없죠. 정보로서의 '사실'을 접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주민들이 자신처럼 진실을 깨닫기를 원하는 건 모순이라고 느꼈어요.
정보를 접할 기회가 없으니 자연스레 다양한 생각을 할 능력도 없기에 마을 주민들은 여러 사회변화의 문제가 닥쳤을 때 역설적으로 코리바의 바람과 다른 결정들을 이어가죠. 이는 코리바 스스로 자신이 우려한 바를 자초한 아이러니라고 봅니다.
은화
2번 물음의 경우, 코리바는 '한때는 필요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불필요해진 것들'의 상징적 존재로 느꼈어요. 사회가 시대가 흐르면 어떤 관습이나 문화는 과거에는 의미가 있었을지 몰라도 결국 사멸하듯, 코리바는 키리냐가가 과거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 때까지만 필요했다고 봅니다. 다만 그 스스로도, 키리냐가도 그 변화의 흐름이 얼마나 빨리 다가올지는 몰랐을 뿐이죠.
멸종한 과거의 생물들 중에는 공룡처럼 자연의 사건에 의해 사라지는 것들도 있지만 인간 때문에 멸종하는 것들도 있죠. 그것이 옳다 그르다의 가치 판단과는 별개로 인위적인 변화도 큰 틀에서는 시대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 밖에 없는 흐름이라고 봅니다.
코리바의 능력이나 지혜가 전혀 쓸모없거나, 그의 주장이 마냥 근거 없지는 않다는 점이 작중 여기저기서 나타납니다. 외부에서의 침입자가 독재자로 군림하던 일화나 에필로그에서 온갖 부정과 환경오염, 생명경시의 문제를 보여주는 케냐가 그렇죠. 하지만 코리바와 응가이, 그리고 과거 키리냐가의 삶의 방식조차도 변화하는 우주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때가 오기 마련입니다.
사라지는 전통들 중에는 악습이나 사회에 오히려 해가 되는 가치들도 있을 것이고, 일부는 여전히 인류에게 소중하고 의미있는 것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매번 골라가며 변화를 통제할 수는 없죠. 코리바 스스로도 자주 강조하듯 자연의 모든 요소가 서로 긴밀하게 엮여있듯이 전통도 그 안에는 빛과 그림자가 섞여있고 때론 경계가 불분명한 지점들이 있기에 어느 것을 쉽사리 취사선택 할 수 없으니까요.
코리바는 문두무구로서 마을에 필요하던 때가 있었지만 시간이 흐름에도 변화를 거부하고,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음으로서 어느 순간부터 장애물이 되어 마을과 자신 모두에게 힘든 시간을 더 연장한 것이라고 봅니다.
결말의 경우 그가 케냐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보며 아들 에드워드의 평가처럼 처음에는 패배한 실패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럽인들의 기술력으로 기후를 조절하고, 컴퓨터를 사용하는 키리냐가는 서구사회와 분리되어 살겠다면서도 여전히 근본적으로는 유럽인에게 의존해야 하는 모순이 있었죠. 코리바의 선택은 응가이를 케냐의 키리냐가에서 다른 키리냐가로 옮겨 놓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미 신이 떠나간 자리를 우주로 옮겨봐야 그곳에 응가이가 있을 리 없죠.
하지만 멸종한 아흐메드가 되살아 날 수 있다면 키쿠유와 코리바 자신도 어떤 형태로든, 언젠가는 보존될 수 있다는 희망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신과 전통이 떠나간 자리에 남아 서로에게 고통을 주기 보다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가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봤어요. 어찌 보면 5장의 뭄비에게 노인은 물러나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는 말을 정작 스스로는 지키지 않다가 자신도 받아들이고 미련을 털어내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RAMO
1)
해리 포터는 정말 존재하는 걸까요?
어릴 적 즐겨 보았던 『해리 포터』 소설과 영화를 보면서 저는 늘 생각했습니다. 머글인 우리가 모르는 마법사의 세계가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말이죠. 『해리 포터』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한 번쯤은 그런 상상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야기는 아름다웠고, 호그와트와 마법은 어린 시절 우리에게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 우리는 그 세계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이 결론은 정말 절대적인 것일까요? 『해리 포터』는 정말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이 바로 이번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존재’란 무엇일까요? 존재(Exist)는 라틴어 existere에서 유래한 단어로, ex- (밖으로)와 sistere (서다, 나타나다)가 결합하여 “밖으로 드러나다, 모습을 드러내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즉, 존재한다는 것은 다른 것들과 비교하여 확실히 인식될 수 있어야 하며,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식하고 경험하는 『해리 포터』는 존재하는 것일까요?
이 개념을 『키리냐가』의 7장에서 등장하는 코리바와 은데미의 논쟁에 대입해보겠습니다. 7장에서 그들은 ‘진실’의 무게를 어디에 둘 것인가를 두고 대립합니다. 코리바는 사람들이 스스로 깨닫고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사실 그 자체는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반면, 은데미는 거짓과 허구에 기반한 진실은 아무리 값지더라도 결국 가짜일 뿐이라고 반박합니다.
책의 흐름상, 역사의 진실을 강조하는 은데미의 입장이 힘을 얻습니다.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했던 코리바의 우화는 논리적인 은데미의 반론에 의해 유토피아라는 허구를 깨부수는 단초가 됩니다. 그리고 코리바가 지키고자 했던 세계는 결국 『키리냐가』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저자는 이 갈등을 통해 허구보다 진실이 더 중요한 가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합니다.
한편 저는 이와 다르게 생각합니다. 『해리 포터』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궁금해하던 어린 시절의 저와, 현실적으로 그는 존재할 수 없다고 단정짓는 현재의 저 사이의 갈등은 『키리냐가』 속 논쟁과 닮아 있습니다. 저는 두 입장 모두 가치 있다고 봅니다.
어린 시절의 즐거운 상상은 좋은 추억이 되었고, 지금의 저는 『해리 포터』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고찰하며 새로운 의미를 찾습니다. 그리고 저의 결론은 명확합니다. 『해리 포터』는 우리 세계에 분명 존재합니다.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전 세계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이 되어준 인물로서, 그 존재감은 어떤 무생물보다도 강렬하게 ‘튀어나와’ 있기에 충분히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키리냐가』에서는 허구에 기반을 둔 우화를 코리바의 몰락과 함께 부정적으로 그려내지만,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허구가 반드시 진실보다 덜 중요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때때로 허구는 현실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며, 사회적 변화와 인간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해리 포터』는 단순한 소설을 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으며, 이는 그 어떤 역사적 사실보다도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이 사실이냐가 아니라, 무엇이 우리에게 더 깊은 울림을 주느냐가 아닐까요?
RAMO
3)
과학의 시대, 미래에도 종교는 살아남을까요? - '키리냐가'를 읽고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한 현대 사회에서 '신을 믿는 종교'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사람들은 과학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그 증거를 신뢰합니다. 이른바 과학의 시대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에도 '신을 믿는 종교'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마이크 레스닉의 소설 '키리냐가'는 주술사 코리바를 통해 종교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그는 전통적인 종교 지도자로서 마을을 이끌지만, 점차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잃고 고뇌합니다. 코리바의 모습은 마치 인류가 종교를 바라보는 시각 변화를 반영하는 듯합니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샤머니즘을 통해 자연 현상을 이해하고 삶의 안정을 추구하며 종교를 만들어왔습니다. 종교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중세 시대에 이르러 그 힘이 지나치게 강해지면서 인간 중심의 사고가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종교를 대체하는 중요한 도구로 자리 잡았고, 사람들은 과학적인 증거를 믿으며 종교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키리냐가' 속 코리바는 이러한 종교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자신의 설자리를 잃고 결국 또 다른 서구사회로 변한 '케냐'로 돌아옵니다. 과학이 종교의 믿음을 대체한 시대, '신을 믿는 종교'는 정말로 사라지는 것일까요? 책 밖의 현실에서도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설문 결과를 보면 그러한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소설 속 '케냐'에는 멸종된 코끼리의 복제 '아흐메드'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코끼리 아흐메드는 극심한 고독감에 시달리며 사육사를 위협합니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모른 채 아흐메드를 배척하지만, 코리바는 그의 고독을 이해하고 다가가 위로를 건넵니다. 마치 우주 너머 초원의 냄새를 맡은 듯 아흐메드는 코리바에게서 안정을 찾습니다.
기술이 발전한 미래는 유토피아와 같을 것이라는 믿음이 존재합니다. 오래된 문제들은 기술로 해결되고 삶의 질은 향상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지만, '키리냐가' 속 미래는 유일한 복제 코끼리 아흐메드의 존재를 통해 그러한 믿음이 깨집니다. 기술 발전을 통해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지라도, 소외된 존재는 여전히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코리바는 아흐메드에게 안식이 되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결심을 한 것이 아닙니다. 기술의 진보에도 소외되는 존재가 있음을 깨닫고 그들을 위한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꿉니다.
미래의 종교는 사라지는가에 대한 저의 생각은 이 장면에서 머뭅니다. 소외되고 외로운 이들 곁에 남아 사랑과 실천을 전하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 될 것입니다.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향하며 신의 말씀을 전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면서 서로를 보듬어주는 것, 그것이 미래 시대의 새로운 종교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키리냐가'의 결말은 이러한 저의 질문에 대한 작가의 대답일지도 모릅니다. 코리바는 아흐메드와 함께 떠나면서 새로운 유토피아를 찾아 나섭니다. 하지만 그의 여정이 진정한 유토피아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피인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코리바가 꿈꾸는 유토피아는 완벽한 사회가 아닌, 소외된 존재들을 포용하고 그들에게 마음의 안식처를 제공하는 곳인지도 모릅니다. 그의 선택은 우리에게 유토피아의 의미를 되묻고 각자의 삶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듭니다. 미래의 종교가 살아남는 것은 바로 이러한 유토피아를 제공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은화
아흐메드가 소외된 존재를 상징한다는 해석과 감상이 흥미롭네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고독감, 소외감을 느끼는 건 개인화 되어가며 점점 자신을 사회에 고정시켜주던 심리적 닻이 사라지기 때문일 겁니다. 과거 사회에서는 누군가는 종교의 믿음으로, 누군가는 전통에서, 누군가는 이웃과의 교류로 그것들을 유지했겠지만 기술이 그것들을 대체하거나 퇴색하게 만들면서 생기는 문제겠죠. 그렇게 본다면 아흐메드는 인간의 마지막 연결고리인 '자연과의 교감'마저 무너진 사회를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네요.
저는 책을 읽으며 아흐메드를 통해 작가가 기술의 발전이 전통을 무너뜨리고 잊어버리게 만들 수도 있지만, 반대로 전통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느꼈어요. (코리바라면 그 생각을 용납하지 않겠지만.) 아흐메드가 현대문명의 도움으로 되살아 날 수 있다면, 키쿠유와 키리냐가의 가치도 언젠가는 다시 인정받을 날이 온다는 해석도 했습니다.
책 안에서는 과학자와 자본가들이 이익을 위해 아흐메드를 복제하긴 했지만, 누군가는 아흐메드를 통해 감명을 받고 희망을 얻죠. 이처럼 현대문명의 지배적 가치이자 정수인 과학기술을 어떻게 해석하고 사용하는가는 우리 자신이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기술의 결과를 통해 혜택을 얻더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기술로 인한 사회 문제를 또 다른 기술로 막는데만 급급할 뿐 근원적인 사회와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 풍토를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코리바가 사람들의 고통을 눈여겨보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지점부터 사람들이 기술의 결과물에만 집착하다 보면 키리냐가도 결국 케냐의 문제를 똑같이 밟을 뿐이라는 우려도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무작정 반대할 것도, 찬성할 것도 아닌 '우리 사회에 가장 좋은 가치가 되어줄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다수를 행복하게 하면서도 소수를 배척하지 않을 방법인가'를 고민하는 자세가 전통과 현대 모두에 필요하다는 것이 책의 주제가 아닐까 싶네요.
RAMO
좋은 책을 통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즐거운 독서로 한 달을 보내게 된 점이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봄솔
최근에 못읽고 있었는데 다행히 일주일이 남았네요.
부지런히 후반부 읽어보겠습니다.
김사과
“ 「질문이 있어요. 할아버지는 사람을 벌레로 만드실 수 있고, 어둠 속에서도 보실 수 있고, 공중을 걸어다니실 수도 있잖아요.」
「그렇지.
…중략…
「할아버지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줄 알았는데요.」
나는 빙긋 웃었다.
「문두무구는 모든 것을 다 알지도 못하고 알 필요도 없단다.」 ”
『키리냐가』 마이크 레스닉 지음, 최용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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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과
코리바의 패착은 본인이 신과 같다고 말할때부터 보였어요. 스스로도 말도 안되는걸 알면서 부족 사람들을 속였죠. 저는 계속 사이비 종교의 교주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좋게 봐줘야 근본주의 종교인.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니 웅가이 신화가 사실이 아니고 우화라는 것을 알았을텐데 스스로를 속이고 부족민들을 속이다가 결국 한계에 봉착했죠. 그의 태도 변화가 좀 우스웠어요. 거짓에 기반한 의미가 무슨 힘이 있을까요. 저는 은데미가 맞았다고 생각해요.
봄솔
“ 너는 역사를 추구하고 나는 진실을 추구한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은데미는 얼굴을 찌푸렸다.
「똑같아요. 역사가 〈곧〉 진실이죠.」
「아니다. 역사란 사실과 사건의 집합으로, 끊임없이 재해석을 해야만 한단다. 역사는 진실로부터 시작해서 우화로 발전해 간다. 하지만 내 이야기는 우화로 시작해서 진실로 끝난단다.」
-알라딘 eBook <키리냐가> (마이크 레스닉 지음, 최용준 옮김) 중에서 ”
『키리냐가』 마이크 레스닉 지음, 최용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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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 「받을 권리가 있는 혜택을 받지 않다니 바보 같은 짓이에요. 아버지는 아주 오래 사실 거예요. 그 돈을 받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필요 없는 걸 받다니 수치스러운 일이야. 우릴 좀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전하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