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제발트 읽기] 『자연을 따라 기초시』 같이 읽어요

D-29
접근할 것 같은→접근해야 할 것 같은 / 해석밥→해석법 입니다. 생각나는대로 쓰다보니 오타가 ㅠ
말씀을 들으니 제발트의 다른 저서들도 궁금해지네요. 일단 이 책부터 읽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지만요 :)
일단은 겨울에 읽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좀 생뚱맞은가요?ㅎㅎ이 책을 봄이나 여름에 읽었다면 책에의 몰입도가 떨어졌을 것 같아요. 추운 계절에 어울리는 책인 것 같다는... 옮긴이의 말부터 읽고 시작해서 이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어요. ‘2008년 늦가을, 나는 베를린에 있었다.‘로 시작, 제단화 이야기를 잠깐 언급한 후 ’회색빛과 보랏빛이 섞인 해질녘이었다.‘로 이어지는 북독일의 차가운 저녁 풍경이 책으로 진입하기 적당한 무드를 훌륭하게 형성해 주었어요. 그렇게 읽기 시작한 1부 ’알프스의 눈과 같이‘는 제가 다른 어떤 텍스트에서도 경험한 적 없는 톤 앤 매너를 보여주는 듯 합니다. 종교적이면서 음울하고 고통스럽고 허망하기도 한 느낌... 의미나 해설을 딱히 덧붙이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묘사들, 그림과 풍경과 인물에 관한. 오래된 종교 벽화를 한참 동안 보고 있는 듯하달까요. 독특하고 흥미로워서 계속 읽게 되는데 정확히 왜 계속 읽게 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무엇인지 모르면서 계속 읽게 되는 건 텍스트가 가진 힘이 있어서라고 생각됩니다. 매혹적인 텍스트임은 분명해요. 읽는 이를 매혹하는 힘이 있어요. 책 날개에 적힌 작가의 이력을 봤는데, 어떻게 이런 심상을 내면에 갖게 되었는지 쉽게 이해되진 않았습니다. 생존 시기를 보면 더 의아해집니다. 그렇게까지 먼 옛날 사람도 아니어서요.
형식적 측면에서는 저한텐 서사시 같았어요. 역사적 사실을 시로 옮겨놓은 듯한, 다만 함축적인 의미나 은유나 상징이 복잡하게 들어가 있진 않은. 역사적 사건, 일어났던 일을 장면으로 그려내는 시. @russist 님은 어떻게 읽으셨을지 정말 궁금하네요 :)
저는 그 장르는 그 장르여야만 하는 이유를 작품이 내적으로 설명해야한다고 봐요. 그래서 영화로 더 잘 표현될 수 있는 소설이라거나 산문으로 표현될 수 있는 시는 기본적으로 실패했다는 생각을 하곤 했어요. 같은 기준을 적용해보면, 기존에 제발트가 써 오면 평론이나 에세이가 아닌 서사시인 이유가 있다고 봤어요. 시에는 일반적인 산문형 줄글에서는 볼 수 없는 행갈이가 있잖아요. 아무래도 제발트가 이 사실을 더 첨예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시를 쓰지 않았나 추측해 보았어요. 게다가 내용상으로도 회화 작품을 주로 다루잖아요. 그렇다면 문장의 호흡을 적절히 끊어서 '회화'의 부분부분을 바라보는 시선처럼 보여줄 수 있는 시가 적절하지 않나 싶어요. 근데 하나 더 재밌는 점은, 기존의 서사시가 영웅의 모험을 다룬다는 점이었어요. 영웅의 업적이나 그 위대함을 칭송하기 위한 노랫말이 서사시였잖아요. 근데 제발트는 영웅적인 인물을 다루지 않고, 외려 반영웅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예술적 이방인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게 이 책의 묘한 부분이죠. 서사시라는 오래된 형식과 서사시가 다루는 대상 간의 불일치가 주는 묘한 긴장감이 내용상으로도 중요한 주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군요 :) 화자가 등장하지 않고, 또 진술이나 설명도 따라붙지 않으려면 소설보다는 시라는 형태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점에서 성경을 닮은 것 같기도 해요. 성경에서 어떤 사건을 얘기하면서 그에 대한 해석을 일일히 붙이지 않는 것처럼요. 성경을 하나의 이야기라고 했을 때 그 이야기의 화자는 예수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어떤 등장인물의 시점도 취하지 않고, 3인칭 시점도 전지적 시점도 아닌 위치에 있는데... 그러면서도 모든 사건들이 어떻게 진행됐고 끝났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서술할 때 나올 수 있는 문장들로 성경이 이루어져 있잖아요. 1부의 문장들이 저한텐 그렇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이 문장을 쓴 사람의 위치, 시점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해줬어요.
말씀하신대로 작품에서 화자의 위치가 전지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서사시라는 특성 때문인 듯해요. 오래간만에 집에 있는 성경을 펼쳐봤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알 것도 같네요. 짚어주신 부분이 제발트의 작품에 나오는 화자의 전반적인 특징 같아요. 이 책에서는 잘 안드러나지만 다른 작품을 읽으면서 되게 신기했던 부분인데요, 1인칭으로 쓰여져 있고 굳이 그것을 숨기지도 않는데 '나'가 교묘하게 지워져 있어서 전지적인 시점 같이 읽힙니다. 그런데 또 재밌게도 한번씩 '나'가 등장해서, 그걸 보고나서야 '맞다, 이게 1인칭으로 돼 있었지' 하고 뒤늦게 알게 되곤 했지요. 역사나 과거 쪽으로 치우쳐 있는 화자라서 더 그런 게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1차 시기 ⟨알프스의 눈과 같이⟩ 소감, ~49쪽] 오늘은 일찌감치 일을 끝마치고 ⟨알프스의 눈과 같이⟩를 다시 한번 읽었습니다. 서사에 치중된 시이다 보니, 구체적인 표현법보다는 전체적인 글의 짜임새에 더 신경을 쓰면서 읽었습니다. 작품에서 화자가 말하듯이 그뤼네발트 폰 아샤펜부르크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화자는 그뤼네발트의 그림을 주관적으로 묘사한다거나 그를 언급한 다른 이들의 책을 참조하면서 얘기를 꾸려가는 형식입니다. 찾아보니 그뤼네발트는 삼련제단화라고 하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세 폭 짜리 연작 그림을 그린 작가라고 하네요. 이 책의 전체 구성이 3편의 장시로 이뤄져 있고, 가장 첫 번째 시로 그뤼네발트를 다룬다는 점이 퍽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네요. "워낙에도 극단적인 세계관에 / 마음이 끌리던 것이 분명한 그뤼네발트는 / 이미 삶의 구원이란 / 삶으로부터 구원일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 구절에서도 보듯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음울한 편이고, 그림 속 인물들은 다들 저마다 사연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자기가 살았던 시대의 비극에 영향을 받은 탓인지 작품은 멜랑콜리합니다. 프랑크하우젠 전투에서 농민군이 학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뤼네발트가 몇 주 동안 눈에 검은 천을 두르고 있었다는 대목이 인상깊었습니다. 제가 인상적으로 읽은 몇 대목 인용해보겠습니다.
사막의 거주지에 있는 성인 안토니우스에게 부리로 음식을 물어다준 검은 새는 아마도 지금 우리를 향해서 점점 더 가까이 날아오고 있을 것이다. 투명한 심장을 가진 그 새에 대해서 종말을 예언한 또다른 성인의 말처럼, 새는 바다에 배설물을 쌀 것이다. 그리하여 바다는 끓어넘치고, 그리하여 대지는 진동하며, 철탑이 서 있는 대도시는 화염에 휩싸이리라. 교황은 쪽배에 몸을 숨기며 암흑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고 그곳, 검은 성채가 무너진 곳에 누런 회색의 흙먼지가 일어 땅을 뒤덮으리라. ⏤본문 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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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시기 끝] 인간 역시 자연의 한조각에 불과하다는 통속적인 말이 얼마나 힘이 센지 느낍니다. 작가들은 자연의 한 풍경 속에서 역사의 파국을 미리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을 '예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건 다 지나간 다음에 끼워맞추는 음모론에 불과하니까요. 1부를 읽으면서 내내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로써 1차 시기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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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시기 시작 ~⟨그리고 내가 바다 끝에 가서 머물지라도⟩] 10일까지 2부를 읽습니다. 식물학자인 게오르크 빌헬름 슈텔러의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동물군과 식물군을 묘사하고 표현할 생각에 사로잡힌 슈텔러는, 박사학위를 치른 다음날 당시 러시아군이 점령 중이던 그단스크에서 러시아 본토로 돌아가는 우편선에 오릅니다. 슈텔러가 그단스크 만을 벗어나며 갑판에서 목격한 풍경을 감상하면서 2차 시기 시작하겠습니다:)
바다의 광폭함과 웅장함 공기 속에 어린 소금기 배 아래로 깊숙이 가라앉은 까마득한 어둠에. 왼편으로 길고 가느다란 헬 반도의 끄트머리, 오른편에는 싱그러운 석호를 감싸는 곶. 밝은 회색빛으로 그어진 한줄기 선이 더욱 밝고 흐릿한 회색빛 대기 속으로 영원을 향하듯 스며들어간다. 저 뒤편의 땅이 한때 독일이었으니 그는 어린 시절과 빈츠하임의 숲, 소년 시절 학교에서 지루하게 배웠던 고대어를 떠올렸다. 페르스크루타미니 스크리프투라스(문헌을 연구하라), 이 말은 이렇게 바꾸어도 되지 않을까, 페르스크루타미니 나투라스 레룸(자연을 연구하라). ⏤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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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시기 끝 ~ ⟨그리고 내가 바다 끝에 가서 머물지라도⟩] 10일 동안 2부를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읽을 때마다 전에는 주목하지 못했던 좋은 표현들이 눈에 띄어서 좋았구요. 2부는 식물학자 게으르크 빌헬름 슈텔러의 생애를 다룹니다. 독일의 빈츠하임에서 태어난 슈텔러는 표트르대제의 명에 따라서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 사이에 있다는 전설의 섬 가마로 가는 항로를 떠나는 비투스 베링의 탐험대에 합류하게 됩니다. 그단스크 만을 지나 상트페테부르크, 야쿠츠크, 오호츠크 해를 건너서 캄차카반도에 도달하고, 또 훗날 비투스 베링이 죽은 이후에도 슈텔러의 탐구는 계속됩니다. 제발트는 연구욕을 넘치는 탐구자의 생애를 글로써 조용히 좇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은 2부였습니다. 다만 여기서 말해보고 싶은 내용은, 제발트가 왜 슈텔러라는 인물에 집중했는가 입니다. 결국 우리는 인생의 어느 순간에서 연구자의 모습을 띠게 되는 것 같아요. 다만 그 분야는 다 다르겠죠. 그 이상할 정도의 열정과 집념이 2부에서 잘 드러납니다. 정말 좋은 문장이 많았지만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1736년 슈텔러가 이미 십 년 전에 출발한 베링 탐험대에 합류해서 야쿠츠크까지 가는 여정을 표현한 담담한 문장이었어요. "슈텔러는 그 5000마일의 거리를 삼 년 반을 걸려서 갔다." 본격적으로 탐험을 시작하기도 전에 거기에 닿는 데만 해도 십수년이 걸리는 일을 하게 하는 동력은 무엇이고, 또 그러한 사람은 무엇이며, 그러한 사람을 기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쓰기에 대한 욕망은 무질서한(혹은 무질서하게 보이는)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 같아요. 그리고 그건 “세계의 무질서를 최소화하려는 과학자다운 의식”과 무관하지 않겠죠. 2부 말미에서 슈텔러는 인생의 노년에 북빙해에 떠 있는 섬에 마침내 당도하여, “거친 펜촉과 담즙 잉크로 생의 막바지에 기록한 원고”, ⟪데 비스티스 마리니스(해양 동물집)⟫를 완성합니다. 어떤 기록들은 까마득한 것을 까마득한 채로 놓아두지 않으려는 의지의 산물입니다. 헌데도 이런 기록들은 두껍고 진한 담즙 잉크로 쓰인다는 점은 아이러니합니다. 이로써 2부를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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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시기 시작 ~⟨어두운 밤이 전진한다⟩] 마지막 3부를 시작합니다. 3부는 작가가 직접 화자로서 등장해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나'가 태어날 즈음인 1944년은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접어들던 시기입니다. 작가는 자신이 태어날 무렵의 독일의 상황을 차분히 열거하는데요, 제발트가 훗날 쓰게 될 작품들을 예비하는 대목들이 눈에 띕니다. 소재적인 측면에서도 그러하지만, 기법적인 측면에서도 이후 작품을 어느 정도 예비하고 있습니다. 제발트의 글을 읽다보면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할 수 있는 문체란 이런 것이구나 감탄하면서 읽게 됩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한편의 글에서 생각지도 못한 디테일을 발견할 때를 참 좋아합니다. 제 경우에는 3부의 세 번째 꼭지가 참 좋았는데요, 제가 인상적으로 읽은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3부 시작하겠습니다. ※ 참고로 이번 모임은 12월 20일에서 21로 넘어가는 자정에 끝이 납니다. 감사합니다:)
(···) 왜 인간은 그렇게 어려운 일만을 벌이느라 애쓰는 것일까? 위안으로 남은 것은 다른 이들의 불행, 연인의 모자에는 사악한 노란빛⏤ 옛 시절에는 참으로 아름다웠던, 지난 세기의 산문, 엉겅퀴에 걸려 엉클어진 옷자락, 약간의 피, 황홀한 행복감, 찢어진 편지, 군복의 별과 창가에 하염없이 앉아 있는 시간. 어두운 골방에서의 불쾌한 몽상, 오랫동안 지고 가야 하는 죄, 여기에 눈물까지, 또한 물고기에 대한 기억 속 꺼져가는 불, 결혼식 꽃다발을 태워버린 엠마. 가엾은 시골 의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신을 매장하는 날 그는 반짝거리는 에나멜 장화와 사후에 벌어지는 유혹을 꿈꾼다. 하지만 실제로 다가온 것은 창백한 시간. 당신, 눈부시게 번쩍이는 음란의 한가운데서 나는 당신의 음울한 눈동자를 기억해낼 것이다. (···) ⏤본문 113-114쪽.
문득 제가 써 놓은 글을 보니 과연 내가 제대로 읽은 것이 맞는지 의구심이 드네요. 제발트의 글들은 늘 독자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물론 과도하게 우상화하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만··· 이 시대에서 소설만이 가능한 것이 무엇인가 누군가 묻는다면, 그냥 조심스럽게 제발트를 한번 읽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할 것 같아요. 영상매체가 범람하는 시대에서 활자로써 가능한 소설은 무엇이고, 또 그 형태는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좋은 대답이라고 봐요. 역시 혼자 떠들고 있습니다.(ㅜㅜ)
화제로 지정된 대화
제발트의 작품 속에는 유독 회화나 사진이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글들과 달리, 제발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텍스트를 보충설명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어요. 제발트의 글들은 분명 상품의 상세 페이지의 보충 설명이나 미술 작품 아래에 달리는 캡션 따위와 다르고요. 굳이 표현하자면, 제발트의 작품에서 이미지와 텍스트는 서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응시한다는 인상입니다. 그 근거는 작품 안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알프스의 눈과 같이⟩에서 화가 그뤼네발트는 프랑크하우젠 전투에서 오만 명의 농민군이 곡식이 추수되듯 베어넘겨졌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5월 18일의 일이었고, 그뤼네발트는 "보덴 호수와 튀링거발트 사이에 있는 지역에서 눈알을 파내는 처벌이 한 동안 행해졌음을 들은 뒤에는 몇 주 동안 검은 천을 눈에 두르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제발트는 자신이 5월 18일에 태어났음을 알고, 역사적 사건과 자신의 탄생을 연결시킴으로써 의미화를 이뤄냅니다(이러한 기법은 이후 작품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로써, 이미지의 세계에 검은 천을 드리운 시점에서 탄생한 사람이 있으며, 그 흑막이 드리워진 자리에서 검은 담즘으로 된 글이 시작되는 셈입니다. 적어도 제발트의 글 속에서 그림과 글은 서로를 안일하게 보충 설명하거나 보강하지 않습니다. 그림은 글을, 글은 그림을 서로 스쳐지나가면서 긴장을 이룰 뿐입니다. 마치 행성들이 저마다의 궤도를 도는 것처럼요. 다만 그들이 겹쳐보이는 것은 지구에 붙박인 인간의 관점입니다. 이는 여러가지 생각을 불러옵니다. 지금 우리는 장르간의 교배와 혼종성이 강조되는 시대에서 살고,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무너진다는 식의 얘기를 하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얘기를 들으면 과연 그런가, 그것이 좋기만 한가, 반문하게 됩니다. 그런 혼종성과 '경계의 무너짐'이 강조될 때 한 장르는 그 장르로서 특성을 잃고 한 장르가 다른 장르에 복속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비슷하지 않나요? 온갖 장르간의 교차, 경계 따위를 운운하면서 작품은 콘텐츠가 되고 모든 것은 '영상화 여부'로써 판단되기도 하죠. 웹툰과 소설이 각각의 서사 장르로써 고유한 특성이 있음에도 그것들이 모두 영상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선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 점에서 보면 제발트의 작품은 더욱 섬세하게 읽혀져야 합니다. 적어도 그의 작품은 이미지 없는 세계에 검은 담즘 잉크로 그려진 또 다른 이미지이니까요. 책을 읽는 내내 영상 매체가 범람하는 시대에서 굳이 책을 펴고 글을 읽는다는 행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자발적인 맹시 속으로 들어가는 건 아닐까요. 따라서 한 편의 텍스트 속에 보충설명으로써 이미지를 삽입하는 행위는 반만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그 실패를 응시하고 실패로써 환기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망연히 실패하기만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요. 오늘은 두서없지만 길게 써 보았습니다. 이것으로 3부 감상을 대체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스산한 절망의 얼굴로 차가에 서 있는 여인, 바람 속에 흔들리는 녹슨 그네, 둔덕에 세운 캠핑카 안에는 귀에 라디오 수신기를 댄 채 앉아 있는 외로운 스파이. 아니, 이곳에서 우리는 엽서를 쓸 수가 없다, 차에서 내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말해다오, 내 마음이 괴롭듯이 네 마음 또한 그러하다고. 해가 갈수록 밀려오는 파도에 점점 더 북으로 후퇴하는 자갈층, 한 톨 한 톨의 돌멩이는 죽은 영혼이며 하늘은 짙은 회색빛 한 치의 농담도 없이 일관된 회색빛 이처럼 낮게 깔린 하늘은 그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 수평선을 따라 다른 시간 속으로 건너가는 화물선들, 바이올린 연주자가 현을 튕기는 소리에 맞춰 광물 원소의 핵을 저속으로 파괴하는 사이즈웰 발전소. 서퍽 지역의 황무지 위로 광기의 속삭임이 퍼져나간다, 이것은 약속된 종말인가? 오, 돌로 된 인간들아. 이미 죽은 것은, 죽은 채로 머물러 있으리라. 삶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일지니. (···) ⏤본문 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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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누워서 쓰는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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