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탄 이들의 이야기(Historias de Jinetes)] 사람은 공간과 환경을 만들지만, 우리가 만든 공간과 환경에 의해서 다시 영향받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도시화된 삶은, 혹여 한 가지 유형의 인간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래서인지 오늘날 말 탄 이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재밌으면서도 쓸쓸합니다. 이 잃어버린 이야기를 도시에 살아가는 제가 읽고 있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 좀 웃기고 안쓰러운 일이죠.
여기서 '노마드'를 얘기하는 것은 공허한 논의가 될 것 같습니다. 다만 보르헤스가 말한 '말 탄 이들'을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몽골족의 이야기는 도시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생소하지만 아주 재밌고 의미심장한 지점을 보여줍니다. 바로 그들이 자신이 얻은 것을 축적하기보다는 어쩔 줄 몰라서 버리고 파괴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늘 지금이 싫은 사람들, 현재가 못마땅한 사람들은 자기가 얻은 것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서 파괴하는데, 그 점에서 축복받았다고 할 만합니다. 저 역시 많은 옷을 갖고 있고, 많은 물건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것들이 좋으면서도 혐오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혐오스러움은 한편으로는 저를 생각하고 탐구하게 만듭니다. 따지고 보면, 저 말 탄 이들이 별천지에서 온 사람들도 아니거든요.
우리는 다들 뭔가를 버리고 있습니다. 일년 전의 내 몸과 '변함없다'고 믿는 현재의 내 몸은 세포 수준에서 끊임없이 탈각하는 중이며, '굳건한 땅'이라는 은유는 지질학적 시간을 모르는 인간에게나 통용되며, 인간이 숨쉬듯이 내뱉는 '영구'와 '반영구처럼 기만적이고 인간 스스로를 착취하는 단어도 없는 것 같아요. 그건 마치 세살배기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인생'과 같아서, 우리 인속과 습속을 보여주는 상투어일 뿐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버리고 있으며, 그 점에서 우리는 핏속에 저 말 탄 이들의 삶을 이미 갖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글이 약간 두서가 없어도 양해해주세요😅
(10) [보르헤스 읽기]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3부 같이 읽어요
D-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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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쨋든 이처럼 다양하게 변하는 시간의 가면 밑에서 변하지 않고 등장하는 기마병과 도시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43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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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El Cuchillo)] 무기를 쥐어보면 알지만 섬뜩합니다. 오로지 상대를 해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그 효율성과 의도가 끔찍할 정도로 단순하고 선명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보르헤스의 단도도 그러합니다. 단도는 역사 속에서 무수한 인물을 죽였고, 그 형태는 큰 틀에서 바뀌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단도야말로 역사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죽음의 상징입니다.
언젠가 ⟨만남⟩이라는 단편에서도 얘기했듯이, '단도'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그 시대의 정념이 적층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만져지는 역사이며, 형태를 지닌 의지입니다. 마치 도구에 정념이 들러붙어서 언젠가 자신의 의지를 실행해줄 인간 숙주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는 겁니다. 군대에 다녀온 남자들은 훈련소에서 처음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어본 기억이 있을 겁니다. 그 차가운 금속성이 놀랍도록 오른손 검지에 매끄럽게 안착하던 기억이 제게도 선명합니다. 이물감이 없도록 매끄럽게 곡면 처리된 그것은 언제 생각해도 소름끼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칼의 손잡이를 한번 쥐어보면, 그것이 놀라울 정도로 가볍고 단단하고 손에 잘 안착되도록 설계된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 안정감에서 소름끼치는 이야기를 읽어냅니다. 그것을 보르헤스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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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단도는 단지 금속으로 만들어진 물건 이상이다. 남자들이 그 단도의 모양을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만들 때 한 가지 명확한 목적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어젯밤 타콰렘보에서 어떤 이를 죽인 단도이고, 카이사르의 몸을 난도질한 단도들이라는 점에서 역사에서 영원히 반복되는 칼이다. 그것은 누군가를 죽이고, 에고 없이 피를 보고 싶어 한다.
원고와 편지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 내 책상 서랍 속에서 단도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호랑이 꿈을 꾸고 있다. 그것을 쥐고 휘두르는 순간 차가운 금속뿐 아니라 손의 감각 또한 되살아난다. 누군가가 그 칼을 손에 쥐는 순간 금속은 그 손의 주인이 자신이 기다리던 살인자임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444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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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리스토 카리에고의 시전집에 붙이는 서문(Prólogo a la Obra Poética de Evaristo Carriego)] 뭐라고 표현하기가 어려워서 각자 읽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에바리스토 카리에고는 분명 "남아메리카의 초라한 변두리 동네"에 살던 시인이었습니다만, 보르헤스는 그가 남긴 작품이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아궁이를 가리키며 "여기에도 신들이 계시니까요"라고 말했던 헤라클레이토스처럼, 카리에고 역시 자신이 살던 비좁은 변두리의 거리에서 신을 보았던 것이라고 보르헤스는 말합니다. 이는 큰 것과 작은 것을 단번에 뒤집는 어떤 순간을 만들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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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의 삶이든(그것이 아무리 복잡하고 충만하다 할지라도) 실제로 한순간, 그러니까 자신이 누구인지 영원히 알 수 있는 순간으로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 때가 있다. 내가 직관으로 파악하고자 했던 불분명한 계시를 통해 보니 카리에고는 카리에고이다. ”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44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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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의 역사(Historia del Tango)] 2부에서 다룬 ⟨탱고의 기원⟩에 이은, 탱고에 관한 두번째 산문입니다. 먼저, 보르헤스는 이 글에서도 앞서와 마찬가지로 탱고의 역사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며, 그 유래도 불명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깔고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 ⟨탱고의 기원⟩에서도 한번 언급한 적 있지만, 보르헤스에게 초창기 탱고란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역사와 문화의 정수가 담긴 또 하나의 텍스트이고, '문학'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뿐, 문학이 관심을 둘 법한 숱한 주제가 가사에 담겨져 있습니다. 글꼭지는 크게 다섯 가지이며, '탱고의 역사', '호전적인 탱고', '한 가지 남은 수수께끼', '가사', '결투 신청'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비단 탱고 뿐만이 아니라 탱고를 둘러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전반적인 문화를 향한 보르헤스의 애정이 글 곳곳에서 묻어납니다. 예컨대 쇼펜하우어를 인용하면서 음악과 문학을 비교해보는 대목을 보시면, 보르헤스가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는 사실도 엿볼 수 있을 겁니다.
다섯 개의 글꼭지가 모두 흥미로웠지만 그중에서도 제가 특히 재밌게 본 글꼭지는 '결투 신청'이었습니다. 보르헤스는 자신이 들은 매력적인 이야기 한 편을 소개합니다. 흥미롭게도 이야기 속의 웬세슬라오 수아레스는 아무런 사심이나 목적 없이도 결투를 벌였다고 합니다. 이는 유럽의 결투(duel) 문화와도 다른 것이, 흔히들 아는 결투 문화에서는 타인의 당사자의 명예를 더렵혔거나 모욕을 주었다고 느꼈을 때 상대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 하지만 보르헤스가 소개하는 수아레스가 벌이는 결투는 특정한 이유가 있어서 벌어지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나아가 결투 끝에 주어지는 '죽음'은 어떤 심판의 결과도, 순리의 결과도 아닙니다. 죽음은 마치 공기처럼 우리 주변을 떠다닙니다. '아무런 사심이나 목적 없는' 결투가 이러한 죽음의 성격을 뒷받침하고 있고요. 마치 코맥 맥카시의 소설에 등장하는 죽음의 화신인 안톤 시거처럼(그가 지니고 다니는 상상의 '에어 샷건'에 들어가는 총알은 공기 그 자체이며,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죽음은 '이유 없이', '설명 없이' 그냥 옵니다.
이러한 '이유 없음'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는 듯, 웬세슬라오는 지나칠 정도로 정중한 면모를 지닌 인물로 묘사됩니다(“평소 가죽 끈 꼬는 모습, 어머니를 홀로 남겨 두지 않으려 하는 자상한 성격, 낯선 이와 주고받은 화려한 편지, 그와 점심을 먹으면서 허심탄회하게 나눈 대화”). 여느 이야기에서처럼 결투로 인물 중 하나가 죽어야 할 이유를 찾으려고 하면,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것만 알게 되는 겁니다. 죽음을 병적으로 기피하면서부터 역설적으로 죽음(을 이용하는 여러 산업)에 예속되어 버린 현대인들과 비교하면, 이들에게 죽음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는 표현은 한갓 은유가 아닙니다. 보르헤스는 이러한 결투 문화를 두고 "언제든지 죽고 죽을 수 있는 용기와 사나이다움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무자비한 종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 외에도, "북아메리카나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과 달리 아르헨티나인들은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지 않는다"(461쪽)고 말한 대목도 곱씹어 볼 만한데, 그러러면 더 많은 글을 써야 해서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다만 보르헤스의 설명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특정한 목적이나 대의명분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를 한사코 거부한다고만 말해두겠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는 탱고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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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음악은 세계 자체만큼이나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만약 세계가 없거나 언어에 의해 환기될 수 있는 우리의 공유 자산, 즉 기억이 없다면 문학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반면 음악은 굳이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세계가 없어도 음악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은 의지이자 열정이다. 음악으로서 초기 탱고는 먼 옛날 그리스와 게르만 민족의 시인들이 언어로 표현하려고 했던 전쟁의 기쁨을 직설적으로 전달한다. ”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457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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