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보르헤스 읽기]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3부 같이 읽어요

D-29
russist님의 대화: [또다시 은유] '은유'에 대해서 달리 분석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 뭣보다, 시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라고 봅니다. 그리고 다르게 생각하려고 하다 보면 다르게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하고, 그러다 보면 결과적으로 은유를 데려오게 된다고 봅니다. 은유는 새로운 사고방식의 결과물임과 동시에 새롭게 사고하는 수단인 것입니다. 하지만 시 자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며, 때때로 그 위험성도 있습니다. (잠시 샛길로 새면, 한 시대를 풍미한 은유에는 그 시대의 한계가 녹아 있기도 합니다. "국가 수뇌부"라는 표현이 군주를 중심으로 신체라는 국가를 일사분란하게 조종하는 이미지를 은연중에 그려내고, "사회의 암덩어리" 같은 은유에 암환자를 향한 은근한 멸시와 그 방종한 생활을 비난하는 함의가 담겨있는 것을 보면 그러합니다.) 반복하지만 은유는 달리 생각하기입니다. 따라서 은유로써 달리 생각하지 못하고, 기지를 기계적으로 재생산할 뿐이라면, 그 은유는 (혹은 그 은유에 대한 생각은) 쇄신되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보르헤스가 211쪽 괄호 속에 겸손하게 숨겨놓은 문장은 빛납니다. "나는 진심으로 은유는 시를 지을 때보다 오히려 시를 지은 후에, 문학적이고 이미 잘 꾸려진 시를 원할 때 필요하다고 본다. 은유로 인해 뒤섞인 어휘로 구성된 시는 제약을 가하고,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실패하게 만들기도 한다." 은유를 모르고서 시를 읽을 수는 없지만, 시의 모든 것을 은유로 보면 우리는 시를 즐기지 못합니다. 시는 수수께끼가 아니고 은유는 수수께끼의 힌트 따위가 아닙니다. 시를 수수께끼로, 은유를 수수께끼의 힌트로 좁게 보기 시작하면, 시는 낱말 맞추기처럼 시시하고 피곤한 것이 되며, 시인은 살인 현장을 밀실로 만들려는 범죄 추리극의 시시한 범인이 되고 맙니다. "동굴(grata)에서 파생되었다는 이유로 ‘그로테스크’라는 단어가 은유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10이라는 숫자에 있는 0이라는 상징으로 인해 ‘절대 무(無)’의 개념이 개입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212쪽. 글의 말미에서, 보르헤스는 은유가 장식이자 호화로움이라고 말합니다. '장식'과 '호화로움'이라는 단어가 오해될 뉘앙스를 갖고 있음에도 보르헤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결국 장식도 '다르게 보이기(말하기)' 위함이니까요. 이때 '장식'이란, 내면이 텅 비어 있음을 가리는 겉치레를 넘어서는 개념입니다. 때로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줄 뿐 아니라, 중한 것과 중하지 않은 것 사이를 일순 반전시킬 힘을 지닙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저는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피처럼 붉은 체리 한 알을 생각했습니다. 그 체리 한 알은 케이크 시트와 그 위에 덧발릴 생크림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장식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생크림케이크의 맛과도 무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없으면 생크림케이크는 이미지적으로 너무 둔탁하거나 옹졸해 보일 것 같습니다. 그 점에서 새하얀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붉은 체리는 사소하지만 중한 것입니다. 물리적으로는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지만, 이미지적으로는 생크림케이크가 작은 체리 한 알 위에 올라타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보르헤스가 쓴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은 너무 멋집니다. 저에게는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핏빛 체리를 연상케 합니다.
(내 생각에)사물은 본질적으로 시적이지 않다. 이를 시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과 사물을 연관시키고 혼신을 다해 이를 궁리하는 데 길들 필요가 있다. 별들은 시적이다. 수 세기 동안 인간의 눈이 이를 보아 왔고 그 영원성에 시간을, 그 가변성에 불변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10p,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russist님의 대화: [돈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의 소네트]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는 17세기 스페인 작가입니다. 소네트와 산문, 비평을 오가며 다양한 글을 썼다고 합니다. 케베도의 소네트는 굉장히 엄격한 형식을 갖췄던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보르헤스는 이 때문에 케베도의 시가 상투적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측면이 있다고 먼저 지적합니다. '죽음'에 대한 케베도의 묘사를 완곡어법이라고 비판하는 부분은 약간 웃기기도 합니다. 보르헤스는 "내 눈을 감길 수 있으리 최후의 / 그 그림자 (···)"라고 쓴 부분을 두고, 우린 잠 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보르헤스가 쉰 살 무렵이 되어서 거의 시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런 비판은 의미심장하기까지 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젊은 보르헤스는 선천적으로 시력이 약했던 증조부 세대를 가늠해 보면서 어느 정도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래서 이런 비판은 오직 보르헤스만 가능한, 아이러니하고 웃긴 지점마저 있습니다. 그럼에도 보르헤스는 마지막 행에서만큼은 케베도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케베도는 논리적이기보다는 직관적이라고 언급하며, 자신의 느끼는 강렬함을 "불사의 약속"으로 만들어내기에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보르헤스가 보기에 케베도는 그 엄격한 형식성 탓에 단점이 아주 없지는 않으나, 여전히 문학적으로 불사의 삶을 살아갈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는 겁니다. 한편, 보르헤스가 타인의 작품을 이해하고 읽어내는 방식을 살펴 보면, 그가 살아가게 될 삶이 일종의 예지 형태로 녹아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쓴 이십대 후반이라는 나이를 고려해보면, 훗날 쓰게 될 작품과 희미한 연결선이 언뜻언뜻 보인다는 점도 하나의 감상 포인트입니다. 여담이지만 소설 전집을 다 읽고나서 논픽션 전집을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롭네요.
케베도는 논리적이기보다 직관적이다. 그에게 있어 강렬함은 불사의 약속이다. 아무것에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의 강렬함이 아니라 사랑의 욕구, 아니, 좀 더 정확히는 그 행위의 강도를 말한다. 환희, 존재의 완전함이 그 순간을 앞지르고, 그렇게 강렬한 순간을 한번 경험한 사람은 사는 법을 잊지 않고 죽지 않을 것이라 단언한다. 이제 에로스는 은유의 경지에 이른다. 육체의 뻔뻔스러움과 안식일은 육체의 손님이자 동반자인 영혼을 위해 기쁜 소식을 전하는 매체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2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russist님의 대화: [과식주의] 여기서 과식주의(culteranismo)로 번역된 단어는 흔히 공고라주의(Gongorismo)라고 해서, 16세기 시인 루이스 공고라에서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문체 운동을 일컫습니다. 화려하고 과장된('過飾') 어휘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보르헤스도 설명하듯, 과식주의는 "은유법의 남용, 라틴어 어투, 즉 고어체의 사용 그리고 그리스 신화의 남용"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보르헤스는 이 글에서 과식주의를 비판합니다. 제가 제대로 읽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글은 공고라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에서 파생한 문체에 대한 비판인 것 같습니다. 마치 성서의 말씀은 언제나 있으되, 그것을 왜곡하는 사람도 항상 있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성서의 진의를 어쩐 일인지 자신만은 알아버렸다고 주장하면서 구세주를 자처하고 내용을 왜곡해서 설파하는 사이비들처럼요. 보르헤스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와 그 용례의 관계를 들어서 이러한 논의를 엽니다(216쪽). 즉 문법이란 그것에 고착되거나 귀속되기 위한 정답지가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더 넓은 땅을 여행하기 위한 토대라는 겁니다. 생각해보면, 문법에 과도하게 신경쓰다보면 우리는 언어적 입스(yips) 상태에 빠집니다. 하지만 능숙한 운동 선수가 그렇듯이, 경이로운 플레이는 논리가 아니라 숙달된 감각, 찰나의 직관으로만 가능합니다. 모듈화된 룰이 중요한 것은 그것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고 그 모듈화된 경직성으로부터 제대로 알고 벗어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이러한 맥락에서, 보르헤스는 공고라가 아닌 과식주의의 세 가지 오류를 다시금 살핍니다. 먼저, 은유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은유가 오래된 생각을 쇄신하는 수단이 되기에 실패한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은유는 은유라서 시적인 것이 아니라 그가 성취한 표현에 의해 시적이다"라는 내용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과식주의에서 은유는 상상하는 수단이 아니라 "상상하거나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수단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 다음으로, 공고라가 즐겨썼던 라틴어식 표현을 짚어봅니다. 보르헤스는 라틴어식 표현을 두고, 자신이 “오늘날 스페인어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정통주의자들의 어리석음과 비사교성보다는 라틴어 혼용주의자의 너그러운 자세를 선호한다”고 말합니다. 젠체하며 학식을 뽐내는 수단이 아니라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식주의자들이 보여주는 일종의 '믿음 없는 믿음'을 지적합니다. 이는 무신론자들의 주기도문과 같습니다. 이때 과식주의자들의 그리스 신화는 공통된 이야기에 접촉하려는 열망이 아니라 "아부하거나 타지의 풍경을 이용하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 점에서 과식주의는 공고라의 장치를 치장으로 오해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무신론자가 “하느님께 맹세코!”라는 말을 하거나 십자가의 고난을 믿지 않는 이가 “주여, 마귀로부터 나를 지켜주소서.”라고 기도하며 마귀를 상상하지 않는 것은 나태한 것이다. 시는 신화의 발견 혹은 친연성을 가지고 신화를 소재로 등장시키는 것이지 아부하거나 타지의 풍경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과식주의는 죄를 저질렀다. 그늘과 그림자, 흔적, 단어, 메아리, 부재와 환영을 사용했으며 (믿지도 않으면서)불사조와 신화와 천사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지없이 화려한 시의 흉내였으며 죽음으로 아름답게 치장까지 하였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24,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russist님의 대화: [돈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의 소네트]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는 17세기 스페인 작가입니다. 소네트와 산문, 비평을 오가며 다양한 글을 썼다고 합니다. 케베도의 소네트는 굉장히 엄격한 형식을 갖췄던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보르헤스는 이 때문에 케베도의 시가 상투적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측면이 있다고 먼저 지적합니다. '죽음'에 대한 케베도의 묘사를 완곡어법이라고 비판하는 부분은 약간 웃기기도 합니다. 보르헤스는 "내 눈을 감길 수 있으리 최후의 / 그 그림자 (···)"라고 쓴 부분을 두고, 우린 잠 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보르헤스가 쉰 살 무렵이 되어서 거의 시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런 비판은 의미심장하기까지 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젊은 보르헤스는 선천적으로 시력이 약했던 증조부 세대를 가늠해 보면서 어느 정도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래서 이런 비판은 오직 보르헤스만 가능한, 아이러니하고 웃긴 지점마저 있습니다. 그럼에도 보르헤스는 마지막 행에서만큼은 케베도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케베도는 논리적이기보다는 직관적이라고 언급하며, 자신의 느끼는 강렬함을 "불사의 약속"으로 만들어내기에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보르헤스가 보기에 케베도는 그 엄격한 형식성 탓에 단점이 아주 없지는 않으나, 여전히 문학적으로 불사의 삶을 살아갈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는 겁니다. 한편, 보르헤스가 타인의 작품을 이해하고 읽어내는 방식을 살펴 보면, 그가 살아가게 될 삶이 일종의 예지 형태로 녹아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쓴 이십대 후반이라는 나이를 고려해보면, 훗날 쓰게 될 작품과 희미한 연결선이 언뜻언뜻 보인다는 점도 하나의 감상 포인트입니다. 여담이지만 소설 전집을 다 읽고나서 논픽션 전집을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롭네요.
나는 신과 불사의 무아지경을 믿는 이들의 편이다. 내 믿음은 우나무노식도 아니고 불편하지도 않다. 나의 밤은 그 안에서 편히 잘 줄 알고, 꿈꾸어 마지않는 현실은 휴가를 보내 버리기까지 한다. 내 믿음은 자주 확신에 이르고 결코 의심에 굴복하지 않는 ‘가능함’이다. 묘사할 수도 없는 원자 하나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면서 자신의 자아는 최후에도 숨길 수 있다고 확신하는 기계론자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우주에 물질 분자 하나를 훔치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면서 수없는 영혼은 허락한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3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이미지의 시뮬레이션] 예술, 그중에서도 특히 문학에서 '이미지'라는 것을 깊이 살펴보는 글입니다. 보르헤스는 기존의 문학에서 '이미지'가 시각적인 것에만 국한된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그 "시각적인 것의 무분별한 남용 사례"를 하나씩 살핍니다. (234) "어둠이 아니다. 즉 빛나는 밝음, 눈부신 밝음이자 내면의 밝음, 깊은 밝음이다. 번쩍이는 바다는 파란 크리스털이다. 다이아몬드가 뿌려진, 또는 태양이 타원을 그리며 횡단하는 무결점, 사파이어색 하늘." 보르헤스는 은유라고 불리는 많은 것들이 시각적인 무절제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면서, 기존의 표현들이 얼마나 정확하지 않은지, 최상급의 과장된 표현으로 가득한지, 그리고 그러한 게으른 과장법이 독자의 부주의와 어떻게 공모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생각해보면, 과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자신이 설득하려는 이미지에 닿지 못하는 궁색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닿지 않기 때문에 수식어를 주렁주렁 다는 것인데, 계속해서 수식을 달수록 애당초 닿으려는 이미지와는 더욱 멀어지고마는 역설에 봉착합니다. 좁아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날카로워지고 있다고 오판하는 일이 그렇게 왕왕 벌어집니다. 그 점에서 '이미지'를 설득하려는 사람은 휴리스틱 이론에서의 '교집합의 오류', 혹은 '결합 오류(conjunction fallacy)'라고 부르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미국과 러시아가 전쟁을 할 확률이 얼마인가'를 물으면 그럴 확률이 거의 없을 거라고 말한 사람들에게 질문을 바꿔서, '제삼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미국과 러시아가 전쟁을 하게 될 확률이 얼마인가'를 물으면 오히려 전쟁이 벌어질 확률을 높게 책정한다는 겁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는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다. 왜냐면 전자의 질문이 후자의 질문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이미지를 설득하기 위해서 수사적 장치를 동원하는 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결국 수식어는 한정하는 역할을 하고, 더 많은 수식어를 쓸수록 더욱더 그 이미지는 한정적인 것이 되어서 도무지 공감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마는데도, 이상하게도 쓰는 입장에서는 더욱 그럴듯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이 글에 달린 댓글 2개 보기
russist님의 대화: [이미지의 시뮬레이션] 예술, 그중에서도 특히 문학에서 '이미지'라는 것을 깊이 살펴보는 글입니다. 보르헤스는 기존의 문학에서 '이미지'가 시각적인 것에만 국한된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그 "시각적인 것의 무분별한 남용 사례"를 하나씩 살핍니다. (234) "어둠이 아니다. 즉 빛나는 밝음, 눈부신 밝음이자 내면의 밝음, 깊은 밝음이다. 번쩍이는 바다는 파란 크리스털이다. 다이아몬드가 뿌려진, 또는 태양이 타원을 그리며 횡단하는 무결점, 사파이어색 하늘." 보르헤스는 은유라고 불리는 많은 것들이 시각적인 무절제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면서, 기존의 표현들이 얼마나 정확하지 않은지, 최상급의 과장된 표현으로 가득한지, 그리고 그러한 게으른 과장법이 독자의 부주의와 어떻게 공모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생각해보면, 과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자신이 설득하려는 이미지에 닿지 못하는 궁색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닿지 않기 때문에 수식어를 주렁주렁 다는 것인데, 계속해서 수식을 달수록 애당초 닿으려는 이미지와는 더욱 멀어지고마는 역설에 봉착합니다. 좁아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날카로워지고 있다고 오판하는 일이 그렇게 왕왕 벌어집니다. 그 점에서 '이미지'를 설득하려는 사람은 휴리스틱 이론에서의 '교집합의 오류', 혹은 '결합 오류(conjunction fallacy)'라고 부르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미국과 러시아가 전쟁을 할 확률이 얼마인가'를 물으면 그럴 확률이 거의 없을 거라고 말한 사람들에게 질문을 바꿔서, '제삼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미국과 러시아가 전쟁을 하게 될 확률이 얼마인가'를 물으면 오히려 전쟁이 벌어질 확률을 높게 책정한다는 겁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는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다. 왜냐면 전자의 질문이 후자의 질문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이미지를 설득하기 위해서 수사적 장치를 동원하는 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결국 수식어는 한정하는 역할을 하고, 더 많은 수식어를 쓸수록 더욱더 그 이미지는 한정적인 것이 되어서 도무지 공감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마는데도, 이상하게도 쓰는 입장에서는 더욱 그럴듯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끝으로 한 가지만 더 언급하자면 그런 언어의 부주의나 균열, 우유부단함이나 고의적인 속임수는 항상 독자와 공모한다. (···) 나태함은 절반의 이미지만으로 만족하곤 하며, 읽은 것을 실행에 옮길 마음이 없다 보니 오류를 발견하지 못한다. (···) 모든 작가가 진정한 미학적 성취는 새로운 일이지만 문학 비평가나 언론인, 동료들이나 문학 애호가에게 부적절한 기술의 전시보다도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요즘은 실패한 이미지가 '대담하다(audaz)'며 더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을 안다. 신비로움을 강조하고 미치광이가 기법을 가진 척하기만 하면 표현의 반복적인 실패가 명성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안다. 예를 들어 공고라가 알았고, 우리 시대의 글줄이라도 쓰는 모든 작가가 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3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호르헤 만리케의 ⟪코플라⟫] 이 글을 보면서 느낀 점이 있는데요, 보르헤스의 산문에는 하나같이 묘한 특징이 있다는 겁니다. 언뜻 보면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않고, 더러는 명료한 주장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명료한 논증 구조를 내세워서, 문단 하나하나마다 잠정적인 결론을 맺어가면서 독자들을 설득하는 방식과는 좀 다른 듯합니다. 보르헤스는 본서에서 스페인어로 쓰인 무수한 고전 작품들을 논합니다. 고전에 대한 기존의 관점을 살펴보고, 비판하는 한편, 배울 점을 찾는 식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칭송하고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작품이 지닌 시대적 한계와 현재의 관점에서 본 미진함을 모두 살핀 다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계승할 부분을 찾으면서 마무리하는 구조인 겁니다. 이 글도 마찬가집니다. 보르헤스는 호르헤 만리케가 쓴, 중세의 장례 애가 장르인 코플라를 본격적으로 살핍니다. 보르헤스는 이 코플라가 '죽음'이라는 주제에 걸맞지는 않으나, 그 아름다움만은 인정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코플라의 한계에서 그 불멸성에 대한 형이상학을 뽑아올리는 마지막 문장은 과연 멋집니다. 어쩜, 한 편의 좋은 글은 우리를 협소한 앎에 자족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그 무궁무진하게 열려있는 무지로 인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앎이 아니라 모름 속에서 더 편안해 하고 활짝 열려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글에 달린 댓글 2개 보기
russist님의 대화: [호르헤 만리케의 ⟪코플라⟫] 이 글을 보면서 느낀 점이 있는데요, 보르헤스의 산문에는 하나같이 묘한 특징이 있다는 겁니다. 언뜻 보면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않고, 더러는 명료한 주장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명료한 논증 구조를 내세워서, 문단 하나하나마다 잠정적인 결론을 맺어가면서 독자들을 설득하는 방식과는 좀 다른 듯합니다. 보르헤스는 본서에서 스페인어로 쓰인 무수한 고전 작품들을 논합니다. 고전에 대한 기존의 관점을 살펴보고, 비판하는 한편, 배울 점을 찾는 식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칭송하고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작품이 지닌 시대적 한계와 현재의 관점에서 본 미진함을 모두 살핀 다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계승할 부분을 찾으면서 마무리하는 구조인 겁니다. 이 글도 마찬가집니다. 보르헤스는 호르헤 만리케가 쓴, 중세의 장례 애가 장르인 코플라를 본격적으로 살핍니다. 보르헤스는 이 코플라가 '죽음'이라는 주제에 걸맞지는 않으나, 그 아름다움만은 인정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코플라의 한계에서 그 불멸성에 대한 형이상학을 뽑아올리는 마지막 문장은 과연 멋집니다. 어쩜, 한 편의 좋은 글은 우리를 협소한 앎에 자족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그 무궁무진하게 열려있는 무지로 인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앎이 아니라 모름 속에서 더 편안해 하고 활짝 열려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코플라⟫를 다시 읽으며 작가가 덧없고 일시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고를 가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만리케(철학적 명상에 잠긴 모든 스페인 사람)에게는 영원한 것이 유일한 존재 형태이다. 하지만 해골은 그 주인보다 오래 살아남고, 따라서 해골이 인간보다 사실적인 법이다. 이탈리카의 유적들은 도시보다 오래 살아남고(죽어 남고) 따라서 오늘 그곳의 변덕스러운 날씨는 사실이며 지난날 그곳에 산 사람들은 허구이다. 스페인이라는 이름은 그 제국보다 오래 버텼으나 이제 제국은 존재하지 않으니 영국인들은 이와 유사한 현실을 기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현실을 위계화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어떤 이유로 죽음의 순간이 삶의 순간들보다 진실하며, 금요일이 월요일보다 진실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44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russist님의 대화: [호르헤 만리케의 ⟪코플라⟫] 이 글을 보면서 느낀 점이 있는데요, 보르헤스의 산문에는 하나같이 묘한 특징이 있다는 겁니다. 언뜻 보면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않고, 더러는 명료한 주장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명료한 논증 구조를 내세워서, 문단 하나하나마다 잠정적인 결론을 맺어가면서 독자들을 설득하는 방식과는 좀 다른 듯합니다. 보르헤스는 본서에서 스페인어로 쓰인 무수한 고전 작품들을 논합니다. 고전에 대한 기존의 관점을 살펴보고, 비판하는 한편, 배울 점을 찾는 식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칭송하고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작품이 지닌 시대적 한계와 현재의 관점에서 본 미진함을 모두 살핀 다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계승할 부분을 찾으면서 마무리하는 구조인 겁니다. 이 글도 마찬가집니다. 보르헤스는 호르헤 만리케가 쓴, 중세의 장례 애가 장르인 코플라를 본격적으로 살핍니다. 보르헤스는 이 코플라가 '죽음'이라는 주제에 걸맞지는 않으나, 그 아름다움만은 인정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코플라의 한계에서 그 불멸성에 대한 형이상학을 뽑아올리는 마지막 문장은 과연 멋집니다. 어쩜, 한 편의 좋은 글은 우리를 협소한 앎에 자족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그 무궁무진하게 열려있는 무지로 인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앎이 아니라 모름 속에서 더 편안해 하고 활짝 열려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독자여! 코플라의 좁은 길을 통해 우리는 형이상학에 도달했다. 이제 당신은 자신의 무지의 주인이니 나의 무지가 필요없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46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russist님의 대화: [이미지의 시뮬레이션] 예술, 그중에서도 특히 문학에서 '이미지'라는 것을 깊이 살펴보는 글입니다. 보르헤스는 기존의 문학에서 '이미지'가 시각적인 것에만 국한된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그 "시각적인 것의 무분별한 남용 사례"를 하나씩 살핍니다. (234) "어둠이 아니다. 즉 빛나는 밝음, 눈부신 밝음이자 내면의 밝음, 깊은 밝음이다. 번쩍이는 바다는 파란 크리스털이다. 다이아몬드가 뿌려진, 또는 태양이 타원을 그리며 횡단하는 무결점, 사파이어색 하늘." 보르헤스는 은유라고 불리는 많은 것들이 시각적인 무절제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면서, 기존의 표현들이 얼마나 정확하지 않은지, 최상급의 과장된 표현으로 가득한지, 그리고 그러한 게으른 과장법이 독자의 부주의와 어떻게 공모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생각해보면, 과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자신이 설득하려는 이미지에 닿지 못하는 궁색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닿지 않기 때문에 수식어를 주렁주렁 다는 것인데, 계속해서 수식을 달수록 애당초 닿으려는 이미지와는 더욱 멀어지고마는 역설에 봉착합니다. 좁아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날카로워지고 있다고 오판하는 일이 그렇게 왕왕 벌어집니다. 그 점에서 '이미지'를 설득하려는 사람은 휴리스틱 이론에서의 '교집합의 오류', 혹은 '결합 오류(conjunction fallacy)'라고 부르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미국과 러시아가 전쟁을 할 확률이 얼마인가'를 물으면 그럴 확률이 거의 없을 거라고 말한 사람들에게 질문을 바꿔서, '제삼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미국과 러시아가 전쟁을 하게 될 확률이 얼마인가'를 물으면 오히려 전쟁이 벌어질 확률을 높게 책정한다는 겁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는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다. 왜냐면 전자의 질문이 후자의 질문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이미지를 설득하기 위해서 수사적 장치를 동원하는 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결국 수식어는 한정하는 역할을 하고, 더 많은 수식어를 쓸수록 더욱더 그 이미지는 한정적인 것이 되어서 도무지 공감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마는데도, 이상하게도 쓰는 입장에서는 더욱 그럴듯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글에서 인용된 ‘무절제한 표현들’을 읽다보니 보르헤스가 러브크래프트를 완전히 상반된 스타일로 패러디(?)했던 단편이 생각났어요.ㅎㅎ
화제로 지정된 대화
[문학의 기쁨] 보르헤스는 먼저 자신이 과거에 읽었던 책들을 쭉 열거하면서, 그것을 다시 읽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과거야말로 새로운 것입니다. 미래가 아니라요. 잘 쓰인 한 권의 책을 소유하는 것과 그 책을 읽고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일은 전혀 다름에도, 우리는 어떤 책을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것을 한번 읽고 옆으로 치워버립니다. 이렇듯, "무모할 정도의 고고학적 노력"(253쪽)으로 읽고 또 읽어서, '이미 있던 것'에서 '앞으로 있게 될 것'을 끌어내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고, 또 사람들이 큰 관심을 두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보르헤스가 이 글의 말미에서 언급하는 이름들은 아직 건재합니다. 케베도와 로버트 번스와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와 하인리히 하이네와 윌트 휘트먼이 바로 그들입니다. 일전에 1부에서 새로움에 대해서 쓴 내용이 떠오릅니다. 새로움을 말하려는 사람은 새롭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어야만 자신의 새로움이 진정 새로운지 검증할 수 있습니다. 1부터 9라는 개념을 고안한 다음에, 0이라는 숫자가 있어야만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고대인들처럼요. 보르헤스는 영원의 책이 진정 존재한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다만 제가 봤을 때 보르헤스는 감히 영원의 책을 쓰려거나 소유하려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영원이 책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을 믿으면서, 그 한 페이지를 탐구하기를 바랐던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본문에서 보르헤스가 건네는 말에 잘 담겨있습니다. "독자여, 그대가 선호하는 책들은 마지막까지 읽지 못한 영원의 책의 초고와도 같다."(249쪽) 결국 '문학의 기쁨'이란, 고전을 다시 읽는 기쁨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고 할지라도 그는 한 인간일 뿐이며, 한 인간은 사는 동안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겸손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이 전혀 아름답지 않은 인간을 아름다움 쪽으로 차차 나아가게 만듭니다. 따라서 불완전한 과거를 탐구하는 고고학이야말로 미래의 학문입니다. 과거를 발굴하는 행위와 미래를 지향하는 행위는 방향이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책장이 쉽게 넘어가는 책이 아니라 자꾸 뒤를 들춰봐야하는 이런 책을 읽을 때 참 기쁩니다.
이 글에 달린 댓글 2개 보기
russist님의 대화: [문학의 기쁨] 보르헤스는 먼저 자신이 과거에 읽었던 책들을 쭉 열거하면서, 그것을 다시 읽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과거야말로 새로운 것입니다. 미래가 아니라요. 잘 쓰인 한 권의 책을 소유하는 것과 그 책을 읽고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일은 전혀 다름에도, 우리는 어떤 책을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것을 한번 읽고 옆으로 치워버립니다. 이렇듯, "무모할 정도의 고고학적 노력"(253쪽)으로 읽고 또 읽어서, '이미 있던 것'에서 '앞으로 있게 될 것'을 끌어내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고, 또 사람들이 큰 관심을 두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보르헤스가 이 글의 말미에서 언급하는 이름들은 아직 건재합니다. 케베도와 로버트 번스와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와 하인리히 하이네와 윌트 휘트먼이 바로 그들입니다. 일전에 1부에서 새로움에 대해서 쓴 내용이 떠오릅니다. 새로움을 말하려는 사람은 새롭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어야만 자신의 새로움이 진정 새로운지 검증할 수 있습니다. 1부터 9라는 개념을 고안한 다음에, 0이라는 숫자가 있어야만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고대인들처럼요. 보르헤스는 영원의 책이 진정 존재한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다만 제가 봤을 때 보르헤스는 감히 영원의 책을 쓰려거나 소유하려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영원이 책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을 믿으면서, 그 한 페이지를 탐구하기를 바랐던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본문에서 보르헤스가 건네는 말에 잘 담겨있습니다. "독자여, 그대가 선호하는 책들은 마지막까지 읽지 못한 영원의 책의 초고와도 같다."(249쪽) 결국 '문학의 기쁨'이란, 고전을 다시 읽는 기쁨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고 할지라도 그는 한 인간일 뿐이며, 한 인간은 사는 동안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겸손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이 전혀 아름답지 않은 인간을 아름다움 쪽으로 차차 나아가게 만듭니다. 따라서 불완전한 과거를 탐구하는 고고학이야말로 미래의 학문입니다. 과거를 발굴하는 행위와 미래를 지향하는 행위는 방향이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책장이 쉽게 넘어가는 책이 아니라 자꾸 뒤를 들춰봐야하는 이런 책을 읽을 때 참 기쁩니다.
영원한 존재의 운명은 대체로 다르다. 감정이나 사고의 부수적인 것들은 사라지거나 업적 아에서 보이지 않게 되고 회복할 수도 없으며 아무도 그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게 된다. 반면에 그의 개성(인생의 한순간도 순수하지 않았으리라는 단순하고 이상적인 생각)은 뿌리처럼 영혼에 들러붙는다. 숫자처럼 완벽해진다. 추상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고작 그림자 한 조각처럼 될지라도 영원한 것이다. 다음의 문장이 아주 잘 어울린다. "메아리로 남았으니 위엄의 결핍과 공백에, 온전한 목소리가 아니라 말의 부재에 매달려 가라."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52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russist님의 대화: [문학의 기쁨] 보르헤스는 먼저 자신이 과거에 읽었던 책들을 쭉 열거하면서, 그것을 다시 읽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과거야말로 새로운 것입니다. 미래가 아니라요. 잘 쓰인 한 권의 책을 소유하는 것과 그 책을 읽고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일은 전혀 다름에도, 우리는 어떤 책을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것을 한번 읽고 옆으로 치워버립니다. 이렇듯, "무모할 정도의 고고학적 노력"(253쪽)으로 읽고 또 읽어서, '이미 있던 것'에서 '앞으로 있게 될 것'을 끌어내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고, 또 사람들이 큰 관심을 두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보르헤스가 이 글의 말미에서 언급하는 이름들은 아직 건재합니다. 케베도와 로버트 번스와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와 하인리히 하이네와 윌트 휘트먼이 바로 그들입니다. 일전에 1부에서 새로움에 대해서 쓴 내용이 떠오릅니다. 새로움을 말하려는 사람은 새롭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어야만 자신의 새로움이 진정 새로운지 검증할 수 있습니다. 1부터 9라는 개념을 고안한 다음에, 0이라는 숫자가 있어야만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고대인들처럼요. 보르헤스는 영원의 책이 진정 존재한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다만 제가 봤을 때 보르헤스는 감히 영원의 책을 쓰려거나 소유하려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영원이 책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을 믿으면서, 그 한 페이지를 탐구하기를 바랐던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본문에서 보르헤스가 건네는 말에 잘 담겨있습니다. "독자여, 그대가 선호하는 책들은 마지막까지 읽지 못한 영원의 책의 초고와도 같다."(249쪽) 결국 '문학의 기쁨'이란, 고전을 다시 읽는 기쁨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고 할지라도 그는 한 인간일 뿐이며, 한 인간은 사는 동안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겸손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이 전혀 아름답지 않은 인간을 아름다움 쪽으로 차차 나아가게 만듭니다. 따라서 불완전한 과거를 탐구하는 고고학이야말로 미래의 학문입니다. 과거를 발굴하는 행위와 미래를 지향하는 행위는 방향이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책장이 쉽게 넘어가는 책이 아니라 자꾸 뒤를 들춰봐야하는 이런 책을 읽을 때 참 기쁩니다.
무모할 정도의 고고학적인 노력만이 이 황폐한 곳을 재건할 수 있으리라. 또한 영원한 것에는 불멸성이 있다. 달과 봄, 나이팅게일이 하인리히 하이네의 영광을 나타낸다면 앨저넌 스윈번은 회색빛 하늘을 견뎌 내는 바다가 표상하고, 긴 승강장과 선착장은 윌트 휘트먼의 영광을 형상화한다. 그러나 최고의 불멸성(열정이 지배하는 불멸)은 계속 채워지지 않는다. 죽음과 절망, 욕망과 증오를 모두 담은 목소리를 내는 시인은 없다. 다시 말해 인류의 위대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고 우리는 이런 불완전함 때문에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5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심슨님의 대화: 글에서 인용된 ‘무절제한 표현들’을 읽다보니 보르헤스가 러브크래프트를 완전히 상반된 스타일로 패러디(?)했던 단편이 생각났어요.ㅎㅎ
아마 ⟨더 많은 것들이 있다⟩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어떤 부분이 그랬을까요?
.
russist님의 대화: 아마 ⟨더 많은 것들이 있다⟩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어떤 부분이 그랬을까요?
(괴물이 사는 곳으로 추정되는) 어떤 으스스한 공간만을 묘사했던 작품으로 기억하는데, 괴물의 모습을 늘 지나친 수사로 표현하는 러브크래프트에 대한 비평 같았거든요. 아니면 본인이 어디선가 이렇게 말한 것을 제가 읽었을수도;
화제로 지정된 대화
[탱고의 기원] 갑자기 왠 탱고인가 할 수도 있습니다만, 보르헤스는 생전 탱고에 관한 시나 단편 소설, 산문을 많이 썼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보르헤스에게 탱고는 단순한 음악은 아니었습니다. 탱고는 문학이 아닌 것중에 가장 문학적인 텍스트였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많은 이민자가 들어오게 되면서 발생한 여러 사회 문화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 탱고였거든요. 하지만 보르헤스는 오늘날의 변형된 탱고가 아니라 초창기 탱고에 천착했습니다. 초기 탱고는 이민자들의 좌절과 향수, 변두리의 거친 삶과 활력, 칼잡이와 건달의 길거리 결투와 숙명성, 사창가의 에로티시즘과 외로움이라는 독특한 정서가 녹아있는데요, 보르헤스가 탱고에서 읽어내고자 한 것도 바로 이러했습니다. 본문에서 미겔 카미노의 시를 언급하는 부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보르헤스는 부드럽고 슬프게 사랑을 노래하는 이탈리아적인 감상적 탱고보다 활력 넘치는 도시적인 초기 탱고가 더 낫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훗날 이런 생각을 일부 수정하긴 했지만, 큰 틀에서 보르헤스가 도시적이고 항구적인 것이 반영된 초기 탱고에 천착했음은 이 글에서도 어렴풋이 드러납니다. 초기 단편집에서도 이런 경향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인 2016년에는 탱고를 주제로 한 강연 녹음본이 발견되어 출간되기도 했는데, 현재 민음사에서 번역본이 나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보르헤스는 탱고에 꽤나 진심이어서, 1965년 아스토르 피아졸라(Astro Piazzolla)와 함께 탱고 음반을 내기도 했습니다. 보르헤스의 시 6편과 단편 ⟨장밋빛 모퉁이의 남자⟩에 음악을 붙인 것입니다. 본문 애기를 좀 해보자면, 보르헤스는 글에서 말 그대로 자신이 생각하는 탱고의 기원을 논합니다. 먼저, 보르헤스는 탱고의 기원에 대한 분분한 의견을 소개한 다음,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는데요, 이 탱고의 기원을 추적하는 과정 자체가 유럽적인 것과 아메리카적인 것이 혼재하는 아르헨티나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우루과이 작가인 비센테 로시를 비롯한 사람들은 오늘날 탱고가 우루과이의 '밀롱가'라는 전통 음악에서 비롯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밀롱가는 19세기 후반 쿠바에서 아르헨티나로 전해진 '아네바라'가 아프리카계 음악인 '칸돔베'와 만나서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듯, 탱고야말로 아메리카의 혼란한 역사를 방증하는 또 하나의 텍스트인 것입니다. 보르헤스는 탱고가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에서 나왔다는 로시의 주장을 반박하며, 탱고가 가우초에 향수를 느끼는 몬테비데오에서만 오롯이 나왔다고 말할 수 없으며, 오히려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항구도시적 것("포르테뇨")에도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음을 이 글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쓰고 보니 두서가 없긴 한데, 탱고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다룰 일이 있을 것 같아요.
탱고 - 네 개의 강연전 세계 독자들에게 전하는 보르헤스의 마지막 신간 『탱고』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보르헤스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 만에 출간된 그의 유고 강연집으로 37년 동안이나 망각 속에 묻혀 있던 보르헤스의 강연 자료를 책으로 펴낸 것이다.
이 글에 달린 댓글 1개 보기
russist님의 대화: [탱고의 기원] 갑자기 왠 탱고인가 할 수도 있습니다만, 보르헤스는 생전 탱고에 관한 시나 단편 소설, 산문을 많이 썼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보르헤스에게 탱고는 단순한 음악은 아니었습니다. 탱고는 문학이 아닌 것중에 가장 문학적인 텍스트였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많은 이민자가 들어오게 되면서 발생한 여러 사회 문화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 탱고였거든요. 하지만 보르헤스는 오늘날의 변형된 탱고가 아니라 초창기 탱고에 천착했습니다. 초기 탱고는 이민자들의 좌절과 향수, 변두리의 거친 삶과 활력, 칼잡이와 건달의 길거리 결투와 숙명성, 사창가의 에로티시즘과 외로움이라는 독특한 정서가 녹아있는데요, 보르헤스가 탱고에서 읽어내고자 한 것도 바로 이러했습니다. 본문에서 미겔 카미노의 시를 언급하는 부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보르헤스는 부드럽고 슬프게 사랑을 노래하는 이탈리아적인 감상적 탱고보다 활력 넘치는 도시적인 초기 탱고가 더 낫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훗날 이런 생각을 일부 수정하긴 했지만, 큰 틀에서 보르헤스가 도시적이고 항구적인 것이 반영된 초기 탱고에 천착했음은 이 글에서도 어렴풋이 드러납니다. 초기 단편집에서도 이런 경향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인 2016년에는 탱고를 주제로 한 강연 녹음본이 발견되어 출간되기도 했는데, 현재 민음사에서 번역본이 나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보르헤스는 탱고에 꽤나 진심이어서, 1965년 아스토르 피아졸라(Astro Piazzolla)와 함께 탱고 음반을 내기도 했습니다. 보르헤스의 시 6편과 단편 ⟨장밋빛 모퉁이의 남자⟩에 음악을 붙인 것입니다. 본문 애기를 좀 해보자면, 보르헤스는 글에서 말 그대로 자신이 생각하는 탱고의 기원을 논합니다. 먼저, 보르헤스는 탱고의 기원에 대한 분분한 의견을 소개한 다음,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는데요, 이 탱고의 기원을 추적하는 과정 자체가 유럽적인 것과 아메리카적인 것이 혼재하는 아르헨티나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우루과이 작가인 비센테 로시를 비롯한 사람들은 오늘날 탱고가 우루과이의 '밀롱가'라는 전통 음악에서 비롯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밀롱가는 19세기 후반 쿠바에서 아르헨티나로 전해진 '아네바라'가 아프리카계 음악인 '칸돔베'와 만나서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듯, 탱고야말로 아메리카의 혼란한 역사를 방증하는 또 하나의 텍스트인 것입니다. 보르헤스는 탱고가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에서 나왔다는 로시의 주장을 반박하며, 탱고가 가우초에 향수를 느끼는 몬테비데오에서만 오롯이 나왔다고 말할 수 없으며, 오히려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항구도시적 것("포르테뇨")에도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음을 이 글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쓰고 보니 두서가 없긴 한데, 탱고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다룰 일이 있을 것 같아요.
나의 논리는 간단하다. 탱고는 분명히 도시적인 공간 또는 도시 근교나 항구에서 발생했는데, 코랄레스 사람들은 항상 팜파스와 가우초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고 어떤 형태의 발명에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과거를 숭배하고 가우초를 흉내 내는 데 열중했기 때문이다. 탱고는 들판의 것이 아니라 항구의 것이다. 그것의 고향은 들판이 아니라 교외의 분홍빛 길모퉁이이고, 그 분위기는 바호 지역의 것이며, 그 상징은 옴부가 아니라 강변에 늘어진 버드나무의 가지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62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날짜] 네 가지 주제에 대한 짤막한 글 모음처럼 읽힙니다. 제목이 왜 '날짜(Fechas)’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렴풋이 네 편의 짤막한 글에서 '시간과 그 흐름'을 쓰고자 했다는 인상을 받기는 했지만, 정확히 그런 의도로 썼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가장 재밌게 봤던 글만 말하면, 레예스의 애넥도트(anecdote)를 엮은 ⟪해시계⟫를 논한 두 번째 글입니다. 애넥도트는 흔히 '일화'로 옮겨지는데, 각주에서 설명하듯 한국적인 맥락에서는 이 장르를 지칭하는 마땅한 단어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애넥도트는 희랍어 ‘anékdota’에서 유래한 말로,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발표되지 않은 이야기’, ‘미공개 이야기’라고 합니다. 부정접두사 “an-”과 ‘출판된’을 의미하는 “ékdotos”이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며, 이것이 현대 영어에서 ‘anecdote’로 옮겨왔다고 전해집니다. 애넥도트는 특정한 이유 때문에 출판되거나 공개되지 않았던 이야기감이라는 의미에서 출발합니다. 보르헤스에 따르면, 애넥도트는 "모든 시적 현실이자 우리가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 애넥도트는 핵심적인 요소만 진술했고, 또 교훈적인 요소가 반드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레예스의 애넥도트는 항상 결말에 이르러서야 그 핵심과 교훈이 드러나는 기존의 '일화주의자'들의 결과물과 달랐다는 것이 보르헤스의 말입니다. "레예스는 우리에게 작은 세계를 소개하고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만든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영화 끝에 기막힌 반전이 숨겨진 영화가 한때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다가 금세 사그라든 것이 떠올랐습니다. 좋은 책과 영화는 기막힌 반전, 스포일러와 무관하게 접할 때마다 새로운 것이 아닐까 합니다. 좋은 책은 꾹 참고 끝까지 읽고 나서야 좋은 이유를 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읽고 있는 페이지에서 좋은 점을 꼭 하나는 꼽을 수 있는 책이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좋다'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요.) 한편, 이전에 했던 모임에서 제발트의 ⟪전원에서 머문 날들⟫를 읽으면서, 잠시 애넥도트의 한 사례를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달력 이야기꾼 요한 페터 헤벨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참고로 2010년대 음악의 명반 계열에 오른 ESENS의 앨범 제목도 애넥도트입니다.
전원에 머문 날들독일문학의 거장 W. G. 제발트의 에세이. 요한 페터 헤벨, 고트프리트 켈러, 로베르트 발저, 장자크 루소, 에두아르트 뫼리케, 얀 페터 트리프, 총 여섯 작가에 대해 다룬다.
이 글에 달린 댓글 1개 보기
russist님의 대화: [과식주의] 여기서 과식주의(culteranismo)로 번역된 단어는 흔히 공고라주의(Gongorismo)라고 해서, 16세기 시인 루이스 공고라에서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문체 운동을 일컫습니다. 화려하고 과장된('過飾') 어휘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보르헤스도 설명하듯, 과식주의는 "은유법의 남용, 라틴어 어투, 즉 고어체의 사용 그리고 그리스 신화의 남용"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보르헤스는 이 글에서 과식주의를 비판합니다. 제가 제대로 읽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글은 공고라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에서 파생한 문체에 대한 비판인 것 같습니다. 마치 성서의 말씀은 언제나 있으되, 그것을 왜곡하는 사람도 항상 있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성서의 진의를 어쩐 일인지 자신만은 알아버렸다고 주장하면서 구세주를 자처하고 내용을 왜곡해서 설파하는 사이비들처럼요. 보르헤스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와 그 용례의 관계를 들어서 이러한 논의를 엽니다(216쪽). 즉 문법이란 그것에 고착되거나 귀속되기 위한 정답지가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더 넓은 땅을 여행하기 위한 토대라는 겁니다. 생각해보면, 문법에 과도하게 신경쓰다보면 우리는 언어적 입스(yips) 상태에 빠집니다. 하지만 능숙한 운동 선수가 그렇듯이, 경이로운 플레이는 논리가 아니라 숙달된 감각, 찰나의 직관으로만 가능합니다. 모듈화된 룰이 중요한 것은 그것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고 그 모듈화된 경직성으로부터 제대로 알고 벗어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이러한 맥락에서, 보르헤스는 공고라가 아닌 과식주의의 세 가지 오류를 다시금 살핍니다. 먼저, 은유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은유가 오래된 생각을 쇄신하는 수단이 되기에 실패한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은유는 은유라서 시적인 것이 아니라 그가 성취한 표현에 의해 시적이다"라는 내용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과식주의에서 은유는 상상하는 수단이 아니라 "상상하거나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수단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 다음으로, 공고라가 즐겨썼던 라틴어식 표현을 짚어봅니다. 보르헤스는 라틴어식 표현을 두고, 자신이 “오늘날 스페인어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정통주의자들의 어리석음과 비사교성보다는 라틴어 혼용주의자의 너그러운 자세를 선호한다”고 말합니다. 젠체하며 학식을 뽐내는 수단이 아니라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식주의자들이 보여주는 일종의 '믿음 없는 믿음'을 지적합니다. 이는 무신론자들의 주기도문과 같습니다. 이때 과식주의자들의 그리스 신화는 공통된 이야기에 접촉하려는 열망이 아니라 "아부하거나 타지의 풍경을 이용하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 점에서 과식주의는 공고라의 장치를 치장으로 오해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거의 모든 시인이 상상력을 소설가나 역사가에게 내주고 단어의 명성만을 거래한다는 점이 유감스럽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22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글타래
화제 모음
지정된 화제가 없습니다
[책나눔 이벤트] 지금 모집중!
[책 증정] Beyond Bookclub 10기 <오늘도 뇌 마음대로 하는 중>
💡독서모임에 관심있는 출판사들을 위한 안내
출판사 협업 문의 관련 안내
그믐 새내기를 위한 가이드
그믐에 처음 오셨나요?[그믐레터]로 그믐 소식 받으세요중간 참여할 수 있어요!
💊 여러분의 처방책이 필요합니다.
결혼하는 같은회사 직원에게 선물할 책을 추천해주세요.수험생이 시집이 읽고 싶대요. 스무살 청년에게 추천하고 싶은 시집을 추천해주세요.[책처방] 5.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을 추천받고 싶어요.
독서모임에선 책만 읽는다? 댓츠 노노!
혹시 필사 좋아하세요?문학편식쟁이의 수학공부! 50일 수학(상) 함께 풀어요.스몰 색채 워크샵프리스타일 랩을 위한 북클럽 《운율,서재》
2월 8일(토) 달오름극장에서 만나요.
[그믐연뮤클럽] 5. 의심, 균열, 파국 x 추리소설과 연극무대가 함께 하는 "붉은 낙엽"[그믐연뮤클럽] 4. 다시 찾아온 도박사의 세계 x 진실한 사랑과 구원의 "백치"[그믐연뮤클럽] 3. "리어왕" 읽고 "더 드레서" 같이 관람해요
2월 26일(수), 함께 낭독해요 🎤
[그믐밤X그믐클래식] 32. 달밤에 낭독, <일리아스>
2월의 고전
[그믐클래식 2025] 2월, 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이달의 고전] 2월 『제5도살장』 함께 읽어요[이달의 고전] 2월 『양철북』 함께 읽어요[그믐밤X그믐클래식] 32. 달밤에 낭독, <일리아스>
책도 벽돌, 독자들의 대화도 벽돌!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19. <호라이즌>[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18. <행동>[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17. <노이즈>[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16. <마오주의>
작품 말고 작가가 더 궁금할 때!
[그믐북클럽Xsam] 24. <작가란 무엇인가> 읽고 답해요[책증정] 페미니즘의 창시자, 프랑켄슈타인의 창조자 《메리와 메리》 함께 읽어요![그믐밤] 28. 달밤에 낭독, <우리는 언제나 희망하고 있지 않나요>[Re:Fresh] 4.『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다시 읽어요.
illef의 깊이 읽기
AI 교과서(AIDT)우리가 운명이라고 불렀던 것들왕의 목을 친 남자 - 사형집행인 샤를 앙리 상송의 이야기
매달 만나는 젊은 작가의 달달한 로맨스 🧁
[북다] 《정원에 대하여(달달북다08)》 함께 읽어요! (+책 나눔 이벤트)[북다] 《어느 순간을 가리키자면(달달북다07)》 함께 읽어요! (1/23 라이브 채팅!)[북다] 《지나가는 것들(달달북다06)》 함께 읽어요! (책 나눔 이벤트)[북다] 《빛처럼 비지처럼(달달북다05)》 함께 읽어요! (+책 나눔 이벤트)[북다] 《횡단보도에서 수호천사를 만나 사랑에 빠진 이야기(달달북다04)》
📩 닫히지 않는 편지 가게 글월
편지가게 글월 / 백승연 지음 (2024 런던 국제 도서전 화제작)[책 증정] 텍스티와 함께 『편지 가게 글월』 함께 읽어요![편지 가게 글월] 서로 꿈을 이야기하며 안부를 전하는 글쓰기를 하고자 합니다.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SF 어렵지 않아요! 함께 읽는다면
[함께 읽는 SF소설] 03.키리냐가 - 마이크 레스닉[함께 읽는 SF소설] 02.민들레 와인 - 레이 브래드버리[함께 읽는 SF소설] 01.별을 위한 시간
모집중밤하늘
내 블로그
내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