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리스토 카리에고의 어떤 삶(Una Vida de Evaristo Carriego)] 본격적으로 에바리스토 카리에고를 다룹니다. 그는 29살에 죽었습니다. 본문에도 나오듯이 보르헤스는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와 알고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와 알고 지냈다는 사실이 전기를 쓰는 어려움을 덜어줬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고 보르헤스는 먼저 말합니다. 제삼자에 관한 기억을 타인에게 떠올리게 만드는 일, 즉 전기를 쓰는 일이 일정 부분 불가능을 가능케 하려는 시도의 일환임을 먼저 알고 나서 전기를 쓰고 있음을 밝히는 겁니다.
보르헤스는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의 출신, 내륙 지방의 토착적인 가치관, 그가 생전에 가졌던 병약함과 그로 인한 강렬한 명예욕, 죽음이 가까워서 더욱 예리해지던 감각 따위를 서술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카리에고가 엔트레리오스의 크리오요였고 아르헨티나의 토착적 정서를 대변했지만 그의 몸속에는 이탈리아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란 사람 자체가 이미 혼잡했던 아메리카 대륙의 문화와 언어, 역사를 보여주는 것도 같습니다. 아메리카적인 것은 유럽적인 것의 복사판인 것 같지만 위화감을 주는 복사판이며, 그 점에서 독창적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래서인지 글의 말미에서 카리에고의 '반복'을 말하는 부분이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
조금 딴 얘기를 하자면, 저는 이 글이 요절한 작가에 대한 흔한 찬사가 아니라서 다행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요절한 작가들에 대한 열광은 '걸출함'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고 봅니다. 작품의 여정을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다작하지도 않았으니까요. 따라서 요절한 작가들에 대한 열광이란, 잘 쳐줘도 젊음이 지닌 가능성에 대한 예찬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그 한발 앞에는 낭떠러지가 있습니다. 일종의 호르몬 예찬이자, 인습적인 천재성과 낭만주의적 작가관에 대한 열광이 바로 그겁니다. 누군가의 열정에 쉽사리 감화되는 사람은 열정을 잃은 자신을 속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비슷하게, 젊은 몸의 아름다움만 찬양하는 이들은 늙음이라는 인생의 단계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한 자신을 단죄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절한 작가를 애석해 하며, 다만 천수를 누리고 죽은 작가들을 더 애정합니다. 젊은 날 자기 스타일과 치기를 부끄러워하고, 호르몬과 열기로 해낸 것을 차분히 가라앉혀서 바로 보고, 또 부끄러워하면서 소박해진 보르헤스나 버틀런트 러셀 같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자기 젊음을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이고 또 대단한 특혜이니까요. 그 점에서 시간은 모든 것을 검증해준다는 말은 옳습니다. 자기 젊었을 적 스타일을 평가해줄 사람은 뛰어난 동료도, 비평가도, 고급한 독자도 아닙니다. 늙은 그 자신밖에 없습니다. 보르헤스는 이런 이야기를 단편 ⟨타인⟩에서 하고자 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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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기억보르헤스의 소설은 때로 한 페이지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짧은분량에 현실과 환상을 뒤섞고 시간 또는 존재와 같은 우주론적 주제를 형상화함으로써 고도로 지적인 특성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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