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보르헤스 읽기]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3부 같이 읽어요

D-29
화제로 지정된 대화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의 어떤 삶(Una Vida de Evaristo Carriego)] 본격적으로 에바리스토 카리에고를 다룹니다. 그는 29살에 죽었습니다. 본문에도 나오듯이 보르헤스는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와 알고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와 알고 지냈다는 사실이 전기를 쓰는 어려움을 덜어줬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고 보르헤스는 먼저 말합니다. 제삼자에 관한 기억을 타인에게 떠올리게 만드는 일, 즉 전기를 쓰는 일이 일정 부분 불가능을 가능케 하려는 시도의 일환임을 먼저 알고 나서 전기를 쓰고 있음을 밝히는 겁니다. 보르헤스는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의 출신, 내륙 지방의 토착적인 가치관, 그가 생전에 가졌던 병약함과 그로 인한 강렬한 명예욕, 죽음이 가까워서 더욱 예리해지던 감각 따위를 서술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카리에고가 엔트레리오스의 크리오요였고 아르헨티나의 토착적 정서를 대변했지만 그의 몸속에는 이탈리아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란 사람 자체가 이미 혼잡했던 아메리카 대륙의 문화와 언어, 역사를 보여주는 것도 같습니다. 아메리카적인 것은 유럽적인 것의 복사판인 것 같지만 위화감을 주는 복사판이며, 그 점에서 독창적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래서인지 글의 말미에서 카리에고의 '반복'을 말하는 부분이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 조금 딴 얘기를 하자면, 저는 이 글이 요절한 작가에 대한 흔한 찬사가 아니라서 다행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요절한 작가들에 대한 열광은 '걸출함'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고 봅니다. 작품의 여정을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다작하지도 않았으니까요. 따라서 요절한 작가들에 대한 열광이란, 잘 쳐줘도 젊음이 지닌 가능성에 대한 예찬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그 한발 앞에는 낭떠러지가 있습니다. 일종의 호르몬 예찬이자, 인습적인 천재성과 낭만주의적 작가관에 대한 열광이 바로 그겁니다. 누군가의 열정에 쉽사리 감화되는 사람은 열정을 잃은 자신을 속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비슷하게, 젊은 몸의 아름다움만 찬양하는 이들은 늙음이라는 인생의 단계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한 자신을 단죄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절한 작가를 애석해 하며, 다만 천수를 누리고 죽은 작가들을 더 애정합니다. 젊은 날 자기 스타일과 치기를 부끄러워하고, 호르몬과 열기로 해낸 것을 차분히 가라앉혀서 바로 보고, 또 부끄러워하면서 소박해진 보르헤스나 버틀런트 러셀 같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자기 젊음을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이고 또 대단한 특혜이니까요. 그 점에서 시간은 모든 것을 검증해준다는 말은 옳습니다. 자기 젊었을 적 스타일을 평가해줄 사람은 뛰어난 동료도, 비평가도, 고급한 독자도 아닙니다. 늙은 그 자신밖에 없습니다. 보르헤스는 이런 이야기를 단편 ⟨타인⟩에서 하고자 했을 겁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보르헤스의 소설은 때로 한 페이지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짧은분량에 현실과 환상을 뒤섞고 시간 또는 존재와 같은 우주론적 주제를 형상화함으로써 고도로 지적인 특성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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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의 어떤 삶(Una Vida de Evaristo Carriego)] 본격적으로 에바리스토 카리에고를 다룹니다. 그는 29살에 죽었습니다. 본문에도 나오듯이 보르헤스는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와 알고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와 알고 지냈다는 사실이 전기를 쓰는 어려움을 덜어줬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고 보르헤스는 먼저 말합니다. 제삼자에 관한 기억을 타인에게 떠올리게 만드는 일, 즉 전기를 쓰는 일이 일정 부분 불가능을 가능케 하려는 시도의 일환임을 먼저 알고 나서 전기를 쓰고 있음을 밝히는 겁니다. 보르헤스는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의 출신, 내륙 지방의 토착적인 가치관, 그가 생전에 가졌던 병약함과 그로 인한 강렬한 명예욕, 죽음이 가까워서 더욱 예리해지던 감각 따위를 서술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카리에고가 엔트레리오스의 크리오요였고 아르헨티나의 토착적 정서를 대변했지만 그의 몸속에는 이탈리아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란 사람 자체가 이미 혼잡했던 아메리카 대륙의 문화와 언어, 역사를 보여주는 것도 같습니다. 아메리카적인 것은 유럽적인 것의 복사판인 것 같지만 위화감을 주는 복사판이며, 그 점에서 독창적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래서인지 글의 말미에서 카리에고의 '반복'을 말하는 부분이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 조금 딴 얘기를 하자면, 저는 이 글이 요절한 작가에 대한 흔한 찬사가 아니라서 다행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요절한 작가들에 대한 열광은 '걸출함'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고 봅니다. 작품의 여정을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다작하지도 않았으니까요. 따라서 요절한 작가들에 대한 열광이란, 잘 쳐줘도 젊음이 지닌 가능성에 대한 예찬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그 한발 앞에는 낭떠러지가 있습니다. 일종의 호르몬 예찬이자, 인습적인 천재성과 낭만주의적 작가관에 대한 열광이 바로 그겁니다. 누군가의 열정에 쉽사리 감화되는 사람은 열정을 잃은 자신을 속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비슷하게, 젊은 몸의 아름다움만 찬양하는 이들은 늙음이라는 인생의 단계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한 자신을 단죄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절한 작가를 애석해 하며, 다만 천수를 누리고 죽은 작가들을 더 애정합니다. 젊은 날 자기 스타일과 치기를 부끄러워하고, 호르몬과 열기로 해낸 것을 차분히 가라앉혀서 바로 보고, 또 부끄러워하면서 소박해진 보르헤스나 버틀런트 러셀 같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자기 젊음을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이고 또 대단한 특혜이니까요. 그 점에서 시간은 모든 것을 검증해준다는 말은 옳습니다. 자기 젊었을 적 스타일을 평가해줄 사람은 뛰어난 동료도, 비평가도, 고급한 독자도 아닙니다. 늙은 그 자신밖에 없습니다. 보르헤스는 이런 이야기를 단편 ⟨타인⟩에서 하고자 했을 겁니다.
그가 일상적으로 되풀이하던 활동은 우리 안에서 그가 무한히 반복해서 나타나도록 해 준다. 마치 카리에고가 우리의 운명 속에 흩어져 지속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더 나아가 우리 각자가 단 몇 초 동안만이라도 카리에고 자신이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정말 그렇다고 믿는다. 이처럼 우리가 일시적으로 경험하는 여러 정체성들(이는 동일한 것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만으로도 시간이 계속 흐른다는 그릇된 통념을 폐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영원성을 증명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35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russist님의 대화: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의 어떤 삶(Una Vida de Evaristo Carriego)] 본격적으로 에바리스토 카리에고를 다룹니다. 그는 29살에 죽었습니다. 본문에도 나오듯이 보르헤스는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와 알고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와 알고 지냈다는 사실이 전기를 쓰는 어려움을 덜어줬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고 보르헤스는 먼저 말합니다. 제삼자에 관한 기억을 타인에게 떠올리게 만드는 일, 즉 전기를 쓰는 일이 일정 부분 불가능을 가능케 하려는 시도의 일환임을 먼저 알고 나서 전기를 쓰고 있음을 밝히는 겁니다. 보르헤스는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의 출신, 내륙 지방의 토착적인 가치관, 그가 생전에 가졌던 병약함과 그로 인한 강렬한 명예욕, 죽음이 가까워서 더욱 예리해지던 감각 따위를 서술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카리에고가 엔트레리오스의 크리오요였고 아르헨티나의 토착적 정서를 대변했지만 그의 몸속에는 이탈리아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란 사람 자체가 이미 혼잡했던 아메리카 대륙의 문화와 언어, 역사를 보여주는 것도 같습니다. 아메리카적인 것은 유럽적인 것의 복사판인 것 같지만 위화감을 주는 복사판이며, 그 점에서 독창적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래서인지 글의 말미에서 카리에고의 '반복'을 말하는 부분이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 조금 딴 얘기를 하자면, 저는 이 글이 요절한 작가에 대한 흔한 찬사가 아니라서 다행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요절한 작가들에 대한 열광은 '걸출함'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고 봅니다. 작품의 여정을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다작하지도 않았으니까요. 따라서 요절한 작가들에 대한 열광이란, 잘 쳐줘도 젊음이 지닌 가능성에 대한 예찬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그 한발 앞에는 낭떠러지가 있습니다. 일종의 호르몬 예찬이자, 인습적인 천재성과 낭만주의적 작가관에 대한 열광이 바로 그겁니다. 누군가의 열정에 쉽사리 감화되는 사람은 열정을 잃은 자신을 속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비슷하게, 젊은 몸의 아름다움만 찬양하는 이들은 늙음이라는 인생의 단계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한 자신을 단죄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절한 작가를 애석해 하며, 다만 천수를 누리고 죽은 작가들을 더 애정합니다. 젊은 날 자기 스타일과 치기를 부끄러워하고, 호르몬과 열기로 해낸 것을 차분히 가라앉혀서 바로 보고, 또 부끄러워하면서 소박해진 보르헤스나 버틀런트 러셀 같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자기 젊음을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이고 또 대단한 특혜이니까요. 그 점에서 시간은 모든 것을 검증해준다는 말은 옳습니다. 자기 젊었을 적 스타일을 평가해줄 사람은 뛰어난 동료도, 비평가도, 고급한 독자도 아닙니다. 늙은 그 자신밖에 없습니다. 보르헤스는 이런 이야기를 단편 ⟨타인⟩에서 하고자 했을 겁니다.
나는 가끔 이렇게 상상하곤 한다. 죽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구멍을 통해 인간에게 서서히 스며들기 때문에 그것이 가까이 다가오면 인간은 언제나 불쾌한 기분에 휩싸이면서도 명징한 인식을 갖게 될 뿐 아니라 믿기 어려울 정도의 주의력과 예지력을 얻게 된다고 말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360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이단 미사(Misa Hereje)]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의 첫 시집을 논합니다. 초기 시집에서 드러날 법한 미숙한 욕망과 모호한 표현법을 상세하게 지적한 다음, 카리에고의 시에서 보이는 변두리적인 특성을 설명합니다. 그 뒤에는 잘 쓴 작품을 하나씩 상세히 살펴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에 살을 덧붙입니다. 제가 특별히 이야기하기보다는 각자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마지막 시인 ⟨건달⟩을 논하는 부분을 읽고 있으면, 죽음과 죽음을 부르는 폭력을 이상할 정도로 친근히 여기는 태도가 느껴집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죽음'을 관리하고 통제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를 끊임없이 조장하는 것과는 굉장히 다르죠. 코맥 맥카시가 대본을 집필한 영화 ⟪카운슬러⟫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영화는 한국에서 굉장히 반응이 저조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는 대사까지 외울 정도로 매우 좋아합니다🙂 기회가 되면 보시기 바랍니다.
카운슬러전미 도서상, 퓰리처 상 수상 작가 코맥 매카시의 첫 번째 시나리오 작품. 피의 보복으로 점철된 멕시코 마약 전쟁의 한가운데, 사라진 2천만 달러어치 코카인을 놓고, 세상에 복수하려는 여자와 인생 역전을 노리는 남자가 운명을 건 한판 도박에 뛰어든다.
카운슬러젊고 유능한 변호사 카운슬러는 아름다운 약혼녀 로라에게 프로포즈하기 위해 최고급 다이아몬드 반지를 마련한다. 호화로운 삶에 빠진 타락한 사업가 라이너는 재정 위기에 몰린 카운슬러를 유혹해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마약밀매 사업을 제안한다. 라이너가 소개한 미스터리한 마약 중개인 웨스트레이는 지독한 범죄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카운슬러에게 경고하고, 라이너의 치명적인 여자친구인 말키나는 그들 주변을 맴도는 가운데 운반 중이던 거액의 마약이 사라지는 일이 벌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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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이단 미사(Misa Hereje)]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의 첫 시집을 논합니다. 초기 시집에서 드러날 법한 미숙한 욕망과 모호한 표현법을 상세하게 지적한 다음, 카리에고의 시에서 보이는 변두리적인 특성을 설명합니다. 그 뒤에는 잘 쓴 작품을 하나씩 상세히 살펴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에 살을 덧붙입니다. 제가 특별히 이야기하기보다는 각자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마지막 시인 ⟨건달⟩을 논하는 부분을 읽고 있으면, 죽음과 죽음을 부르는 폭력을 이상할 정도로 친근히 여기는 태도가 느껴집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죽음'을 관리하고 통제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를 끊임없이 조장하는 것과는 굉장히 다르죠. 코맥 맥카시가 대본을 집필한 영화 ⟪카운슬러⟫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영화는 한국에서 굉장히 반응이 저조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는 대사까지 외울 정도로 매우 좋아합니다🙂 기회가 되면 보시기 바랍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만의 방식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말과, 투계와 도박에 걸 몇 페소만으로도 즐겁게 일요일을 보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꼭 힘이 셀 필요도 없었다. 가령 당시 최고의 건달 중 한 명이던 페티소 플로레스만 해도 뱀처럼 깡마르고 키가 작아서 보잘것없었지만 칼만 잡으면 전광석화처럼 상대를 쓰러뜨렸다. 또한 건달은 먼저 시비를 걸거나 소란을 피울 필요도 없었다. (···)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우쭐거리지 않고 자신이 거둔 승리(즉, 상대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다 운명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라네. 살다 보면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일(가령 아이를 낳거나 사람을 죽이는 것)을 하기 마련인데, 다 지나서 땅을 치고 후회하거나 자랑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리석은 짓일 뿐이지." 그는 자신의 손에 죽은 이들의 희미한 모습을 기억 속에 떠올리며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380-38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변두리 동네의 노래(Canción de Barrio)]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의 유작 시집을 다룹니다. 여전히 카리에고는 변두리의 거리를 묘사하지만, 보르헤스에 따르면 좀더 원숙하고 깊어졌습니다. 아침이면 배에 칼을 맞고 죽은 시체가 볼썽사납게 나뒹구는 변두리의 거리에서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이전 시집인 ⟪변두리의 영혼⟫과 비교하면 ⟪변두리 동네의 노래⟫에서 시인은 좀더 자신의 주제와 밀착해 있다는 것입니다. 변두리 동네의 화자가 "나는 이러이러한 변두리에 살아요"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한 부분은 통렬합니다. 여기서 보르헤스가 말한, 카리에고가 자기 주제에 좀더 밀착해 있다는 주장은 세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사는 곳을 주변환경과 관련된 말로 정의하는 것과는 구분됩니다. 이를테면, "시골 사람은 흔히 팜파스로, 콤파드리토는 낡은 함석판으로 이어 만든 오두막으로 규정"(385쪽)하는 식입니다. 보르헤스는 굳이 시에서 자기 지역색을 강하게 드러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표합니다. 실제로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말에 지역색을 더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반면, 그들을 어설프게 흉내내려는 사람은 오히려 '지방색'을 넣으려고 애쓴다는 것입니다. 마치 한국 수사극에서 흔히 광역수사대를 '광수대'라고 줄여 칭하는 것과 비슷한데, 그건 마치 백인이 흑인 동네를 괜시리 어슬렁거리다가 하이파이브를 하고 상대를 '니거'라고 부르는 것만큼이나 어이없습니다. 한마디로 총맞을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서 말하려던 카리에고의 유고 시집에서 드러나는 '원숙함'은 한갓 지역색이나 지방색으로 축소되지 않는 것입니다. 중년의 위기를 겪는 가장이 자식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아들의 방문을 열고 '버카충'이나 '럭키비키' 같은 소리를 하면 아들과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질 뿐인 거죠. 전혀 다른 차원의, 보다 세밀한 시선이 필요한 겁니다. 이를테면, 보르헤스는 '콤파트리토'라고 불리우는 이들을 세밀하게 구분하고자 합니다. 콤파트리토는 세간의 분분한 인식처럼 불량배가 아니라, "어느 정도 세련되고 공손한 도시 서민"이라는 겁니다. 잠시 딴 얘기를 하면, 나라마다 도시적 산보자를 부르는 명칭이 다르고, 그 성격도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 재밌습니다. 보들레르로 대표되는 파리의 플라뇌르가 그러하고, 런던의 런던내기가 그러합니다. 한국에서 굳이 이런 존재를 찾자면, 후기 조선에서 행려풍속을 실천했던 '나그네'를 들 수 있을 것 같네요. 하나 같이 문화적이며 문학적인 주체로 형상화되어 있다는 점도 재밌죠. 언젠가 이들에 대해서 논할 기회가 있을 것 같아요. 끝으로, 저는 보르헤스가 카리에고의 유고 시집에서 발견한 것은 '변두리'라는 공간 같습니다. 이 변두리는 '시골'과 '도시'로 이분화되는 구도를 탈피합니다. 지방의 시선에서 본 중심도 아니고, 중심의 시선에서 바라본 지방도 아닌 것 말입니다. 이것을 보르헤스는 다음처럼 멋지게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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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변두리 동네의 노래(Canción de Barrio)]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의 유작 시집을 다룹니다. 여전히 카리에고는 변두리의 거리를 묘사하지만, 보르헤스에 따르면 좀더 원숙하고 깊어졌습니다. 아침이면 배에 칼을 맞고 죽은 시체가 볼썽사납게 나뒹구는 변두리의 거리에서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이전 시집인 ⟪변두리의 영혼⟫과 비교하면 ⟪변두리 동네의 노래⟫에서 시인은 좀더 자신의 주제와 밀착해 있다는 것입니다. 변두리 동네의 화자가 "나는 이러이러한 변두리에 살아요"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한 부분은 통렬합니다. 여기서 보르헤스가 말한, 카리에고가 자기 주제에 좀더 밀착해 있다는 주장은 세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사는 곳을 주변환경과 관련된 말로 정의하는 것과는 구분됩니다. 이를테면, "시골 사람은 흔히 팜파스로, 콤파드리토는 낡은 함석판으로 이어 만든 오두막으로 규정"(385쪽)하는 식입니다. 보르헤스는 굳이 시에서 자기 지역색을 강하게 드러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표합니다. 실제로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말에 지역색을 더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반면, 그들을 어설프게 흉내내려는 사람은 오히려 '지방색'을 넣으려고 애쓴다는 것입니다. 마치 한국 수사극에서 흔히 광역수사대를 '광수대'라고 줄여 칭하는 것과 비슷한데, 그건 마치 백인이 흑인 동네를 괜시리 어슬렁거리다가 하이파이브를 하고 상대를 '니거'라고 부르는 것만큼이나 어이없습니다. 한마디로 총맞을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서 말하려던 카리에고의 유고 시집에서 드러나는 '원숙함'은 한갓 지역색이나 지방색으로 축소되지 않는 것입니다. 중년의 위기를 겪는 가장이 자식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아들의 방문을 열고 '버카충'이나 '럭키비키' 같은 소리를 하면 아들과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질 뿐인 거죠. 전혀 다른 차원의, 보다 세밀한 시선이 필요한 겁니다. 이를테면, 보르헤스는 '콤파트리토'라고 불리우는 이들을 세밀하게 구분하고자 합니다. 콤파트리토는 세간의 분분한 인식처럼 불량배가 아니라, "어느 정도 세련되고 공손한 도시 서민"이라는 겁니다. 잠시 딴 얘기를 하면, 나라마다 도시적 산보자를 부르는 명칭이 다르고, 그 성격도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 재밌습니다. 보들레르로 대표되는 파리의 플라뇌르가 그러하고, 런던의 런던내기가 그러합니다. 한국에서 굳이 이런 존재를 찾자면, 후기 조선에서 행려풍속을 실천했던 '나그네'를 들 수 있을 것 같네요. 하나 같이 문화적이며 문학적인 주체로 형상화되어 있다는 점도 재밌죠. 언젠가 이들에 대해서 논할 기회가 있을 것 같아요. 끝으로, 저는 보르헤스가 카리에고의 유고 시집에서 발견한 것은 '변두리'라는 공간 같습니다. 이 변두리는 '시골'과 '도시'로 이분화되는 구도를 탈피합니다. 지방의 시선에서 본 중심도 아니고, 중심의 시선에서 바라본 지방도 아닌 것 말입니다. 이것을 보르헤스는 다음처럼 멋지게 썼습니다.
겉으로는 아름다워 보일지 모르지만 에스타니슬라오 델 캄포의 ⟪파우스토⟫에 나타나는 동틀 녘과 해 질 녘의 팜파스에 대한 묘사는 다소 실망스러울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거북한 느낌마저 든다. 이러한 문제는 이야기 초반에 시인이 무대 배경을 한 차례 언급하면서 시작된다. 반면 카리에고의 작품에서는 보다 섬세하고 교묘한 표현을 통해 변두리 동네의 비현실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한 비현실적인 성격은 모든 것이 순전히 우연에 의해 되는대로 이루어지는 그곳만의 특성과 말들이 달리거나 농부들이 작은 땅을 부치고 사는 평원의 두 가지 매력, 2층짜리 집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와 자신을 시골 사람이나 도시 사람으로 생각하지 절대 변두리 사람으로는 여기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성향에서 비롯된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410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덧붙이는 글(Apéndice)] 말 그대로 덧붙여진 시와 글입니다. 한가지만 언급하면, 트루코 게임에 대한 글이 인상적입니다. 트루코 게임을 시작하면 사람들이 그 옛날의 크리오요로 돌변한다는 대목을 보고, 저는 화투가 생각나서 웃겼습니다. 명절이 되면 둘러앉아서 화투를 치는 모습을 떠올려보세요. 조금 더 말이 거칠어지고, 더욱 계산적이 되고, 조금 더 우스꽝스러운 분위기가 되는 것, 선을 타는 아슬아슬한 농담이 오가는 것도 그렇고요. 트루코에서 정해진 예법이 있는 것도 화투와 비슷하고, 패를 내리치는 방식(기세를 과시하는 수단입니다!), 패를 회수하고 정리하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기는 방식이 이미 정해져 있고, 다만 매 게임마다 그것이 반복되는 것마저도 같습니다. 트루코든 화투패이든 우리는 둘러 앉아서 게임을 할 때, 전혀 다른 모습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요.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그 분위기 속으로 잠시 들어가서 살다 나오는 기분입니다. 보르헤스도 말하지만 그것은 포커판의 포커페이스와는 전혀 다른, 익살맞은 연극에 가깝습니다.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찰스 부코스키가 노년에 마지막으로 출간한 대표작 <The Last Night of the Earth Poems>이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와 <창작 수업> 두 권으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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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덧붙이는 글(Apéndice)] 말 그대로 덧붙여진 시와 글입니다. 한가지만 언급하면, 트루코 게임에 대한 글이 인상적입니다. 트루코 게임을 시작하면 사람들이 그 옛날의 크리오요로 돌변한다는 대목을 보고, 저는 화투가 생각나서 웃겼습니다. 명절이 되면 둘러앉아서 화투를 치는 모습을 떠올려보세요. 조금 더 말이 거칠어지고, 더욱 계산적이 되고, 조금 더 우스꽝스러운 분위기가 되는 것, 선을 타는 아슬아슬한 농담이 오가는 것도 그렇고요. 트루코에서 정해진 예법이 있는 것도 화투와 비슷하고, 패를 내리치는 방식(기세를 과시하는 수단입니다!), 패를 회수하고 정리하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기는 방식이 이미 정해져 있고, 다만 매 게임마다 그것이 반복되는 것마저도 같습니다. 트루코든 화투패이든 우리는 둘러 앉아서 게임을 할 때, 전혀 다른 모습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요.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그 분위기 속으로 잠시 들어가서 살다 나오는 기분입니다. 보르헤스도 말하지만 그것은 포커판의 포커페이스와는 전혀 다른, 익살맞은 연극에 가깝습니다.
사실 트루코를 하은 사람은 과거에 쓴 패를 다시 쓸 뿐이다. 따라서 트루코는 예전 게임, 다시 말해 예전에 경험했던 순간의 반복이다. 옛 세대의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우리 곁을 떠났지만 트루코 속에 여전히 살고 있다. 그들은 트루코 자체이다. (이것은 절대 비유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시간은 단지 환영이거나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결국 우리는 울긋불긋한 색깔로 그려진 트루코 카드의 미로를 따라서 삶에 관한 모든 사유의 유일한 존재 이유이자 목적인 형이상학의 세계로 다가선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422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마차에 쓰인 글귀들(Inscripciones en los Carros)]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마차에 들어가는 글귀와 장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장식을 '필레테아도 포르테뇨(Filete porteño)'라고 부릅니다. 굳이 비슷한 것을 들자면, 오늘날 자동차의 본네트에 붙는 브랜드 엠블럼을 들 수 있을 텐데, 이 필레테아도는 그보다 좀더 화려하고 좀더 경구가 많이 들어갑니다. 사전적 설명에 따르면, 이 필레테아도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도상 예술 형식이며, "시간이 지나면서 상징이나 형상 외에도 독창적인 문구나 격언, 재미있고 철학적인 내용의 잠언이나 시구등이 포함되기 시작했다"고 전해집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도 지정됐을 정도로 특징적인지라, 오늘날에는 마차를 넘어서 버스나 유리창에도 보이는데요, 흔히들 텍스트 주변을 강렬한 색깔의 선으로 장식합니다. 본문에서는 왜 이 필레테아도가 아르헨티나의 문화 유산으로 남을 수 있었는지가 흥미진진하게 묘사됩니다. 이 필레테아도의 고유함을 논하려면 '마차'라는 당시의 운송수단을 얘기해야 합니다. 재빠르게 도로를 주파하는 자동차와 달리, 마차는 느릿느릿합니다. 보르헤스는 오히려 자동차의 '빠름'와 대비되는 마차의 '느림'에서 필레테아도가 태동했다고 말합니다. "거리를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를 보면 마치 겁에 질려 황급히 도망치는 노예의 모습이 연상되는 반면 느릿느릿 걸어가는 마차는 (영원까지는 아닐지라도) 시간을 완전히 소유한 인상을 준다."(424쪽) 이와 연결지어서 생각해볼 부분이 있습니다. 혹시 요즘 거리의 자동차들이 점점 커지고 화려해진다는 인상을 받지 않으셨나요? 실루엣은 과장되고, 라지에이터 그릴은 두꺼워지고, 독삼사의 엠블럼은 묘하게 커진 듯한 인상입니다. 그건 아마 더욱 좁은 공간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도회적인 도로 상황 때문일 겁니다. 정체현상이 극심한 도시에서 자동차들은 달리지 못하고, 달리지 못하기 때문에 더 자세히 볼 수 있으며, 자세히 볼 수 있기 때문에 점점 더 전광판 같은 면모로 바뀌고 있는 건 아닐까요. 오늘날 도회적 상황에서 자동차의 화려함은 보르헤스가 말하는 '마차의 금석학'과 완전히 상충됩니다만, 아이러니하게도 비슷한 화려함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차의 금석학이 시간을 소유한 자의 여유와 느긋함이라면, 오늘날 자동차의 과장되고 화려한 실루엣은 바쁨에 치여 과부화되고 정체화된 도회적 삶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시간에 묶여 있습니다. 바빠야만 한다고 느낄 뿐 아니라, 바쁨 속에서만 자신의 유능함을 과시할 수 있는 상황에서, 원하는 만큼 느릴 수 있다는 것은 마차의 대단한 특권입니다. 여기서 필레테아도의 텍스트와 화려한 장식의 조화, 그 웃김이 발생한다고 저는 읽었습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마치에 쓰인 글귀와 마차를 장식한 꽃은 '마차' 그 자체에 비하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겁니다. 여기서 재차 문학의 쓸모와 무쓸모를 논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그 생크림케이크 위에 핏빛 체리에 해당하는 것이 없으면, 생크림케이크는 너무나 옹졸해 보일 거라고만 말하고 싶습니다. 엣지Copilot으로 이런 이미지를 만들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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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마차에 쓰인 글귀들(Inscripciones en los Carros)]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마차에 들어가는 글귀와 장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장식을 '필레테아도 포르테뇨(Filete porteño)'라고 부릅니다. 굳이 비슷한 것을 들자면, 오늘날 자동차의 본네트에 붙는 브랜드 엠블럼을 들 수 있을 텐데, 이 필레테아도는 그보다 좀더 화려하고 좀더 경구가 많이 들어갑니다. 사전적 설명에 따르면, 이 필레테아도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도상 예술 형식이며, "시간이 지나면서 상징이나 형상 외에도 독창적인 문구나 격언, 재미있고 철학적인 내용의 잠언이나 시구등이 포함되기 시작했다"고 전해집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도 지정됐을 정도로 특징적인지라, 오늘날에는 마차를 넘어서 버스나 유리창에도 보이는데요, 흔히들 텍스트 주변을 강렬한 색깔의 선으로 장식합니다. 본문에서는 왜 이 필레테아도가 아르헨티나의 문화 유산으로 남을 수 있었는지가 흥미진진하게 묘사됩니다. 이 필레테아도의 고유함을 논하려면 '마차'라는 당시의 운송수단을 얘기해야 합니다. 재빠르게 도로를 주파하는 자동차와 달리, 마차는 느릿느릿합니다. 보르헤스는 오히려 자동차의 '빠름'와 대비되는 마차의 '느림'에서 필레테아도가 태동했다고 말합니다. "거리를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를 보면 마치 겁에 질려 황급히 도망치는 노예의 모습이 연상되는 반면 느릿느릿 걸어가는 마차는 (영원까지는 아닐지라도) 시간을 완전히 소유한 인상을 준다."(424쪽) 이와 연결지어서 생각해볼 부분이 있습니다. 혹시 요즘 거리의 자동차들이 점점 커지고 화려해진다는 인상을 받지 않으셨나요? 실루엣은 과장되고, 라지에이터 그릴은 두꺼워지고, 독삼사의 엠블럼은 묘하게 커진 듯한 인상입니다. 그건 아마 더욱 좁은 공간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도회적인 도로 상황 때문일 겁니다. 정체현상이 극심한 도시에서 자동차들은 달리지 못하고, 달리지 못하기 때문에 더 자세히 볼 수 있으며, 자세히 볼 수 있기 때문에 점점 더 전광판 같은 면모로 바뀌고 있는 건 아닐까요. 오늘날 도회적 상황에서 자동차의 화려함은 보르헤스가 말하는 '마차의 금석학'과 완전히 상충됩니다만, 아이러니하게도 비슷한 화려함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차의 금석학이 시간을 소유한 자의 여유와 느긋함이라면, 오늘날 자동차의 과장되고 화려한 실루엣은 바쁨에 치여 과부화되고 정체화된 도회적 삶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시간에 묶여 있습니다. 바빠야만 한다고 느낄 뿐 아니라, 바쁨 속에서만 자신의 유능함을 과시할 수 있는 상황에서, 원하는 만큼 느릴 수 있다는 것은 마차의 대단한 특권입니다. 여기서 필레테아도의 텍스트와 화려한 장식의 조화, 그 웃김이 발생한다고 저는 읽었습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마치에 쓰인 글귀와 마차를 장식한 꽃은 '마차' 그 자체에 비하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겁니다. 여기서 재차 문학의 쓸모와 무쓸모를 논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그 생크림케이크 위에 핏빛 체리에 해당하는 것이 없으면, 생크림케이크는 너무나 옹졸해 보일 거라고만 말하고 싶습니다. 엣지Copilot으로 이런 이미지를 만들어봤습니다.
그러나 내가 수집한 것들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글은(동시에 가장 그늘진 꽃은) '실패한 이는 울지 않는다'인데, 왠지 음산하고 쓸쓸한 느낌을 준다. 로버트 브라우닝의 심원한 세계와 쓸데없이 복잡하기만 하지 보잘것없는 말라르메의 시, 골치만 아픈 공고라의 작품조차 거뜬히 이해하던 나와 술 솔라르였지만 마차에 쓰인 그 글에서 도무지 헤어날 수가 없었다. 실패한 이는 울지 않는다. 나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그 카네이션을 독자들에게 건네고자 한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43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말 탄 이들의 이야기(Historias de Jinetes)] 사람은 공간과 환경을 만들지만, 우리가 만든 공간과 환경에 의해서 다시 영향받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도시화된 삶은, 혹여 한 가지 유형의 인간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래서인지 오늘날 말 탄 이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재밌으면서도 쓸쓸합니다. 이 잃어버린 이야기를 도시에 살아가는 제가 읽고 있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 좀 웃기고 안쓰러운 일이죠. 여기서 '노마드'를 얘기하는 것은 공허한 논의가 될 것 같습니다. 다만 보르헤스가 말한 '말 탄 이들'을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몽골족의 이야기는 도시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생소하지만 아주 재밌고 의미심장한 지점을 보여줍니다. 바로 그들이 자신이 얻은 것을 축적하기보다는 어쩔 줄 몰라서 버리고 파괴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늘 지금이 싫은 사람들, 현재가 못마땅한 사람들은 자기가 얻은 것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서 파괴하는데, 그 점에서 축복받았다고 할 만합니다. 저 역시 많은 옷을 갖고 있고, 많은 물건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것들이 좋으면서도 혐오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혐오스러움은 한편으로는 저를 생각하고 탐구하게 만듭니다. 따지고 보면, 저 말 탄 이들이 별천지에서 온 사람들도 아니거든요. 우리는 다들 뭔가를 버리고 있습니다. 일년 전의 내 몸과 '변함없다'고 믿는 현재의 내 몸은 세포 수준에서 끊임없이 탈각하는 중이며, '굳건한 땅'이라는 은유는 지질학적 시간을 모르는 인간에게나 통용되며, 인간이 숨쉬듯이 내뱉는 '영구'와 '반영구처럼 기만적이고 인간 스스로를 착취하는 단어도 없는 것 같아요. 그건 마치 세살배기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인생'과 같아서, 우리 인속과 습속을 보여주는 상투어일 뿐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버리고 있으며, 그 점에서 우리는 핏속에 저 말 탄 이들의 삶을 이미 갖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글이 약간 두서가 없어도 양해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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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말 탄 이들의 이야기(Historias de Jinetes)] 사람은 공간과 환경을 만들지만, 우리가 만든 공간과 환경에 의해서 다시 영향받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도시화된 삶은, 혹여 한 가지 유형의 인간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래서인지 오늘날 말 탄 이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재밌으면서도 쓸쓸합니다. 이 잃어버린 이야기를 도시에 살아가는 제가 읽고 있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 좀 웃기고 안쓰러운 일이죠. 여기서 '노마드'를 얘기하는 것은 공허한 논의가 될 것 같습니다. 다만 보르헤스가 말한 '말 탄 이들'을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몽골족의 이야기는 도시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생소하지만 아주 재밌고 의미심장한 지점을 보여줍니다. 바로 그들이 자신이 얻은 것을 축적하기보다는 어쩔 줄 몰라서 버리고 파괴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늘 지금이 싫은 사람들, 현재가 못마땅한 사람들은 자기가 얻은 것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서 파괴하는데, 그 점에서 축복받았다고 할 만합니다. 저 역시 많은 옷을 갖고 있고, 많은 물건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것들이 좋으면서도 혐오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혐오스러움은 한편으로는 저를 생각하고 탐구하게 만듭니다. 따지고 보면, 저 말 탄 이들이 별천지에서 온 사람들도 아니거든요. 우리는 다들 뭔가를 버리고 있습니다. 일년 전의 내 몸과 '변함없다'고 믿는 현재의 내 몸은 세포 수준에서 끊임없이 탈각하는 중이며, '굳건한 땅'이라는 은유는 지질학적 시간을 모르는 인간에게나 통용되며, 인간이 숨쉬듯이 내뱉는 '영구'와 '반영구처럼 기만적이고 인간 스스로를 착취하는 단어도 없는 것 같아요. 그건 마치 세살배기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인생'과 같아서, 우리 인속과 습속을 보여주는 상투어일 뿐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버리고 있으며, 그 점에서 우리는 핏속에 저 말 탄 이들의 삶을 이미 갖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글이 약간 두서가 없어도 양해해주세요😅
어쨋든 이처럼 다양하게 변하는 시간의 가면 밑에서 변하지 않고 등장하는 기마병과 도시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43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단도(El Cuchillo)] 무기를 쥐어보면 알지만 섬뜩합니다. 오로지 상대를 해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그 효율성과 의도가 끔찍할 정도로 단순하고 선명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보르헤스의 단도도 그러합니다. 단도는 역사 속에서 무수한 인물을 죽였고, 그 형태는 큰 틀에서 바뀌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단도야말로 역사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죽음의 상징입니다. 언젠가 ⟨만남⟩이라는 단편에서도 얘기했듯이, '단도'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그 시대의 정념이 적층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만져지는 역사이며, 형태를 지닌 의지입니다. 마치 도구에 정념이 들러붙어서 언젠가 자신의 의지를 실행해줄 인간 숙주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는 겁니다. 군대에 다녀온 남자들은 훈련소에서 처음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어본 기억이 있을 겁니다. 그 차가운 금속성이 놀랍도록 오른손 검지에 매끄럽게 안착하던 기억이 제게도 선명합니다. 이물감이 없도록 매끄럽게 곡면 처리된 그것은 언제 생각해도 소름끼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칼의 손잡이를 한번 쥐어보면, 그것이 놀라울 정도로 가볍고 단단하고 손에 잘 안착되도록 설계된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 안정감에서 소름끼치는 이야기를 읽어냅니다. 그것을 보르헤스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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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단도(El Cuchillo)] 무기를 쥐어보면 알지만 섬뜩합니다. 오로지 상대를 해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그 효율성과 의도가 끔찍할 정도로 단순하고 선명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보르헤스의 단도도 그러합니다. 단도는 역사 속에서 무수한 인물을 죽였고, 그 형태는 큰 틀에서 바뀌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단도야말로 역사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죽음의 상징입니다. 언젠가 ⟨만남⟩이라는 단편에서도 얘기했듯이, '단도'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그 시대의 정념이 적층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만져지는 역사이며, 형태를 지닌 의지입니다. 마치 도구에 정념이 들러붙어서 언젠가 자신의 의지를 실행해줄 인간 숙주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는 겁니다. 군대에 다녀온 남자들은 훈련소에서 처음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어본 기억이 있을 겁니다. 그 차가운 금속성이 놀랍도록 오른손 검지에 매끄럽게 안착하던 기억이 제게도 선명합니다. 이물감이 없도록 매끄럽게 곡면 처리된 그것은 언제 생각해도 소름끼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칼의 손잡이를 한번 쥐어보면, 그것이 놀라울 정도로 가볍고 단단하고 손에 잘 안착되도록 설계된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 안정감에서 소름끼치는 이야기를 읽어냅니다. 그것을 보르헤스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 단도는 단지 금속으로 만들어진 물건 이상이다. 남자들이 그 단도의 모양을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만들 때 한 가지 명확한 목적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어젯밤 타콰렘보에서 어떤 이를 죽인 단도이고, 카이사르의 몸을 난도질한 단도들이라는 점에서 역사에서 영원히 반복되는 칼이다. 그것은 누군가를 죽이고, 에고 없이 피를 보고 싶어 한다. 원고와 편지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 내 책상 서랍 속에서 단도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호랑이 꿈을 꾸고 있다. 그것을 쥐고 휘두르는 순간 차가운 금속뿐 아니라 손의 감각 또한 되살아난다. 누군가가 그 칼을 손에 쥐는 순간 금속은 그 손의 주인이 자신이 기다리던 살인자임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444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의 시전집에 붙이는 서문(Prólogo a la Obra Poética de Evaristo Carriego)] 뭐라고 표현하기가 어려워서 각자 읽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에바리스토 카리에고는 분명 "남아메리카의 초라한 변두리 동네"에 살던 시인이었습니다만, 보르헤스는 그가 남긴 작품이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아궁이를 가리키며 "여기에도 신들이 계시니까요"라고 말했던 헤라클레이토스처럼, 카리에고 역시 자신이 살던 비좁은 변두리의 거리에서 신을 보았던 것이라고 보르헤스는 말합니다. 이는 큰 것과 작은 것을 단번에 뒤집는 어떤 순간을 만들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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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의 시전집에 붙이는 서문(Prólogo a la Obra Poética de Evaristo Carriego)] 뭐라고 표현하기가 어려워서 각자 읽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에바리스토 카리에고는 분명 "남아메리카의 초라한 변두리 동네"에 살던 시인이었습니다만, 보르헤스는 그가 남긴 작품이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아궁이를 가리키며 "여기에도 신들이 계시니까요"라고 말했던 헤라클레이토스처럼, 카리에고 역시 자신이 살던 비좁은 변두리의 거리에서 신을 보았던 것이라고 보르헤스는 말합니다. 이는 큰 것과 작은 것을 단번에 뒤집는 어떤 순간을 만들어냅니다.
누구의 삶이든(그것이 아무리 복잡하고 충만하다 할지라도) 실제로 한순간, 그러니까 자신이 누구인지 영원히 알 수 있는 순간으로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 때가 있다. 내가 직관으로 파악하고자 했던 불분명한 계시를 통해 보니 카리에고는 카리에고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44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탱고의 역사(Historia del Tango)] 2부에서 다룬 ⟨탱고의 기원⟩에 이은, 탱고에 관한 두번째 산문입니다. 먼저, 보르헤스는 이 글에서도 앞서와 마찬가지로 탱고의 역사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며, 그 유래도 불명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깔고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 ⟨탱고의 기원⟩에서도 한번 언급한 적 있지만, 보르헤스에게 초창기 탱고란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역사와 문화의 정수가 담긴 또 하나의 텍스트이고, '문학'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뿐, 문학이 관심을 둘 법한 숱한 주제가 가사에 담겨져 있습니다. 글꼭지는 크게 다섯 가지이며, '탱고의 역사', '호전적인 탱고', '한 가지 남은 수수께끼', '가사', '결투 신청'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비단 탱고 뿐만이 아니라 탱고를 둘러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전반적인 문화를 향한 보르헤스의 애정이 글 곳곳에서 묻어납니다. 예컨대 쇼펜하우어를 인용하면서 음악과 문학을 비교해보는 대목을 보시면, 보르헤스가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는 사실도 엿볼 수 있을 겁니다. 다섯 개의 글꼭지가 모두 흥미로웠지만 그중에서도 제가 특히 재밌게 본 글꼭지는 '결투 신청'이었습니다. 보르헤스는 자신이 들은 매력적인 이야기 한 편을 소개합니다. 흥미롭게도 이야기 속의 웬세슬라오 수아레스는 아무런 사심이나 목적 없이도 결투를 벌였다고 합니다. 이는 유럽의 결투(duel) 문화와도 다른 것이, 흔히들 아는 결투 문화에서는 타인의 당사자의 명예를 더렵혔거나 모욕을 주었다고 느꼈을 때 상대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 하지만 보르헤스가 소개하는 수아레스가 벌이는 결투는 특정한 이유가 있어서 벌어지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나아가 결투 끝에 주어지는 '죽음'은 어떤 심판의 결과도, 순리의 결과도 아닙니다. 죽음은 마치 공기처럼 우리 주변을 떠다닙니다. '아무런 사심이나 목적 없는' 결투가 이러한 죽음의 성격을 뒷받침하고 있고요. 마치 코맥 맥카시의 소설에 등장하는 죽음의 화신인 안톤 시거처럼(그가 지니고 다니는 상상의 '에어 샷건'에 들어가는 총알은 공기 그 자체이며,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죽음은 '이유 없이', '설명 없이' 그냥 옵니다. 이러한 '이유 없음'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는 듯, 웬세슬라오는 지나칠 정도로 정중한 면모를 지닌 인물로 묘사됩니다(“평소 가죽 끈 꼬는 모습, 어머니를 홀로 남겨 두지 않으려 하는 자상한 성격, 낯선 이와 주고받은 화려한 편지, 그와 점심을 먹으면서 허심탄회하게 나눈 대화”). 여느 이야기에서처럼 결투로 인물 중 하나가 죽어야 할 이유를 찾으려고 하면,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것만 알게 되는 겁니다. 죽음을 병적으로 기피하면서부터 역설적으로 죽음(을 이용하는 여러 산업)에 예속되어 버린 현대인들과 비교하면, 이들에게 죽음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는 표현은 한갓 은유가 아닙니다. 보르헤스는 이러한 결투 문화를 두고 "언제든지 죽고 죽을 수 있는 용기와 사나이다움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무자비한 종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 외에도, "북아메리카나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과 달리 아르헨티나인들은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지 않는다"(461쪽)고 말한 대목도 곱씹어 볼 만한데, 그러러면 더 많은 글을 써야 해서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다만 보르헤스의 설명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특정한 목적이나 대의명분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를 한사코 거부한다고만 말해두겠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는 탱고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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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탱고의 역사(Historia del Tango)] 2부에서 다룬 ⟨탱고의 기원⟩에 이은, 탱고에 관한 두번째 산문입니다. 먼저, 보르헤스는 이 글에서도 앞서와 마찬가지로 탱고의 역사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며, 그 유래도 불명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깔고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 ⟨탱고의 기원⟩에서도 한번 언급한 적 있지만, 보르헤스에게 초창기 탱고란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역사와 문화의 정수가 담긴 또 하나의 텍스트이고, '문학'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뿐, 문학이 관심을 둘 법한 숱한 주제가 가사에 담겨져 있습니다. 글꼭지는 크게 다섯 가지이며, '탱고의 역사', '호전적인 탱고', '한 가지 남은 수수께끼', '가사', '결투 신청'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비단 탱고 뿐만이 아니라 탱고를 둘러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전반적인 문화를 향한 보르헤스의 애정이 글 곳곳에서 묻어납니다. 예컨대 쇼펜하우어를 인용하면서 음악과 문학을 비교해보는 대목을 보시면, 보르헤스가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는 사실도 엿볼 수 있을 겁니다. 다섯 개의 글꼭지가 모두 흥미로웠지만 그중에서도 제가 특히 재밌게 본 글꼭지는 '결투 신청'이었습니다. 보르헤스는 자신이 들은 매력적인 이야기 한 편을 소개합니다. 흥미롭게도 이야기 속의 웬세슬라오 수아레스는 아무런 사심이나 목적 없이도 결투를 벌였다고 합니다. 이는 유럽의 결투(duel) 문화와도 다른 것이, 흔히들 아는 결투 문화에서는 타인의 당사자의 명예를 더렵혔거나 모욕을 주었다고 느꼈을 때 상대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 하지만 보르헤스가 소개하는 수아레스가 벌이는 결투는 특정한 이유가 있어서 벌어지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나아가 결투 끝에 주어지는 '죽음'은 어떤 심판의 결과도, 순리의 결과도 아닙니다. 죽음은 마치 공기처럼 우리 주변을 떠다닙니다. '아무런 사심이나 목적 없는' 결투가 이러한 죽음의 성격을 뒷받침하고 있고요. 마치 코맥 맥카시의 소설에 등장하는 죽음의 화신인 안톤 시거처럼(그가 지니고 다니는 상상의 '에어 샷건'에 들어가는 총알은 공기 그 자체이며,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죽음은 '이유 없이', '설명 없이' 그냥 옵니다. 이러한 '이유 없음'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는 듯, 웬세슬라오는 지나칠 정도로 정중한 면모를 지닌 인물로 묘사됩니다(“평소 가죽 끈 꼬는 모습, 어머니를 홀로 남겨 두지 않으려 하는 자상한 성격, 낯선 이와 주고받은 화려한 편지, 그와 점심을 먹으면서 허심탄회하게 나눈 대화”). 여느 이야기에서처럼 결투로 인물 중 하나가 죽어야 할 이유를 찾으려고 하면,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것만 알게 되는 겁니다. 죽음을 병적으로 기피하면서부터 역설적으로 죽음(을 이용하는 여러 산업)에 예속되어 버린 현대인들과 비교하면, 이들에게 죽음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는 표현은 한갓 은유가 아닙니다. 보르헤스는 이러한 결투 문화를 두고 "언제든지 죽고 죽을 수 있는 용기와 사나이다움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무자비한 종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 외에도, "북아메리카나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과 달리 아르헨티나인들은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지 않는다"(461쪽)고 말한 대목도 곱씹어 볼 만한데, 그러러면 더 많은 글을 써야 해서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다만 보르헤스의 설명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특정한 목적이나 대의명분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를 한사코 거부한다고만 말해두겠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는 탱고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음악은 세계 자체만큼이나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만약 세계가 없거나 언어에 의해 환기될 수 있는 우리의 공유 자산, 즉 기억이 없다면 문학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반면 음악은 굳이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세계가 없어도 음악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은 의지이자 열정이다. 음악으로서 초기 탱고는 먼 옛날 그리스와 게르만 민족의 시인들이 언어로 표현하려고 했던 전쟁의 기쁨을 직설적으로 전달한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457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russist님의 대화: [탱고의 역사(Historia del Tango)] 2부에서 다룬 ⟨탱고의 기원⟩에 이은, 탱고에 관한 두번째 산문입니다. 먼저, 보르헤스는 이 글에서도 앞서와 마찬가지로 탱고의 역사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며, 그 유래도 불명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깔고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 ⟨탱고의 기원⟩에서도 한번 언급한 적 있지만, 보르헤스에게 초창기 탱고란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역사와 문화의 정수가 담긴 또 하나의 텍스트이고, '문학'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뿐, 문학이 관심을 둘 법한 숱한 주제가 가사에 담겨져 있습니다. 글꼭지는 크게 다섯 가지이며, '탱고의 역사', '호전적인 탱고', '한 가지 남은 수수께끼', '가사', '결투 신청'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비단 탱고 뿐만이 아니라 탱고를 둘러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전반적인 문화를 향한 보르헤스의 애정이 글 곳곳에서 묻어납니다. 예컨대 쇼펜하우어를 인용하면서 음악과 문학을 비교해보는 대목을 보시면, 보르헤스가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는 사실도 엿볼 수 있을 겁니다. 다섯 개의 글꼭지가 모두 흥미로웠지만 그중에서도 제가 특히 재밌게 본 글꼭지는 '결투 신청'이었습니다. 보르헤스는 자신이 들은 매력적인 이야기 한 편을 소개합니다. 흥미롭게도 이야기 속의 웬세슬라오 수아레스는 아무런 사심이나 목적 없이도 결투를 벌였다고 합니다. 이는 유럽의 결투(duel) 문화와도 다른 것이, 흔히들 아는 결투 문화에서는 타인의 당사자의 명예를 더렵혔거나 모욕을 주었다고 느꼈을 때 상대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 하지만 보르헤스가 소개하는 수아레스가 벌이는 결투는 특정한 이유가 있어서 벌어지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나아가 결투 끝에 주어지는 '죽음'은 어떤 심판의 결과도, 순리의 결과도 아닙니다. 죽음은 마치 공기처럼 우리 주변을 떠다닙니다. '아무런 사심이나 목적 없는' 결투가 이러한 죽음의 성격을 뒷받침하고 있고요. 마치 코맥 맥카시의 소설에 등장하는 죽음의 화신인 안톤 시거처럼(그가 지니고 다니는 상상의 '에어 샷건'에 들어가는 총알은 공기 그 자체이며,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죽음은 '이유 없이', '설명 없이' 그냥 옵니다. 이러한 '이유 없음'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는 듯, 웬세슬라오는 지나칠 정도로 정중한 면모를 지닌 인물로 묘사됩니다(“평소 가죽 끈 꼬는 모습, 어머니를 홀로 남겨 두지 않으려 하는 자상한 성격, 낯선 이와 주고받은 화려한 편지, 그와 점심을 먹으면서 허심탄회하게 나눈 대화”). 여느 이야기에서처럼 결투로 인물 중 하나가 죽어야 할 이유를 찾으려고 하면,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것만 알게 되는 겁니다. 죽음을 병적으로 기피하면서부터 역설적으로 죽음(을 이용하는 여러 산업)에 예속되어 버린 현대인들과 비교하면, 이들에게 죽음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는 표현은 한갓 은유가 아닙니다. 보르헤스는 이러한 결투 문화를 두고 "언제든지 죽고 죽을 수 있는 용기와 사나이다움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무자비한 종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 외에도, "북아메리카나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과 달리 아르헨티나인들은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지 않는다"(461쪽)고 말한 대목도 곱씹어 볼 만한데, 그러러면 더 많은 글을 써야 해서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다만 보르헤스의 설명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특정한 목적이나 대의명분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를 한사코 거부한다고만 말해두겠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는 탱고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음악적 측면에서 볼 때 탱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탱고의 유일한 중요성은 우리가 그것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 결론적으로 어떤 탱고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저녁과 밤 없이는 절대 만들어질 수 없으며, 탱고의 플라톤적 이데아, 다시 말해 탱고의 보편적 형식이 하늘나라에서 우리 아르헨티나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 아니라 아무리 천박하다 해도 탱고는 이 세계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46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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