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보르헤스 읽기]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3부 같이 읽어요

D-29
russist님의 대화: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표제작입니다. 말 그대로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아르헨티나에서 스페인어로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적는 그 특수함에 대한 글입니다. 먼저,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의 언어를 바라보는 두 가지 오류에 대해서 지적하면서 글을 엽니다. "한쪽은 악인의 말투를 흉내 내고, 다른 쪽은 사전이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문제적 스페인어를 흉내 낸다."⏤304쪽. 아르헨티나의 언어는 변두리나 교외의 사투리를 뜻하는 아라발레로(arrabalrero)에서 탄생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스페인어의 '순수한 완벽함'을 믿고서 변화 자체를 부정하는 순수 언어주의자들의 그것도 아닙니다. 즉, 아르헨티나의 언어는 아르헨티나의 '지역색'으로 환원되지도, 이베리아 반도 스페인의 '고유함'으로 환원되지 않는단 겁니다. 전자의 오류를 간략히 짚어보면, 아라발레로는 소통되고 교환되기보다는 소수의 무리짓기에 봉사하는 언어, 기호로 전락한 언어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1부에서 다룬 ⟨아라발레로에 대한 비판⟩에서 이미 한번 다룬 적 있습니다. 후자도 오류이긴 매한가지입니다. 스페인어 순수주의자들은 스페인어 사전의 풍요로움을 언급하지만, 그것이 문학적 풍요로움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르헤스에 따르면 "단어 수의 우월성은 쓸모없는 비축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1부에서 다룬 ⟨끝없는 언어⟩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성은 어떤 억압이나 구경거리 이상의 무엇이어야 한다. 소명 의식이어야 한다."⏤306쪽. 나아가, 보르헤스는 유럽의 남서쪽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스페인의 스페인어"와 아메리카 대륙의 "아르헨티나의 스페인어"의 차이를 살핍니다. 거기에 건너가지 못할 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둘은 미묘하게 뉘앙스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같은 언어라고 해서 어느 시공간 속에서나 다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언어는 그 언어가 속한 시공간과 조응한 결과물이고, 그것은 아르헨티나의 스페인어 즉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도 마찬가집니다. 보르헤스는 "어조의 다른 분위기, 특정 단어에 우리가 부여하는 모순적이거나 애정이 담긴 가치, 동일하지 않은 온도"가 있다고 말합니다. 약간 다른 의미의 청출어람, 쪽빛에서 나왔지만 쪽빛과는 또 다른 빛깔을 입게 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잘 쓰인 문학 작품은 고유한 뉘앙스를 포착해내기에 성공한 작품이라고 봅니다. 스페인어를 쓰는 한 토론은 스페인적일 수 있지만 자신들의 시와 유머는 아르헨티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내용 역시 1부의 ⟨토착화된 민요⟩에서 한번 다룬 바 있습니다. 곱씹어 읽어 보면 1부와 2부를 아우르는 멋진 글, 과연 표제작이라고 할 만한 글입니다.
선대 사람들은 이보다 나았다. 그들의 문체는 말의 어조와 같았다. 입이 손을 배반하지 않았다. 그들은 품위를 갖춘 아르헨티나 사람들이었다. 스스로를 크리오요로 칭한 것도 변두리 출신의 자존심이나 불쾌함에 기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상의 평범한 사투리를 글로 표현했다. 스페인 사람들을 흉내 내거나 시골뜨기로 퇴화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 그들은 용도 폐기된 아르헨티나어로 멋지게 표현했다. 글을 쓰기 위해 치장하거나 새로운 이민자인 척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305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russist님의 문장 수집: "선대 사람들은 이보다 나았다. 그들의 문체는 말의 어조와 같았다. 입이 손을 배반하지 않았다. 그들은 품위를 갖춘 아르헨티나 사람들이었다. 스스로를 크리오요로 칭한 것도 변두리 출신의 자존심이나 불쾌함에 기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상의 평범한 사투리를 글로 표현했다. 스페인 사람들을 흉내 내거나 시골뜨기로 퇴화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 그들은 용도 폐기된 아르헨티나어로 멋지게 표현했다. 글을 쓰기 위해 치장하거나 새로운 이민자인 척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
그러나 우리는 대중들의 열정적인 성격, 우리 마을의 끝없는 달콤함, 우리의 멋진 여름과 우리의 비와 공공의 믿음을 잘 포용하는 온순하고 무난한 스페인어를 원한다. 바울은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했다. 나는 미래로부터 오는 기억이라고 번역하겠다. 희망은 우리의 친구이고 스페인어를 순수한 아르헨티나 억양으로 말하는 것이 그가 우리에게 말하는 확증의 하나이다. 각자 내면을 표현하기만 해도 그것을 가질 수 있으리라. 다른 철학적 간계는 필요 없으니, 가슴이라고 말하고 그 안에 있는 상상을 말하라. 이것이 내가 그대들에게 말하고자 한 것이다. (가장 좋은 이름은 희망인 그것인) 미래가 우리 가슴을 끌어당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309-310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서문 & 알리는 글(Advertencia)] 3부입니다. 서문은 생략했지만 각자 읽어보면 됩니다. 3부는 한 시인에 관한 전기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각 장이 일관되게 한 인물을 다루고 있지는 않고, 파편집처럼 구성되어 있기는 합니다. 또 일반적인 전기 형식을 따르지는 않는다는 점을 알고 읽으면 좋겠습니다. 대상 인물을 간략히만 소개하면, 에바리스토 카리에고(Evaristo Carriego, 1883-1912)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관한 시와 탱고 가사를 썼던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29세의 나이로 죽기 전까지, 그는 "변두리의 시인", "팔레르모의 시인"으로 일컬어졌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에바리스토 카리에고라는 시인이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건 바로 보르헤스가 유년을 보낸 바리오(barrio), 즉 교외 지역이 팔레르모(Palermo)이기 때문입니다. 보르헤스에게는 이 변두리 지역이야말로 자신의 유년의 기억이 '보존된' 장소임과 동시에 자기 이전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정수를 간직한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듯 팔레르모는 보르헤스 개인사와 역사가 상이한 방식으로 교차하는 특수한 공간입니다. 유년 속에서 팔레르모는 '보호된' 공간이었지만, 당시 역사적 맥락에서 팔레르모는 "단검과 기타가 난무하는" 음험한 공간이었던 셈입니다. 이 독특한 시차에서 보르헤스의 상상력과 호기심이 태동합니다. 따라서 "팔레르모의 시인"으로 불렸던 카리에고를 연구한다는 것은 중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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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서문 & 알리는 글(Advertencia)] 3부입니다. 서문은 생략했지만 각자 읽어보면 됩니다. 3부는 한 시인에 관한 전기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각 장이 일관되게 한 인물을 다루고 있지는 않고, 파편집처럼 구성되어 있기는 합니다. 또 일반적인 전기 형식을 따르지는 않는다는 점을 알고 읽으면 좋겠습니다. 대상 인물을 간략히만 소개하면, 에바리스토 카리에고(Evaristo Carriego, 1883-1912)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관한 시와 탱고 가사를 썼던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29세의 나이로 죽기 전까지, 그는 "변두리의 시인", "팔레르모의 시인"으로 일컬어졌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에바리스토 카리에고라는 시인이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건 바로 보르헤스가 유년을 보낸 바리오(barrio), 즉 교외 지역이 팔레르모(Palermo)이기 때문입니다. 보르헤스에게는 이 변두리 지역이야말로 자신의 유년의 기억이 '보존된' 장소임과 동시에 자기 이전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정수를 간직한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듯 팔레르모는 보르헤스 개인사와 역사가 상이한 방식으로 교차하는 특수한 공간입니다. 유년 속에서 팔레르모는 '보호된' 공간이었지만, 당시 역사적 맥락에서 팔레르모는 "단검과 기타가 난무하는" 음험한 공간이었던 셈입니다. 이 독특한 시차에서 보르헤스의 상상력과 호기심이 태동합니다. 따라서 "팔레르모의 시인"으로 불렸던 카리에고를 연구한다는 것은 중요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교외 지역, 그러니까 위험한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 있고 노을로 붉게 물든 하늘이 훤히 보이는 변두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믿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쇠창살 울타리로 둘러싸인 정원에서 놀았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영어 책이 꽂혀 있는 서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살았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315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russist님의 문장 수집: "오랜 세월 동안 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교외 지역, 그러니까 위험한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 있고 노을로 붉게 물든 하늘이 훤히 보이는 변두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믿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쇠창살 울타리로 둘러싸인 정원에서 놀았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영어 책이 꽂혀 있는 서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살았다. "
나는 단순한 추측이나 가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념과 정의에 따라 논의를 전개하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사실 이는 스스로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다. 가령 온두라스 거리라고 말하고 나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그 이름이 입 안에 맴도는데,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괜히 장황하게 개념을 정의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오류의 가능성이 훨씬 적은 (그리고 훨씬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31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비록 완전 참여는 못하지만, russist님 해설로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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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KD님의 대화: 비록 완전 참여는 못하지만, russist님 해설로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팔레르모(Palermo de Buenos Aires)] 개인적으로 멀리서 긴 연휴를 보내고 푹 쉬다 왔습니다. 한번 쉬면 그냥 쭉 쉬는 게으른 타입이라 늦었습니다. 어느덧 모임이 이틀 남았는데, 오늘내일 해서 부지런히 다뤄 보겠습니다😅 그리고 3부의 각 장은 원제를 병기해 놓았습니다. 구글로 검색해보시면 원문을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엣지Copilot과 DeepL과 Claude로 번역시켜서 책과 비교하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궁금한 것도 물어보면 잘 답변해줍니다. 어떻게 번역이 이루어진 것인지 궁금한 분들은 한번 저처럼 해보셔도 좋을 겁니다. 보르헤스는 자신이 태어난 1889년을 기점으로 팔레르모의 이전과 이후를 살핍니다. 자신의 이전 시간에 대해서는 늘 그래왔듯이 책을 참고하는데, 도입부부터 보르헤스답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도서관 연보⟫ 3권 360쪽 주석”이나 “⟪노소트로스⟫라는 잡지 242호”에서 인용구를 뽑아올리는 협소한 취향과 세밀한 시선이 돋보입니다. 위대한 고전에서 뽑아올린 문구들이 아니라서 더 좋았고, 아무도 안 볼 법한 책을 펼쳐서 더 아무도 안 볼 법한 각주를 구부정히 들여다보았을 그 모습이 떠올라서 웃기기도 했습니다. 유명한 저자의 유명세에 업혀 있지 않은 구절들, 오래된 도서관 구석에서 지금도 조용히 먼지를 먹고 있을 오래된 책들을 펼치면 나올 구절은 너무 많을 테고, 또 꼭 그만큼 무한히 매력적일 겁니다. 반복하지만, 보르헤스는 자신이 태어난 해인 1889년을 기점으로 팔레르모의 역사를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서 쓰고 있습니다. 자기 이전의 시간은 책에서, 자기 이후의 시간은 개인적인 상상력과 유년의 인상을 바탕으로 씁니다. 독재자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축출되고 이후 연방제 국가의 대통령인 호세 데 우르키사가 들어오는 과정에서 팔레르모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설명한 뒤에, 유년의 팔레르모를 기억에 의존하여 서술하고 있는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보르헤스는 자기 이전의 시간을 불완전한 형식인 책으로밖에 접하지 못했고, 자기 이후의 시간인 유년마저도 망각되고 있음을 알고서 이 글을 썼으리라고 봅니다. 생각해보면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생몰이 역사의 큰 흐름에서 하나의 기념비적인 사건이 되기를 욕망하는 것 같습니다. 그걸 누추한 명예욕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우리는 모두 한 개인으로서 역사와 대면하고 역사에 동참하니까요. 그 점에서 보르헤스가 유년의 팔레르모를 기억하는 방식은 무척이나 개인적이며 역사와 동떨어져 있는 서술처럼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기억과 서술은 역사 속으로 편입되고 있다고 저에겐 읽혀집니다. 용기의 상징인 단검과 결투, 무시무시한 칼을 휘두르며 경찰들과 싸우던 불량배들, 어디서나 들리던 기타 소리, 어둔 골목을 걸을 때면 들려오던 의미를 알 수 없는 휘파람 신호까지, 매력적인 디테일을 하나씩 찾아보는 것도 재밌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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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팔레르모(Palermo de Buenos Aires)] 개인적으로 멀리서 긴 연휴를 보내고 푹 쉬다 왔습니다. 한번 쉬면 그냥 쭉 쉬는 게으른 타입이라 늦었습니다. 어느덧 모임이 이틀 남았는데, 오늘내일 해서 부지런히 다뤄 보겠습니다😅 그리고 3부의 각 장은 원제를 병기해 놓았습니다. 구글로 검색해보시면 원문을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엣지Copilot과 DeepL과 Claude로 번역시켜서 책과 비교하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궁금한 것도 물어보면 잘 답변해줍니다. 어떻게 번역이 이루어진 것인지 궁금한 분들은 한번 저처럼 해보셔도 좋을 겁니다. 보르헤스는 자신이 태어난 1889년을 기점으로 팔레르모의 이전과 이후를 살핍니다. 자신의 이전 시간에 대해서는 늘 그래왔듯이 책을 참고하는데, 도입부부터 보르헤스답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도서관 연보⟫ 3권 360쪽 주석”이나 “⟪노소트로스⟫라는 잡지 242호”에서 인용구를 뽑아올리는 협소한 취향과 세밀한 시선이 돋보입니다. 위대한 고전에서 뽑아올린 문구들이 아니라서 더 좋았고, 아무도 안 볼 법한 책을 펼쳐서 더 아무도 안 볼 법한 각주를 구부정히 들여다보았을 그 모습이 떠올라서 웃기기도 했습니다. 유명한 저자의 유명세에 업혀 있지 않은 구절들, 오래된 도서관 구석에서 지금도 조용히 먼지를 먹고 있을 오래된 책들을 펼치면 나올 구절은 너무 많을 테고, 또 꼭 그만큼 무한히 매력적일 겁니다. 반복하지만, 보르헤스는 자신이 태어난 해인 1889년을 기점으로 팔레르모의 역사를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서 쓰고 있습니다. 자기 이전의 시간은 책에서, 자기 이후의 시간은 개인적인 상상력과 유년의 인상을 바탕으로 씁니다. 독재자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축출되고 이후 연방제 국가의 대통령인 호세 데 우르키사가 들어오는 과정에서 팔레르모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설명한 뒤에, 유년의 팔레르모를 기억에 의존하여 서술하고 있는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보르헤스는 자기 이전의 시간을 불완전한 형식인 책으로밖에 접하지 못했고, 자기 이후의 시간인 유년마저도 망각되고 있음을 알고서 이 글을 썼으리라고 봅니다. 생각해보면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생몰이 역사의 큰 흐름에서 하나의 기념비적인 사건이 되기를 욕망하는 것 같습니다. 그걸 누추한 명예욕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우리는 모두 한 개인으로서 역사와 대면하고 역사에 동참하니까요. 그 점에서 보르헤스가 유년의 팔레르모를 기억하는 방식은 무척이나 개인적이며 역사와 동떨어져 있는 서술처럼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기억과 서술은 역사 속으로 편입되고 있다고 저에겐 읽혀집니다. 용기의 상징인 단검과 결투, 무시무시한 칼을 휘두르며 경찰들과 싸우던 불량배들, 어디서나 들리던 기타 소리, 어둔 골목을 걸을 때면 들려오던 의미를 알 수 없는 휘파람 신호까지, 매력적인 디테일을 하나씩 찾아보는 것도 재밌을 겁니다.
팔레르모를 묘사한 글에는 언제나 멋진 농장과 불결한 도살장이 등장한다. 그리고 야음을 틈타 부들이 늘어져 있는 하구로 조용히 다가가는 네덜란드 밀수선도 빠지지 않는다. 이처럼 모든 것이 거의 멈춰 선 듯한 기원의 세계를 되살리려는 시도는 미세한 과정, 다시 말해 오래전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가 팔레르모를 향해, 그것도 조국이 모르는 사이에 자주 물바다로 변하곤 하던 텅 빈 땅을 향해 미친 듯이 진군해 오던 과정을 경솔하게 연대기로 엮으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32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russist님의 대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팔레르모(Palermo de Buenos Aires)] 개인적으로 멀리서 긴 연휴를 보내고 푹 쉬다 왔습니다. 한번 쉬면 그냥 쭉 쉬는 게으른 타입이라 늦었습니다. 어느덧 모임이 이틀 남았는데, 오늘내일 해서 부지런히 다뤄 보겠습니다😅 그리고 3부의 각 장은 원제를 병기해 놓았습니다. 구글로 검색해보시면 원문을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엣지Copilot과 DeepL과 Claude로 번역시켜서 책과 비교하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궁금한 것도 물어보면 잘 답변해줍니다. 어떻게 번역이 이루어진 것인지 궁금한 분들은 한번 저처럼 해보셔도 좋을 겁니다. 보르헤스는 자신이 태어난 1889년을 기점으로 팔레르모의 이전과 이후를 살핍니다. 자신의 이전 시간에 대해서는 늘 그래왔듯이 책을 참고하는데, 도입부부터 보르헤스답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도서관 연보⟫ 3권 360쪽 주석”이나 “⟪노소트로스⟫라는 잡지 242호”에서 인용구를 뽑아올리는 협소한 취향과 세밀한 시선이 돋보입니다. 위대한 고전에서 뽑아올린 문구들이 아니라서 더 좋았고, 아무도 안 볼 법한 책을 펼쳐서 더 아무도 안 볼 법한 각주를 구부정히 들여다보았을 그 모습이 떠올라서 웃기기도 했습니다. 유명한 저자의 유명세에 업혀 있지 않은 구절들, 오래된 도서관 구석에서 지금도 조용히 먼지를 먹고 있을 오래된 책들을 펼치면 나올 구절은 너무 많을 테고, 또 꼭 그만큼 무한히 매력적일 겁니다. 반복하지만, 보르헤스는 자신이 태어난 해인 1889년을 기점으로 팔레르모의 역사를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서 쓰고 있습니다. 자기 이전의 시간은 책에서, 자기 이후의 시간은 개인적인 상상력과 유년의 인상을 바탕으로 씁니다. 독재자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축출되고 이후 연방제 국가의 대통령인 호세 데 우르키사가 들어오는 과정에서 팔레르모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설명한 뒤에, 유년의 팔레르모를 기억에 의존하여 서술하고 있는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보르헤스는 자기 이전의 시간을 불완전한 형식인 책으로밖에 접하지 못했고, 자기 이후의 시간인 유년마저도 망각되고 있음을 알고서 이 글을 썼으리라고 봅니다. 생각해보면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생몰이 역사의 큰 흐름에서 하나의 기념비적인 사건이 되기를 욕망하는 것 같습니다. 그걸 누추한 명예욕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우리는 모두 한 개인으로서 역사와 대면하고 역사에 동참하니까요. 그 점에서 보르헤스가 유년의 팔레르모를 기억하는 방식은 무척이나 개인적이며 역사와 동떨어져 있는 서술처럼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기억과 서술은 역사 속으로 편입되고 있다고 저에겐 읽혀집니다. 용기의 상징인 단검과 결투, 무시무시한 칼을 휘두르며 경찰들과 싸우던 불량배들, 어디서나 들리던 기타 소리, 어둔 골목을 걸을 때면 들려오던 의미를 알 수 없는 휘파람 신호까지, 매력적인 디테일을 하나씩 찾아보는 것도 재밌을 겁니다.
나는 1889년 당시의 팔레르모에 관해 글을 쓰고자 한다. 이 글을 통해 내가 아는 모든 것을 가감 없이 쓸 생각이다. 내가 아무 거리낌 없이 글을 쓰겠다는 것은 우선 삶이 범죄만큼이나 부끄러울 뿐 아니라 하느님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우리로서는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 팔레르모는 가난에 찌들었을지언정 한가로운 곳이었다. 무화과나무의 그늘이 토담 위로 드리우고, 수수한 건물의 발코니가 변함없이 되풀이되는 일상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 땅콩 장수의 뿔피리가 애절한 소리를 내며 마을 곳곳을 돌아다녔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326쪽, 32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russist님의 대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팔레르모(Palermo de Buenos Aires)] 개인적으로 멀리서 긴 연휴를 보내고 푹 쉬다 왔습니다. 한번 쉬면 그냥 쭉 쉬는 게으른 타입이라 늦었습니다. 어느덧 모임이 이틀 남았는데, 오늘내일 해서 부지런히 다뤄 보겠습니다😅 그리고 3부의 각 장은 원제를 병기해 놓았습니다. 구글로 검색해보시면 원문을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엣지Copilot과 DeepL과 Claude로 번역시켜서 책과 비교하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궁금한 것도 물어보면 잘 답변해줍니다. 어떻게 번역이 이루어진 것인지 궁금한 분들은 한번 저처럼 해보셔도 좋을 겁니다. 보르헤스는 자신이 태어난 1889년을 기점으로 팔레르모의 이전과 이후를 살핍니다. 자신의 이전 시간에 대해서는 늘 그래왔듯이 책을 참고하는데, 도입부부터 보르헤스답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도서관 연보⟫ 3권 360쪽 주석”이나 “⟪노소트로스⟫라는 잡지 242호”에서 인용구를 뽑아올리는 협소한 취향과 세밀한 시선이 돋보입니다. 위대한 고전에서 뽑아올린 문구들이 아니라서 더 좋았고, 아무도 안 볼 법한 책을 펼쳐서 더 아무도 안 볼 법한 각주를 구부정히 들여다보았을 그 모습이 떠올라서 웃기기도 했습니다. 유명한 저자의 유명세에 업혀 있지 않은 구절들, 오래된 도서관 구석에서 지금도 조용히 먼지를 먹고 있을 오래된 책들을 펼치면 나올 구절은 너무 많을 테고, 또 꼭 그만큼 무한히 매력적일 겁니다. 반복하지만, 보르헤스는 자신이 태어난 해인 1889년을 기점으로 팔레르모의 역사를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서 쓰고 있습니다. 자기 이전의 시간은 책에서, 자기 이후의 시간은 개인적인 상상력과 유년의 인상을 바탕으로 씁니다. 독재자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축출되고 이후 연방제 국가의 대통령인 호세 데 우르키사가 들어오는 과정에서 팔레르모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설명한 뒤에, 유년의 팔레르모를 기억에 의존하여 서술하고 있는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보르헤스는 자기 이전의 시간을 불완전한 형식인 책으로밖에 접하지 못했고, 자기 이후의 시간인 유년마저도 망각되고 있음을 알고서 이 글을 썼으리라고 봅니다. 생각해보면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생몰이 역사의 큰 흐름에서 하나의 기념비적인 사건이 되기를 욕망하는 것 같습니다. 그걸 누추한 명예욕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우리는 모두 한 개인으로서 역사와 대면하고 역사에 동참하니까요. 그 점에서 보르헤스가 유년의 팔레르모를 기억하는 방식은 무척이나 개인적이며 역사와 동떨어져 있는 서술처럼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기억과 서술은 역사 속으로 편입되고 있다고 저에겐 읽혀집니다. 용기의 상징인 단검과 결투, 무시무시한 칼을 휘두르며 경찰들과 싸우던 불량배들, 어디서나 들리던 기타 소리, 어둔 골목을 걸을 때면 들려오던 의미를 알 수 없는 휘파람 신호까지, 매력적인 디테일을 하나씩 찾아보는 것도 재밌을 겁니다.
회반죽을 바르지 않은 납작한 집들도 있었다. 그런 집들을 보고 있노라면 쓸쓸하고 황량한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인간들의 간섭 없이 홀로 자식을 기르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33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의 어떤 삶(Una Vida de Evaristo Carriego)] 본격적으로 에바리스토 카리에고를 다룹니다. 그는 29살에 죽었습니다. 본문에도 나오듯이 보르헤스는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와 알고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와 알고 지냈다는 사실이 전기를 쓰는 어려움을 덜어줬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고 보르헤스는 먼저 말합니다. 제삼자에 관한 기억을 타인에게 떠올리게 만드는 일, 즉 전기를 쓰는 일이 일정 부분 불가능을 가능케 하려는 시도의 일환임을 먼저 알고 나서 전기를 쓰고 있음을 밝히는 겁니다. 보르헤스는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의 출신, 내륙 지방의 토착적인 가치관, 그가 생전에 가졌던 병약함과 그로 인한 강렬한 명예욕, 죽음이 가까워서 더욱 예리해지던 감각 따위를 서술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카리에고가 엔트레리오스의 크리오요였고 아르헨티나의 토착적 정서를 대변했지만 그의 몸속에는 이탈리아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란 사람 자체가 이미 혼잡했던 아메리카 대륙의 문화와 언어, 역사를 보여주는 것도 같습니다. 아메리카적인 것은 유럽적인 것의 복사판인 것 같지만 위화감을 주는 복사판이며, 그 점에서 독창적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래서인지 글의 말미에서 카리에고의 '반복'을 말하는 부분이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 조금 딴 얘기를 하자면, 저는 이 글이 요절한 작가에 대한 흔한 찬사가 아니라서 다행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요절한 작가들에 대한 열광은 '걸출함'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고 봅니다. 작품의 여정을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다작하지도 않았으니까요. 따라서 요절한 작가들에 대한 열광이란, 잘 쳐줘도 젊음이 지닌 가능성에 대한 예찬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그 한발 앞에는 낭떠러지가 있습니다. 일종의 호르몬 예찬이자, 인습적인 천재성과 낭만주의적 작가관에 대한 열광이 바로 그겁니다. 누군가의 열정에 쉽사리 감화되는 사람은 열정을 잃은 자신을 속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비슷하게, 젊은 몸의 아름다움만 찬양하는 이들은 늙음이라는 인생의 단계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한 자신을 단죄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절한 작가를 애석해 하며, 다만 천수를 누리고 죽은 작가들을 더 애정합니다. 젊은 날 자기 스타일과 치기를 부끄러워하고, 호르몬과 열기로 해낸 것을 차분히 가라앉혀서 바로 보고, 또 부끄러워하면서 소박해진 보르헤스나 버틀런트 러셀 같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자기 젊음을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이고 또 대단한 특혜이니까요. 그 점에서 시간은 모든 것을 검증해준다는 말은 옳습니다. 자기 젊었을 적 스타일을 평가해줄 사람은 뛰어난 동료도, 비평가도, 고급한 독자도 아닙니다. 늙은 그 자신밖에 없습니다. 보르헤스는 이런 이야기를 단편 ⟨타인⟩에서 하고자 했을 겁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보르헤스의 소설은 때로 한 페이지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짧은분량에 현실과 환상을 뒤섞고 시간 또는 존재와 같은 우주론적 주제를 형상화함으로써 고도로 지적인 특성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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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의 어떤 삶(Una Vida de Evaristo Carriego)] 본격적으로 에바리스토 카리에고를 다룹니다. 그는 29살에 죽었습니다. 본문에도 나오듯이 보르헤스는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와 알고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와 알고 지냈다는 사실이 전기를 쓰는 어려움을 덜어줬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고 보르헤스는 먼저 말합니다. 제삼자에 관한 기억을 타인에게 떠올리게 만드는 일, 즉 전기를 쓰는 일이 일정 부분 불가능을 가능케 하려는 시도의 일환임을 먼저 알고 나서 전기를 쓰고 있음을 밝히는 겁니다. 보르헤스는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의 출신, 내륙 지방의 토착적인 가치관, 그가 생전에 가졌던 병약함과 그로 인한 강렬한 명예욕, 죽음이 가까워서 더욱 예리해지던 감각 따위를 서술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카리에고가 엔트레리오스의 크리오요였고 아르헨티나의 토착적 정서를 대변했지만 그의 몸속에는 이탈리아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란 사람 자체가 이미 혼잡했던 아메리카 대륙의 문화와 언어, 역사를 보여주는 것도 같습니다. 아메리카적인 것은 유럽적인 것의 복사판인 것 같지만 위화감을 주는 복사판이며, 그 점에서 독창적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래서인지 글의 말미에서 카리에고의 '반복'을 말하는 부분이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 조금 딴 얘기를 하자면, 저는 이 글이 요절한 작가에 대한 흔한 찬사가 아니라서 다행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요절한 작가들에 대한 열광은 '걸출함'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고 봅니다. 작품의 여정을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다작하지도 않았으니까요. 따라서 요절한 작가들에 대한 열광이란, 잘 쳐줘도 젊음이 지닌 가능성에 대한 예찬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그 한발 앞에는 낭떠러지가 있습니다. 일종의 호르몬 예찬이자, 인습적인 천재성과 낭만주의적 작가관에 대한 열광이 바로 그겁니다. 누군가의 열정에 쉽사리 감화되는 사람은 열정을 잃은 자신을 속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비슷하게, 젊은 몸의 아름다움만 찬양하는 이들은 늙음이라는 인생의 단계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한 자신을 단죄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절한 작가를 애석해 하며, 다만 천수를 누리고 죽은 작가들을 더 애정합니다. 젊은 날 자기 스타일과 치기를 부끄러워하고, 호르몬과 열기로 해낸 것을 차분히 가라앉혀서 바로 보고, 또 부끄러워하면서 소박해진 보르헤스나 버틀런트 러셀 같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자기 젊음을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이고 또 대단한 특혜이니까요. 그 점에서 시간은 모든 것을 검증해준다는 말은 옳습니다. 자기 젊었을 적 스타일을 평가해줄 사람은 뛰어난 동료도, 비평가도, 고급한 독자도 아닙니다. 늙은 그 자신밖에 없습니다. 보르헤스는 이런 이야기를 단편 ⟨타인⟩에서 하고자 했을 겁니다.
그가 일상적으로 되풀이하던 활동은 우리 안에서 그가 무한히 반복해서 나타나도록 해 준다. 마치 카리에고가 우리의 운명 속에 흩어져 지속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더 나아가 우리 각자가 단 몇 초 동안만이라도 카리에고 자신이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정말 그렇다고 믿는다. 이처럼 우리가 일시적으로 경험하는 여러 정체성들(이는 동일한 것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만으로도 시간이 계속 흐른다는 그릇된 통념을 폐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영원성을 증명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35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russist님의 대화: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의 어떤 삶(Una Vida de Evaristo Carriego)] 본격적으로 에바리스토 카리에고를 다룹니다. 그는 29살에 죽었습니다. 본문에도 나오듯이 보르헤스는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와 알고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와 알고 지냈다는 사실이 전기를 쓰는 어려움을 덜어줬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고 보르헤스는 먼저 말합니다. 제삼자에 관한 기억을 타인에게 떠올리게 만드는 일, 즉 전기를 쓰는 일이 일정 부분 불가능을 가능케 하려는 시도의 일환임을 먼저 알고 나서 전기를 쓰고 있음을 밝히는 겁니다. 보르헤스는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의 출신, 내륙 지방의 토착적인 가치관, 그가 생전에 가졌던 병약함과 그로 인한 강렬한 명예욕, 죽음이 가까워서 더욱 예리해지던 감각 따위를 서술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카리에고가 엔트레리오스의 크리오요였고 아르헨티나의 토착적 정서를 대변했지만 그의 몸속에는 이탈리아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란 사람 자체가 이미 혼잡했던 아메리카 대륙의 문화와 언어, 역사를 보여주는 것도 같습니다. 아메리카적인 것은 유럽적인 것의 복사판인 것 같지만 위화감을 주는 복사판이며, 그 점에서 독창적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래서인지 글의 말미에서 카리에고의 '반복'을 말하는 부분이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 조금 딴 얘기를 하자면, 저는 이 글이 요절한 작가에 대한 흔한 찬사가 아니라서 다행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요절한 작가들에 대한 열광은 '걸출함'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고 봅니다. 작품의 여정을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다작하지도 않았으니까요. 따라서 요절한 작가들에 대한 열광이란, 잘 쳐줘도 젊음이 지닌 가능성에 대한 예찬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그 한발 앞에는 낭떠러지가 있습니다. 일종의 호르몬 예찬이자, 인습적인 천재성과 낭만주의적 작가관에 대한 열광이 바로 그겁니다. 누군가의 열정에 쉽사리 감화되는 사람은 열정을 잃은 자신을 속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비슷하게, 젊은 몸의 아름다움만 찬양하는 이들은 늙음이라는 인생의 단계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한 자신을 단죄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절한 작가를 애석해 하며, 다만 천수를 누리고 죽은 작가들을 더 애정합니다. 젊은 날 자기 스타일과 치기를 부끄러워하고, 호르몬과 열기로 해낸 것을 차분히 가라앉혀서 바로 보고, 또 부끄러워하면서 소박해진 보르헤스나 버틀런트 러셀 같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자기 젊음을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이고 또 대단한 특혜이니까요. 그 점에서 시간은 모든 것을 검증해준다는 말은 옳습니다. 자기 젊었을 적 스타일을 평가해줄 사람은 뛰어난 동료도, 비평가도, 고급한 독자도 아닙니다. 늙은 그 자신밖에 없습니다. 보르헤스는 이런 이야기를 단편 ⟨타인⟩에서 하고자 했을 겁니다.
나는 가끔 이렇게 상상하곤 한다. 죽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구멍을 통해 인간에게 서서히 스며들기 때문에 그것이 가까이 다가오면 인간은 언제나 불쾌한 기분에 휩싸이면서도 명징한 인식을 갖게 될 뿐 아니라 믿기 어려울 정도의 주의력과 예지력을 얻게 된다고 말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360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이단 미사(Misa Hereje)]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의 첫 시집을 논합니다. 초기 시집에서 드러날 법한 미숙한 욕망과 모호한 표현법을 상세하게 지적한 다음, 카리에고의 시에서 보이는 변두리적인 특성을 설명합니다. 그 뒤에는 잘 쓴 작품을 하나씩 상세히 살펴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에 살을 덧붙입니다. 제가 특별히 이야기하기보다는 각자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마지막 시인 ⟨건달⟩을 논하는 부분을 읽고 있으면, 죽음과 죽음을 부르는 폭력을 이상할 정도로 친근히 여기는 태도가 느껴집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죽음'을 관리하고 통제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를 끊임없이 조장하는 것과는 굉장히 다르죠. 코맥 맥카시가 대본을 집필한 영화 ⟪카운슬러⟫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영화는 한국에서 굉장히 반응이 저조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는 대사까지 외울 정도로 매우 좋아합니다🙂 기회가 되면 보시기 바랍니다.
카운슬러전미 도서상, 퓰리처 상 수상 작가 코맥 매카시의 첫 번째 시나리오 작품. 피의 보복으로 점철된 멕시코 마약 전쟁의 한가운데, 사라진 2천만 달러어치 코카인을 놓고, 세상에 복수하려는 여자와 인생 역전을 노리는 남자가 운명을 건 한판 도박에 뛰어든다.
카운슬러젊고 유능한 변호사 카운슬러는 아름다운 약혼녀 로라에게 프로포즈하기 위해 최고급 다이아몬드 반지를 마련한다. 호화로운 삶에 빠진 타락한 사업가 라이너는 재정 위기에 몰린 카운슬러를 유혹해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마약밀매 사업을 제안한다. 라이너가 소개한 미스터리한 마약 중개인 웨스트레이는 지독한 범죄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카운슬러에게 경고하고, 라이너의 치명적인 여자친구인 말키나는 그들 주변을 맴도는 가운데 운반 중이던 거액의 마약이 사라지는 일이 벌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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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이단 미사(Misa Hereje)]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의 첫 시집을 논합니다. 초기 시집에서 드러날 법한 미숙한 욕망과 모호한 표현법을 상세하게 지적한 다음, 카리에고의 시에서 보이는 변두리적인 특성을 설명합니다. 그 뒤에는 잘 쓴 작품을 하나씩 상세히 살펴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에 살을 덧붙입니다. 제가 특별히 이야기하기보다는 각자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마지막 시인 ⟨건달⟩을 논하는 부분을 읽고 있으면, 죽음과 죽음을 부르는 폭력을 이상할 정도로 친근히 여기는 태도가 느껴집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죽음'을 관리하고 통제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를 끊임없이 조장하는 것과는 굉장히 다르죠. 코맥 맥카시가 대본을 집필한 영화 ⟪카운슬러⟫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영화는 한국에서 굉장히 반응이 저조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는 대사까지 외울 정도로 매우 좋아합니다🙂 기회가 되면 보시기 바랍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만의 방식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말과, 투계와 도박에 걸 몇 페소만으로도 즐겁게 일요일을 보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꼭 힘이 셀 필요도 없었다. 가령 당시 최고의 건달 중 한 명이던 페티소 플로레스만 해도 뱀처럼 깡마르고 키가 작아서 보잘것없었지만 칼만 잡으면 전광석화처럼 상대를 쓰러뜨렸다. 또한 건달은 먼저 시비를 걸거나 소란을 피울 필요도 없었다. (···)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우쭐거리지 않고 자신이 거둔 승리(즉, 상대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다 운명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라네. 살다 보면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일(가령 아이를 낳거나 사람을 죽이는 것)을 하기 마련인데, 다 지나서 땅을 치고 후회하거나 자랑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리석은 짓일 뿐이지." 그는 자신의 손에 죽은 이들의 희미한 모습을 기억 속에 떠올리며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380-38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변두리 동네의 노래(Canción de Barrio)]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의 유작 시집을 다룹니다. 여전히 카리에고는 변두리의 거리를 묘사하지만, 보르헤스에 따르면 좀더 원숙하고 깊어졌습니다. 아침이면 배에 칼을 맞고 죽은 시체가 볼썽사납게 나뒹구는 변두리의 거리에서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이전 시집인 ⟪변두리의 영혼⟫과 비교하면 ⟪변두리 동네의 노래⟫에서 시인은 좀더 자신의 주제와 밀착해 있다는 것입니다. 변두리 동네의 화자가 "나는 이러이러한 변두리에 살아요"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한 부분은 통렬합니다. 여기서 보르헤스가 말한, 카리에고가 자기 주제에 좀더 밀착해 있다는 주장은 세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사는 곳을 주변환경과 관련된 말로 정의하는 것과는 구분됩니다. 이를테면, "시골 사람은 흔히 팜파스로, 콤파드리토는 낡은 함석판으로 이어 만든 오두막으로 규정"(385쪽)하는 식입니다. 보르헤스는 굳이 시에서 자기 지역색을 강하게 드러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표합니다. 실제로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말에 지역색을 더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반면, 그들을 어설프게 흉내내려는 사람은 오히려 '지방색'을 넣으려고 애쓴다는 것입니다. 마치 한국 수사극에서 흔히 광역수사대를 '광수대'라고 줄여 칭하는 것과 비슷한데, 그건 마치 백인이 흑인 동네를 괜시리 어슬렁거리다가 하이파이브를 하고 상대를 '니거'라고 부르는 것만큼이나 어이없습니다. 한마디로 총맞을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서 말하려던 카리에고의 유고 시집에서 드러나는 '원숙함'은 한갓 지역색이나 지방색으로 축소되지 않는 것입니다. 중년의 위기를 겪는 가장이 자식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아들의 방문을 열고 '버카충'이나 '럭키비키' 같은 소리를 하면 아들과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질 뿐인 거죠. 전혀 다른 차원의, 보다 세밀한 시선이 필요한 겁니다. 이를테면, 보르헤스는 '콤파트리토'라고 불리우는 이들을 세밀하게 구분하고자 합니다. 콤파트리토는 세간의 분분한 인식처럼 불량배가 아니라, "어느 정도 세련되고 공손한 도시 서민"이라는 겁니다. 잠시 딴 얘기를 하면, 나라마다 도시적 산보자를 부르는 명칭이 다르고, 그 성격도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 재밌습니다. 보들레르로 대표되는 파리의 플라뇌르가 그러하고, 런던의 런던내기가 그러합니다. 한국에서 굳이 이런 존재를 찾자면, 후기 조선에서 행려풍속을 실천했던 '나그네'를 들 수 있을 것 같네요. 하나 같이 문화적이며 문학적인 주체로 형상화되어 있다는 점도 재밌죠. 언젠가 이들에 대해서 논할 기회가 있을 것 같아요. 끝으로, 저는 보르헤스가 카리에고의 유고 시집에서 발견한 것은 '변두리'라는 공간 같습니다. 이 변두리는 '시골'과 '도시'로 이분화되는 구도를 탈피합니다. 지방의 시선에서 본 중심도 아니고, 중심의 시선에서 바라본 지방도 아닌 것 말입니다. 이것을 보르헤스는 다음처럼 멋지게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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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변두리 동네의 노래(Canción de Barrio)]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의 유작 시집을 다룹니다. 여전히 카리에고는 변두리의 거리를 묘사하지만, 보르헤스에 따르면 좀더 원숙하고 깊어졌습니다. 아침이면 배에 칼을 맞고 죽은 시체가 볼썽사납게 나뒹구는 변두리의 거리에서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이전 시집인 ⟪변두리의 영혼⟫과 비교하면 ⟪변두리 동네의 노래⟫에서 시인은 좀더 자신의 주제와 밀착해 있다는 것입니다. 변두리 동네의 화자가 "나는 이러이러한 변두리에 살아요"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한 부분은 통렬합니다. 여기서 보르헤스가 말한, 카리에고가 자기 주제에 좀더 밀착해 있다는 주장은 세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사는 곳을 주변환경과 관련된 말로 정의하는 것과는 구분됩니다. 이를테면, "시골 사람은 흔히 팜파스로, 콤파드리토는 낡은 함석판으로 이어 만든 오두막으로 규정"(385쪽)하는 식입니다. 보르헤스는 굳이 시에서 자기 지역색을 강하게 드러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표합니다. 실제로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말에 지역색을 더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반면, 그들을 어설프게 흉내내려는 사람은 오히려 '지방색'을 넣으려고 애쓴다는 것입니다. 마치 한국 수사극에서 흔히 광역수사대를 '광수대'라고 줄여 칭하는 것과 비슷한데, 그건 마치 백인이 흑인 동네를 괜시리 어슬렁거리다가 하이파이브를 하고 상대를 '니거'라고 부르는 것만큼이나 어이없습니다. 한마디로 총맞을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서 말하려던 카리에고의 유고 시집에서 드러나는 '원숙함'은 한갓 지역색이나 지방색으로 축소되지 않는 것입니다. 중년의 위기를 겪는 가장이 자식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아들의 방문을 열고 '버카충'이나 '럭키비키' 같은 소리를 하면 아들과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질 뿐인 거죠. 전혀 다른 차원의, 보다 세밀한 시선이 필요한 겁니다. 이를테면, 보르헤스는 '콤파트리토'라고 불리우는 이들을 세밀하게 구분하고자 합니다. 콤파트리토는 세간의 분분한 인식처럼 불량배가 아니라, "어느 정도 세련되고 공손한 도시 서민"이라는 겁니다. 잠시 딴 얘기를 하면, 나라마다 도시적 산보자를 부르는 명칭이 다르고, 그 성격도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 재밌습니다. 보들레르로 대표되는 파리의 플라뇌르가 그러하고, 런던의 런던내기가 그러합니다. 한국에서 굳이 이런 존재를 찾자면, 후기 조선에서 행려풍속을 실천했던 '나그네'를 들 수 있을 것 같네요. 하나 같이 문화적이며 문학적인 주체로 형상화되어 있다는 점도 재밌죠. 언젠가 이들에 대해서 논할 기회가 있을 것 같아요. 끝으로, 저는 보르헤스가 카리에고의 유고 시집에서 발견한 것은 '변두리'라는 공간 같습니다. 이 변두리는 '시골'과 '도시'로 이분화되는 구도를 탈피합니다. 지방의 시선에서 본 중심도 아니고, 중심의 시선에서 바라본 지방도 아닌 것 말입니다. 이것을 보르헤스는 다음처럼 멋지게 썼습니다.
겉으로는 아름다워 보일지 모르지만 에스타니슬라오 델 캄포의 ⟪파우스토⟫에 나타나는 동틀 녘과 해 질 녘의 팜파스에 대한 묘사는 다소 실망스러울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거북한 느낌마저 든다. 이러한 문제는 이야기 초반에 시인이 무대 배경을 한 차례 언급하면서 시작된다. 반면 카리에고의 작품에서는 보다 섬세하고 교묘한 표현을 통해 변두리 동네의 비현실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한 비현실적인 성격은 모든 것이 순전히 우연에 의해 되는대로 이루어지는 그곳만의 특성과 말들이 달리거나 농부들이 작은 땅을 부치고 사는 평원의 두 가지 매력, 2층짜리 집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와 자신을 시골 사람이나 도시 사람으로 생각하지 절대 변두리 사람으로는 여기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성향에서 비롯된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410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덧붙이는 글(Apéndice)] 말 그대로 덧붙여진 시와 글입니다. 한가지만 언급하면, 트루코 게임에 대한 글이 인상적입니다. 트루코 게임을 시작하면 사람들이 그 옛날의 크리오요로 돌변한다는 대목을 보고, 저는 화투가 생각나서 웃겼습니다. 명절이 되면 둘러앉아서 화투를 치는 모습을 떠올려보세요. 조금 더 말이 거칠어지고, 더욱 계산적이 되고, 조금 더 우스꽝스러운 분위기가 되는 것, 선을 타는 아슬아슬한 농담이 오가는 것도 그렇고요. 트루코에서 정해진 예법이 있는 것도 화투와 비슷하고, 패를 내리치는 방식(기세를 과시하는 수단입니다!), 패를 회수하고 정리하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기는 방식이 이미 정해져 있고, 다만 매 게임마다 그것이 반복되는 것마저도 같습니다. 트루코든 화투패이든 우리는 둘러 앉아서 게임을 할 때, 전혀 다른 모습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요.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그 분위기 속으로 잠시 들어가서 살다 나오는 기분입니다. 보르헤스도 말하지만 그것은 포커판의 포커페이스와는 전혀 다른, 익살맞은 연극에 가깝습니다.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찰스 부코스키가 노년에 마지막으로 출간한 대표작 <The Last Night of the Earth Poems>이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와 <창작 수업> 두 권으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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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덧붙이는 글(Apéndice)] 말 그대로 덧붙여진 시와 글입니다. 한가지만 언급하면, 트루코 게임에 대한 글이 인상적입니다. 트루코 게임을 시작하면 사람들이 그 옛날의 크리오요로 돌변한다는 대목을 보고, 저는 화투가 생각나서 웃겼습니다. 명절이 되면 둘러앉아서 화투를 치는 모습을 떠올려보세요. 조금 더 말이 거칠어지고, 더욱 계산적이 되고, 조금 더 우스꽝스러운 분위기가 되는 것, 선을 타는 아슬아슬한 농담이 오가는 것도 그렇고요. 트루코에서 정해진 예법이 있는 것도 화투와 비슷하고, 패를 내리치는 방식(기세를 과시하는 수단입니다!), 패를 회수하고 정리하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기는 방식이 이미 정해져 있고, 다만 매 게임마다 그것이 반복되는 것마저도 같습니다. 트루코든 화투패이든 우리는 둘러 앉아서 게임을 할 때, 전혀 다른 모습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요.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그 분위기 속으로 잠시 들어가서 살다 나오는 기분입니다. 보르헤스도 말하지만 그것은 포커판의 포커페이스와는 전혀 다른, 익살맞은 연극에 가깝습니다.
사실 트루코를 하은 사람은 과거에 쓴 패를 다시 쓸 뿐이다. 따라서 트루코는 예전 게임, 다시 말해 예전에 경험했던 순간의 반복이다. 옛 세대의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우리 곁을 떠났지만 트루코 속에 여전히 살고 있다. 그들은 트루코 자체이다. (이것은 절대 비유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시간은 단지 환영이거나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결국 우리는 울긋불긋한 색깔로 그려진 트루코 카드의 미로를 따라서 삶에 관한 모든 사유의 유일한 존재 이유이자 목적인 형이상학의 세계로 다가선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422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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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에 처음 오셨나요?[그믐레터]로 그믐 소식 받으세요중간 참여할 수 있어요!
💊 여러분의 처방책이 필요합니다.
결혼하는 같은회사 직원에게 선물할 책을 추천해주세요.수험생이 시집이 읽고 싶대요. 스무살 청년에게 추천하고 싶은 시집을 추천해주세요.[책처방] 5.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을 추천받고 싶어요.
독서모임에선 책만 읽는다? 댓츠 노노!
혹시 필사 좋아하세요?문학편식쟁이의 수학공부! 50일 수학(상) 함께 풀어요.스몰 색채 워크샵프리스타일 랩을 위한 북클럽 《운율,서재》
2월 8일(토) 달오름극장에서 만나요.
[그믐연뮤클럽] 5. 의심, 균열, 파국 x 추리소설과 연극무대가 함께 하는 "붉은 낙엽"[그믐연뮤클럽] 4. 다시 찾아온 도박사의 세계 x 진실한 사랑과 구원의 "백치"[그믐연뮤클럽] 3. "리어왕" 읽고 "더 드레서" 같이 관람해요
2월 26일(수), 함께 낭독해요 🎤
[그믐밤X그믐클래식] 32. 달밤에 낭독, <일리아스>
2월의 고전
[그믐클래식 2025] 2월, 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이달의 고전] 2월 『제5도살장』 함께 읽어요[이달의 고전] 2월 『양철북』 함께 읽어요[그믐밤X그믐클래식] 32. 달밤에 낭독, <일리아스>
책도 벽돌, 독자들의 대화도 벽돌!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19. <호라이즌>[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18. <행동>[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17. <노이즈>[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16. <마오주의>
작품 말고 작가가 더 궁금할 때!
[그믐북클럽Xsam] 24. <작가란 무엇인가> 읽고 답해요[책증정] 페미니즘의 창시자, 프랑켄슈타인의 창조자 《메리와 메리》 함께 읽어요![그믐밤] 28. 달밤에 낭독, <우리는 언제나 희망하고 있지 않나요>[Re:Fresh] 4.『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다시 읽어요.
illef의 깊이 읽기
AI 교과서(AIDT)우리가 운명이라고 불렀던 것들왕의 목을 친 남자 - 사형집행인 샤를 앙리 상송의 이야기
매달 만나는 젊은 작가의 달달한 로맨스 🧁
[북다] 《정원에 대하여(달달북다08)》 함께 읽어요! (+책 나눔 이벤트)[북다] 《어느 순간을 가리키자면(달달북다07)》 함께 읽어요! (1/23 라이브 채팅!)[북다] 《지나가는 것들(달달북다06)》 함께 읽어요! (책 나눔 이벤트)[북다] 《빛처럼 비지처럼(달달북다05)》 함께 읽어요! (+책 나눔 이벤트)[북다] 《횡단보도에서 수호천사를 만나 사랑에 빠진 이야기(달달북다04)》
📩 닫히지 않는 편지 가게 글월
편지가게 글월 / 백승연 지음 (2024 런던 국제 도서전 화제작)[책 증정] 텍스티와 함께 『편지 가게 글월』 함께 읽어요![편지 가게 글월] 서로 꿈을 이야기하며 안부를 전하는 글쓰기를 하고자 합니다.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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