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sist님의 대화: [날짜] 네 가지 주제에 대한 짤막한 글 모음처럼 읽힙니다. 제목이 왜 '날짜(Fechas)’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렴풋이 네 편의 짤막한 글에서 '시간과 그 흐름'을 쓰고자 했다는 인상을 받기는 했지만, 정확히 그런 의도로 썼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가장 재밌게 봤던 글만 말하면, 레예스의 애넥도트(anecdote)를 엮은 ⟪해시계⟫를 논한 두 번째 글입니다. 애넥도트는 흔히 '일화'로 옮겨지는데, 각주에서 설명하듯 한국적인 맥락에서는 이 장르를 지칭하는 마땅한 단어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애넥도트는 희랍어 ‘anékdota’에서 유래한 말로,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발표되지 않은 이야기’, ‘미공개 이야기’라고 합니다. 부정접두사 “an-”과 ‘출판된’을 의미하는 “ékdotos”이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며, 이것이 현대 영어에서 ‘anecdote’로 옮겨왔다고 전해집니다.
애넥도트는 특정한 이유 때문에 출판되거나 공개되지 않았던 이야기감이라는 의미에서 출발합니다. 보르헤스에 따르면, 애넥도트는 "모든 시적 현실이자 우리가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 애넥도트는 핵심적인 요소만 진술했고, 또 교훈적인 요소가 반드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레예스의 애넥도트는 항상 결말에 이르러서야 그 핵심과 교훈이 드러나는 기존의 '일화주의자'들의 결과물과 달랐다는 것이 보르헤스의 말입니다. "레예스는 우리에게 작은 세계를 소개하고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만든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영화 끝에 기막힌 반전이 숨겨진 영화가 한때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다가 금세 사그라든 것이 떠올랐습니다. 좋은 책과 영화는 기막힌 반전, 스포일러와 무관하게 접할 때마다 새로운 것이 아닐까 합니다. 좋은 책은 꾹 참고 끝까지 읽고 나서야 좋은 이유를 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읽고 있는 페이지에서 좋은 점을 꼭 하나는 꼽을 수 있는 책이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좋다'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요.)
한편, 이전에 했던 모임에서 제발트의 ⟪전원에서 머문 날들⟫를 읽으면서, 잠시 애넥도트의 한 사례를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달력 이야기꾼 요한 페터 헤벨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참고로 2010년대 음악의 명반 계열에 오른 ESENS의 앨범 제목도 애넥도트입니다.
“ “‘일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적어도 우리를 즐겁게 만든다. 우리로 하여금 잠시 동안이라도 살도록 도와주고 망각하도록 도와준다. 이보다 큰 자비가 있는가? 이는 식물의 꽃과 같아서, 중요한 미덕인 손으로 잘라서 가슴에 꽂고 다닐 수 있는 따뜻하고 가시적이며 조화로운 조합이다.
우리에게 풍차가 제공하는 밀가루와 추억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66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문장모음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