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보르헤스 읽기]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3부 같이 읽어요

D-29
russist님의 대화: [이미지의 시뮬레이션] 예술, 그중에서도 특히 문학에서 '이미지'라는 것을 깊이 살펴보는 글입니다. 보르헤스는 기존의 문학에서 '이미지'가 시각적인 것에만 국한된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그 "시각적인 것의 무분별한 남용 사례"를 하나씩 살핍니다. (234) "어둠이 아니다. 즉 빛나는 밝음, 눈부신 밝음이자 내면의 밝음, 깊은 밝음이다. 번쩍이는 바다는 파란 크리스털이다. 다이아몬드가 뿌려진, 또는 태양이 타원을 그리며 횡단하는 무결점, 사파이어색 하늘." 보르헤스는 은유라고 불리는 많은 것들이 시각적인 무절제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면서, 기존의 표현들이 얼마나 정확하지 않은지, 최상급의 과장된 표현으로 가득한지, 그리고 그러한 게으른 과장법이 독자의 부주의와 어떻게 공모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생각해보면, 과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자신이 설득하려는 이미지에 닿지 못하는 궁색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닿지 않기 때문에 수식어를 주렁주렁 다는 것인데, 계속해서 수식을 달수록 애당초 닿으려는 이미지와는 더욱 멀어지고마는 역설에 봉착합니다. 좁아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날카로워지고 있다고 오판하는 일이 그렇게 왕왕 벌어집니다. 그 점에서 '이미지'를 설득하려는 사람은 휴리스틱 이론에서의 '교집합의 오류', 혹은 '결합 오류(conjunction fallacy)'라고 부르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미국과 러시아가 전쟁을 할 확률이 얼마인가'를 물으면 그럴 확률이 거의 없을 거라고 말한 사람들에게 질문을 바꿔서, '제삼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미국과 러시아가 전쟁을 하게 될 확률이 얼마인가'를 물으면 오히려 전쟁이 벌어질 확률을 높게 책정한다는 겁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는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다. 왜냐면 전자의 질문이 후자의 질문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이미지를 설득하기 위해서 수사적 장치를 동원하는 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결국 수식어는 한정하는 역할을 하고, 더 많은 수식어를 쓸수록 더욱더 그 이미지는 한정적인 것이 되어서 도무지 공감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마는데도, 이상하게도 쓰는 입장에서는 더욱 그럴듯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글에서 인용된 ‘무절제한 표현들’을 읽다보니 보르헤스가 러브크래프트를 완전히 상반된 스타일로 패러디(?)했던 단편이 생각났어요.ㅎㅎ
화제로 지정된 대화
[문학의 기쁨] 보르헤스는 먼저 자신이 과거에 읽었던 책들을 쭉 열거하면서, 그것을 다시 읽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과거야말로 새로운 것입니다. 미래가 아니라요. 잘 쓰인 한 권의 책을 소유하는 것과 그 책을 읽고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일은 전혀 다름에도, 우리는 어떤 책을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것을 한번 읽고 옆으로 치워버립니다. 이렇듯, "무모할 정도의 고고학적 노력"(253쪽)으로 읽고 또 읽어서, '이미 있던 것'에서 '앞으로 있게 될 것'을 끌어내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고, 또 사람들이 큰 관심을 두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보르헤스가 이 글의 말미에서 언급하는 이름들은 아직 건재합니다. 케베도와 로버트 번스와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와 하인리히 하이네와 윌트 휘트먼이 바로 그들입니다. 일전에 1부에서 새로움에 대해서 쓴 내용이 떠오릅니다. 새로움을 말하려는 사람은 새롭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어야만 자신의 새로움이 진정 새로운지 검증할 수 있습니다. 1부터 9라는 개념을 고안한 다음에, 0이라는 숫자가 있어야만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고대인들처럼요. 보르헤스는 영원의 책이 진정 존재한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다만 제가 봤을 때 보르헤스는 감히 영원의 책을 쓰려거나 소유하려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영원이 책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을 믿으면서, 그 한 페이지를 탐구하기를 바랐던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본문에서 보르헤스가 건네는 말에 잘 담겨있습니다. "독자여, 그대가 선호하는 책들은 마지막까지 읽지 못한 영원의 책의 초고와도 같다."(249쪽) 결국 '문학의 기쁨'이란, 고전을 다시 읽는 기쁨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고 할지라도 그는 한 인간일 뿐이며, 한 인간은 사는 동안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겸손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이 전혀 아름답지 않은 인간을 아름다움 쪽으로 차차 나아가게 만듭니다. 따라서 불완전한 과거를 탐구하는 고고학이야말로 미래의 학문입니다. 과거를 발굴하는 행위와 미래를 지향하는 행위는 방향이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책장이 쉽게 넘어가는 책이 아니라 자꾸 뒤를 들춰봐야하는 이런 책을 읽을 때 참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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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문학의 기쁨] 보르헤스는 먼저 자신이 과거에 읽었던 책들을 쭉 열거하면서, 그것을 다시 읽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과거야말로 새로운 것입니다. 미래가 아니라요. 잘 쓰인 한 권의 책을 소유하는 것과 그 책을 읽고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일은 전혀 다름에도, 우리는 어떤 책을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것을 한번 읽고 옆으로 치워버립니다. 이렇듯, "무모할 정도의 고고학적 노력"(253쪽)으로 읽고 또 읽어서, '이미 있던 것'에서 '앞으로 있게 될 것'을 끌어내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고, 또 사람들이 큰 관심을 두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보르헤스가 이 글의 말미에서 언급하는 이름들은 아직 건재합니다. 케베도와 로버트 번스와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와 하인리히 하이네와 윌트 휘트먼이 바로 그들입니다. 일전에 1부에서 새로움에 대해서 쓴 내용이 떠오릅니다. 새로움을 말하려는 사람은 새롭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어야만 자신의 새로움이 진정 새로운지 검증할 수 있습니다. 1부터 9라는 개념을 고안한 다음에, 0이라는 숫자가 있어야만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고대인들처럼요. 보르헤스는 영원의 책이 진정 존재한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다만 제가 봤을 때 보르헤스는 감히 영원의 책을 쓰려거나 소유하려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영원이 책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을 믿으면서, 그 한 페이지를 탐구하기를 바랐던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본문에서 보르헤스가 건네는 말에 잘 담겨있습니다. "독자여, 그대가 선호하는 책들은 마지막까지 읽지 못한 영원의 책의 초고와도 같다."(249쪽) 결국 '문학의 기쁨'이란, 고전을 다시 읽는 기쁨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고 할지라도 그는 한 인간일 뿐이며, 한 인간은 사는 동안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겸손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이 전혀 아름답지 않은 인간을 아름다움 쪽으로 차차 나아가게 만듭니다. 따라서 불완전한 과거를 탐구하는 고고학이야말로 미래의 학문입니다. 과거를 발굴하는 행위와 미래를 지향하는 행위는 방향이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책장이 쉽게 넘어가는 책이 아니라 자꾸 뒤를 들춰봐야하는 이런 책을 읽을 때 참 기쁩니다.
영원한 존재의 운명은 대체로 다르다. 감정이나 사고의 부수적인 것들은 사라지거나 업적 아에서 보이지 않게 되고 회복할 수도 없으며 아무도 그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게 된다. 반면에 그의 개성(인생의 한순간도 순수하지 않았으리라는 단순하고 이상적인 생각)은 뿌리처럼 영혼에 들러붙는다. 숫자처럼 완벽해진다. 추상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고작 그림자 한 조각처럼 될지라도 영원한 것이다. 다음의 문장이 아주 잘 어울린다. "메아리로 남았으니 위엄의 결핍과 공백에, 온전한 목소리가 아니라 말의 부재에 매달려 가라."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52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russist님의 대화: [문학의 기쁨] 보르헤스는 먼저 자신이 과거에 읽었던 책들을 쭉 열거하면서, 그것을 다시 읽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과거야말로 새로운 것입니다. 미래가 아니라요. 잘 쓰인 한 권의 책을 소유하는 것과 그 책을 읽고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일은 전혀 다름에도, 우리는 어떤 책을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것을 한번 읽고 옆으로 치워버립니다. 이렇듯, "무모할 정도의 고고학적 노력"(253쪽)으로 읽고 또 읽어서, '이미 있던 것'에서 '앞으로 있게 될 것'을 끌어내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고, 또 사람들이 큰 관심을 두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보르헤스가 이 글의 말미에서 언급하는 이름들은 아직 건재합니다. 케베도와 로버트 번스와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와 하인리히 하이네와 윌트 휘트먼이 바로 그들입니다. 일전에 1부에서 새로움에 대해서 쓴 내용이 떠오릅니다. 새로움을 말하려는 사람은 새롭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어야만 자신의 새로움이 진정 새로운지 검증할 수 있습니다. 1부터 9라는 개념을 고안한 다음에, 0이라는 숫자가 있어야만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고대인들처럼요. 보르헤스는 영원의 책이 진정 존재한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다만 제가 봤을 때 보르헤스는 감히 영원의 책을 쓰려거나 소유하려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영원이 책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을 믿으면서, 그 한 페이지를 탐구하기를 바랐던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본문에서 보르헤스가 건네는 말에 잘 담겨있습니다. "독자여, 그대가 선호하는 책들은 마지막까지 읽지 못한 영원의 책의 초고와도 같다."(249쪽) 결국 '문학의 기쁨'이란, 고전을 다시 읽는 기쁨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고 할지라도 그는 한 인간일 뿐이며, 한 인간은 사는 동안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겸손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이 전혀 아름답지 않은 인간을 아름다움 쪽으로 차차 나아가게 만듭니다. 따라서 불완전한 과거를 탐구하는 고고학이야말로 미래의 학문입니다. 과거를 발굴하는 행위와 미래를 지향하는 행위는 방향이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책장이 쉽게 넘어가는 책이 아니라 자꾸 뒤를 들춰봐야하는 이런 책을 읽을 때 참 기쁩니다.
무모할 정도의 고고학적인 노력만이 이 황폐한 곳을 재건할 수 있으리라. 또한 영원한 것에는 불멸성이 있다. 달과 봄, 나이팅게일이 하인리히 하이네의 영광을 나타낸다면 앨저넌 스윈번은 회색빛 하늘을 견뎌 내는 바다가 표상하고, 긴 승강장과 선착장은 윌트 휘트먼의 영광을 형상화한다. 그러나 최고의 불멸성(열정이 지배하는 불멸)은 계속 채워지지 않는다. 죽음과 절망, 욕망과 증오를 모두 담은 목소리를 내는 시인은 없다. 다시 말해 인류의 위대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고 우리는 이런 불완전함 때문에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5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심슨님의 대화: 글에서 인용된 ‘무절제한 표현들’을 읽다보니 보르헤스가 러브크래프트를 완전히 상반된 스타일로 패러디(?)했던 단편이 생각났어요.ㅎㅎ
아마 ⟨더 많은 것들이 있다⟩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어떤 부분이 그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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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아마 ⟨더 많은 것들이 있다⟩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어떤 부분이 그랬을까요?
(괴물이 사는 곳으로 추정되는) 어떤 으스스한 공간만을 묘사했던 작품으로 기억하는데, 괴물의 모습을 늘 지나친 수사로 표현하는 러브크래프트에 대한 비평 같았거든요. 아니면 본인이 어디선가 이렇게 말한 것을 제가 읽었을수도;
화제로 지정된 대화
[탱고의 기원] 갑자기 왠 탱고인가 할 수도 있습니다만, 보르헤스는 생전 탱고에 관한 시나 단편 소설, 산문을 많이 썼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보르헤스에게 탱고는 단순한 음악은 아니었습니다. 탱고는 문학이 아닌 것중에 가장 문학적인 텍스트였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많은 이민자가 들어오게 되면서 발생한 여러 사회 문화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 탱고였거든요. 하지만 보르헤스는 오늘날의 변형된 탱고가 아니라 초창기 탱고에 천착했습니다. 초기 탱고는 이민자들의 좌절과 향수, 변두리의 거친 삶과 활력, 칼잡이와 건달의 길거리 결투와 숙명성, 사창가의 에로티시즘과 외로움이라는 독특한 정서가 녹아있는데요, 보르헤스가 탱고에서 읽어내고자 한 것도 바로 이러했습니다. 본문에서 미겔 카미노의 시를 언급하는 부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보르헤스는 부드럽고 슬프게 사랑을 노래하는 이탈리아적인 감상적 탱고보다 활력 넘치는 도시적인 초기 탱고가 더 낫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훗날 이런 생각을 일부 수정하긴 했지만, 큰 틀에서 보르헤스가 도시적이고 항구적인 것이 반영된 초기 탱고에 천착했음은 이 글에서도 어렴풋이 드러납니다. 초기 단편집에서도 이런 경향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인 2016년에는 탱고를 주제로 한 강연 녹음본이 발견되어 출간되기도 했는데, 현재 민음사에서 번역본이 나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보르헤스는 탱고에 꽤나 진심이어서, 1965년 아스토르 피아졸라(Astro Piazzolla)와 함께 탱고 음반을 내기도 했습니다. 보르헤스의 시 6편과 단편 ⟨장밋빛 모퉁이의 남자⟩에 음악을 붙인 것입니다. 본문 애기를 좀 해보자면, 보르헤스는 글에서 말 그대로 자신이 생각하는 탱고의 기원을 논합니다. 먼저, 보르헤스는 탱고의 기원에 대한 분분한 의견을 소개한 다음,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는데요, 이 탱고의 기원을 추적하는 과정 자체가 유럽적인 것과 아메리카적인 것이 혼재하는 아르헨티나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우루과이 작가인 비센테 로시를 비롯한 사람들은 오늘날 탱고가 우루과이의 '밀롱가'라는 전통 음악에서 비롯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밀롱가는 19세기 후반 쿠바에서 아르헨티나로 전해진 '아네바라'가 아프리카계 음악인 '칸돔베'와 만나서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듯, 탱고야말로 아메리카의 혼란한 역사를 방증하는 또 하나의 텍스트인 것입니다. 보르헤스는 탱고가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에서 나왔다는 로시의 주장을 반박하며, 탱고가 가우초에 향수를 느끼는 몬테비데오에서만 오롯이 나왔다고 말할 수 없으며, 오히려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항구도시적 것("포르테뇨")에도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음을 이 글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쓰고 보니 두서가 없긴 한데, 탱고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다룰 일이 있을 것 같아요.
탱고 - 네 개의 강연전 세계 독자들에게 전하는 보르헤스의 마지막 신간 『탱고』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보르헤스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 만에 출간된 그의 유고 강연집으로 37년 동안이나 망각 속에 묻혀 있던 보르헤스의 강연 자료를 책으로 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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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탱고의 기원] 갑자기 왠 탱고인가 할 수도 있습니다만, 보르헤스는 생전 탱고에 관한 시나 단편 소설, 산문을 많이 썼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보르헤스에게 탱고는 단순한 음악은 아니었습니다. 탱고는 문학이 아닌 것중에 가장 문학적인 텍스트였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많은 이민자가 들어오게 되면서 발생한 여러 사회 문화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 탱고였거든요. 하지만 보르헤스는 오늘날의 변형된 탱고가 아니라 초창기 탱고에 천착했습니다. 초기 탱고는 이민자들의 좌절과 향수, 변두리의 거친 삶과 활력, 칼잡이와 건달의 길거리 결투와 숙명성, 사창가의 에로티시즘과 외로움이라는 독특한 정서가 녹아있는데요, 보르헤스가 탱고에서 읽어내고자 한 것도 바로 이러했습니다. 본문에서 미겔 카미노의 시를 언급하는 부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보르헤스는 부드럽고 슬프게 사랑을 노래하는 이탈리아적인 감상적 탱고보다 활력 넘치는 도시적인 초기 탱고가 더 낫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훗날 이런 생각을 일부 수정하긴 했지만, 큰 틀에서 보르헤스가 도시적이고 항구적인 것이 반영된 초기 탱고에 천착했음은 이 글에서도 어렴풋이 드러납니다. 초기 단편집에서도 이런 경향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인 2016년에는 탱고를 주제로 한 강연 녹음본이 발견되어 출간되기도 했는데, 현재 민음사에서 번역본이 나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보르헤스는 탱고에 꽤나 진심이어서, 1965년 아스토르 피아졸라(Astro Piazzolla)와 함께 탱고 음반을 내기도 했습니다. 보르헤스의 시 6편과 단편 ⟨장밋빛 모퉁이의 남자⟩에 음악을 붙인 것입니다. 본문 애기를 좀 해보자면, 보르헤스는 글에서 말 그대로 자신이 생각하는 탱고의 기원을 논합니다. 먼저, 보르헤스는 탱고의 기원에 대한 분분한 의견을 소개한 다음,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는데요, 이 탱고의 기원을 추적하는 과정 자체가 유럽적인 것과 아메리카적인 것이 혼재하는 아르헨티나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우루과이 작가인 비센테 로시를 비롯한 사람들은 오늘날 탱고가 우루과이의 '밀롱가'라는 전통 음악에서 비롯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밀롱가는 19세기 후반 쿠바에서 아르헨티나로 전해진 '아네바라'가 아프리카계 음악인 '칸돔베'와 만나서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듯, 탱고야말로 아메리카의 혼란한 역사를 방증하는 또 하나의 텍스트인 것입니다. 보르헤스는 탱고가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에서 나왔다는 로시의 주장을 반박하며, 탱고가 가우초에 향수를 느끼는 몬테비데오에서만 오롯이 나왔다고 말할 수 없으며, 오히려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항구도시적 것("포르테뇨")에도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음을 이 글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쓰고 보니 두서가 없긴 한데, 탱고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다룰 일이 있을 것 같아요.
나의 논리는 간단하다. 탱고는 분명히 도시적인 공간 또는 도시 근교나 항구에서 발생했는데, 코랄레스 사람들은 항상 팜파스와 가우초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고 어떤 형태의 발명에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과거를 숭배하고 가우초를 흉내 내는 데 열중했기 때문이다. 탱고는 들판의 것이 아니라 항구의 것이다. 그것의 고향은 들판이 아니라 교외의 분홍빛 길모퉁이이고, 그 분위기는 바호 지역의 것이며, 그 상징은 옴부가 아니라 강변에 늘어진 버드나무의 가지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62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날짜] 네 가지 주제에 대한 짤막한 글 모음처럼 읽힙니다. 제목이 왜 '날짜(Fechas)’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렴풋이 네 편의 짤막한 글에서 '시간과 그 흐름'을 쓰고자 했다는 인상을 받기는 했지만, 정확히 그런 의도로 썼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가장 재밌게 봤던 글만 말하면, 레예스의 애넥도트(anecdote)를 엮은 ⟪해시계⟫를 논한 두 번째 글입니다. 애넥도트는 흔히 '일화'로 옮겨지는데, 각주에서 설명하듯 한국적인 맥락에서는 이 장르를 지칭하는 마땅한 단어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애넥도트는 희랍어 ‘anékdota’에서 유래한 말로,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발표되지 않은 이야기’, ‘미공개 이야기’라고 합니다. 부정접두사 “an-”과 ‘출판된’을 의미하는 “ékdotos”이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며, 이것이 현대 영어에서 ‘anecdote’로 옮겨왔다고 전해집니다. 애넥도트는 특정한 이유 때문에 출판되거나 공개되지 않았던 이야기감이라는 의미에서 출발합니다. 보르헤스에 따르면, 애넥도트는 "모든 시적 현실이자 우리가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 애넥도트는 핵심적인 요소만 진술했고, 또 교훈적인 요소가 반드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레예스의 애넥도트는 항상 결말에 이르러서야 그 핵심과 교훈이 드러나는 기존의 '일화주의자'들의 결과물과 달랐다는 것이 보르헤스의 말입니다. "레예스는 우리에게 작은 세계를 소개하고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만든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영화 끝에 기막힌 반전이 숨겨진 영화가 한때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다가 금세 사그라든 것이 떠올랐습니다. 좋은 책과 영화는 기막힌 반전, 스포일러와 무관하게 접할 때마다 새로운 것이 아닐까 합니다. 좋은 책은 꾹 참고 끝까지 읽고 나서야 좋은 이유를 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읽고 있는 페이지에서 좋은 점을 꼭 하나는 꼽을 수 있는 책이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좋다'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요.) 한편, 이전에 했던 모임에서 제발트의 ⟪전원에서 머문 날들⟫를 읽으면서, 잠시 애넥도트의 한 사례를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달력 이야기꾼 요한 페터 헤벨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참고로 2010년대 음악의 명반 계열에 오른 ESENS의 앨범 제목도 애넥도트입니다.
전원에 머문 날들독일문학의 거장 W. G. 제발트의 에세이. 요한 페터 헤벨, 고트프리트 켈러, 로베르트 발저, 장자크 루소, 에두아르트 뫼리케, 얀 페터 트리프, 총 여섯 작가에 대해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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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과식주의] 여기서 과식주의(culteranismo)로 번역된 단어는 흔히 공고라주의(Gongorismo)라고 해서, 16세기 시인 루이스 공고라에서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문체 운동을 일컫습니다. 화려하고 과장된('過飾') 어휘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보르헤스도 설명하듯, 과식주의는 "은유법의 남용, 라틴어 어투, 즉 고어체의 사용 그리고 그리스 신화의 남용"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보르헤스는 이 글에서 과식주의를 비판합니다. 제가 제대로 읽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글은 공고라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에서 파생한 문체에 대한 비판인 것 같습니다. 마치 성서의 말씀은 언제나 있으되, 그것을 왜곡하는 사람도 항상 있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성서의 진의를 어쩐 일인지 자신만은 알아버렸다고 주장하면서 구세주를 자처하고 내용을 왜곡해서 설파하는 사이비들처럼요. 보르헤스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와 그 용례의 관계를 들어서 이러한 논의를 엽니다(216쪽). 즉 문법이란 그것에 고착되거나 귀속되기 위한 정답지가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더 넓은 땅을 여행하기 위한 토대라는 겁니다. 생각해보면, 문법에 과도하게 신경쓰다보면 우리는 언어적 입스(yips) 상태에 빠집니다. 하지만 능숙한 운동 선수가 그렇듯이, 경이로운 플레이는 논리가 아니라 숙달된 감각, 찰나의 직관으로만 가능합니다. 모듈화된 룰이 중요한 것은 그것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고 그 모듈화된 경직성으로부터 제대로 알고 벗어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이러한 맥락에서, 보르헤스는 공고라가 아닌 과식주의의 세 가지 오류를 다시금 살핍니다. 먼저, 은유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은유가 오래된 생각을 쇄신하는 수단이 되기에 실패한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은유는 은유라서 시적인 것이 아니라 그가 성취한 표현에 의해 시적이다"라는 내용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과식주의에서 은유는 상상하는 수단이 아니라 "상상하거나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수단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 다음으로, 공고라가 즐겨썼던 라틴어식 표현을 짚어봅니다. 보르헤스는 라틴어식 표현을 두고, 자신이 “오늘날 스페인어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정통주의자들의 어리석음과 비사교성보다는 라틴어 혼용주의자의 너그러운 자세를 선호한다”고 말합니다. 젠체하며 학식을 뽐내는 수단이 아니라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식주의자들이 보여주는 일종의 '믿음 없는 믿음'을 지적합니다. 이는 무신론자들의 주기도문과 같습니다. 이때 과식주의자들의 그리스 신화는 공통된 이야기에 접촉하려는 열망이 아니라 "아부하거나 타지의 풍경을 이용하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 점에서 과식주의는 공고라의 장치를 치장으로 오해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거의 모든 시인이 상상력을 소설가나 역사가에게 내주고 단어의 명성만을 거래한다는 점이 유감스럽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22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russist님의 대화: [날짜] 네 가지 주제에 대한 짤막한 글 모음처럼 읽힙니다. 제목이 왜 '날짜(Fechas)’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렴풋이 네 편의 짤막한 글에서 '시간과 그 흐름'을 쓰고자 했다는 인상을 받기는 했지만, 정확히 그런 의도로 썼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가장 재밌게 봤던 글만 말하면, 레예스의 애넥도트(anecdote)를 엮은 ⟪해시계⟫를 논한 두 번째 글입니다. 애넥도트는 흔히 '일화'로 옮겨지는데, 각주에서 설명하듯 한국적인 맥락에서는 이 장르를 지칭하는 마땅한 단어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애넥도트는 희랍어 ‘anékdota’에서 유래한 말로,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발표되지 않은 이야기’, ‘미공개 이야기’라고 합니다. 부정접두사 “an-”과 ‘출판된’을 의미하는 “ékdotos”이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며, 이것이 현대 영어에서 ‘anecdote’로 옮겨왔다고 전해집니다. 애넥도트는 특정한 이유 때문에 출판되거나 공개되지 않았던 이야기감이라는 의미에서 출발합니다. 보르헤스에 따르면, 애넥도트는 "모든 시적 현실이자 우리가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 애넥도트는 핵심적인 요소만 진술했고, 또 교훈적인 요소가 반드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레예스의 애넥도트는 항상 결말에 이르러서야 그 핵심과 교훈이 드러나는 기존의 '일화주의자'들의 결과물과 달랐다는 것이 보르헤스의 말입니다. "레예스는 우리에게 작은 세계를 소개하고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만든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영화 끝에 기막힌 반전이 숨겨진 영화가 한때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다가 금세 사그라든 것이 떠올랐습니다. 좋은 책과 영화는 기막힌 반전, 스포일러와 무관하게 접할 때마다 새로운 것이 아닐까 합니다. 좋은 책은 꾹 참고 끝까지 읽고 나서야 좋은 이유를 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읽고 있는 페이지에서 좋은 점을 꼭 하나는 꼽을 수 있는 책이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좋다'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요.) 한편, 이전에 했던 모임에서 제발트의 ⟪전원에서 머문 날들⟫를 읽으면서, 잠시 애넥도트의 한 사례를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달력 이야기꾼 요한 페터 헤벨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참고로 2010년대 음악의 명반 계열에 오른 ESENS의 앨범 제목도 애넥도트입니다.
“‘일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적어도 우리를 즐겁게 만든다. 우리로 하여금 잠시 동안이라도 살도록 도와주고 망각하도록 도와준다. 이보다 큰 자비가 있는가? 이는 식물의 꽃과 같아서, 중요한 미덕인 손으로 잘라서 가슴에 꽂고 다닐 수 있는 따뜻하고 가시적이며 조화로운 조합이다. 우리에게 풍차가 제공하는 밀가루와 추억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66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세르반테스의 소설적 행동] 먼저, 보르헤스는 글에서 돈키호테를 바라보는 기존의 두 관점에 내재한 오류를 비판합니다. 한 가지 오류는 ⟪돈키호테⟫를 당시 유행하던 기사 소설에 대한 패러디로 보는 관점입니다. 나머지 한 가지 오류는 ⟪돈키호테⟫를 합리주의과 이상주의의 대립으로 읽는 겁니다. 첫 번째 오류에 대응하여, 보르헤스는 일반적인 패러디나 알레고리가 진정한 예술의 표현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패러디는 다른 것의 이면에 지나지 않고, 패러디가 있으려면 원전이 필요하다"(277쪽)고 그 이유를 듭니다. 그러나 ⟪돈키호테⟫에는 이러한 패러디의 결핍이 없다는 것이 보르헤스의 주장입니다. 이런 생각을 확장하면, 오늘날 우리는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라는 아주 흥미로운 단편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두 가지 오류는 훗날 밀란 쿤데라가 ⟪소설의 기술⟫에서 지적한 바와 동일합니다. 쿤데라는 소설의 세계란 기본적으로 애매성과 불확실성으로 이해해야 하며, 거기서 하나의 절대 진리를 뽑아내려는 모든 시도는 무용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아래 인용구를 참고하세요. 나아가 보르헤스는 ⟪돈키호테⟫에게서 유일한 고독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프로메테우스가 마지막 순간에 세상의 동정을 얻고, 햄릿이 독백으로 사람들을 지적으로 설득하고, 라스콜리니코프를 둘러싼 모든 순간이 소설화되는 반면,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가 스스로 미쳤다고 고백하게 만들고 나서 죽게 함으로써 침묵시켰다는 겁니다. 보르헤스는 그것을 성인들이 황홀경에 빠지는 명상, 그것의 고요함이라고 표현합니다. "돈키호테는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동정과 눈물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바쳤다. 말하자면 죽었다." 마지막으로, 보르헤스는 돈키호테가 산초 판자에게 충고하는 내용보다 충고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돈키호테의 '질투'를 읽으며, 그것이야말로 영웅적이거나 반영웅적인 캐릭터를 넘어선 '정직함'을 담보한다는 겁니다. 이른바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의 입을 빌려, 세르반테스 자신의 진실을 직접 폭로하거나 증언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다만 뛰어난 소설적 캐릭터를, 정직한 인물을 창조해낸 겁니다. 저는 이렇게 읽었습니다.
픽션들'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권. 기호학, 해체주의, 후기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20세기 주요 현대 사상을 견인한 선구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대표작. 1941년 발표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과 1944년 발표한 '기교들'에 수록된 열일곱 편의 단편 소설을 모은 소설집으로, 일생 동안 단 한 편의 장편 소설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단편 전문 작가 보르헤스의 문학적 정수를 보여 준다.
소설의 기술쿤데라의 에세이들과 대담, 그리고 연설문들을 엮은 작품. 책에 수록된 글들은 '여러 특정한 정황에서 쓰였지만 언젠가는 소설의 기술에 대한 생각들이 결실을 이루게 될 한 권의 평론집으로 묶일 수 있게 되리라는 생각'에 따라 구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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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세르반테스의 소설적 행동] 먼저, 보르헤스는 글에서 돈키호테를 바라보는 기존의 두 관점에 내재한 오류를 비판합니다. 한 가지 오류는 ⟪돈키호테⟫를 당시 유행하던 기사 소설에 대한 패러디로 보는 관점입니다. 나머지 한 가지 오류는 ⟪돈키호테⟫를 합리주의과 이상주의의 대립으로 읽는 겁니다. 첫 번째 오류에 대응하여, 보르헤스는 일반적인 패러디나 알레고리가 진정한 예술의 표현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패러디는 다른 것의 이면에 지나지 않고, 패러디가 있으려면 원전이 필요하다"(277쪽)고 그 이유를 듭니다. 그러나 ⟪돈키호테⟫에는 이러한 패러디의 결핍이 없다는 것이 보르헤스의 주장입니다. 이런 생각을 확장하면, 오늘날 우리는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라는 아주 흥미로운 단편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두 가지 오류는 훗날 밀란 쿤데라가 ⟪소설의 기술⟫에서 지적한 바와 동일합니다. 쿤데라는 소설의 세계란 기본적으로 애매성과 불확실성으로 이해해야 하며, 거기서 하나의 절대 진리를 뽑아내려는 모든 시도는 무용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아래 인용구를 참고하세요. 나아가 보르헤스는 ⟪돈키호테⟫에게서 유일한 고독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프로메테우스가 마지막 순간에 세상의 동정을 얻고, 햄릿이 독백으로 사람들을 지적으로 설득하고, 라스콜리니코프를 둘러싼 모든 순간이 소설화되는 반면,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가 스스로 미쳤다고 고백하게 만들고 나서 죽게 함으로써 침묵시켰다는 겁니다. 보르헤스는 그것을 성인들이 황홀경에 빠지는 명상, 그것의 고요함이라고 표현합니다. "돈키호테는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동정과 눈물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바쳤다. 말하자면 죽었다." 마지막으로, 보르헤스는 돈키호테가 산초 판자에게 충고하는 내용보다 충고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돈키호테의 '질투'를 읽으며, 그것이야말로 영웅적이거나 반영웅적인 캐릭터를 넘어선 '정직함'을 담보한다는 겁니다. 이른바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의 입을 빌려, 세르반테스 자신의 진실을 직접 폭로하거나 증언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다만 뛰어난 소설적 캐릭터를, 정직한 인물을 창조해낸 겁니다. 저는 이렇게 읽었습니다.
세르반테스의 위대한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주제에 관해서는 수많은 글들이 있다. 그 가운데에는 이 소설에서 몽롱한 이상주의에 대한 돈키호테의 합리주의적 비판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글도 있다. 또 다른 글들은 이 소설에서 바로 이상주의 자체의 환호를 보기도 한다. 이러한 해석들은 소설의 근본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정신적인 편향을 찾아보려는 것이기에 모두 다 낡아 빠졌다.
소설의 기술 16쪽, 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
russist님의 대화: [세르반테스의 소설적 행동] 먼저, 보르헤스는 글에서 돈키호테를 바라보는 기존의 두 관점에 내재한 오류를 비판합니다. 한 가지 오류는 ⟪돈키호테⟫를 당시 유행하던 기사 소설에 대한 패러디로 보는 관점입니다. 나머지 한 가지 오류는 ⟪돈키호테⟫를 합리주의과 이상주의의 대립으로 읽는 겁니다. 첫 번째 오류에 대응하여, 보르헤스는 일반적인 패러디나 알레고리가 진정한 예술의 표현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패러디는 다른 것의 이면에 지나지 않고, 패러디가 있으려면 원전이 필요하다"(277쪽)고 그 이유를 듭니다. 그러나 ⟪돈키호테⟫에는 이러한 패러디의 결핍이 없다는 것이 보르헤스의 주장입니다. 이런 생각을 확장하면, 오늘날 우리는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라는 아주 흥미로운 단편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두 가지 오류는 훗날 밀란 쿤데라가 ⟪소설의 기술⟫에서 지적한 바와 동일합니다. 쿤데라는 소설의 세계란 기본적으로 애매성과 불확실성으로 이해해야 하며, 거기서 하나의 절대 진리를 뽑아내려는 모든 시도는 무용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아래 인용구를 참고하세요. 나아가 보르헤스는 ⟪돈키호테⟫에게서 유일한 고독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프로메테우스가 마지막 순간에 세상의 동정을 얻고, 햄릿이 독백으로 사람들을 지적으로 설득하고, 라스콜리니코프를 둘러싼 모든 순간이 소설화되는 반면,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가 스스로 미쳤다고 고백하게 만들고 나서 죽게 함으로써 침묵시켰다는 겁니다. 보르헤스는 그것을 성인들이 황홀경에 빠지는 명상, 그것의 고요함이라고 표현합니다. "돈키호테는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동정과 눈물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바쳤다. 말하자면 죽었다." 마지막으로, 보르헤스는 돈키호테가 산초 판자에게 충고하는 내용보다 충고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돈키호테의 '질투'를 읽으며, 그것이야말로 영웅적이거나 반영웅적인 캐릭터를 넘어선 '정직함'을 담보한다는 겁니다. 이른바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의 입을 빌려, 세르반테스 자신의 진실을 직접 폭로하거나 증언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다만 뛰어난 소설적 캐릭터를, 정직한 인물을 창조해낸 겁니다. 저는 이렇게 읽었습니다.
세르반테스는 여기서 우리로 하여금 돈키호테의 정직한 캐릭터가 질투를 느낀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돈키호테가 들판에 쓰러져 있고 돼지 떼가 그 위로 지나가는 험한 장면보다 질투에 대한 이 작은 암시가 오히려 더 가증스럽지 않은가? 나는 모욕과 과잉이, 자신의 영웅이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세르반테스의 믿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직 세르반테스만 그런 유의 용기를 보여준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8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두 길모퉁이] 이전 글들과 굉장히 톤이 다릅니다. 이전의 글이 외형적으로는 논증이나 비평 구조를 띠고 있다면, 이 글은 보르헤스가 느끼는 길모퉁이에 대한 에세이처럼 읽힙니다. 묘사들이 참 아름답기도 하고, 보르헤스의 문학이 향수하는 '아르헨티나의 길모퉁이'에 대한 인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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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두 길모퉁이] 이전 글들과 굉장히 톤이 다릅니다. 이전의 글이 외형적으로는 논증이나 비평 구조를 띠고 있다면, 이 글은 보르헤스가 느끼는 길모퉁이에 대한 에세이처럼 읽힙니다. 묘사들이 참 아름답기도 하고, 보르헤스의 문학이 향수하는 '아르헨티나의 길모퉁이'에 대한 인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내가 유년 시절을 보낸 그 근처, 단어의 의미로는 모두 가졌지만 실제로는 조금만 소유한, 이웃인 동시에 신화적인 경계를 뜻한다. 아는 곳의 반대편, 그 끝에서 두 번째 거리, 우리 집의 감춰져 있는 시멘트나 우리 몸의 보이지 않는 뼈대처럼 실제로는 잊힌 거리들이다. 산책의 여정은 어느 골목 길모퉁이에 나를 남겨 두었다. 나는 고요히 생각에 잠긴 채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복잡하지 않은 풍경이 피로감 때문에 더 단순해 보이는 것 같았다. 전형적인 풍경이 오히려 그것을 비현실적으로 만들었다. 낮은 집들이 늘어선 거리는 처음에는 가난해 보이지만 나중에는 행운이 깃든 것처럼 보인다. 가장 가난한 것이 가장 아름다웠다. 어떤 집도 거리에 활력을 불어넣지 않았다. 팔각정 위의 무화과나무가 드리워 있고, 대문은 끝없는 밤과 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산책로는 가파르게 뻗어 있었다. 길은 진흙, 아직 정복되지 않은 아메리카의 진흙으로 되어 있다. 동시의 바람은 이미 좁은 길을 지나 말도나도를 향해 조금씩 사그라져 갔다. 탁하고 혼란스러운 지면 위의 분홍빛 담벼락은 달빛을 담은 것이 아니라 내면의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분홍빛보다 다정다감함을 잘 표현하는 것은 없으리라.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8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에두아르도 윌데] 에두아르도 윌데(Eduardo Wilde, 1844-1913)는 아르헨티나의 의사이자 정치가이자 작가로, 아르헨티나 현대화 세대의 저명한 지식인이었습니다. 생전 다양한 이력을 가졌던 에두아르도 윌데가 쓴 작품을 보르헤스는 이렇게 평가합니다. "인생에서 모험이라고 해 봐야 작품 속 모험이 전부인, 중심에서 살짝 비켜난 거친 작가들이 있는가 하면 치열한 삶의 주인으로, 작품이 그들의 다사다난한 삶의 여정이자 순간을 반영하는 작가들도 있다. 윌데가 그랬다."(289쪽) 이 글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에두아르도 윌데를 평가한 리카르도 로하스의 의견(290쪽)을 보르헤스가 다시 재평가하는 대목입니다. 리카르도 로하스가 윌데의 작품을 평가하면서 '기법'과 '작가의 인격'을 인위적으로 구분했던 것을 두고 보르헤스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나는 작가의 기법에 어떤 고유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인간의 심리를 고발하지 않는 작가의 기법을 대체 누가 좋아한단 말인가?” 나아가, 한 언어의 특수한 통사론이 사고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그럴싸한 주장이 사실로 호도된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여담입니다만 이걸 읽고 있으면, 예전에 한 기자가 '한국어 문장은 자주 주어가 생략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주체성이 없다'고 비판했던 어이없는 사건이 떠오릅니다. 비슷하게, 한때 정치권에서 '주어 없음'이 법기술자의 미꾸라지 같은 법해석으로 호도되던 것도 떠오르고요. 오히려 보르헤스의 말대로, 통사론이 우리 사고를 지배한다기보다는, 통사론이 사후적으로 안일하고 부패한 정치 의식을 정당화해주는 경우가 더 많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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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에두아르도 윌데] 에두아르도 윌데(Eduardo Wilde, 1844-1913)는 아르헨티나의 의사이자 정치가이자 작가로, 아르헨티나 현대화 세대의 저명한 지식인이었습니다. 생전 다양한 이력을 가졌던 에두아르도 윌데가 쓴 작품을 보르헤스는 이렇게 평가합니다. "인생에서 모험이라고 해 봐야 작품 속 모험이 전부인, 중심에서 살짝 비켜난 거친 작가들이 있는가 하면 치열한 삶의 주인으로, 작품이 그들의 다사다난한 삶의 여정이자 순간을 반영하는 작가들도 있다. 윌데가 그랬다."(289쪽) 이 글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에두아르도 윌데를 평가한 리카르도 로하스의 의견(290쪽)을 보르헤스가 다시 재평가하는 대목입니다. 리카르도 로하스가 윌데의 작품을 평가하면서 '기법'과 '작가의 인격'을 인위적으로 구분했던 것을 두고 보르헤스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나는 작가의 기법에 어떤 고유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인간의 심리를 고발하지 않는 작가의 기법을 대체 누가 좋아한단 말인가?” 나아가, 한 언어의 특수한 통사론이 사고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그럴싸한 주장이 사실로 호도된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여담입니다만 이걸 읽고 있으면, 예전에 한 기자가 '한국어 문장은 자주 주어가 생략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주체성이 없다'고 비판했던 어이없는 사건이 떠오릅니다. 비슷하게, 한때 정치권에서 '주어 없음'이 법기술자의 미꾸라지 같은 법해석으로 호도되던 것도 떠오르고요. 오히려 보르헤스의 말대로, 통사론이 우리 사고를 지배한다기보다는, 통사론이 사후적으로 안일하고 부패한 정치 의식을 정당화해주는 경우가 더 많을 겁니다.
누군가가 우리의 목소리나 발음, 말투에 과하게 집중한다면 정작 우리가 하는 말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다. 온전한 효율성과 온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이 두 가지가 모든 형식을 완벽히 구성할 것이다. 감정이나 사고를 어법과 짝짓는 것, 내용과 형태를 동일시하는 것은 모두가 추천하지만 아무도 실행하지 않는 가치이다. 어떻게 실행하라는 것인가? 의식의 현상과 언어의 통사론 사이에 미리 정해지고 항상 지켜지는 평등한 관계가 존재하기나 하는가?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영국인들은 갈색 말을 반드시 ‘a brown hores’라고 말하며 우리는 의무적으로 형용사를 뒤에 둔다. 이런 관습에 어떤 영적 의미가 있는가? 영국인들은 (항상) 갈색 얼룩을 먼저 본 후에 그것이 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우리는 (항상) 그것이 말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아차린 후 털의 색을 정한다고 인정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 아닌가?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90-29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표제작입니다. 말 그대로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아르헨티나에서 스페인어로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적는 그 특수함에 대한 글입니다. 먼저,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의 언어를 바라보는 두 가지 오류에 대해서 지적하면서 글을 엽니다. "한쪽은 악인의 말투를 흉내 내고, 다른 쪽은 사전이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문제적 스페인어를 흉내 낸다."⏤304쪽. 아르헨티나의 언어는 변두리나 교외의 사투리를 뜻하는 아라발레로(arrabalrero)에서 탄생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스페인어의 '순수한 완벽함'을 믿고서 변화 자체를 부정하는 순수 언어주의자들의 그것도 아닙니다. 즉, 아르헨티나의 언어는 아르헨티나의 '지역색'으로 환원되지도, 이베리아 반도 스페인의 '고유함'으로 환원되지 않는단 겁니다. 전자의 오류를 간략히 짚어보면, 아라발레로는 소통되고 교환되기보다는 소수의 무리짓기에 봉사하는 언어, 기호로 전락한 언어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1부에서 다룬 ⟨아라발레로에 대한 비판⟩에서 이미 한번 다룬 적 있습니다. 후자도 오류이긴 매한가지입니다. 스페인어 순수주의자들은 스페인어 사전의 풍요로움을 언급하지만, 그것이 문학적 풍요로움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르헤스에 따르면 "단어 수의 우월성은 쓸모없는 비축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1부에서 다룬 ⟨끝없는 언어⟩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성은 어떤 억압이나 구경거리 이상의 무엇이어야 한다. 소명 의식이어야 한다."⏤306쪽. 나아가, 보르헤스는 유럽의 남서쪽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스페인의 스페인어"와 아메리카 대륙의 "아르헨티나의 스페인어"의 차이를 살핍니다. 거기에 건너가지 못할 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둘은 미묘하게 뉘앙스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같은 언어라고 해서 어느 시공간 속에서나 다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언어는 그 언어가 속한 시공간과 조응한 결과물이고, 그것은 아르헨티나의 스페인어 즉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도 마찬가집니다. 보르헤스는 "어조의 다른 분위기, 특정 단어에 우리가 부여하는 모순적이거나 애정이 담긴 가치, 동일하지 않은 온도"가 있다고 말합니다. 약간 다른 의미의 청출어람, 쪽빛에서 나왔지만 쪽빛과는 또 다른 빛깔을 입게 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잘 쓰인 문학 작품은 고유한 뉘앙스를 포착해내기에 성공한 작품이라고 봅니다. 스페인어를 쓰는 한 토론은 스페인적일 수 있지만 자신들의 시와 유머는 아르헨티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내용 역시 1부의 ⟨토착화된 민요⟩에서 한번 다룬 바 있습니다. 곱씹어 읽어 보면 1부와 2부를 아우르는 멋진 글, 과연 표제작이라고 할 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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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X그믐클래식] 32. 달밤에 낭독, <일리아스>
2월의 고전
[그믐클래식 2025] 2월, 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이달의 고전] 2월 『제5도살장』 함께 읽어요[이달의 고전] 2월 『양철북』 함께 읽어요[그믐밤X그믐클래식] 32. 달밤에 낭독, <일리아스>
책도 벽돌, 독자들의 대화도 벽돌!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19. <호라이즌>[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18. <행동>[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17. <노이즈>[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16. <마오주의>
작품 말고 작가가 더 궁금할 때!
[그믐북클럽Xsam] 24. <작가란 무엇인가> 읽고 답해요[책증정] 페미니즘의 창시자, 프랑켄슈타인의 창조자 《메리와 메리》 함께 읽어요![그믐밤] 28. 달밤에 낭독, <우리는 언제나 희망하고 있지 않나요>[Re:Fresh] 4.『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다시 읽어요.
illef의 깊이 읽기
AI 교과서(AIDT)우리가 운명이라고 불렀던 것들왕의 목을 친 남자 - 사형집행인 샤를 앙리 상송의 이야기
매달 만나는 젊은 작가의 달달한 로맨스 🧁
[북다] 《정원에 대하여(달달북다08)》 함께 읽어요! (+책 나눔 이벤트)[북다] 《어느 순간을 가리키자면(달달북다07)》 함께 읽어요! (1/23 라이브 채팅!)[북다] 《지나가는 것들(달달북다06)》 함께 읽어요! (책 나눔 이벤트)[북다] 《빛처럼 비지처럼(달달북다05)》 함께 읽어요! (+책 나눔 이벤트)[북다] 《횡단보도에서 수호천사를 만나 사랑에 빠진 이야기(달달북다04)》
📩 닫히지 않는 편지 가게 글월
편지가게 글월 / 백승연 지음 (2024 런던 국제 도서전 화제작)[책 증정] 텍스티와 함께 『편지 가게 글월』 함께 읽어요![편지 가게 글월] 서로 꿈을 이야기하며 안부를 전하는 글쓰기를 하고자 합니다.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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