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보르헤스 읽기]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3부 같이 읽어요

D-29
화제로 지정된 대화
[또다시 은유] '은유'에 대해서 달리 분석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 뭣보다, 시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라고 봅니다. 그리고 다르게 생각하려고 하다 보면 다르게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하고, 그러다 보면 결과적으로 은유를 데려오게 된다고 봅니다. 은유는 새로운 사고방식의 결과물임과 동시에 새롭게 사고하는 수단인 것입니다. 하지만 시 자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며, 때때로 그 위험성도 있습니다. (잠시 샛길로 새면, 한 시대를 풍미한 은유에는 그 시대의 한계가 녹아 있기도 합니다. "국가 수뇌부"라는 표현이 군주를 중심으로 신체라는 국가를 일사분란하게 조종하는 이미지를 은연중에 그려내고, "사회의 암덩어리" 같은 은유에 암환자를 향한 은근한 멸시와 그 방종한 생활을 비난하는 함의가 담겨있는 것을 보면 그러합니다.) 반복하지만 은유는 달리 생각하기입니다. 따라서 은유로써 달리 생각하지 못하고, 기지를 기계적으로 재생산할 뿐이라면, 그 은유는 (혹은 그 은유에 대한 생각은) 쇄신되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보르헤스가 211쪽 괄호 속에 겸손하게 숨겨놓은 문장은 빛납니다. "나는 진심으로 은유는 시를 지을 때보다 오히려 시를 지은 후에, 문학적이고 이미 잘 꾸려진 시를 원할 때 필요하다고 본다. 은유로 인해 뒤섞인 어휘로 구성된 시는 제약을 가하고,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실패하게 만들기도 한다." 은유를 모르고서 시를 읽을 수는 없지만, 시의 모든 것을 은유로 보면 우리는 시를 즐기지 못합니다. 시는 수수께끼가 아니고 은유는 수수께끼의 힌트 따위가 아닙니다. 시를 수수께끼로, 은유를 수수께끼의 힌트로 좁게 보기 시작하면, 시는 낱말 맞추기처럼 시시하고 피곤한 것이 되며, 시인은 살인 현장을 밀실로 만들려는 범죄 추리극의 시시한 범인이 되고 맙니다. "동굴(grata)에서 파생되었다는 이유로 ‘그로테스크’라는 단어가 은유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10이라는 숫자에 있는 0이라는 상징으로 인해 ‘절대 무(無)’의 개념이 개입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212쪽. 글의 말미에서, 보르헤스는 은유가 장식이자 호화로움이라고 말합니다. '장식'과 '호화로움'이라는 단어가 오해될 뉘앙스를 갖고 있음에도 보르헤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결국 장식도 '다르게 보이기(말하기)' 위함이니까요. 이때 '장식'이란, 내면이 텅 비어 있음을 가리는 겉치레를 넘어서는 개념입니다. 때로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줄 뿐 아니라, 중한 것과 중하지 않은 것 사이를 일순 반전시킬 힘을 지닙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저는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피처럼 붉은 체리 한 알을 생각했습니다. 그 체리 한 알은 케이크 시트와 그 위에 덧발릴 생크림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장식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생크림케이크의 맛과도 무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없으면 생크림케이크는 이미지적으로 너무 둔탁하거나 옹졸해 보일 것 같습니다. 그 점에서 새하얀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붉은 체리는 사소하지만 중한 것입니다. 물리적으로는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지만, 이미지적으로는 생크림케이크가 작은 체리 한 알 위에 올라타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보르헤스가 쓴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은 너무 멋집니다. 저에게는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핏빛 체리를 연상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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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글로 쓴 행복] 말 그대로, 보르헤스가 생각하는 "글로 쓴 행복"에 부합하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문학'과 '행복'과 '종교'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풀어내고 있습니다. 먼저 보르헤스는 글로써 행복을 묘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얘기를 꺼냅니다. 생각보다 현실에서 행복을 잘 묘사한 글은 보기 드뭅니다. 역사 속에서 많은 작가가 행복을 대변하는 천국이나 유토피아를 묘사하려고 했습니다만, 결과적으로든 다들 실패했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만 봐도 그러합니다. 도서관에서도 단테의 신곡 중 ⟪천국편⟫이 비교적 덜 대출된다고 하죠. 하지만 그럼에도 보르헤스는 "행운이나 행복한 운명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데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는 천국이나 유토피아로 치닫지 않는 한에서의 행복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프라이 루이스를 논하면서 보르헤스는 그가 행복한 상태를 묘사하려고 했지만 왜 실패했는지를 짚습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생각하는 "글로 쓴 행복"에 부합하는 사례를 찾아내는데요, 바로 아르날도스 백작의 로망세입니다. 보르헤스는 시의 유쾌함을 두고 이렇게 씁니다. “(추측컨대) 그 유쾌함은 시 초반부의 행복한 장면과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는 행복이 사랑이나 보물을 찾는 모험에 있지 않고 작은 배에서 일어나는 것에 불과하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는 데 있다. 인간이 어느 아침 노래하는 뱃사람과 돛대에 내려앉은 새를 보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끼던 시대와 시간들은 축복받은 것이다.” 글을 읽고 있으면, 지향하는 바나 풀어내는 과정은 좀 다르지만 조지 오웰이 떠오릅니다. 그는 ⟨사회주의자는 행복할 수 있는가?⟩에서 비슷하게 주장한 바 있습니다.
저는 제목을 보고 엉뚱하게 체스터튼이 바로 생각났는데, 보르헤스가 '그는 행복을 선택했다. 적어도 그런 척했다'고 평했던게 늘 인상적이었거든요. 두 사람 모두 세상을 하나의 이야기처럼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긍정하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체스터튼은 정작 읽어보면 오늘날은 물론이고 당대에도 꽤나 반시대적이고 호전적으로 느껴졌을 글들을 썼더라구요. 인용해주신 조지 오웰의 글까지 읽으니 여러 생각이 드네요. 여하간, 정작 체스터튼을 읽고 나니, 실은 보르헤스 쪽이 더 행복했던거 아닌가? 체스터튼(이나 조지 오웰)이 세상에 '문학'을 실현시키기 위해 분투했다면 보르헤스는 도서관에 앉아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선과 악을, 세상 자체를 문학으로 만들고 있는거 아닌가? 같은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시대와 환경을 고려하면 '수행적일 수 없었던 보르헤스가 불행했다'고 생각하는게 맞을거고, '보르헤스 작품에 사실 더 무시무시한 뭔가가 있다'는 생각도 맞을 것 같구요. 이 글에서 보르헤스는 '근대적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행복한 시대가 있었고, 문학으로 표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낸다면, 체스터튼은 '그게 행복의 조건이라면 당연히 세상에서 시간을 없애야 한다!'같은 순진한 소리를 부끄러움없이 할 것 같고, 조지 오웰은 오늘날 타락하게 된 단어(행복) 대신 새로이 찾은 단어(인류애)를 소개하는데, 사실 이건 다른 두 사람이 말하는 행복과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russist님의 대화: [단어의 탐구] 이 글이 보르헤스가 스물아홉살 되던 해에 출간된 책에 담겨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그 방대한 독서 편력과 인용구를 오가는 솜씨가 대단합니다. 앞서 다룬 1부의 ⟨분석 연습⟩에서처럼 ⟪돈키호테⟫ 속의 문장 하나만 가지고도 사고를 이렇게까지 확장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문법적으로' ⟪돈키호테⟫의 첫 문장("En un lugar de la Manch, de cuyo nombre no quiero acordarme,")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어떤 심리적 과정을 거쳐 한 문장을 이해하는"지를 탐구합니다. 우선 보르헤스는 두 가지 입장을 제시합니다. 한 가지는 안드레스 베요를 위시한 문법학자들과 대중적인 사전이 뒷받침하는 주장으로, "모든 단어가 하나의 기호이고 독자적 의도를 나타낸다"(181쪽)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선 첫 문장은 열두 개의 생각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죠.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분절해서, 그 독자적인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소위 크로체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에 반박합니다. "동일한 개념이 다른 개수의 단어로 나타난다는 점"을 근거로, "단어는 언어의 실재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이들은 더 나아가서 "유일한 언어적 실재는 문장"(183쪽)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르헤스는 어느 쪽에도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다만 슈필러의 관점에서 "문장을 표현하는 단위가 되는 작은 통사적 집합으로 분리"(184쪽)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합니다. 이는 사고의 단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 이르러서 언어간의 차이, 즉 영어처럼 형용사가 명사 앞에 오느냐, 스페인어처럼 형용사가 명사 뒤에 오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치 않은 것이 됩니다. 실제로 오늘날 연구도 우리가 어떤 텍스트를 읽을 때, 단어순으로 기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개인 간의 편차는 있지만 의미 단위로 끊어서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텍스트에 익숙지 않은 아이들이나 난독증 환자는 이 의미 단위가 비교적 좁게 인식된다고 합니다.) 독서하는 뇌를 연구한 메리언 울프의 책을 보면 잘 나옵니다. 울프는 아이들이 단어를 일종의 '시각적 덩어리'로 인식하면서 텍스트를 읽어가는 능력을 숙달해간다고 말합니다. 예컨대, ‘beheaded(참수당한)’가 ‘be(be동사)+head(‘머리’라는 명사)+ed(과거분사형)’라는 것을 빨리 알아차릴수록 보다 유창하게 단어를 식별하게 되고, 이런 단어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면서 독서를 해 나간다는 것이죠. 나아가 어떤 글자를 읽을 때, 우리는 단순히 좌에서 우로 널브러져 있는 텍스트를 추수하듯이 읽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안구가 고정되는 와중에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안구가 눈이 아주 살짝 뒤로 돌아가서 과거 정보를 회수하기도 합니다. 지금 보고 있는 단어를 봄과 동시에 약간의 예측도 함께 일어납니다. 이를 우치다 다쓰루 선생은 '멀리 있는 표적을 활로 쏘는 식으로 말을 줄 잇는다'고 표현합니다. 일종의 기지 속에서 미지를 예감하는 것입니다. 보르헤스는 말미에서, 문법에 신경을 쓰면서도 거기에 종속되지 말고 우연성과 순간성에 몸을 맡기기를 권하면서 이렇게 씁니다. "(문법의 가능한 도움을 받아) 이렇듯 그저 단순한 변이 형태에서 자율적 표현으로 격상될 수 있다. (조금밖에 없는) 본래의 뜻보다는 변형과 우연성과 순간적인 재치가 언어, 즉 (굴욕적이게도) 사고를 풍요롭게 한다."(191쪽)
"그리고 (살짝 비꼬는 실망감을 가지고) 언어의 가장 쉬운 분류법이 문장을 능동태, 수동태, 현재 분사, 비인칭 등으로 나누는 기술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russist님의 대화: [알마푸에르테의 위치] 저도 처음에 알마푸에르테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당황했습니다. 아마 각주로 설명해줬다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다른 인명은 각주가 있는데, 정작 중요한 인물에 대한 각주가 없는 것은 편집상 아쉬운 점입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알마푸에르테는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라플라타 지역에서 활동한 시인입니다. 본문에도 나오듯 본명은 페드로 보니파시오 팔라시오스(Pedro Bonifacio Palacios)입니다. 청년기에는 화가로 활동했지만, 여러 이유로 유럽행이 좌절되자 진로를 바꿔 글쓰기와 교육에 전념했다고 알려집니다. 시인이자 교사였고, 기자로 활동한 적도 있습니다. 보르헤스처럼 사서와 번역을 겸한 적도 있고요. 이른 시기부터 시를 썼던 것으로 보이나, 책들이 주로 출간된 시기는 20세기 초입니다. 그는 무수한 필명을 갖고 있었는데요, '알마푸에르테'는 그중 가장 유명한 이름입니다. ⟨나아가라!(¡Piú avanti!)⟩라는 시를 보면 대충 어떤 시를 쓰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Claude로 번역을 맡겨봤습니다. 포기하지 마라, 패배했더라도, 노예처럼 느끼지 마라, 노예일지라도; 네 자신을 용맹하다고 생각하라, 공포로 떨면서도, 맹렬히 돌진하라, 이미 깊이 다쳤어도. 지녀라, 녹슨 못의 그 끈기를 낡고 보잘것없어도, 다시금 못으로 되돌아가는; 안 된다, 공작새의 비겁한 대담함처럼 작은 소리에도 깃털이 움츠러들어서는. 나아가라, 신처럼 결코 울지 않는; 혹은 결코 기도하지 않는 루시퍼처럼; 혹은 위대함을 지닌 참나무 숲처럼 필요로 하나 구걸하지 않는 물을······ 하여, 물어뜯고 외치게 하라, 복수하듯이, 먼지 속을 구르는, 너의 머리를!
감사합니다. 내용 이해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russist님의 대화: [또다시 은유] '은유'에 대해서 달리 분석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 뭣보다, 시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라고 봅니다. 그리고 다르게 생각하려고 하다 보면 다르게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하고, 그러다 보면 결과적으로 은유를 데려오게 된다고 봅니다. 은유는 새로운 사고방식의 결과물임과 동시에 새롭게 사고하는 수단인 것입니다. 하지만 시 자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며, 때때로 그 위험성도 있습니다. (잠시 샛길로 새면, 한 시대를 풍미한 은유에는 그 시대의 한계가 녹아 있기도 합니다. "국가 수뇌부"라는 표현이 군주를 중심으로 신체라는 국가를 일사분란하게 조종하는 이미지를 은연중에 그려내고, "사회의 암덩어리" 같은 은유에 암환자를 향한 은근한 멸시와 그 방종한 생활을 비난하는 함의가 담겨있는 것을 보면 그러합니다.) 반복하지만 은유는 달리 생각하기입니다. 따라서 은유로써 달리 생각하지 못하고, 기지를 기계적으로 재생산할 뿐이라면, 그 은유는 (혹은 그 은유에 대한 생각은) 쇄신되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보르헤스가 211쪽 괄호 속에 겸손하게 숨겨놓은 문장은 빛납니다. "나는 진심으로 은유는 시를 지을 때보다 오히려 시를 지은 후에, 문학적이고 이미 잘 꾸려진 시를 원할 때 필요하다고 본다. 은유로 인해 뒤섞인 어휘로 구성된 시는 제약을 가하고,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실패하게 만들기도 한다." 은유를 모르고서 시를 읽을 수는 없지만, 시의 모든 것을 은유로 보면 우리는 시를 즐기지 못합니다. 시는 수수께끼가 아니고 은유는 수수께끼의 힌트 따위가 아닙니다. 시를 수수께끼로, 은유를 수수께끼의 힌트로 좁게 보기 시작하면, 시는 낱말 맞추기처럼 시시하고 피곤한 것이 되며, 시인은 살인 현장을 밀실로 만들려는 범죄 추리극의 시시한 범인이 되고 맙니다. "동굴(grata)에서 파생되었다는 이유로 ‘그로테스크’라는 단어가 은유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10이라는 숫자에 있는 0이라는 상징으로 인해 ‘절대 무(無)’의 개념이 개입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212쪽. 글의 말미에서, 보르헤스는 은유가 장식이자 호화로움이라고 말합니다. '장식'과 '호화로움'이라는 단어가 오해될 뉘앙스를 갖고 있음에도 보르헤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결국 장식도 '다르게 보이기(말하기)' 위함이니까요. 이때 '장식'이란, 내면이 텅 비어 있음을 가리는 겉치레를 넘어서는 개념입니다. 때로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줄 뿐 아니라, 중한 것과 중하지 않은 것 사이를 일순 반전시킬 힘을 지닙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저는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피처럼 붉은 체리 한 알을 생각했습니다. 그 체리 한 알은 케이크 시트와 그 위에 덧발릴 생크림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장식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생크림케이크의 맛과도 무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없으면 생크림케이크는 이미지적으로 너무 둔탁하거나 옹졸해 보일 것 같습니다. 그 점에서 새하얀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붉은 체리는 사소하지만 중한 것입니다. 물리적으로는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지만, 이미지적으로는 생크림케이크가 작은 체리 한 알 위에 올라타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보르헤스가 쓴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은 너무 멋집니다. 저에게는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핏빛 체리를 연상케 합니다.
"일반적으로 은유의 발견은 감탄스럽다. 그러나 그 발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담화 속에 은유를 어디에 둘지 자리를 찾는 것과, 은유를 정의하기 위해 선택하는 단어들이다."
russist님의 대화: [또다시 은유] '은유'에 대해서 달리 분석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 뭣보다, 시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라고 봅니다. 그리고 다르게 생각하려고 하다 보면 다르게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하고, 그러다 보면 결과적으로 은유를 데려오게 된다고 봅니다. 은유는 새로운 사고방식의 결과물임과 동시에 새롭게 사고하는 수단인 것입니다. 하지만 시 자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며, 때때로 그 위험성도 있습니다. (잠시 샛길로 새면, 한 시대를 풍미한 은유에는 그 시대의 한계가 녹아 있기도 합니다. "국가 수뇌부"라는 표현이 군주를 중심으로 신체라는 국가를 일사분란하게 조종하는 이미지를 은연중에 그려내고, "사회의 암덩어리" 같은 은유에 암환자를 향한 은근한 멸시와 그 방종한 생활을 비난하는 함의가 담겨있는 것을 보면 그러합니다.) 반복하지만 은유는 달리 생각하기입니다. 따라서 은유로써 달리 생각하지 못하고, 기지를 기계적으로 재생산할 뿐이라면, 그 은유는 (혹은 그 은유에 대한 생각은) 쇄신되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보르헤스가 211쪽 괄호 속에 겸손하게 숨겨놓은 문장은 빛납니다. "나는 진심으로 은유는 시를 지을 때보다 오히려 시를 지은 후에, 문학적이고 이미 잘 꾸려진 시를 원할 때 필요하다고 본다. 은유로 인해 뒤섞인 어휘로 구성된 시는 제약을 가하고,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실패하게 만들기도 한다." 은유를 모르고서 시를 읽을 수는 없지만, 시의 모든 것을 은유로 보면 우리는 시를 즐기지 못합니다. 시는 수수께끼가 아니고 은유는 수수께끼의 힌트 따위가 아닙니다. 시를 수수께끼로, 은유를 수수께끼의 힌트로 좁게 보기 시작하면, 시는 낱말 맞추기처럼 시시하고 피곤한 것이 되며, 시인은 살인 현장을 밀실로 만들려는 범죄 추리극의 시시한 범인이 되고 맙니다. "동굴(grata)에서 파생되었다는 이유로 ‘그로테스크’라는 단어가 은유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10이라는 숫자에 있는 0이라는 상징으로 인해 ‘절대 무(無)’의 개념이 개입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212쪽. 글의 말미에서, 보르헤스는 은유가 장식이자 호화로움이라고 말합니다. '장식'과 '호화로움'이라는 단어가 오해될 뉘앙스를 갖고 있음에도 보르헤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결국 장식도 '다르게 보이기(말하기)' 위함이니까요. 이때 '장식'이란, 내면이 텅 비어 있음을 가리는 겉치레를 넘어서는 개념입니다. 때로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줄 뿐 아니라, 중한 것과 중하지 않은 것 사이를 일순 반전시킬 힘을 지닙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저는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피처럼 붉은 체리 한 알을 생각했습니다. 그 체리 한 알은 케이크 시트와 그 위에 덧발릴 생크림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장식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생크림케이크의 맛과도 무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없으면 생크림케이크는 이미지적으로 너무 둔탁하거나 옹졸해 보일 것 같습니다. 그 점에서 새하얀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붉은 체리는 사소하지만 중한 것입니다. 물리적으로는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지만, 이미지적으로는 생크림케이크가 작은 체리 한 알 위에 올라타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보르헤스가 쓴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은 너무 멋집니다. 저에게는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핏빛 체리를 연상케 합니다.
삶이 우리에게 부당한 고통을 주거나 걸맞지 않은 행운을 가져다주면 우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은유법을 사용한다. 우리는 세상보다 잘지 않기를 바라고, 세상만큼 커지기를 원한다. 215쪽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심슨님의 대화: 저는 제목을 보고 엉뚱하게 체스터튼이 바로 생각났는데, 보르헤스가 '그는 행복을 선택했다. 적어도 그런 척했다'고 평했던게 늘 인상적이었거든요. 두 사람 모두 세상을 하나의 이야기처럼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긍정하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체스터튼은 정작 읽어보면 오늘날은 물론이고 당대에도 꽤나 반시대적이고 호전적으로 느껴졌을 글들을 썼더라구요. 인용해주신 조지 오웰의 글까지 읽으니 여러 생각이 드네요. 여하간, 정작 체스터튼을 읽고 나니, 실은 보르헤스 쪽이 더 행복했던거 아닌가? 체스터튼(이나 조지 오웰)이 세상에 '문학'을 실현시키기 위해 분투했다면 보르헤스는 도서관에 앉아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선과 악을, 세상 자체를 문학으로 만들고 있는거 아닌가? 같은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시대와 환경을 고려하면 '수행적일 수 없었던 보르헤스가 불행했다'고 생각하는게 맞을거고, '보르헤스 작품에 사실 더 무시무시한 뭔가가 있다'는 생각도 맞을 것 같구요. 이 글에서 보르헤스는 '근대적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행복한 시대가 있었고, 문학으로 표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낸다면, 체스터튼은 '그게 행복의 조건이라면 당연히 세상에서 시간을 없애야 한다!'같은 순진한 소리를 부끄러움없이 할 것 같고, 조지 오웰은 오늘날 타락하게 된 단어(행복) 대신 새로이 찾은 단어(인류애)를 소개하는데, 사실 이건 다른 두 사람이 말하는 행복과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는 데 저도 동의합니다. 결국 흔히들 말하고 소망하는 것과 달리, 행복이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죠. 저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납니다.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고, 다만 인생을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에 부차적으로 중요할 뿐이라고요.
russist님의 대화: [또다시 은유] '은유'에 대해서 달리 분석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 뭣보다, 시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라고 봅니다. 그리고 다르게 생각하려고 하다 보면 다르게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하고, 그러다 보면 결과적으로 은유를 데려오게 된다고 봅니다. 은유는 새로운 사고방식의 결과물임과 동시에 새롭게 사고하는 수단인 것입니다. 하지만 시 자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며, 때때로 그 위험성도 있습니다. (잠시 샛길로 새면, 한 시대를 풍미한 은유에는 그 시대의 한계가 녹아 있기도 합니다. "국가 수뇌부"라는 표현이 군주를 중심으로 신체라는 국가를 일사분란하게 조종하는 이미지를 은연중에 그려내고, "사회의 암덩어리" 같은 은유에 암환자를 향한 은근한 멸시와 그 방종한 생활을 비난하는 함의가 담겨있는 것을 보면 그러합니다.) 반복하지만 은유는 달리 생각하기입니다. 따라서 은유로써 달리 생각하지 못하고, 기지를 기계적으로 재생산할 뿐이라면, 그 은유는 (혹은 그 은유에 대한 생각은) 쇄신되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보르헤스가 211쪽 괄호 속에 겸손하게 숨겨놓은 문장은 빛납니다. "나는 진심으로 은유는 시를 지을 때보다 오히려 시를 지은 후에, 문학적이고 이미 잘 꾸려진 시를 원할 때 필요하다고 본다. 은유로 인해 뒤섞인 어휘로 구성된 시는 제약을 가하고,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실패하게 만들기도 한다." 은유를 모르고서 시를 읽을 수는 없지만, 시의 모든 것을 은유로 보면 우리는 시를 즐기지 못합니다. 시는 수수께끼가 아니고 은유는 수수께끼의 힌트 따위가 아닙니다. 시를 수수께끼로, 은유를 수수께끼의 힌트로 좁게 보기 시작하면, 시는 낱말 맞추기처럼 시시하고 피곤한 것이 되며, 시인은 살인 현장을 밀실로 만들려는 범죄 추리극의 시시한 범인이 되고 맙니다. "동굴(grata)에서 파생되었다는 이유로 ‘그로테스크’라는 단어가 은유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10이라는 숫자에 있는 0이라는 상징으로 인해 ‘절대 무(無)’의 개념이 개입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212쪽. 글의 말미에서, 보르헤스는 은유가 장식이자 호화로움이라고 말합니다. '장식'과 '호화로움'이라는 단어가 오해될 뉘앙스를 갖고 있음에도 보르헤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결국 장식도 '다르게 보이기(말하기)' 위함이니까요. 이때 '장식'이란, 내면이 텅 비어 있음을 가리는 겉치레를 넘어서는 개념입니다. 때로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줄 뿐 아니라, 중한 것과 중하지 않은 것 사이를 일순 반전시킬 힘을 지닙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저는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피처럼 붉은 체리 한 알을 생각했습니다. 그 체리 한 알은 케이크 시트와 그 위에 덧발릴 생크림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장식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생크림케이크의 맛과도 무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없으면 생크림케이크는 이미지적으로 너무 둔탁하거나 옹졸해 보일 것 같습니다. 그 점에서 새하얀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붉은 체리는 사소하지만 중한 것입니다. 물리적으로는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지만, 이미지적으로는 생크림케이크가 작은 체리 한 알 위에 올라타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보르헤스가 쓴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은 너무 멋집니다. 저에게는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핏빛 체리를 연상케 합니다.
나는 전차를 타고 다니는, 그저 우수에 젖은 남자이며, 산책을 하려고 황폐한 거리를 선택하지만 마차와 자동차가 다니고 유리창이 빛나는 플로리다 거리도 좋고 마찬가지로 은유가 있어 어떤 강렬한 정열의 순간을 축하하는 것도 좋다. 삶이 우리에게 부당한 고통을 주거나 걸맞지 않은 행운을 가져다주면 우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은유법을 사용한다. 우리는 세상보다 작지 않기를 바라고, 세상만큼 커지기를 원한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15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과식주의] 여기서 과식주의(culteranismo)로 번역된 단어는 흔히 공고라주의(Gongorismo)라고 해서, 16세기 시인 루이스 공고라에서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문체 운동을 일컫습니다. 화려하고 과장된('過飾') 어휘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보르헤스도 설명하듯, 과식주의는 "은유법의 남용, 라틴어 어투, 즉 고어체의 사용 그리고 그리스 신화의 남용"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보르헤스는 이 글에서 과식주의를 비판합니다. 제가 제대로 읽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글은 공고라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에서 파생한 문체에 대한 비판인 것 같습니다. 마치 성서의 말씀은 언제나 있으되, 그것을 왜곡하는 사람도 항상 있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성서의 진의를 어쩐 일인지 자신만은 알아버렸다고 주장하면서 구세주를 자처하고 내용을 왜곡해서 설파하는 사이비들처럼요. 보르헤스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와 그 용례의 관계를 들어서 이러한 논의를 엽니다(216쪽). 즉 문법이란 그것에 고착되거나 귀속되기 위한 정답지가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더 넓은 땅을 여행하기 위한 토대라는 겁니다. 생각해보면, 문법에 과도하게 신경쓰다보면 우리는 언어적 입스(yips) 상태에 빠집니다. 하지만 능숙한 운동 선수가 그렇듯이, 경이로운 플레이는 논리가 아니라 숙달된 감각, 찰나의 직관으로만 가능합니다. 모듈화된 룰이 중요한 것은 그것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고 그 모듈화된 경직성으로부터 제대로 알고 벗어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이러한 맥락에서, 보르헤스는 공고라가 아닌 과식주의의 세 가지 오류를 다시금 살핍니다. 먼저, 은유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은유가 오래된 생각을 쇄신하는 수단이 되기에 실패한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은유는 은유라서 시적인 것이 아니라 그가 성취한 표현에 의해 시적이다"라는 내용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과식주의에서 은유는 상상하는 수단이 아니라 "상상하거나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수단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 다음으로, 공고라가 즐겨썼던 라틴어식 표현을 짚어봅니다. 보르헤스는 라틴어식 표현을 두고, 자신이 “오늘날 스페인어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정통주의자들의 어리석음과 비사교성보다는 라틴어 혼용주의자의 너그러운 자세를 선호한다”고 말합니다. 젠체하며 학식을 뽐내는 수단이 아니라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식주의자들이 보여주는 일종의 '믿음 없는 믿음'을 지적합니다. 이는 무신론자들의 주기도문과 같습니다. 이때 과식주의자들의 그리스 신화는 공통된 이야기에 접촉하려는 열망이 아니라 "아부하거나 타지의 풍경을 이용하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 점에서 과식주의는 공고라의 장치를 치장으로 오해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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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과식주의] 여기서 과식주의(culteranismo)로 번역된 단어는 흔히 공고라주의(Gongorismo)라고 해서, 16세기 시인 루이스 공고라에서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문체 운동을 일컫습니다. 화려하고 과장된('過飾') 어휘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보르헤스도 설명하듯, 과식주의는 "은유법의 남용, 라틴어 어투, 즉 고어체의 사용 그리고 그리스 신화의 남용"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보르헤스는 이 글에서 과식주의를 비판합니다. 제가 제대로 읽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글은 공고라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에서 파생한 문체에 대한 비판인 것 같습니다. 마치 성서의 말씀은 언제나 있으되, 그것을 왜곡하는 사람도 항상 있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성서의 진의를 어쩐 일인지 자신만은 알아버렸다고 주장하면서 구세주를 자처하고 내용을 왜곡해서 설파하는 사이비들처럼요. 보르헤스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와 그 용례의 관계를 들어서 이러한 논의를 엽니다(216쪽). 즉 문법이란 그것에 고착되거나 귀속되기 위한 정답지가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더 넓은 땅을 여행하기 위한 토대라는 겁니다. 생각해보면, 문법에 과도하게 신경쓰다보면 우리는 언어적 입스(yips) 상태에 빠집니다. 하지만 능숙한 운동 선수가 그렇듯이, 경이로운 플레이는 논리가 아니라 숙달된 감각, 찰나의 직관으로만 가능합니다. 모듈화된 룰이 중요한 것은 그것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고 그 모듈화된 경직성으로부터 제대로 알고 벗어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이러한 맥락에서, 보르헤스는 공고라가 아닌 과식주의의 세 가지 오류를 다시금 살핍니다. 먼저, 은유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은유가 오래된 생각을 쇄신하는 수단이 되기에 실패한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은유는 은유라서 시적인 것이 아니라 그가 성취한 표현에 의해 시적이다"라는 내용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과식주의에서 은유는 상상하는 수단이 아니라 "상상하거나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수단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 다음으로, 공고라가 즐겨썼던 라틴어식 표현을 짚어봅니다. 보르헤스는 라틴어식 표현을 두고, 자신이 “오늘날 스페인어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정통주의자들의 어리석음과 비사교성보다는 라틴어 혼용주의자의 너그러운 자세를 선호한다”고 말합니다. 젠체하며 학식을 뽐내는 수단이 아니라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식주의자들이 보여주는 일종의 '믿음 없는 믿음'을 지적합니다. 이는 무신론자들의 주기도문과 같습니다. 이때 과식주의자들의 그리스 신화는 공통된 이야기에 접촉하려는 열망이 아니라 "아부하거나 타지의 풍경을 이용하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 점에서 과식주의는 공고라의 장치를 치장으로 오해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이것들을 공부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이것들은 언어의 발명가나 창조자가 아니라 나중에 만들어진 분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어가 사전적 의미만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문법의 구조와 논리적 사고와 이해의 과정 사이에 확실한 연관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16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돈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의 소네트]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는 17세기 스페인 작가입니다. 소네트와 산문, 비평을 오가며 다양한 글을 썼다고 합니다. 케베도의 소네트는 굉장히 엄격한 형식을 갖췄던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보르헤스는 이 때문에 케베도의 시가 상투적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측면이 있다고 먼저 지적합니다. '죽음'에 대한 케베도의 묘사를 완곡어법이라고 비판하는 부분은 약간 웃기기도 합니다. 보르헤스는 "내 눈을 감길 수 있으리 최후의 / 그 그림자 (···)"라고 쓴 부분을 두고, 우린 잠 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보르헤스가 쉰 살 무렵이 되어서 거의 시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런 비판은 의미심장하기까지 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젊은 보르헤스는 선천적으로 시력이 약했던 증조부 세대를 가늠해 보면서 어느 정도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래서 이런 비판은 오직 보르헤스만 가능한, 아이러니하고 웃긴 지점마저 있습니다. 그럼에도 보르헤스는 마지막 행에서만큼은 케베도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케베도는 논리적이기보다는 직관적이라고 언급하며, 자신의 느끼는 강렬함을 "불사의 약속"으로 만들어내기에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보르헤스가 보기에 케베도는 그 엄격한 형식성 탓에 단점이 아주 없지는 않으나, 여전히 문학적으로 불사의 삶을 살아갈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는 겁니다. 한편, 보르헤스가 타인의 작품을 이해하고 읽어내는 방식을 살펴 보면, 그가 살아가게 될 삶이 일종의 예지 형태로 녹아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쓴 이십대 후반이라는 나이를 고려해보면, 훗날 쓰게 될 작품과 희미한 연결선이 언뜻언뜻 보인다는 점도 하나의 감상 포인트입니다. 여담이지만 소설 전집을 다 읽고나서 논픽션 전집을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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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또다시 은유] '은유'에 대해서 달리 분석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 뭣보다, 시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라고 봅니다. 그리고 다르게 생각하려고 하다 보면 다르게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하고, 그러다 보면 결과적으로 은유를 데려오게 된다고 봅니다. 은유는 새로운 사고방식의 결과물임과 동시에 새롭게 사고하는 수단인 것입니다. 하지만 시 자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며, 때때로 그 위험성도 있습니다. (잠시 샛길로 새면, 한 시대를 풍미한 은유에는 그 시대의 한계가 녹아 있기도 합니다. "국가 수뇌부"라는 표현이 군주를 중심으로 신체라는 국가를 일사분란하게 조종하는 이미지를 은연중에 그려내고, "사회의 암덩어리" 같은 은유에 암환자를 향한 은근한 멸시와 그 방종한 생활을 비난하는 함의가 담겨있는 것을 보면 그러합니다.) 반복하지만 은유는 달리 생각하기입니다. 따라서 은유로써 달리 생각하지 못하고, 기지를 기계적으로 재생산할 뿐이라면, 그 은유는 (혹은 그 은유에 대한 생각은) 쇄신되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보르헤스가 211쪽 괄호 속에 겸손하게 숨겨놓은 문장은 빛납니다. "나는 진심으로 은유는 시를 지을 때보다 오히려 시를 지은 후에, 문학적이고 이미 잘 꾸려진 시를 원할 때 필요하다고 본다. 은유로 인해 뒤섞인 어휘로 구성된 시는 제약을 가하고,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실패하게 만들기도 한다." 은유를 모르고서 시를 읽을 수는 없지만, 시의 모든 것을 은유로 보면 우리는 시를 즐기지 못합니다. 시는 수수께끼가 아니고 은유는 수수께끼의 힌트 따위가 아닙니다. 시를 수수께끼로, 은유를 수수께끼의 힌트로 좁게 보기 시작하면, 시는 낱말 맞추기처럼 시시하고 피곤한 것이 되며, 시인은 살인 현장을 밀실로 만들려는 범죄 추리극의 시시한 범인이 되고 맙니다. "동굴(grata)에서 파생되었다는 이유로 ‘그로테스크’라는 단어가 은유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10이라는 숫자에 있는 0이라는 상징으로 인해 ‘절대 무(無)’의 개념이 개입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212쪽. 글의 말미에서, 보르헤스는 은유가 장식이자 호화로움이라고 말합니다. '장식'과 '호화로움'이라는 단어가 오해될 뉘앙스를 갖고 있음에도 보르헤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결국 장식도 '다르게 보이기(말하기)' 위함이니까요. 이때 '장식'이란, 내면이 텅 비어 있음을 가리는 겉치레를 넘어서는 개념입니다. 때로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줄 뿐 아니라, 중한 것과 중하지 않은 것 사이를 일순 반전시킬 힘을 지닙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저는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피처럼 붉은 체리 한 알을 생각했습니다. 그 체리 한 알은 케이크 시트와 그 위에 덧발릴 생크림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장식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생크림케이크의 맛과도 무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없으면 생크림케이크는 이미지적으로 너무 둔탁하거나 옹졸해 보일 것 같습니다. 그 점에서 새하얀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붉은 체리는 사소하지만 중한 것입니다. 물리적으로는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지만, 이미지적으로는 생크림케이크가 작은 체리 한 알 위에 올라타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보르헤스가 쓴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은 너무 멋집니다. 저에게는 생크림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핏빛 체리를 연상케 합니다.
(내 생각에)사물은 본질적으로 시적이지 않다. 이를 시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과 사물을 연관시키고 혼신을 다해 이를 궁리하는 데 길들 필요가 있다. 별들은 시적이다. 수 세기 동안 인간의 눈이 이를 보아 왔고 그 영원성에 시간을, 그 가변성에 불변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10p,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russist님의 대화: [돈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의 소네트]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는 17세기 스페인 작가입니다. 소네트와 산문, 비평을 오가며 다양한 글을 썼다고 합니다. 케베도의 소네트는 굉장히 엄격한 형식을 갖췄던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보르헤스는 이 때문에 케베도의 시가 상투적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측면이 있다고 먼저 지적합니다. '죽음'에 대한 케베도의 묘사를 완곡어법이라고 비판하는 부분은 약간 웃기기도 합니다. 보르헤스는 "내 눈을 감길 수 있으리 최후의 / 그 그림자 (···)"라고 쓴 부분을 두고, 우린 잠 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보르헤스가 쉰 살 무렵이 되어서 거의 시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런 비판은 의미심장하기까지 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젊은 보르헤스는 선천적으로 시력이 약했던 증조부 세대를 가늠해 보면서 어느 정도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래서 이런 비판은 오직 보르헤스만 가능한, 아이러니하고 웃긴 지점마저 있습니다. 그럼에도 보르헤스는 마지막 행에서만큼은 케베도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케베도는 논리적이기보다는 직관적이라고 언급하며, 자신의 느끼는 강렬함을 "불사의 약속"으로 만들어내기에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보르헤스가 보기에 케베도는 그 엄격한 형식성 탓에 단점이 아주 없지는 않으나, 여전히 문학적으로 불사의 삶을 살아갈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는 겁니다. 한편, 보르헤스가 타인의 작품을 이해하고 읽어내는 방식을 살펴 보면, 그가 살아가게 될 삶이 일종의 예지 형태로 녹아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쓴 이십대 후반이라는 나이를 고려해보면, 훗날 쓰게 될 작품과 희미한 연결선이 언뜻언뜻 보인다는 점도 하나의 감상 포인트입니다. 여담이지만 소설 전집을 다 읽고나서 논픽션 전집을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롭네요.
케베도는 논리적이기보다 직관적이다. 그에게 있어 강렬함은 불사의 약속이다. 아무것에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의 강렬함이 아니라 사랑의 욕구, 아니, 좀 더 정확히는 그 행위의 강도를 말한다. 환희, 존재의 완전함이 그 순간을 앞지르고, 그렇게 강렬한 순간을 한번 경험한 사람은 사는 법을 잊지 않고 죽지 않을 것이라 단언한다. 이제 에로스는 은유의 경지에 이른다. 육체의 뻔뻔스러움과 안식일은 육체의 손님이자 동반자인 영혼을 위해 기쁜 소식을 전하는 매체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2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russist님의 대화: [과식주의] 여기서 과식주의(culteranismo)로 번역된 단어는 흔히 공고라주의(Gongorismo)라고 해서, 16세기 시인 루이스 공고라에서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문체 운동을 일컫습니다. 화려하고 과장된('過飾') 어휘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보르헤스도 설명하듯, 과식주의는 "은유법의 남용, 라틴어 어투, 즉 고어체의 사용 그리고 그리스 신화의 남용"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보르헤스는 이 글에서 과식주의를 비판합니다. 제가 제대로 읽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글은 공고라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에서 파생한 문체에 대한 비판인 것 같습니다. 마치 성서의 말씀은 언제나 있으되, 그것을 왜곡하는 사람도 항상 있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성서의 진의를 어쩐 일인지 자신만은 알아버렸다고 주장하면서 구세주를 자처하고 내용을 왜곡해서 설파하는 사이비들처럼요. 보르헤스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와 그 용례의 관계를 들어서 이러한 논의를 엽니다(216쪽). 즉 문법이란 그것에 고착되거나 귀속되기 위한 정답지가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더 넓은 땅을 여행하기 위한 토대라는 겁니다. 생각해보면, 문법에 과도하게 신경쓰다보면 우리는 언어적 입스(yips) 상태에 빠집니다. 하지만 능숙한 운동 선수가 그렇듯이, 경이로운 플레이는 논리가 아니라 숙달된 감각, 찰나의 직관으로만 가능합니다. 모듈화된 룰이 중요한 것은 그것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고 그 모듈화된 경직성으로부터 제대로 알고 벗어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이러한 맥락에서, 보르헤스는 공고라가 아닌 과식주의의 세 가지 오류를 다시금 살핍니다. 먼저, 은유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은유가 오래된 생각을 쇄신하는 수단이 되기에 실패한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은유는 은유라서 시적인 것이 아니라 그가 성취한 표현에 의해 시적이다"라는 내용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과식주의에서 은유는 상상하는 수단이 아니라 "상상하거나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수단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 다음으로, 공고라가 즐겨썼던 라틴어식 표현을 짚어봅니다. 보르헤스는 라틴어식 표현을 두고, 자신이 “오늘날 스페인어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정통주의자들의 어리석음과 비사교성보다는 라틴어 혼용주의자의 너그러운 자세를 선호한다”고 말합니다. 젠체하며 학식을 뽐내는 수단이 아니라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식주의자들이 보여주는 일종의 '믿음 없는 믿음'을 지적합니다. 이는 무신론자들의 주기도문과 같습니다. 이때 과식주의자들의 그리스 신화는 공통된 이야기에 접촉하려는 열망이 아니라 "아부하거나 타지의 풍경을 이용하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 점에서 과식주의는 공고라의 장치를 치장으로 오해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무신론자가 “하느님께 맹세코!”라는 말을 하거나 십자가의 고난을 믿지 않는 이가 “주여, 마귀로부터 나를 지켜주소서.”라고 기도하며 마귀를 상상하지 않는 것은 나태한 것이다. 시는 신화의 발견 혹은 친연성을 가지고 신화를 소재로 등장시키는 것이지 아부하거나 타지의 풍경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과식주의는 죄를 저질렀다. 그늘과 그림자, 흔적, 단어, 메아리, 부재와 환영을 사용했으며 (믿지도 않으면서)불사조와 신화와 천사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지없이 화려한 시의 흉내였으며 죽음으로 아름답게 치장까지 하였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24,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russist님의 대화: [돈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의 소네트]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는 17세기 스페인 작가입니다. 소네트와 산문, 비평을 오가며 다양한 글을 썼다고 합니다. 케베도의 소네트는 굉장히 엄격한 형식을 갖췄던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보르헤스는 이 때문에 케베도의 시가 상투적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측면이 있다고 먼저 지적합니다. '죽음'에 대한 케베도의 묘사를 완곡어법이라고 비판하는 부분은 약간 웃기기도 합니다. 보르헤스는 "내 눈을 감길 수 있으리 최후의 / 그 그림자 (···)"라고 쓴 부분을 두고, 우린 잠 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보르헤스가 쉰 살 무렵이 되어서 거의 시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런 비판은 의미심장하기까지 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젊은 보르헤스는 선천적으로 시력이 약했던 증조부 세대를 가늠해 보면서 어느 정도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래서 이런 비판은 오직 보르헤스만 가능한, 아이러니하고 웃긴 지점마저 있습니다. 그럼에도 보르헤스는 마지막 행에서만큼은 케베도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케베도는 논리적이기보다는 직관적이라고 언급하며, 자신의 느끼는 강렬함을 "불사의 약속"으로 만들어내기에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보르헤스가 보기에 케베도는 그 엄격한 형식성 탓에 단점이 아주 없지는 않으나, 여전히 문학적으로 불사의 삶을 살아갈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는 겁니다. 한편, 보르헤스가 타인의 작품을 이해하고 읽어내는 방식을 살펴 보면, 그가 살아가게 될 삶이 일종의 예지 형태로 녹아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쓴 이십대 후반이라는 나이를 고려해보면, 훗날 쓰게 될 작품과 희미한 연결선이 언뜻언뜻 보인다는 점도 하나의 감상 포인트입니다. 여담이지만 소설 전집을 다 읽고나서 논픽션 전집을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롭네요.
나는 신과 불사의 무아지경을 믿는 이들의 편이다. 내 믿음은 우나무노식도 아니고 불편하지도 않다. 나의 밤은 그 안에서 편히 잘 줄 알고, 꿈꾸어 마지않는 현실은 휴가를 보내 버리기까지 한다. 내 믿음은 자주 확신에 이르고 결코 의심에 굴복하지 않는 ‘가능함’이다. 묘사할 수도 없는 원자 하나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면서 자신의 자아는 최후에도 숨길 수 있다고 확신하는 기계론자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우주에 물질 분자 하나를 훔치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면서 수없는 영혼은 허락한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3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이미지의 시뮬레이션] 예술, 그중에서도 특히 문학에서 '이미지'라는 것을 깊이 살펴보는 글입니다. 보르헤스는 기존의 문학에서 '이미지'가 시각적인 것에만 국한된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그 "시각적인 것의 무분별한 남용 사례"를 하나씩 살핍니다. (234) "어둠이 아니다. 즉 빛나는 밝음, 눈부신 밝음이자 내면의 밝음, 깊은 밝음이다. 번쩍이는 바다는 파란 크리스털이다. 다이아몬드가 뿌려진, 또는 태양이 타원을 그리며 횡단하는 무결점, 사파이어색 하늘." 보르헤스는 은유라고 불리는 많은 것들이 시각적인 무절제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면서, 기존의 표현들이 얼마나 정확하지 않은지, 최상급의 과장된 표현으로 가득한지, 그리고 그러한 게으른 과장법이 독자의 부주의와 어떻게 공모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생각해보면, 과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자신이 설득하려는 이미지에 닿지 못하는 궁색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닿지 않기 때문에 수식어를 주렁주렁 다는 것인데, 계속해서 수식을 달수록 애당초 닿으려는 이미지와는 더욱 멀어지고마는 역설에 봉착합니다. 좁아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날카로워지고 있다고 오판하는 일이 그렇게 왕왕 벌어집니다. 그 점에서 '이미지'를 설득하려는 사람은 휴리스틱 이론에서의 '교집합의 오류', 혹은 '결합 오류(conjunction fallacy)'라고 부르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미국과 러시아가 전쟁을 할 확률이 얼마인가'를 물으면 그럴 확률이 거의 없을 거라고 말한 사람들에게 질문을 바꿔서, '제삼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미국과 러시아가 전쟁을 하게 될 확률이 얼마인가'를 물으면 오히려 전쟁이 벌어질 확률을 높게 책정한다는 겁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는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다. 왜냐면 전자의 질문이 후자의 질문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이미지를 설득하기 위해서 수사적 장치를 동원하는 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결국 수식어는 한정하는 역할을 하고, 더 많은 수식어를 쓸수록 더욱더 그 이미지는 한정적인 것이 되어서 도무지 공감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마는데도, 이상하게도 쓰는 입장에서는 더욱 그럴듯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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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이미지의 시뮬레이션] 예술, 그중에서도 특히 문학에서 '이미지'라는 것을 깊이 살펴보는 글입니다. 보르헤스는 기존의 문학에서 '이미지'가 시각적인 것에만 국한된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그 "시각적인 것의 무분별한 남용 사례"를 하나씩 살핍니다. (234) "어둠이 아니다. 즉 빛나는 밝음, 눈부신 밝음이자 내면의 밝음, 깊은 밝음이다. 번쩍이는 바다는 파란 크리스털이다. 다이아몬드가 뿌려진, 또는 태양이 타원을 그리며 횡단하는 무결점, 사파이어색 하늘." 보르헤스는 은유라고 불리는 많은 것들이 시각적인 무절제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면서, 기존의 표현들이 얼마나 정확하지 않은지, 최상급의 과장된 표현으로 가득한지, 그리고 그러한 게으른 과장법이 독자의 부주의와 어떻게 공모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생각해보면, 과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자신이 설득하려는 이미지에 닿지 못하는 궁색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닿지 않기 때문에 수식어를 주렁주렁 다는 것인데, 계속해서 수식을 달수록 애당초 닿으려는 이미지와는 더욱 멀어지고마는 역설에 봉착합니다. 좁아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날카로워지고 있다고 오판하는 일이 그렇게 왕왕 벌어집니다. 그 점에서 '이미지'를 설득하려는 사람은 휴리스틱 이론에서의 '교집합의 오류', 혹은 '결합 오류(conjunction fallacy)'라고 부르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미국과 러시아가 전쟁을 할 확률이 얼마인가'를 물으면 그럴 확률이 거의 없을 거라고 말한 사람들에게 질문을 바꿔서, '제삼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미국과 러시아가 전쟁을 하게 될 확률이 얼마인가'를 물으면 오히려 전쟁이 벌어질 확률을 높게 책정한다는 겁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는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다. 왜냐면 전자의 질문이 후자의 질문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이미지를 설득하기 위해서 수사적 장치를 동원하는 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결국 수식어는 한정하는 역할을 하고, 더 많은 수식어를 쓸수록 더욱더 그 이미지는 한정적인 것이 되어서 도무지 공감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마는데도, 이상하게도 쓰는 입장에서는 더욱 그럴듯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끝으로 한 가지만 더 언급하자면 그런 언어의 부주의나 균열, 우유부단함이나 고의적인 속임수는 항상 독자와 공모한다. (···) 나태함은 절반의 이미지만으로 만족하곤 하며, 읽은 것을 실행에 옮길 마음이 없다 보니 오류를 발견하지 못한다. (···) 모든 작가가 진정한 미학적 성취는 새로운 일이지만 문학 비평가나 언론인, 동료들이나 문학 애호가에게 부적절한 기술의 전시보다도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요즘은 실패한 이미지가 '대담하다(audaz)'며 더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을 안다. 신비로움을 강조하고 미치광이가 기법을 가진 척하기만 하면 표현의 반복적인 실패가 명성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안다. 예를 들어 공고라가 알았고, 우리 시대의 글줄이라도 쓰는 모든 작가가 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3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호르헤 만리케의 ⟪코플라⟫] 이 글을 보면서 느낀 점이 있는데요, 보르헤스의 산문에는 하나같이 묘한 특징이 있다는 겁니다. 언뜻 보면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않고, 더러는 명료한 주장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명료한 논증 구조를 내세워서, 문단 하나하나마다 잠정적인 결론을 맺어가면서 독자들을 설득하는 방식과는 좀 다른 듯합니다. 보르헤스는 본서에서 스페인어로 쓰인 무수한 고전 작품들을 논합니다. 고전에 대한 기존의 관점을 살펴보고, 비판하는 한편, 배울 점을 찾는 식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칭송하고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작품이 지닌 시대적 한계와 현재의 관점에서 본 미진함을 모두 살핀 다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계승할 부분을 찾으면서 마무리하는 구조인 겁니다. 이 글도 마찬가집니다. 보르헤스는 호르헤 만리케가 쓴, 중세의 장례 애가 장르인 코플라를 본격적으로 살핍니다. 보르헤스는 이 코플라가 '죽음'이라는 주제에 걸맞지는 않으나, 그 아름다움만은 인정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코플라의 한계에서 그 불멸성에 대한 형이상학을 뽑아올리는 마지막 문장은 과연 멋집니다. 어쩜, 한 편의 좋은 글은 우리를 협소한 앎에 자족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그 무궁무진하게 열려있는 무지로 인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앎이 아니라 모름 속에서 더 편안해 하고 활짝 열려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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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호르헤 만리케의 ⟪코플라⟫] 이 글을 보면서 느낀 점이 있는데요, 보르헤스의 산문에는 하나같이 묘한 특징이 있다는 겁니다. 언뜻 보면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않고, 더러는 명료한 주장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명료한 논증 구조를 내세워서, 문단 하나하나마다 잠정적인 결론을 맺어가면서 독자들을 설득하는 방식과는 좀 다른 듯합니다. 보르헤스는 본서에서 스페인어로 쓰인 무수한 고전 작품들을 논합니다. 고전에 대한 기존의 관점을 살펴보고, 비판하는 한편, 배울 점을 찾는 식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칭송하고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작품이 지닌 시대적 한계와 현재의 관점에서 본 미진함을 모두 살핀 다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계승할 부분을 찾으면서 마무리하는 구조인 겁니다. 이 글도 마찬가집니다. 보르헤스는 호르헤 만리케가 쓴, 중세의 장례 애가 장르인 코플라를 본격적으로 살핍니다. 보르헤스는 이 코플라가 '죽음'이라는 주제에 걸맞지는 않으나, 그 아름다움만은 인정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코플라의 한계에서 그 불멸성에 대한 형이상학을 뽑아올리는 마지막 문장은 과연 멋집니다. 어쩜, 한 편의 좋은 글은 우리를 협소한 앎에 자족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그 무궁무진하게 열려있는 무지로 인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앎이 아니라 모름 속에서 더 편안해 하고 활짝 열려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코플라⟫를 다시 읽으며 작가가 덧없고 일시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고를 가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만리케(철학적 명상에 잠긴 모든 스페인 사람)에게는 영원한 것이 유일한 존재 형태이다. 하지만 해골은 그 주인보다 오래 살아남고, 따라서 해골이 인간보다 사실적인 법이다. 이탈리카의 유적들은 도시보다 오래 살아남고(죽어 남고) 따라서 오늘 그곳의 변덕스러운 날씨는 사실이며 지난날 그곳에 산 사람들은 허구이다. 스페인이라는 이름은 그 제국보다 오래 버텼으나 이제 제국은 존재하지 않으니 영국인들은 이와 유사한 현실을 기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현실을 위계화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어떤 이유로 죽음의 순간이 삶의 순간들보다 진실하며, 금요일이 월요일보다 진실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44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russist님의 대화: [호르헤 만리케의 ⟪코플라⟫] 이 글을 보면서 느낀 점이 있는데요, 보르헤스의 산문에는 하나같이 묘한 특징이 있다는 겁니다. 언뜻 보면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않고, 더러는 명료한 주장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명료한 논증 구조를 내세워서, 문단 하나하나마다 잠정적인 결론을 맺어가면서 독자들을 설득하는 방식과는 좀 다른 듯합니다. 보르헤스는 본서에서 스페인어로 쓰인 무수한 고전 작품들을 논합니다. 고전에 대한 기존의 관점을 살펴보고, 비판하는 한편, 배울 점을 찾는 식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칭송하고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작품이 지닌 시대적 한계와 현재의 관점에서 본 미진함을 모두 살핀 다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계승할 부분을 찾으면서 마무리하는 구조인 겁니다. 이 글도 마찬가집니다. 보르헤스는 호르헤 만리케가 쓴, 중세의 장례 애가 장르인 코플라를 본격적으로 살핍니다. 보르헤스는 이 코플라가 '죽음'이라는 주제에 걸맞지는 않으나, 그 아름다움만은 인정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코플라의 한계에서 그 불멸성에 대한 형이상학을 뽑아올리는 마지막 문장은 과연 멋집니다. 어쩜, 한 편의 좋은 글은 우리를 협소한 앎에 자족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그 무궁무진하게 열려있는 무지로 인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앎이 아니라 모름 속에서 더 편안해 하고 활짝 열려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독자여! 코플라의 좁은 길을 통해 우리는 형이상학에 도달했다. 이제 당신은 자신의 무지의 주인이니 나의 무지가 필요없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46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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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연뮤클럽] 5. 의심, 균열, 파국 x 추리소설과 연극무대가 함께 하는 "붉은 낙엽"[그믐연뮤클럽] 4. 다시 찾아온 도박사의 세계 x 진실한 사랑과 구원의 "백치"[그믐연뮤클럽] 3. "리어왕" 읽고 "더 드레서" 같이 관람해요
2월 26일(수), 함께 낭독해요 🎤
[그믐밤X그믐클래식] 32. 달밤에 낭독, <일리아스>
2월의 고전
[그믐클래식 2025] 2월, 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이달의 고전] 2월 『제5도살장』 함께 읽어요[이달의 고전] 2월 『양철북』 함께 읽어요[그믐밤X그믐클래식] 32. 달밤에 낭독, <일리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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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닫히지 않는 편지 가게 글월
편지가게 글월 / 백승연 지음 (2024 런던 국제 도서전 화제작)[책 증정] 텍스티와 함께 『편지 가게 글월』 함께 읽어요![편지 가게 글월] 서로 꿈을 이야기하며 안부를 전하는 글쓰기를 하고자 합니다.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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