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연희X그믐] <책 읽다 절교할 뻔> 번외편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읽기

D-29
아빠의 사업이 부도를 맞은 뒤 상황은 점점 나쁜 쪽으로 치닫고 있었다. 재기를 위해 아빠가 벌인 일들은 실패로 끝났고 IMF 사태까지 터지면서 아무 희망도 기대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나쁜 일이 지나가면 더 나쁜 일이 기다리던 그때 ‘다음’은 없었다. 다음이 없으므로 깨끗이 포기할 수도, 끝까지 오기를 부릴 수도 있었다. “가고 싶은 데 가서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 대구에서 다니던 대학을 자퇴하고 집에서 빈둥거리자 엄마는 그런 말로 나의 서울행을 허락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무엇을 하고 싶어서 서울에 가려는 게 아니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집 안을 떠도는 불운의 기운에서, 가족들의 한숨소리에서. 한편으로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에서 늙어갈까 봐, 이곳이 내 세상의 전부일까 봐 두려웠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저도 IMF 직격탄 맞은 이후에 대학을 갔었는데 그때 딱 저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부산에서 서울로 가겠다는 결심과 행동 아래에는 사실 집에서 도망치고자, 불운에서 벗어나고자, 한숨을 듣지 않고자 였다는게 저 문장을 읽을때 갑자기 떠오르더라구요...그때의 저를 갑자기 만나서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싶은 과거의 나이기도 해서 다행이었습니다.
가난은 서로에게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가난은 월세 30만 원짜리 자취방이지만 누군가에게 가난은 포클레인이 밀어버릴 쪽방이었다. 누군가에게 가난은 자기만의 방을 가지지 못한 것이지만 누군가에게 가난은 거리로 내몰린 노숙인의 삶이었다. 가난을 가늠하는 일은 자신의 과거든 타인의 현재든 비교 대상이 필요했다. 마포의 30평대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는 친구의 집을 다녀온 날, 나는 가난했다. 원룸에서 불과 몇 정거장 떨어진 난곡의 쪽방을 목도한 날, 나는 가난하지 않았다. 난곡의 안쪽을 바라볼 때마다 ‘여기’가 최악은 아니라는 안도감과 ‘저기’로 굴러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교차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알고 있었다. ‘저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그 사람들은 ‘저기’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저기’에서나마 쫓겨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그 절박함 앞에서 느끼는 안도와 불안이 부끄러웠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세상에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조차 기어이 바닥을 드러내게 만드는 동네가 있었다. 품위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존중받기를 원하는 만큼 타인을 대접하는 사람, 나의 상처가 아픈 만큼 남의 마음을 섬세하게 헤아리는 사람이고 싶었다. 품위는 인간에 대한 예의이자, 가진 것 없는 자가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방어선이었다. 나는 매사에 ‘내 돈을 써야 하는 일인가’만 생각하는 사람, 폭력적인 시선으로 남을 쳐다보는 사람, 남의 차에 가래침을 뱉는 사람, 욕설을 퍼붓고 악을 쓰는 사람이 결코 되고 싶지 않았다. 나뿐 아니라 누구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다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그런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어떤 환경에 있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몸에 배는 품위와 교양과 인격이 다른 환경에 있는 누군가에게는 필사적인 노력을 통해 만들어야 하는 태도였다. 피곤하고 지친 나머지 끝내 화만 남은 이들에게는 인간성을 유지하는 데에도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이웃들을 좋아할 수 없었지만 차마 미워할 수도 없었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등단한 뒤 열 편의 단편소설과 한 편의 중편소설을 발표했다. 소설의 원고료는 매당 만 원이 안 되었고 책은 1쇄도 다 팔리지 않았다. 창작지원금을 합쳐 3천만 원 남짓한 돈이 내가 5년 동안 소설로 벌어들인 수입의 전부였다. 가끔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생계를 유지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글을 쓰면 쓸수록 가난해졌다. 애초에 직업이 될 수 없는 일을 직업으로 여겼는지도 몰랐다. 월세부터 생활비까지 거의 모든 돈을 동생에게 의존했다. 나의 글은 가족을 착취한 결과였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실수와 오류와 시행착오 사이에서 분투할 때마다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자기 돈과 시간을 써가면서 아등바등 집을 고치고 있단 말이야?” ‘아등바등’이라는 표현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무언가를 이루려고 부단히 애쓰는 모양새’라는 의미였다. 돌이켜보니 아등바등 살아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사는 것을 비참한 일로 여기면서 건성으로 살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동안 가족들은 나의 몫까지 아등바등 살았을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몸부림을 밟고서 서울행 기차를 타고, 학교를 다니고, 집을 구하고, 글을 썼을 것이다. 내가 지낼 공간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시간은 처음으로 스스로를 책임지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순간이었다.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면 이 집이 온전한 나의 집이 되리라 믿었다. 내가 바꾼 공간이 이곳에서 보낼 나의 시간을 바꾸리라 기대했다. 그렇게 일상의 모든 것이 더 좋아지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아등바등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절박하게 애쓰지 않으면 나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집을 고치며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이사를 하고 몇 주가 지나자 새해가 되었다. 2012년이 시작되던 새벽, 침대에 누워 이 집에 오기까지의 시간을 생각했다. 나를 떠난 이들과 내가 떠난 이들을, 내가 아닌 타인이 나를 구제하리라 믿었던 나날을 생각했다. 남에게 의존하며 불안하게 흔들리던 20대는 지나갔다. 나는 30대이고 혼자 나를 책임지고 있었다. 안온했다. 안온함은 책이나 사전에 존재할 뿐 일상에서 떠올려본 적 없는 말이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쓰는 사람은 작가라고 불리는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다. 나의 서사를 나의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 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이는 나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쓰기는 삶의 특정한 순간을 다시 한 번 살아내기이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뭉뚱그리지 않기. 외면하고 싶었던 고통, 분노, 슬픔, 상실, 결핍을 다시 한 번 겪어내기. 그것은 나 자신의 이방인이 되는 일이다. 내가 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타인이 내리는 정의, 규정, 낙인을 거부할 수 있다. 내 안에는 나조차 알지 못하는 불가해하고 복잡한 자아가 존재한다고 항변할 수 있다. 나는 ‘존재하는 한 이야기하라’는 페미니즘의 명제대로 살고 싶다. 그러나 나의 이야기는 나에 대한, 나를 위한 개인적 기록만은 아니다. 자신 안에 갇히는 나르시시즘적 행위가 아니라 나의 삶을 해석하고 사유하기 위해, 그다음에는 스스로를 무한히 확대하고 다른 존재와 연결되기 위해 나는 쓰고 싶다. 자전적 이야기라도 그 안에는 사회나 시대, 타자와 관계된 무언가가 있다. 나는 내 이야기에서 다른 얼굴, 다른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기 바란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엄마는 ‘읽는 사람’이었다. 솔제니친과 체호프 같은 러시아 작가들을 특히 사랑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고 내가 받은 충격에 대해 대화할 수 있는 사람도 가족 중에서 엄마가 유일했다. 나는 끝까지 읽지 못했고 앞으로도 읽지 못할 것 같은 박경리의 『토지』와 최명희의 『혼불』을 완독하고 재독까지 한 사람도 내 주변에서 엄마뿐이었다. 가세가 기운 뒤 엄마는 집 안팎에서 이중노동을 하면서도 잠들기 전까지 시와 소설을 읽었다. 엄마에게 독서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기만의 정신적 공간이었으리라.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창밖을 자주, 오래 바라보는 것은 이 집에 와서 생긴 습관이다. 집을 선택하는 것은 매일 보게 될 풍경을 선택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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