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빠의 사업이 부도를 맞은 뒤 상황은 점점 나쁜 쪽으로 치닫고 있었다. 재기를 위해 아빠가 벌인 일들은 실패로 끝났고 IMF 사태까지 터지면서 아무 희망도 기대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나쁜 일이 지나가면 더 나쁜 일이 기다리던 그때 ‘다음’은 없었다. 다음이 없으므로 깨끗이 포기할 수도, 끝까지 오기를 부릴 수도 있었다. “가고 싶은 데 가서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 대구에서 다니던 대학을 자퇴하고 집에서 빈둥거리자 엄마는 그런 말로 나의 서울행을 허락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무엇을 하고 싶어서 서울에 가려는 게 아니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집 안을 떠도는 불운의 기운에서, 가족들의 한숨소리에서. 한편으로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에서 늙어갈까 봐, 이곳이 내 세상의 전부일까 봐 두려웠다. ”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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