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소설_겨울] 『해가 죽던 날』 함께 읽기

D-29
그가 어머니를 향해 가볍게 미소 지었습니다. "이제 쓸 이야기가 생겼어요." 어머니가 다가가 그의 얼굴을 가볍게 때렸습니다. "빨리 깨지 않으면 너는 네 이야기 속에서 죽고 말 게다." 그는 의아하다는 듯이 놀란 표정으로 어머니를 쳐다봤습니다. "어서 네 이야기 속에서 나와." 그의 어머니의 외침과 소환은 천둥 같았습니다. "나오지 않으면 너는 네 이야기 속에서 죽고 말 거야."
해가 죽던 날 p.286,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그를 꿈속에서 끌어내지 말아요. 꿈속에 멍하니 있게 놔두세요." 그의 어머니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들 모두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나무 인형들이 나무 인형극을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녀석이 글을 쓰지 않으면 미쳐버리거나 죽는다고 하니 그냥 쓰게 해주자고요. 쓰다가 죽어도 살아 있는 걸로 느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옌 아저씨 어머니의 얼굴에 눈물방울이 걸려 있었습니다. 메마른 황무지에 비가 내린 것 같았습니다.
해가 죽던 날 p.296,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알고 보니 몽유도 선물이었습니다. 게다가 하늘에 계신 신계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선물이었습니다. 저도 갑자기 몽유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처럼 몽유하면서 자신이 몽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싶어졌습니다. 이는 다른 세상에서 이 세상의 일들을 보는 것과 같으니까요. 죽어서도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으니까요.
해가 죽던 날 p.301,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해가 죽던 날> 관련한 인터뷰를 찾아봤는데요, 아무래도 영미권 작가가 아니다보니 인터뷰를 찾기 쉽지 않네요. 그중 가디언과의 인터뷰가 있어 도움이 될 것 같은 부분을 여기 옮깁니다. (번역기로 돌려서 조금 어색합니다. 전문이 궁금하신 분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Q: 소설의 아이디어는 무엇이었을까요? A: 저는 몽유병을 몇 번 경험했고, 다른 사람들이 몽유병을 겪는다는 보고를 휴대전화에서 계속 보았습니다. 소설의 아이디어는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저는 사람들의 내면 세계에 대해 쓰고 싶었고, 그들이 가장 깊고 가장 비밀스러운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면 어떻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지에 대해 쓰고 싶었습니다. Q: 왜 14세의 내레이터를 선택했나요? A: 이런 스토리는 무작위성과 예측 불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하고, 매우 흥분한 어른이 스토리를 들려준다면 훨씬 믿기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그다지 똑똑하지 않은 청소년이 스토리를 들려주면 사람들이 믿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매우 순진하고 순수한 목소리를 선택함으로써, 저는 중국에서 가장 어렵고, 가장 복잡한 이야기, 중국인들의 가장 깊은 마음을 논의하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눈으로 사회를 바라봄으로써 저는 사람들이 가장 기본적인 방식으로, 종종 매우 어두운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묘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또한 그 모든 것과 정반대인 위대한 선함에 대한 가끔씩의 폭발을 강조할 수 있었습니다. Q: 소설 속 악몽의 일부는 당신 자신이 더 이상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당신은 이야기에 자신을 넣었고, 그것은 작가로서의 당신의 가장 큰 두려움을 반영합니까? A: 저는 소설을 완성할 때 종종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앞으로 10년 동안은 다시는 책을 쓸 수 없을 거라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은 항상 큰 두려움이고, 다시는 글을 쓸 수 없을까봐 항상 큰 불안감을 느낍니다.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8/sep/22/yan-lianke-writers-in-china-day-the-sun-died-interview
오, 그렇지 않아도 그 점이 궁금했는데 이렇게 친히 번역기 돌려 올려주시고, 고맙습니다. 이제야 이 작가를 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본인도 몽유병을 경험하고 그걸 소설로 쓸 생각을 했다니! 놀랍네요. 그렇지 않아도 읽으면서 작가 옌롄커와 소설에 나온 옌롄커를 같은 사람으로 봐야하나 아니면 분리해서 봐야하는 건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좀 그렇고 내일쯤(10일) 글을 올려 볼까 생각중이었는데 오늘 올리고 마네요. ㅎ 사실 전 오래 전부터 편견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에서 화자의 직업을 작가로 상정하는 소설은 좀 김이 빠진다는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그쯤되면 이 작가는 작가로서의 생명을 다했거나 좀 쉬는 게 낫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죠. 또한 이렇게 작가를 직접 등장시켜 작가라는 직업이 어렵고 힘들다는 걸 주저리 떠드는 것도 별로 작가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이 이렇게까지 길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더군요. 특히 제7장 오경에서 옌롄커가 글이 안 써진다고 징징거리잖아요. 그게 작가 본인을 투영한 건지 아니면 그런 인물로 설정한건지 의문스러운 상황이었는데 본인을 투영한 게 맞네요. 물론 보기에 따라선 솔직해 보여서 좋을 수도 있지만 저는 좀 별로였습니다. 그냥 그렇게 인터뷰에서 글 쓰는 게 갈수록 어렵다 뭐 그렇게 밝히는 게 훨씬 보기가 좋지 왜 이렇게 썼을까 아쉽더군요. 작가가 필봉을 들고 있는 한 끝까지 날카로운 촉수를 들이대야 하는데, 과연 이 작가가 이 작품 이후 다음 작품을 쓸 수 있을까 의문스럽더군요. 사실 저도 이렇게 말하는 게 조심스럽긴한데, 저는 이 작품이 첫 작품입니다. 그전에 한 번이라도 작가의 작품을 읽어 보고 말해야 하는 건 아닌가 싶더군요. 솔직히 어려운 작품은 아니지만 제가 중국 사회를 이해를 못해서 그런지 쉽게 읽히진 않더군요. 그래도 완독을 끝까지 해 볼 생각입니다. 서사와 은유를 다루는 방식은 확실히 대가답다는 생각은 듭니다. 하긴 작가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런 고민 당연히 많이 할 것 같긴합니다.
사실 저 역시 글쓰기에 관한 글을 자주 쓰는 작가 중 한 사람이라(한 마디로, 글이 안 써진다고 징징대는 글을 종종 쓰는 편이라...) 할 말이 없긴 하네요... 실제로 글 못 쓰겠다고 징징거리지 좀 마라, 하는 독자분들의 평을 가끔 듣기도 하고요. 분명 그 부분은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인 것 같아요. (저는 제가 그런 작가라서 그런지 무척 좋아합니다. 사실 '글을 못 쓰겠다'고 하면서 글을 쓰는 건 하나의 장르로, 에세이의 위대한 전통 속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많은 위대한 작가들이 화자가 작가인 소설을 썼고, 작가 자신이 화자로 등장하며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흐리는 작품들도 많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쓸 거리가 떨어진 작가가 억지로 쓰는 거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작품의 경우 @최가은 평론가님이 지적해주신 것처럼, 충분히 등장할 만한 개연성을 갖추고 있고 그것이 작품의 의미를 오히려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님의 글을 읽으니 제가 또 침소봉대하여 경거망동을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역시 소설이든 드라마든 끝까지 봐야 이게 무엇을 얘기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 있는데 말입니다. 말씀하신 호불호의 지점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작가에 대해서 뭐라도 좀 알아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고나 할까요? ㅋ 전 작가가 충분히 글 못 쓰겠다고 징징거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맞아요. 에세이의 위대한 전통이 있죠. 저 역시 그런 작품 좋아합니다. 단지 갈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분위기에서 왜 이 작가는 자신의 이름을 들고나와 소설속에서 이러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는 거죠. 그러던 중 마침 그런 글을 올려주셔서 반갑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인터뷰에서 그런 말까지하고... 말씀하신대로 작가가 이렇게하는 개연성을 찾아야할 것 같네요. 근데 작가 자신이 화자로 등장하여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흐리는 작품이라면 어떤 작품이 있을까요? 생각나시면 몇 작품만 소개해 주시죠.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에 몰입하기를 즐기는 독자들은 종종 작중 인물이 아니라 작가 본인이 등장해서 이야기를 하면 방해를 받는 것 같다는 말씀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작가가 화자로 등장하는 작품이라고 하면 먼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가 떠오르네요. 흔히 ’오토픽션‘이라고 하는 장르의 소설이 다 그렇죠. W. G. 제발트 또한 본인이 화자로 등장하는 소설을 쓰고요. 밀란 쿤데라의 <느림>에도 본인이 직접 등장하죠. 이탈로 칼비노나 폴 오스터의 소설 중에도 그런 소설들이 있지만,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흐린다기보다는 메타 픽션적인 장치로서 그렇게 한다고 봐야 할 것 같고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건 엠마뉘엘 카레르의 작품인데요. <리모노프> <왕국> <적> <겨울 아이> <나 아닌 다른 삶> <요가> 등 중기 이후의 작품들은 모두 그런 형식을 갖고 있어요. 저는 그중에서 <리모노프>를 가장 좋아하는데요, 처음 읽으시기에는 <적>이 가장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참고해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또 제가 이러는 건, 처음 보는 것을 좀 의심하는 경향 때문일수도 있어요. 옌롄커가 유명한 작가임엔 틀림없지만 그래도 저는 처음 대하는 작가라 무조건 좋다고만 할 수 없고, 이렇게 책을 읽는 중에 서로 의견을 나누는 건 여기가 처음이죠. 다른 곳에선 다 읽고 리뷰 올리고 댓글 있으면 답글 올리고, 즉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된 다름에 하는 거잖아요. ㅋ
그럼요, 읽어 나가며 그때그때 드는 생각을 올릴 수 있다는 게 그믐의 장점인 것 같아요.
저도 인터뷰 질문처럼 왜 14세의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글을 썼는지 궁금했는데요, 은희경의 <새의 선물>에서 12세 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처럼 아이는 스스로 자기가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할 수 있어서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서술하기에 무리가 없고 그냥 단순한 관찰자로만 존재해도 부담이 없다는 장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책을 읽다보니 함께 읽기의 속도 조절을 못하고 뒷부분이 궁금해 한꺼번에 다 읽어버렸네요. 마지막 부분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이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해가 죽던 날>의 독서를 끝까지 마친 후에 다시 구간 별로 꼼꼼히 읽고 말을 얹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요. 생각보다 완독이 너무 느려져서 대화 진도가 많이 밀린 것 같습니다. 우선 전체적으로 책을 읽고 난 후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결말부가...대단하다...!!! (이러려고 그렇게... 바로 '이것'을 하려고..!) 그리고 하룻밤이 지나치게 길다... 저는 밤낮 관계 없이 일을 마친 후 책을 읽었는데요. 그러다보니 읽다가 졸기도 하고 졸다가 특정 부분에서 잠이 제대로 깨기도 했어요. 책을 읽으며 멍해진 정신 상태 때문에 혹시 내가 지금 몽유하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몽유'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으나, 그 현실과 꿈의 경계에 있는 어떤 상태 같은 게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바로 위에 '프리랜서'의 노동에 대한 이야기가 살짝 언급되었던 것 같은데, 극도의 피로와 극도의 한량함... 사이를 오가며 살고 있는 저에게 그와 같은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어제 꿨던 꿈에 있었던 일인지 그 전날 실제로 겪은 일인지' 잘 모르겠는 상태는 조금 흔하기도 하고요. 그런게 몽유를 겪는 사람들의 정신 상태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몽유'라는 특정 상태를 독자로 하여금 직접 감각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인데요. 그건 금정연 선생님께서 짚어주신 '문체', 그러니까 화자의 비유-사실을 나란히 배치하는 문체와 관련되어 생기는 효과 같기도 했어요. 동일한 그러나 약간의 차이만 있는 문장들이 계속해서 나란히 배치되다 보니까, 읽으면서 심하게 몽롱해지는 기분이 든달까요? 근데 또 밤이 안 끝나... 이 대혼돈의 밤이 도무지 끝나지 않는 갑갑함을 더욱 증폭시켜주는 그런 문체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이어서 구간별로 다시 한 번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여러분이 나눠주신 말씀을 연결해보도록 할게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금정연 선생님께서 특히 옌렌커의 고민에 집중해주시고, 또 스텔라님께서 그 부분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들려주시니 '옌렌커'의 등장이 더욱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작가의 징징거림은 우리가 소설 속에서까지 마주해야 하는 중대한 문제일까. 이는 작가의 과잉된 자의식의 표출인가, 아니면 글쓰기라는 행위 및 내용과 관계된 실존적(?) 문제인가...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옌렌커가 글을 쓸 수 없는 상황과 글을 쓸 수 있겠다고 믿게 되는 상황이 '몽유'와 관련되면서 작가의 징징거림(...)이 글쓰기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 같기도 해요. 말하자면 작가는 글쓰기를 철저히 현실의 층위에서 행하는 것인가?하는 질문에 대해 복잡하게 대답하고 있다는 느낌인 것이죠. 사실 글쓰기는, 나아가 문학은 현실의 산물이고 그것이 처한 조건(작가와 작품 모두) 역시 현실적 고민(생계의 문제 등등)과 연계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글을 써내지 못하면 저는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예요."라고 울부짖는 소설 속 옌렌커는 글을 쓰기 위해, 그로써 살기 위해 '몽유'라는 비현실적 차원으로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가요. 그런데 그 '몽유'라는 비현실적 상태는 이 진에서 일어난 현실의 '사건'이고, 그러한 현실을 자원 삼아(녠녠은 옌렌커가 지금껏 자신의 마을 이야기를 동원하여 소설을 썼다고 반복해서 말하는데, 가끔 이것이 우리의 현실을 '착취'하여 글을 썼다는 비난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작가가 이곳의 일을 글로 써주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부분에선 작가를 현실을 '기록'하여 역사화 하는 유일하게 중요한 인물로 취급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작가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글쓰기의 상태는 꿈과 현실 중 어디에 위치하는 것일까? 꿈과 현실의 '경계'라면 그 경계란 정확히 어디이며 무엇일까... 등등
착취라는 말이 굉장히 인상적으로 들립니다. 아, 그럴수도 있겠구나 하는. 작가의 숙명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 갑자기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오래 전 읽다가 결국 완독은 못했는데, 작가는 지인들에게 미움을 받을 각오를 하면서 그 책을 썼다고 하잖아요. 전 그런 작가가 크나우스고르만 있는 건 아닐 거라고 보는데 과연 그러면서까지 작가가 추구해야 하는 건 뭘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더군요. 예전에 조경란 작가도 작가는 욕먹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기도 했죠. 현실을 모태로 하지 않는 글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말씀하신 현실을 '기록'하여 역사화 하는 존재가 또한 작가가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드네요. 암튼 어제는 금정연님 올리신 글에 다소 흥분해서 두서없이 썼는데, 최가은님 덕분에 생각을 정돈할 수 있어서 좋았네요. 고맙습니다.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2주차 구간에 대한 감상입니다. 제5권부터 제8권까지 이어지는 내용인데요. "다른 사람들은 전부 몽유하고 있지만 우리는 깨어 있으니 이거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닐 수 없네. 자고 싶은 사람들도 잠을 못 자고 있다니까." (192) 본격적으로 몽유를 '천재일우의 기회'로 여기는 인간의 내밀하고 음침한 욕망들이 고개를 쳐드는 구간인 것 같아요. 이를 '천재일우의 기회'로 여기는 인물에는 녠녠의 아버지도 포함되는 것 같고요. 아버지는 사람들이 몽유하고 있는 틈을 타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려고 하니까요. 이것이 진정성이 담긴 행위라기보다 기회를 노린 사과임은 계획한대로 몽유-용서를 받지 못하자 그 고백이 거짓이었다고 둘러대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제 경우에 여기서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녠녠의 어머니가 미리 차를 보낸 사람들의 경우 아버지를 향한 용서를 쉽게 행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조금 전에 자네 아내가 녠녠을 시켜 우리에게 졸음을 막고 몽유를 방지하는 각성 차를 가져다주었네." 죽음을 다루는 사람이어서일까요? 앞서 @지혜 님께서 위즈안즈와 녠녠의 엄마가 지닌 공통점을 '죽음'과 '꽃'으로 엮어 짚어주시기도 했는데요. 아버지만큼이나 어머니도 매우 비범하고 기묘한 능력을 지닌 인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6권에선 본격적으로 길거리 자체가 몽유를 하기 시작하고, 말씀하신대로 옌렌커마저 몽유 상태에 빠집니다. 촌장과 촌장 아내는 물론이고, 앞서 많이 언급된 것처럼 진 정부까지도 몽유하기 시작하죠...(이들의 '황제 놀이'의 의미는 뒷부분에 가서야 더욱 흥미로워지는 것 같아요.) 이제 몽유는 사람마다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고요. 3년 간 남편의 병수발을 들던 아내가 남편을 살해한 경우, 글을 써내지 못하는 옌렌커에게 "이야기"가 생긴 경우, "알고 보니 몽유도 선물"(301)이란 것을 알게 되니까요. 8권에서는 장례용품점을 털러 온 강도들과 맞닥뜨린 녠녠이 기지를 발휘하여 이들을 외삼촌이 사는 동네인 부자 동네로 이끄는 장면이 나옵니다. 대혼란의 상황에서 사람들의 물욕과 폭력성은 거침없이 발휘되고요. 부자 동네에서 일하던 "중년의 가사 도우미"와 "경비원"이 이곳의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모습에 과몰입하면서는 이런 지옥이야말로 계급의 와해가 발생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인 걸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는데요... 아무튼 무엇보다 다시 읽을 땐 부제에 쓰인 시간에 유의하여 이야기를 읽게 보았어요. 해당 시간대의 어둠의 정도를 떠올려보면서요. 마을 주민들이 느꼈을 공포와 망측한 희열 같은 것이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도 같아요. 이 시간이란 게 지옥을 지옥처럼 느끼게 하는 주된 장치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어서 더욱 그런가봅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드디어 함께 읽기 마지막 3주차가 시작되었습니다! 모두가 몽유하는 어지러운 밤도 이제 끝을 향해 가고 있는데요, 그런데 이 밤이 끝이 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실제로 일경에 시작한 소설이 8권에서 오경이 지났는데도 아침이 오지 않습니다. 심지어 '무경'으로 접어들면 시간조차 흐리지 않는데요. 과연 이 혼란한 밤이 어떻게 끝을 맺게 될지, 끝이 있기나 한지, 앞서 뿌렸던 여러 떡밥 중 얼마나 회수 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예상을 벗어나는지 생각하면서 읽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작중은 무더운 여름밤인데 현실은 혹한이네요. 모쪼록 건강 조심하시고 마지막까지 감상, 질문, 밑줄, 기타 등등 마음껏 올려주세요!
제 9권 경후에 들어가면서 두 번째 문장(새들은 밤의 뇌 속에서 죽었습니다)을 읽고서 앞 권 들을 다시 다 살펴 보았어요. 각 권의 제목이 시작에 언급되었나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선명하게 시작에 언급한 부분은 여기밖에 없었어요. 그러면서 차례를 다시 살펴보았고 들새, 새들 그리고 몽유하는 사람과 깨어있는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경후에는 20분-10분 사이로 나누어지는데 (앞에도 마찬가지기는 하지만) 극적인 사건들이 휘몰아치듯이 일어나서 (진 밖 마을 사람들의 약탈, 삼륜차와 오토바이를 통한 진의 동서남북 이동, 진 밖에서의 상황) 숨가빴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해가 죽으면 진은 끝나는 거야. 해가 죽으면 진은 그걸로 끝이라고. 진이 정말로 끝난단 말이야." 책 제목을 새삼스레 이해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더 충격은.. 그 상황속으로 다시 돌아가는...으악.
방송을 세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세 번을 내리찍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귀가 굳은 채로 세 번을 계속 들었지요. 세상은 사라지고 날씨 예보 방송만 남아 있었습니다. 세상은 사라지고 그 검은 얼음 알갱이 같은 소리만 떨어져 내리찍고 있었습니다. 라디오를 껐습니다. 아버지는 검은 기둥처럼 다가올 새벽의 어둠 속에 어 있었습니다. "해가 죽으면 진은 끝나는 거야. 해가 죽으면 진은 그걸로 끝이라고. 진이 정말로 끝난단 말이야."
해가 죽던 날 _p.393_ 제 9권 경후 : 새들은 밤의 뇌 속에서 죽었다_,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어두운 낮의 검은색은 어제의 어두운 밤이 넘친 것이었습니다. 어젯밤은 애당초 끝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끝날 수 없는 것 같았습니다. 애당초 내일의 낮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과거의 어젯밤은 애초부터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밤이라는 시간의 구간이 영원히 끝없이 이어지는 검은 실타래 같았습니다. (...) 결국 아버지는 저와 엄마를 데리고 끝나지 않는 낮의 어둠 속에서 산비탈 아래 진에 있는 집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돌아갔습니다.
해가 죽던 날 _p.395_ 제 9권 경후 : 새들은 밤의 뇌 속에서 죽었다_,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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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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