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하신 것처럼 생각만 해도 속이 답답해지는 요즘인데요. 끝까지 소설을 읽은 제 감상은 ‘어쩌면 오히려 소설이 현실보다 나을 수 있겠다’였어요. 최소한 여기에는 사태를 해결하려고 목숨을 거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현실에서도 하루 빨리 많은 것들이 해결되기를 바라봅니다.
[이 계절의 소설_겨울] 『해가 죽던 날』 함께 읽기
D-29
금정연
최가은
@엘데의짐승 님, 그리고 금정연 선생님 또 이어서 다른 분들이 덧붙여 나눠주신 대화 매우 흥미롭게 읽었어요. "자신이 하는 행위의 의미를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거"다, 라는 말이 특히나 와닿는 요즘이네요. 알고도 행한다, 라는 냉소적 주체에 대한 진단이 지배적이었던 때를 기억하는데 어느샌가부터 의식조차 하지 못하면서 이루어지는 말과 행위가 너무나 많다는 생각도 들고요... 여러모로 이런저런 답답한 마음도 듭니다. 그리고 '해'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물론 저도 끝까지 다 읽은 입장에서 마지막 장면을 위해 '해'가 죽었어야 했고 그렇게 드러나야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뭐랄까 의식의 문제, 그리고 현 시국의 문제에 빗대어 생각해보니 '해'는 어떤 모두를 깨운다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계몽과 같은 걸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그렇게 생각해보면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아버지-해의 출현 이후 크게 변화 없는 ("세상이 다 조용했습니다. 505쪽) 마을의 모습이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오기도 하네요. 고전적 의미의 해가 더 이상 해로 기능하지 않는...
아린
남녀노소나 고위관리나 아니나 누구든 몽유에 빠지면 내면에있던 욕망이 나오는 구나 싶었어요.
지금은 실제로 꿈속에서 헤매는 게 아니라 현실에 살면서 몽유하는 구나 싶더라고요.
정보화 사회라는 속에 살면서 오히려 보고싶고 듣고싶은 것만 계속 취하다 보니 점점 눈과 귀가 멀고 몽유처럼 듣고싶은데로 보고싶은데로 소리치는 사회가 된 건 아닌가 싶어요.
금정연
정말 그렇네요. 필터 버블이라고도 하던데, 개인화된 필터링 서비스로 모두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듣는 현시대의 사람들이 과연 몽유와 얼마나 다 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아린
네.. 정보화 사회라고 하는데, 점점더 극단적인 사고방식으로 가는 거 같아서 아이러니 하네요.
정치이야기를 하는게 점점 더 어려워 지는 거 같아요. 예전에는 아.. 너는 그렇구나.. 이랬던게.. 아 넌 이제 내 편이 아니구나..이런식으로 점점 더 모든 것에서 내편과 니편으로 갈리는 거 같더라고요..
이게 말씀하신 필터 버블처럼 알고리즘에 벗어나지 못해서 점점 더 사고방식이 좁아지는 거 같습니다.
깜주
조금 다른 얘기지만 저도 읽으면서 그런 비슷한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우리는 이상(몽유)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몽유 속에서는 자신이 몽유하는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무의식에 감춰져 있던 자신의 욕망(혹은 자아)을 실현하게 돼요.
우리는 "현실과 현재에 존재"하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 마음 속의 관점이나 가치관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그것에 의해 행동을 결정"하니까요.
그래서 책 속에서의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종종 책 속 주인공이 오히려 몽유를 원하거나, 몽유 상태의 사람을 깨우지 말라고 하는 행동이 보이곤 하는데요.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자아 실현이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장애물(현실)을 제거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옌롄커가 몽유 상태에서는 새로운 이야기가 떠오르는 반면, 몽유에서 깨면 이야기를 못 쓸 것이라고 좌절하는 것처럼요.
"몽유에서 깬 상태"와 "몽유 상태"와의 차이는 영화 매트릭스의 "빨간약"과 "파란약"에 빗대어서 설명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몽유에서 깬 상태"든 "몽유 상태"이든 둘 다 인간의 본성(선과 악)이 드러나죠.
다른 점은 몽유 상태에서는 자신이 몽유 상태인 것과 다른 사람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의 이상이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고, 몽유에서 깬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현실을 인지한 채로 자신의 이상과 욕망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여러분들은 몽유에서 깬 상태와 몽유상태 중 어떤 상태로 살아가고 싶으신가요?
저는 고른다면 몽유상태를 선택하지 않을까 싶어요. 어차피 몽유상태이든 아니든 모두가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허상)"에서 살고 있는 건 마찬가지잖아요. 몽유상태에서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이상이나 가치를 실현할 수 있으니까요. 반면 깬 상태는 다른 사람의 시선 등이 장애로 작용해 이도 저도 아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인간의 본성(선과 악)은 공존하니 이왕이면 좀 더 단순하고 이상적인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깨어 있는 사람"들이 있어 이 세상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모두가 다른 이들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하게 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
일단 "몽유 상태"와 "깬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세상은 아시다시피.. 이 모양인 건 확실한데 말이죠.
인간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 한 둘다 도긴개긴일 것 같긴해요.
금정연
저도 소설을 읽으며, 그리고 말씀해주신 내용을 읽으며 여러 생각이 들었는데요. 한 가지는 확실한 것 같아요. 몽유 상태에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반란군을 배신하고 매트릭스로 들어가 스테이크를 먹으며 이게 가짜인 건 아는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했던 인물처럼요. 물론 그 행복 혹은 행복감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여야 할지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요.
엘데의짐승
저도 아마 몽유상태를 선택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보다 본능에 충실하고 욕망을 추구할 수 있는 어쩌면 억누르고 있는 사회 질서와 관념, 도덕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일종의 자유, 해방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모두 이런 몽유상태를 추구한다고 가정한다면 이곳은 또다른 형태의 현실이자 지옥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실도 지옥이라면 말입니다.
아린
사실 요즘은 제 생각이 과연 옳은 것인가??의심하고 있어요.
일반적이라는 것. 다들 그렇다는 것. 늘 그래왔다는 것. 원래 그랬다는 것.. 그런 것들이 정말 그래도 되는 것인가..?
지금 내 생각들이 몽유 상태인가 아닌가는 누가 판단 할 수 있는 가? 라는 생각이 들고..
어떤 집단에서는 어떤 생각들이 너무 당연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들이 또 다른 집단에서는 너무나 이상하고 무지성이라는 생각을 하니..
꿈에서 깨어난 상태는 과연 진짜 있는 것인지..요즘 판단하기가 힘드네요..
운틴
오늘 아침에 읽은 이성복 시인의 무한화서 116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자기 꿈속에서 헤매는 사람은 누구나 중생이라 하지요. 꿈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고, 현실은 꿈보다 더 지독한 꿈이에요. 시는 꿈이라는 현실과 현실이라는 꿈 사이에서 꾸는 더 짧은 꿈이에요."
요즘 현실보다 더 꿈 같은 일이 많이 일어나니 저도 몽유 상태와 깨어 있는 상태를 구분하기 어렵네요. 그래도 아버지가 끝까지 상황을 개선할 방책을 고민했던 것처럼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이 시점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금정연
말씀해주신 내용이 깊이 공감하면서, 일개 중생인 저로서는 내가 헤매는 곳이 꿈 속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다는 게 정말 어렵게 느껴집니다...
stella15
결국 몽유는 집단 무의식이었네요. 저도 얼마나 전 이 부분 읽었는데. 그러고보니 오래 전, 박범신 작가께서 하셨던 말씀도 어렴풋이 생각나기도 하네요. 소설은 가감없이 나를 풀어놓는 거라고 했던가? 윤리나 도덕의 잣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가차없이 드러내는 거라고 했던. 그렇다면 이 작품은 그에 충실한 작품이란 생각이 들어요. 더구나 개인에서 집단으로 확장시키잖아요. 그러기 쉽지 않죠. 요즘 소설이 개인에 집중해있는 것을 보면. 암튼 탁월한 작가란 생각은 드네요.
금정연
말씀하신 것처럼 개인에서 집단으로 사태를 확장시키면서도 능수능란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가 과연 거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소설은 윤리나 도덕의 잣대로 쓰는 게 아니라는 말씀에도 공감합니다.
엘데의짐승
“ 세상이 사라지고 그저 허상의 기운이 허상의 어둠 속을 흐르고 있는 것처럼 이 밤에 이 세상이 죽은 것처럼 변해 있었습니다. 세상이 사라지고 그저 죽은 묘지와 황야만 남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나 고요한 탓에 세상이 원래 있지 않았던 온갖 소리와 움직임만 있게 되었습니다. 그 소리와 움직임이 하나하나 쌓여 죽은 듯한 밤의 고요와 적막을 더하고 있었습니다.월도月刀와 성도星刀가 야밤의 허공을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이 밤에 공포와 두려움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
『해가 죽던 날』 p289,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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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데의짐승
해가 죽으면 진은 끝나는 거야. 해가 죽으면 진은 그걸로 끝이라고, 진이 정말로 끝난단 말이야
『해가 죽던 날』 p393,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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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데의짐승
어디 가서 해를 가져다 사람들을 깨우지? 해가 나기만 하면 밤이 지나고 사람들이 잠에서 깰 수 있을 텐데.....
『해가 죽던 날』 p442,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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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로 지정된 대화
금정연
10권에서는 세상이 정말로 죽고("진은 정말로 새벽 6시에 죽었습니다. 세상은 정말로 새벽 6시에 죽었습니다") 봉기한 두 세력 간에 전쟁이 벌어집니다. 하나는 이자성의 난을 연상케하는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공산혁명을 꿈꾸는 세력인데요. 녠녠의 말처럼 가히 혼란한 밤의 절정이라고 할 법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두 세력이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을 선동하며 상대편을 죽이는 자에게 상으로 관직을 주는지 땅을 주는지가 다를 뿐이지요. 녠녠은 이렇게 말합니다.
"동서 양쪽에서는 그 누구도 지금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지금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현재를 원하지 않고 과거와 미래의 시간만을 원하는 대전이었지요. 이는 미래와 과거, 책에서 말하는 미래와 역사의 원한에 의한 살육이 벌어지는 전쟁이었습니다. 과거와 미래를 위해 현재 벌이는 싸움과 죽임의 대전이었지요. 이해 이달 이날 밤인 현재에는 사람들 모두 이 모든 것이 악몽이 가져온 것임을 잊고 있었습니다. 현재는 없었습니다. 현재는 사라져버렸습니다. 옌롄커의 책에서 말한 것처럼 미래와 과거의 시간과 역사가 도래한 것 같았습니다. 이제 현재는 악몽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437-438쪽)
옌롄커는 자신의 소설이 중국인의 정신적 자질과 국민성에 대한 비판이지, 중국의 현 사회체제를 비판하는 게 아니라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이 부분을 보면 확실히 어떤 부분을 지적하고 있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중국인'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과거와 미래의 전쟁 사이에서 사라지는 현재, 지금의 삶. 과연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지 묻게 됩니다.
엘데의짐승
읽는 내내 중국 근대사와 관련된 사건들을 떠올리며 그 역사의 단편을 빗대어 중국의 체제를 비판하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만 책을 다 읽고나서 드는 생각은 이 모습이 과연 중국만의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대화가 가져온 문화의 소멸과 패러다임의 변화는 인간의 삶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 과정에 무엇이 사라진건지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게 작가가 이야기 하는 이 책의 주제인 것 같습니다.
금정연
소설에서 그리는 한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보편성을 갖듯 한 국가나 사회에 대한 이야기도 보편성을 갖는 것 같아요. 시간이 갈수록 더욱 평평해지고 좁아지는 세계에서는 더욱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욕망의 획일화라고 할까요. 오늘 아침 뉴스를 보는데도 자꾸 소설 생각이 나더라고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금정연
3주간의 함께 읽기도 이제 막바지네요! 드디어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소설의 마지막 장인 11권에 이르렀습니다. 10권의 마지막에서 아버지는 "어디 가서 해를 가져다 사람들을 깨우지? 해가 나기만 하면 밤이 지나고 사람들이 잠에서 깰 수 있을 텐데..." 라고 말하며 "몽유의 내부를 향해" 동시에 "몽유 외부의 깨어 있는 방향을 향해" 뛰쳐나가는데요. 과연 아버지는 해를 가져다 사람들을 깨울 수 있을까요? 옌롄커는 이 거대하고 혼란한 소설을 어떻게 끝맺으려고 하는 걸까요? 이제 그 대답을 읽으실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