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앞으로 4주 동안 옌롄커의 <해가 죽던 날>을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눌 금정연입니다. 반갑습니다!
옌롄커는 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국내에도 <당씨 마을의 꿈> <풍아송> <레닌의 키스> <그해 여름 끝> <일광유년> 등 의외로 많은 작품이 번역되어 있는데요. 그중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2022년 국내에서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대중과 평단의 평가 모두 '폭망'했다는 건 비밀...).
하룻밤 동안 한 마을이 '몽유'에 휩싸여 서로 죽고죽이는 지옥도가 펼쳐집니다. '신세계'라는 이름의 장례용품점을 운영하는 주인공 가족에게는 어두운 비밀이 있는데요, 모두 잠든 세상에서 홀로 깨어 있는 이들 가족이 마을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아침이 되었지만 해는 뜨지 않고 마을은 악몽 속에서 깨어날 줄을 모릅니다. 그런 하룻밤의 이야기가 스스로 '바보'라고 칭하는 열네 살 소년의 눈을 통해 그려집니다.
서구 평론가들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하룻밤 동안 일어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후알 룰포의 <페드로 파라모>(유령이나 다른 없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마을의 이야기라는 점에서)와 비교하기도 하는데요. 그보다는 훨씬 동양적이고 주술적이면서도 묘하게 현대적인 작품이에요. 중간중간 마치 좀비 소설을 읽는 것 같은 스릴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분량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500쪽이 조금 넘네요. 서문에서 느껴지는 묘하게 옛날 느낌이 나는 문체도 진입장벽이 될 수 있어요. 하지만 일단 그 부분을 넘기시면 그 다음부터는 나도 모르게 작품 속으로 푹 빠지게 될 거예요. 제가 장답합니다!
오늘부터 3주 동안 책을 함께 읽고, 마지막 4주차에는 읽은 내용에 대해 함께 이야기나누는 시간을 가질 예정인데요. 3주 간의 읽기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주 차 : 함께 읽기
*12/27~12/29
앞: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제1권 일경: 들새들이 사람의 뇌 속으로 날아들었다
제2권 이경·상: 새들이 그곳을 어지럽게 날고 있었다
*12/30~1/2
제3권 이경·하: 새들이 그곳에 둥지를 틀었다
제4권 삼경: 새들이 그곳에 알을 낳았다
2주 차 : 함께 읽기
*1/3~1/5
제5권 사경·상: 새들이 그곳에서 알을 품었다
제6권 사경·하: 둥지 가득 새들이 부화했다
*1/6~1/9
제7권 오경·상: 큰 새와 작은 새들이 어지럽게 날고 있었다
제8권 오경·하: 산 사람도 있고 죽은 사람도 있었다
3주 차 : 함께 읽기
*1/10~1/12
제9권 경후: 새들은 밤의 뇌 속에서 죽었다
제10권 무경: 아직 한 마리가 살아 있었다
*1/13~1/16
제11권 상승: 마지막 한 마리 큰 새가 날아가버렸다
뒤: 또 무슨 말을 할까요
저와 최가은 평론가가 틈틈이 이런저런 질문이나 가이드를 올릴게요. 여러분은 소설을 읽으며 들었던 감상, 인상 깊었던 구절, 떠오르는 다른 작품이나 궁금한 것들을 자유롭게 올려주시면 됩니다. 개인적으로 무척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라 다른 분들의 감상이 더욱 궁금한데요.
그럼 지금부터 함께 책을 펼쳐볼까요?
[이 계절의 소설_겨울] 『해가 죽던 날』 함께 읽기
D-29
화제로 지정된 대화
금정연
리키
안녕하세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중국문학을 많이 접해보지 않아서 조금 낯설기도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중국 작가는 찬쉐 작가님입니다. 그리고 이 분 옌렌커 작가님은 기대되는 작가님이십니다^^
전작으로 일광유년을 읽었습니다^^ 늦었지만 잘 합류해 보겠습니다
아린
네.. 저도 중국문학은 많이 안 읽어봤고..찬쉐 작가님 책을 읽다말다..하고 그랬던거 같아요..
이번에 새롭게 잘 접해보지 않은 책을 읽게 되어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대만 작가님 책에 나름 흥미가 있어서 읽고 있어요
금정연
반갑습니다! 찬쉐 작가님의 <황니가>를 보고 충격 받았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네요. 병(혹은 몽유)가 퍼지는 마을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해가 죽던 날>과 <일광유년>을 비교하면서 읽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요.
아린
사실 제가 찬쉐찬쉐..해서..처음으로 읽은 책이 황니가 였거든요.. 그런데 읽어도 읽어도..뭐지????너무 당혹스러워 읽다 포기했어요.. 이 책을 다 읽고 황니가를 읽으면 ..완독할 수 있을 까요???ㅎ
금정연
찬쉐 작품과 옌롄커의 작품은 비슷하면서도 다르지만(찬쉐가 좀 더 불친절한 느낌이에요 저에게는), 이 소설을 읽고 나면 <황니가>도 조금은 수월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엘데의짐승
책 소개 고맙습니다. 중국 작가는 위화 이후로는 처음 읽어보는 작가입니다.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이번에 처음 접하게 되네요.. 두 분 도움 받아 제대로 책을 읽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금정연
반갑습니다! 위화를 언급해주셔서 위화와 옌롄커 모두 매혈을 주제로 소설을 썼다는 사실이 떠올랐어요.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와 옌롄커의 <딩씨 마을의 꿈>이 그것인데요. 위화의 소설이 매혈을 해서 생계를 꾸리는 허삼관과 그 가족의 눈물겨운 이야기라면, 옌롄커의 소설은 매혈 과정에서 주삿바늘과 약솜을 여러 사람에게 무분별하게 재사용하며 마을 사람들이 에이즈에 집단 감염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일종의 사회 고발 소설입니다. 바로 그것이 두 작가의 차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네요!
엘데의짐승
아 새로운 지식 하나 쌓아 갑니다.. ^^
화제로 지정된 대화
최가은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부터 <해가 죽던 날>을 함께 읽을 최가은이라고 합니다. 금정연 선생님의 소개 글을 보니 책을 읽어나갈 시간이 기대되네요! 다들 독서 경험 나누면서 연말 연초 즐거운 시간 보내요. 🙂 내일 첫 부분 읽기와 함께 다시 오겠습니다~~!
달콤한유자씨
책 잘 받았습니다!
새삼 책의 두께에 놀라게 되네요ㅎㅎ
앞으로 읽어나갈 시간이 기대됩니다!
금정연
저도 처음에는 두께에 조금 기가 죽었지만 읽다 보니 어느 순간 줄어드는 페이지를 아쉬워하게 되더라고요!
운틴
1주차 분량을 지금 막 읽었습니다. 옌렌커 책은 처음인데 충격적입니다. 위화를 뛰어넘은 작가네요. 사람들이 몽유 상태로 돌아다니다가 사고로 죽거나 깨어나는 내용은 장자의 호접몽이 연상됩니다. 몽유인 사람을 지켜보는 아이가 없다면 뭐가 꿈이고 어디가 생시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매장을 금지하고 화장을 장려하는 문화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매장을 고발하는 아버지와 화장장을 운영하는 외삼촌의 이야기도 긴장하면서 읽었습니다. 고기를 태울 때 기름이 나오는 것처럼 시신을 태울 때도 기름이 나오고 그 기름으로 돈을 벌다니요. 있을 법한 이야기지만 당 차원에서 장려하는 사업으로 이득을 챙기는 걸 보며(그것도 시신을 이용하여) 어느 사회든 이런 사람이 있게 마련이라는 지점에 이르면 인간성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참 절망스럽습니다.
금정연
저도 말씀해주신 장자의 호접몽 이야기를 떠올렸어요. 뒤로 갈수록 점점 몽유와 깨어 있음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것 또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매장에서 화장으로 국가 주도로 풍속을 바꾸며 거기서 얻어지는 부산물-사람 기름-이 이익을 가져다주는 부산물로 취급된다는 게 충격적이기도 하고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금정연
소설은 ‘앞: 제 말 좀 들어주세요‘라는 다소 특이한 이름의 장으로 시작합니다. ‘앞’은 프롤로그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제 말 좀 들어주세요’는 프롤로그의 제목이고, 제목처럼 화자가 누군가에게 간청하는 것이 프롤로그의 내용입니다.
다짜고짜 하소연으로 시작해요. 한 마을을 위해서, 작은 진(중국의 행정구역으로 적당히 우리나라의 읍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을 위하서, 산맥과 세계를 위해서 왔다고 하는데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지?
조금만 인내심을 가져보지요. 화자가 그것을 간청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아직 우리에겐 500페이지가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까요.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하룻밤의 이야기가 남은 소설에서 이어질 것 같다고 예상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스스로 바보라고 자처하는 어린 화자를 통해 서술될 예정인데요. 우리가 그의 눈과 귀와 코(점차 드러나겠지만 후각이 비중이 무척 높은 소설입니다) 입을 통해 이야기를 경험하는만큼 그가 어떤 화자인지 알아보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요. 직접 들어볼까요?
“저는 가장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로 여러 신께 그 어두운 밤과 밝은 대낮에 일어났던 나무의 잔가지처럼 세밀한 사정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 말 가운데 어딘가 정확하지 못하거나 약간 틀린 부분이 있다면 그건 어린 제가 성실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어린아이인 제가 너무 흥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 제 머리는 원래부터 진흙탕처럼 멍청하고 잘 돌아가지 않습니다. 말도 두서가 없고 어눌합니다. 사람이 있든 없든 자기 말만 하길 좋아합니다. 그렇게 끊이지 않고 한마디 또 한마디 말을 이어가길 좋아합니다. 반 마디에 또 반 마디가 이어지기도 하지요. (...) 저는 멍청하기 때문에 그 어지럽고 복잡한 일들을 두서를 갖춰 조리 있게 풀어내지 못합니다. 말이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이치를 갖지 못합니다.”
음, 스스로 멍청하다고는 하지만 최소한 자기객관화가 잘 되어 있다고는 할 수 있겠네요. 서문을 읽으면 아시겠지만 화자는 분명 두서도 없고 조리도 없는 말을 끊이지 않고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지요. 그리고 그게 바로 이 소설이 500페이지나 되는 이유입니다... 그럼 왜 이런 소설을 읽어야 하냐고요?
“하지만 신들이시여-- 보살과 주님이시여-- 나한과 상제들이시여-- 제발 저를 진짜 바보로 여기지는 말아주십시오. 때로 저는 머리가 아주 명징해지기도 합니다. 물처럼 맑아지지요. 파란 하늘 같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지금 제 머리는 천창을 연 것처럼 환합니다. 하늘을 볼 수 있고 땅도 볼 수 있습니다. 그날 밤 벌어진 일의 진정한 의미를 볼 수 있습니다. 진실하고 분명하게 전부 제 머릿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흔히 ’믿을 수 없는 화자‘라는 말을 하지요. 좁게 말하면 일종의 서술 트릭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넓게 보면 현대 소설의 모든 화자는 사실 대부분 믿을 수 없습니다(물론 이건 약간 다른 이야기이긴 합니다). 그리고 지금 다짜고짜 하늘을 향해 하소연을 늘어놓고 있는 우리의 화자 역시 너무 믿을 수 없는 느낌이지요.
하지만 이 긴 소설을 굳이 이런 형식의 프롤로그로 시작하는 이유를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이것이 하늘을 향한 화자의 간청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소설을 펼친 독자에게 하는 작가의 요청이라고 생각해요. 비록 이것이 다소 혼란스럽고 두서 없이 중언부언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어떤 진실은 이런 방식으로만 말해질 수 있다. 그러니 “인내심을 갖고 제 얘기를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짜증 내지 마시고 귀찮아하지도 마시길 바랍니다. 하늘과 땅처럼 크고 하늘과 땅처럼 올바른 일이니까요.” 바로 첫 페이지에서 너무나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요.
서문을 조금 더 읽으면 재미있는 부분이 나와요. 화자의 옆집에 바로 소설가 옌롄커가 살고 있다는 내용인데요, 유명한 작가인 옌롄커는 그러나 지금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없어 절망하고 있습니다. 펜대를 통째로 아작아작 씹고, 머리를 벽에다 쾅쾅 소리가 나도록 마구 부딪히며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치고 있지요. 그는 쓰고자 하는 글을 쓸 수 없어 죽고 싶은 마음과 혼란만 남은 상태로 유령처럼 호수를 향해 걸어갔고, 그 모습을 본 화자가 혼자 50~60리의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이 산꼭대기로 올라오기로 결심합니다. ”저의 마을, 그 진을 내려다보기 위해서, 우리의 그 땅과 그 땅 위의 사람들, 그리고 옌롄커를 살펴보고 여러분께 그날 밤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드리기 위헤서”.
그리고 곧바로 이렇게 덧붙이면서 하소연은 끝이 납니다. “여러 신이시여, 저희 마을과 진과 사람들을 지켜주십시오. 그곳의 어두운 밤과 환한 낮을 지켜주십시오. 저희 진에 사는 고양이와 개들을 지켜주십시오. 글재주가 고갈된 옌롄커를 지켜주십시오. 그에게 영감과 하늘의 깨달음을 주십시오. 그에게 고갈되지 않는 하늘의 먹과 하늘의 종이를 내려주십시오. 그로 하여금 계속 글을 쓰고 계속 살아 있게 해주십시오. 그에게 사나흘 내에 그 <사람의 밤> 이야기를 써내고, 우리 집안 전체의 이야기를 그 안에 포함시킬 수 있게 해주십시오.”
여기에는 기묘한 전환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분명 한 마을과 작은 진, 산맥과 세계를 위해서 왔다고 했는데 끝에는 그 진에서 자신의 옆집에 사는 옌롄커가 글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몇 번이고 요청하고 있어요. 이건 얼핏 작가의 고갈(writer's block)을 곧장 세계의 종말로 등치시키는 작가의 자의식 과잉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중국이라는 사회에서 살아가며 몸으로 겪는 여러 부조리와 병폐를 작품으로 널리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지만 안팎의 여러이유로 쓸 수 없어 절망하던 옌롄커 본인이 그것을 ‘사실주의’적인 방식이 아닌 다른 층위에서--그러나 똑같이 ‘진실하게‘-- 쓰기 위해 녠녠이라는 어린-바보 화자를 필요로 했고, 그것을 서문에서 간접적으로-그러나 동시에 직접적으로 일러두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음... 아니면 제가 서문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지금 스스로 두서 없이 어눌한 말을 한마디 또 한마디 이어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고요.
아무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해요. 다소 뜬금없어 보일 수도 있고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서문이 실은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서문에서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사정은 남은 소설을 통해 충분히
그려질 테니 조급해 할 필요는 없다는 것. 이런, 간단히 말한다는 게 그만 주절주절 너무 길어져버렸네요...
엘데의짐승
이런 프롤로그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본인의 말이지만 타인의 말을 빌려 전달하는 이 독특한 형식으로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 더 인상적이면서도 무게감 있게 전달하려는 의도를 잘 전달한 것 같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읽었지만 언급해 주셔서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물오름달
저는 주말이 되어서야 책을 시작했는데, 프롤로그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작가의 자의식 과잉이라고 느끼기 보다는 예렌커가 써야하는 이야기가 그정도로 중요하단 거야? 도대체 뭔데? 뭐길래 이렇게 하는 거야?라며 궁금증과 동시에 집중이 확 되어서 좋았습니다.
금정연
맞아요. 과연 그 중요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울러 옌롄커가 아직 문학의 힘을 믿고 있는 작가라는 생각도 들고요.
밍묭
프롤로그를 읽는데 작가의 이름이 나와서 표지를 몇 번이나 번갈아가며 봤는지 모르겠어요ㅋㅋ 프롤로그를 읽고 어쩌면 이건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일부 녹여낸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금정연
프롤로그를 지나 본문에서도 옌롄커가 감초 조연으로 제법 등장하는데요, 글을 못 쓰겠다고 괴로워하다가도 (몽유에 빠져) 드디어 쓸 게 생겼다고 기뻐하는 모습이... 이건 옌롄커 본인의 모습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모든 소설에는 작가의 이야기가 어떤 방식으로든 녹아 있게 마련이지만 같은 이름을 가진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더욱 도드라지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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