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02.민들레 와인 - 레이 브래드버리

D-29
신아님의 대화: 저는 이제 10장까지 다 읽었습니다. 솔직히 어떤 맥락에서 SF소설로 분류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아직 이야기 자체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이라고 여겨지기도 하니 좀더 두고 봐야 겠습니다. 여름에 읽었다면 너무 좋았을 것 같아요. 여름의 공기, 온도, 대기, 바람, 태양, 소리 등등의 여름 묘사가 너무너무 탁월한데… 이 책을 읽고 있는 저의 현실은 너무 춥네요. ㅠㅠ 푹푹 찌는 여름이 오면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작가의 다른 책을 읽었을 때도 똑같이 느꼈던 부분인데, 극작가로서의 특징이 여기서도 많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소설의 문장이라기 보다는 대본의 지문을 읽는 듯한 서술방식이 종종 등장합니다. 연출이 더해지면 완성도나 독자의 이해도가 더 높아질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앞서 말한 여름을 묘사한 문장들은 머릿속으로 자연스럽게 장면이 그려짐으로서 독자 스스로 연출이 가능한데, 2장에 나오는 ‘그것’은 몇 번을 되풀이해서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작가 본인은 분명 뭔가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보이는” 때가 있는가 하면, 그게 어려울 때도 있다는 거죠. 그런 부분에서는 각자의 상상으로 그려가야 하는 영역을 많이 남겨둔 것 같기도 합니다.
저도 다 읽지는 않았지만 20장까지 읽고 보니 SF는 아니고 작가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에 약간의 환상과 상상력을 가미한 것 같네요. 레이 브래드버리 본인의 문체와 묘사력 덕인지 아니면 1930년대라는 거리감 있는 시대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편으로는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동화 속에 나오는 마법의 숲을 보는 것처럼 현실과 상상 사이의 경계를 걷는 느낌이 계속 느껴지더군요. 여름에 겪게 되는 사건과 거기서 느끼는 감상과 기억을 매 장마다 중복된다고 느끼지 않으면서도 구체적으로 풀어 쓰는 걸 보며 확실히 작가들은 세상을 다르게 본다는 게 느껴졌어요. 살면서 기록이나 사진을 찍더라도 자신 스스로도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잊혀지거나 왜곡되기 마련이고, 그 당시에 느낀 감정들도 희미해지죠. 작가가 24살부터 36살까지 쉬지 않고 매일 할아버지의 집에 찾아가 기억을 되새겼다는 서문의 문장이 어떤 의미인지 더 깊이 다가오네요.
사람들이 석양을 좋아하는 건 나타났다 사라지기 때문이에요. (…) 석양이 사라지지 않아 지겨워진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슬픈 일이에요.
민들레 와인 13장,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애리 옮김
바로 이 신비,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이 대지를 장악하지만 다시 대지가 인간을 장악하는 신비가 더글러스를 사로잡았다. 그는 도시가 결코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 도시는 단지 고요한 위험 속에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도시는 잔디 깎는 기계, 살충제, 절단기로 무장하고 문명이 허용하는 한 끊임없이 둥둥 떠 흘러가고 있지만 집마다 이미 언제라도 초록 물결에 영원히 가라앉을 태세였다. 그때가 되면 마지막 인간이 멈추고 그의 잔디 깎는 기계와 모종삽은 모두 녹이 슬어 시리얼처럼 부서져 버릴 것이다.
민들레 와인 4장 p.40,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애리 옮김
샌더슨 씨는 태양이 작열하는 문가에 서서 뭔가를 유심히 듣고 있었다. 그는 오래전으로부터, 꿈에 찬 소년 시절로부터 들려 오는 그 소리를 기억했다. 아름다운 동물들이 하늘 아래서 달리다 덤불 사이를 뚫고 나무 밑으로 멀리 사라지면서 남기는 부드러운 메아리 소리였다.
민들레 와인 5장 p.51,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애리 옮김
삶의 근원적인 외로움에 그는 휘청였다. 어머니도 혼자다. 어머니는 결혼의 신성함에도, 가족에게도, 사랑의 보호에도 의지할 수 없다. 그렇다고 미국 헌법이나 시 경찰에게 의지할 수도 없다. 바로 이 순간 어머니는 자신의 마음 말고는 아무 데도 의지할 수 없다. 그러나 마음속에도 통제할 수 없는 혐오감과 두려움만이 있다. 이 순간 그것은 개인의 문제이며 개인이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그는 혼자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거기서 출발해야 했다.
민들레 와인 10장 p.75,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애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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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바보야!" 더글러스가 말했다. "난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거든, 넌 정말 영리하구나! 그건 사실이야. 노인들은 아이였던 적이 없어!" "그건 좀 슬픈 일이야." 톰이 조용히 앉아서 말했다. "우리가 노인들을 도와줄 길이 없어."
민들레 와인 16장 p.13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애리 옮김
"어디서도 누구도 이긴 사람은 없어. 전쟁에서 승리란 없단다, 찰리야. 항상 패배만 있을 뿐이야. 마지막으로 패배한 사람이 협상을 요구할 뿐이지. 내가 기억하는 것이라곤 수많은 패배와 슬픔뿐이야. 전쟁이 끝난 것만 좋은 일이야. 전쟁에서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전쟁을 끝내는 거란다. 찰리야. 총과는 아무 상관이 없단다."
민들레 와인 17장 p.14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애리 옮김
"그래, 그런데 인생도 행복한 결말이야?" "밤마다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든다는 것뿐이야, 형. 그게 하루에 한 번 있는 행복한 결말이야. 그 다음 날 아침이면 어쩜 모든 게 엉망이 될지도 몰라. 하지만 그 다음 날도 밤이 되면 잠자리에 들 거고 한동안 누워 있으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민들레 와인 29장 p.247,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애리 옮김
11장에서 20장까지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읽고, 현재는 28장을 읽는 중이에요. 13장의 행복 기계 이야기는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한 부분이라고 느꼈습니다. '행복하고 좋은 것들은 그것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가치 있다.'는 레나 부인의 말을 떠올리니 이 책은 여름에 대한 감상과 더불어 여름을 겪으며 지나가는 것/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모음집이더군요. 벤틀리 부인의 젊음, 프리라이 대령의 기억, 마을의 전동차들이 시간이 지나며 사라지는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5장의 벤틀리 부인 이야기가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었어요. 벤틀리 부인이 아이들을 만났을 때 친절하게 대하긴 해도 격식과 나이로 인해 그녀와 아이들 사이에 거리감이 계속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골동품들로 자신의 젊음을 보여주려다가 부정 당하고 이후 자신을 돌아보며 죽은 남편과 머릿속으로 대화하는 장면은 '나'의 존재와 연속성을 생각해보게 하더군요. 이후 그녀가 깨달음을 얻어 물건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서 오히려 아이들과 어울리게 되는 모습.. 작가는 사람이 죽음을 의식해 두려워하고 겁낼수록 죽음이 삶을 지배하게 되듯, 자신의 나이와 늙음을 의식하고 현재를 거부할 때가 진정으로 늙어가는 순간임을 말하고 싶었나 봅니다. 행복기계의 일화처럼 젊음이 가치 있는 이유는 그 시기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인데,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과거에만 목 메느라 지금 주어진 현실을 흘려보내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톰과 더그처럼 속속들이 여름을 즐기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아이들의 수준으로 대화하고, 현재를 온전히 느끼는 것이야말로 나이를 불문하고 진정으로 젊게 사는 것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달콤한유자씨님의 문장 수집: "삶의 근원적인 외로움에 그는 휘청였다. 어머니도 혼자다. 어머니는 결혼의 신성함에도, 가족에게도, 사랑의 보호에도 의지할 수 없다. 그렇다고 미국 헌법이나 시 경찰에게 의지할 수도 없다. 바로 이 순간 어머니는 자신의 마음 말고는 아무 데도 의지할 수 없다. 그러나 마음속에도 통제할 수 없는 혐오감과 두려움만이 있다. 이 순간 그것은 개인의 문제이며 개인이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그는 혼자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거기서 출발해야 했다."
저도 이 글에 밑줄을 쳤어요. 지금처럼 위험한 상황이 아니어도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서 더 아프게 눌러 담는, 깊고 깊은 마음 아래에 꾹꾹 눌러담아 꺼낼 수 없는 감정들의 심연이 있음을, 그 심연을 꺼내 놓을 수 없는 엄마의 고독을 느낍니다.
"아무리 과거의 당신으로 남아 있고 싶어도, 당신은 현재, 여기에 있는 당신일 뿐이야. 시간은 최면을 거는 거야. 당신이 아홉 살 때 늘 아홉 살일 줄 알았지. 서른 살 때는 그 빛나는 중년의 끝에 영원히 머물러 있을 줄 알았지. 그러고 나서 일흔이 되면 영원히 일흔인 거야. 당신은 현재에 있어. 가끔 젊어 보이다가 다시 늙어 보이지만, 이제 다른 당신은 없는 거야."
민들레 와인 p.127,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애리 옮김
그들은 마을을 등지고 언덕 위에 앉아 있었다. 그들 주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무 밑은 동굴 속처럼 시원했다. 저 멀리 마을은 햇빛을 받아 후끈 달아 있고, 창문들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더글러스는 마을로 돌아가고 싶었다. 마을에만 가면 그 무게, 그 집들, 그 덩치로 존을 에워싸고 도망가지 못하게 해 줄 것 같았다.
민들레 와인 p.170,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애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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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울고 싶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것뿐이야. 그냥 한참 울고 나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그러면 행복한 결말이 와. 그리고 밖으로 나가 다시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면 돼. 그게 이해의 시작이야. 포레스터 씨는 한참 울고 주위를 둘러본 다음 이제는 모든 게 끝낫고 다시 아침이 왔다는 걸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어. 오후 5시에라도 말이야."
민들레 와인 29장 p.248,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애리 옮김
은화님의 문장 수집: "그들은 마을을 등지고 언덕 위에 앉아 있었다. 그들 주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무 밑은 동굴 속처럼 시원했다. 저 멀리 마을은 햇빛을 받아 후끈 달아 있고, 창문들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더글러스는 마을로 돌아가고 싶었다. 마을에만 가면 그 무게, 그 집들, 그 덩치로 존을 에워싸고 도망가지 못하게 해 줄 것 같았다."
가장 친한 친구가 이사 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마음을 잘 담아낸 문장이라고 느꼈습니다. 겉으로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사실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 하지만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제외한 세상 누군가가 나서서 어떻게든 막아줬으면 하는 마음, 자신과의 추억이 친구에게 약점이 되어 그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21장 전체에 걸쳐서 느껴졌어요. 떠날 때가 되어서야 마을의 창문 모양이 눈에 밟히고 친구의 눈동자 색이 어떤 색이었는지 기억하게 되는 모습. 서로를 잊지도, 잊히고 싶지도 않아 어떻게든 기억하기 위해 마지막 기차를 타기 직전까지 놀다가 헤어지는 모습을 보며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초등학생 때 맞은편 집에 이웃으로 나이도 같고, 취향도 똑같았던 남자애가 이사를 와 방과 후면 서로의 집에 놀러 가거나 같이 동네를 놀러 다녔어요. 정말 친했고 가까웠는데 이사를 가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괜히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요즘이라면 서로 핸드폰 번호라도 남겨서 연락이라도 해보겠지만 그때는 핸드폰이 없던 때라 이후에 연락은 못했네요. 어린 나이였지만 그 당시에도 이미 속으로는 마지막 날 헤어지는 순간에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만나자, 다시 연락하자'라고 서로 헤어지며 말 하지만 결국 다시 보지 못할 것을 아는 직감이랄까요. 더글러스가 존이 떠나기 직전까지 마지막 놀이를 할 때 서로의 멈춘 모습을 조각상 보듯 찬찬히 훑어 본 것은 그런 감정선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감각과 기억이라는 건 시간이 지나면 장난을 치기 때문에 '자신이 알던 더글러스, 자신이 알던 존'에서 조금씩 멀어져 '이 모습, 저 모습이 짜깁기 된 친했던 누군가'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친했지만 저도 지금은 그 친구에 대한 기억 중 남은 건 거의 없어요. 얼굴도, 이름도, 체형도, 옷도 기억에서 다 사라지고 그저 정말 친했던 친구라는 앙상한 최소한의 뼈대만 남았더군요. 그걸 더글러스도 존도 알았기에 그동안 대충 보고, 대충 기억해 온 친구의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기억에 담아두고자 했던 것 같네요.
"중요한 건 새로운 부분이야. 난 오늘 죽어 가고 있는 게 아니야. 가족이 있는 사람은 죽지 않아. 난 오랫동안 너희 곁에 있을 거야. 지금부터 천 년이 흐르면 이 마을 전체에 퍼진 내 자손들이 유칼리나무 그늘 아래 앉아 시큼한 사과를 먹을 거야. 그게 슬픔에 잠긴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이야."
민들레 와인 32장 p.289,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애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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