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화님의 문장 수집: "그들은 마을을 등지고 언덕 위에 앉아 있었다. 그들 주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무 밑은 동굴 속처럼 시원했다. 저 멀리 마을은 햇빛을 받아 후끈 달아 있고, 창문들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더글러스는 마을로 돌아가고 싶었다. 마을에만 가면 그 무게, 그 집들, 그 덩치로 존을 에워싸고 도망가지 못하게 해 줄 것 같았다."
가장 친한 친구가 이사 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마음을 잘 담아낸 문장이라고 느꼈습니다. 겉으로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사실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 하지만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제외한 세상 누군가가 나서서 어떻게든 막아줬으면 하는 마음, 자신과의 추억이 친구에게 약점이 되어 그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21장 전체에 걸쳐서 느껴졌어요.
떠날 때가 되어서야 마을의 창문 모양이 눈에 밟히고 친구의 눈동자 색이 어떤 색이었는지 기억하게 되는 모습. 서로를 잊지도, 잊히고 싶지도 않아 어떻게든 기억하기 위해 마지막 기차를 타기 직전까지 놀다가 헤어지는 모습을 보며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초등학생 때 맞은편 집에 이웃으로 나이도 같고, 취향도 똑같았던 남자애가 이사를 와 방과 후면 서로의 집에 놀러 가거나 같이 동네를 놀러 다녔어요. 정말 친했고 가까웠는데 이사를 가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괜히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요즘이라면 서로 핸드폰 번호라도 남겨서 연락이라도 해보겠지만 그때는 핸드폰이 없던 때라 이후에 연락은 못했네요. 어린 나이였지만 그 당시에도 이미 속으로는 마지막 날 헤어지는 순간에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만나자, 다시 연락하자'라고 서로 헤어지며 말 하지만 결국 다시 보지 못할 것을 아는 직감이랄까요.
더글러스가 존이 떠나기 직전까지 마지막 놀이를 할 때 서로의 멈춘 모습을 조각상 보듯 찬찬히 훑어 본 것은 그런 감정선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감각과 기억이라는 건 시간이 지나면 장난을 치기 때문에 '자신이 알던 더글러스, 자신이 알던 존'에서 조금씩 멀어져 '이 모습, 저 모습이 짜깁기 된 친했던 누군가'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친했지만 저도 지금은 그 친구에 대한 기억 중 남은 건 거의 없어요. 얼굴도, 이름도, 체형도, 옷도 기억에서 다 사라지고 그저 정말 친했던 친구라는 앙상한 최소한의 뼈대만 남았더군요. 그걸 더글러스도 존도 알았기에 그동안 대충 보고, 대충 기억해 온 친구의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기억에 담아두고자 했던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