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릉님의 대화: 슬픔과 비극에 맞서기 위한 수단 혹은 방패로서 유머가 작동할 때도 있는 듯합니다. 그럴 때의 유머는, 삶을 견뎌내는 하나의 태도가 됩니다. 남을 웃기기 위한 유머도 있겠지만, 일단 나를 살리는 데 초점을 맞춘 유머도 존재하는 셈이겠네요. 그런 식으로 '유머'를 잘 활용한 작품으로, 저는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을 꼽고 싶습니다.
다 아시는 얘기겠지만 이 작품은 커트 보니것이 2차세계대전 당시 경험한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입니다. 영국과 미국 폭격기 800여대가 독일 드레스덴을 포격해 수십만명이 사망했을 때, 보니것은 미군 포로로 현장에 잡혀 있었습니다. 공습 후 시체를 매장하는 일까지 했다고 하죠. 보니것이 '유럽 역사상 최대의 학살'로 불리는 드레스텐 대공습을 소재로 다룬 소설을 쓰기 까지는, 30년이 걸렸다고 하네요.
제가 이 작품을 대단하다고 느낀 점은, 보니것이 자신이 겪은 비극에 짓눌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히려 웃음으로 승화시켰달까요. 이 작품에서 보니것은 외계인과 시간 여행 소재를 뒤섞고, 블랙유머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드레스덴과 전쟁, 전쟁의 아이러니를 다룹니다. 소재와 제목만 보면 무척 무거운 작품처럼 보이고, 주체 자체는 묵직하기 그지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설렁설렁 읽으면 전혀 무겁지 않습니다. 가볍고 정신없는데, 웃기고 심지어 재밌기까지 합니다. 여운이 꽤 오래 지속되는 소설입니다.
추천한 책의 이유를 이야기해주니깐 <쇼는 없다>도 더 이해가 되네요. 저는 소설을 읽을때 직접화법보다는 간접화법으로 자기의 목소리를 내줄때 좋은데, 이릉님의 이 책을 읽을 때 그런 느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