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sist님의 대화: [1부 서문] 모임이 열린지는 꽤 되었습니다만 뒤늦게 모임 시작합니다. 공교롭게도 모임을 열었을 때만 해도 12월 3일 전이어서, 나라 안팎으로 이런 비극적이고도 황당한 일이 벌어질지는 예상치 못했습니다. 아직까지도 믿기지 않는 뉴스들이 보도되는 현실이 뭔가 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각설하고, 이 서문은 ⟪내 희망의 크기⟫라는 보르헤스의 책에 마리아 코다마가 쓴 서문입니다. 마리아 코다마가 생전 보르헤스와 맺은 관계에 대해서는 제가 별로 첨언할 말이 없을 것 같아요. 뭔가 스캔들을 위한 스캔들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 서문에는 크리오요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요,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적 역사를 이해하고 보르헤스의 작품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크리오요'는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태어난 스페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하자,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하루 아침에 피지배 계급이 되고, 스페인 정복자들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럽에서 여러 이민자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들어오게 되는데요, 결과적으로 신대륙은 유럽계 백인, 원주민과 흑인, 그리고 여러 인종이 섞인 다인종, 다문화의 장이 됩니다. 그런 와중에 나타난 '신대륙의 스페인 사람'을 일컬어 크리오요라고 부릅니다. 크리오요라는 단어는 스페인계 백인을 의미하는 인종적인 함의만이 아니라, 정치계급적인 함의도 지닙니다. 크리오요는 경제적으로는 부유한 사업가나 대지주였지만, '스페인에서 태어난 스페인 사람'을 지칭하는 '페닌슐라르'에 비해 정치적인 의사 결정권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이런 정치적 차별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크리오요는 훗날 아메리카 독립 운동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어떤 의미로는 본토에도 속하지 못하고 식민지에도 속하지 못하는 독특한 이민자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는 이들로서, 보르헤스의 문학적 정체성에서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앞서 모임에서 다룬, ⟪픽션들⟫의 마지막 단편인 ⟨남부⟩에서도 보르헤스의 크리오요로서 정체성이 진하게 드러나고 있기도 합니다.
“ 세상 사람 모두가 우리의 신념 부족을 비난할지라도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신념이 없다는 것은 믿음의 또 다른 형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루키아노스와 스위프트, 로런스 스턴, 조지 버나드 쇼 등의 작품에서처럼 신념 부족을 새로운 창작 원천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거대하고 격렬한 불신이야말로 자랑스러운 우리의 유산일 수 있다. ”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6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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