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보르헤스 읽기]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1부 같이 읽어요

D-29
하지만 푸르트가 쓴 사랑의 속삭임부터 부재에 대한 불평, 오만, 관능의 구절들이 모두 스페인에 뿌리를 두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뿌리부터 줄기, 장작, 나무껍질, 낙엽, 열매에 이르기까지 모두 아메리카에서 기인했다. 나는 정원사에서 시작해 동전 지갑으로 넘어갈 것이다. 그것은 아르헨티나의 구리에서 시작해 스페인의 동전이 됐다가 아직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사자 문양을 지우지 못한 동전이다. 그 창조적이지 않은 행위야 반쯤 실망스럽지만 민요를 익살이나 허풍쯤으로 간주함으로써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다. 그것들은 아르헨티나의, 아주 전형적인 아르헨티나의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스페인어로 사랑하고 스페인어로 고통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크리오요성을 주장하고 자랑스러워한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94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본질적 특성은 제쳐 두고 지엽적 특성을 취하는 행위는 죽음을 배태시키는 암흑일 뿐이다. 지방색의 힘으로 크리오요 예술을 고양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런 어둠에 기대는 것이다. (···) 잉카의 싸구려 그릇이나 울부짖는 여인을 그린다고 '물론이지'라는 뜻을 표현하기 위해 스페인어 'claro' 대신 케추아어 'velay'를 쓰는 것은 애국이 아닙니다. 크리오요 정신은 내재적이며, 그 넓은 시야는 우주에 관한 것이리라. 이미 반세기 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주에 있던 선술집에서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던 흑인과 농민이 아주 긴 시간 동안 논쟁을 했다. 그런데 그들은 곧바로 형이상학으로 달려들었다. 그들은 사랑과 법률에 대해 논하고 시간과 영원성에 대해 토론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102-10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프로아⟫를 폐간하면서 보내는 편지] 한 시절 보르헤스 자신이 힘을 쏟았던 잡지를 폐간시키면서 소회를 밝히는 글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삶을 지향하는 태도가 강하게 밴 글입니다. 보르헤스는 "실패하거나 홀로 걷거나 고통받는" 것을 인간된 '권리'로 표현합니다. 이런 역전된 인식을 보면서, 저는 우리 선조들이 인생을 네 글자로 요약한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글자가 떠올랐습니다. 이 글자처럼 우리네 인생을 짧고 간결하고 심오하게, 또 겸손히 요약한 것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생로병사라는 네 글자 중 일견 세 글자(老病死)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좋지 않은 늬앙스를 풍깁니다. 하지만 보르헤스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이며 순리이자 우리가 빚어진 원리라는 겁니다. 여기엔 신의 존재와 무관하게 신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아주 거룩한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실패하거나 홀로 걷거나 고통받을 우리의 권리를 말합니다. 신비롭게도 나 자신에게서 아주 거룩한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신까지도 우리의 연약함을 질투했지요. 신 또한 스스로 인간이 됨으로써 고통을 더했고, 그래서 포스터 속의 십자가처럼 다시 빛나게 됐습니다. 저 역시 이제는 내려가고 싶습니다. 그들에게 ⟪프로아⟫에서 저를 배제하라고, 이제는 종이로 된 왕관을 옷걸이에 걸어 두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변두리에 있는 수백 개의 거리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달과 고독과 가끔은 달콤한 술을 들고서 말입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106-107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주석] 보르헤스가 꼽은 다섯 개의 작품에 대한 짤막한 각주입니다. 각주는 말마따나 그 위치상 발에 채일 정도로 보잘 것 없는 위치에 있는 동시에, 언제든 우리가 걸려 넘어질 수 있는 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해당 작가와 작품을 칭송하는 동시에 그 속에서 개선할 점을 보고 있습니다. 작가들은 다들 자기만의 선구자를 창조한다고 했던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때 선구자는 스승임과 동시에 스승의 반대편, 즉 반면교사입니다. 생각해보면 자기만의 안목으로 자기만의 위대한 작가들로 서재를 꾸리려는 욕망, 이 선구안을 가지려는 욕망이야말로 좋은 작가의 조건이 아닐까 합니다. 거기에는 남들이 특정 작품을 상찬하건 폄훼하건 자신이 거기서 위대함을, 장차 위대해질 수 있는 씨앗을 보았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마음가짐도 포함될 겁니다. 와글거리는 땅에서 이미 있는 기념비에 고개를 조아리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장차 있게 될 건축물을 보려는 야망 말입니다. 내가 언급하고 알아보고 말하려는 타인의 독창성은 그 순간 나의 독창성으로 전환됩니다. 지금으로서는 보르헤스가 여기서 언급한 작품들을 한국어로 읽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재밌습니다. 보르헤스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이 다섯 작품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저는 때로 구체적인 책을 직접 읽을 때보다, 그 책에 흠뻑 빠졌다면서 눈을 반짝이면서 그 책을 설명하는 누군가를 보면서 커다란 매혹감을 느낍니다. 저에게 이 글을 읽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이건 아마 검지 끝으로 달을 가리키는 누군가를 앞에 두고, 달을 보기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행위에 가까울 겁니다. 영화관에 가서 영화는 안 보고 영화에 흠뻑 빠진 옆 사람을 보는 것이나 다름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따금 달을 보기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데서도 뭔가 배울 점이 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술적인 주석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나는 사실 정신적 가치 없이 형태의 유사성만을 단순하게 강조하는 시각적 비교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실바 발데스의 작품에는 나를 매혹시키는 시각적 형상이 참 많다. 그 시각적 형상들에 삶이자 모든 행위의 전제 조건인 드라마틱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 즉 시간이 살고 있는 것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112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그래서 유감스럽게도 그의 인물들은 매우 도식적이다. 영웅적 인물들이 미리 정해진 틀을 벗어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그의 모든 시는 인습적이고 상징적이다. 그의 시에서 2인칭 '너'는 항상 연인을 암시하고, 여명은 충실하게 행복을 뜻하며, 별이나 낙조 또는 초승달은 마지막 3행시의 끝에 등장해서 다시 빛난다. (···) 그가 사용한 시간 역시 서양의 것이 아니다.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재와 과거, 미래를 포함한 영원성의 시간이다. 느릿하고 풍요로운 시간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118-11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가장 단순하고 명확한 것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태양을 과거에 그랬듯 황금으로 덧씌우고, 새가 지저귈 때는 진주로 변화하며, 불쌍한 밤 개구리에 대해서는 "달이라는 피아노의 유리 건반"이라고 말한다. 나는 고귀한 은유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잡동사니로 떨어뜨리는 이러한 은유는 좋아하지 않는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124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분석 연습] 보르헤스는 이 글에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서 뽑아 올린 두 줄의 짧은 시를 분석합니다. 시는 물리적으로 짧습니다. 자연히 시집도 책 중에서 꽤 얇은 축에 속합니다. 하지만 그 물리적인 얆음이 정신적으로는 어떠한 산문집보다 두껍습니다. 그 일면을 이 글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잘 쓰인 한편의 글은 표면적인 내용과 그 부피에 국한하지 않고, 우리 정신의 육중한 거동 과정과 그 숨은 의미를 환기할 수 있습니다. 약간 딴 얘기를 하자면, 저에게 하루종일 시를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여겨집니다. 일반적인 논증 구조로 짜여 있는 글이나 하루종일 읽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게 여겨지는 반면에 말입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만약 누군가가 내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대답해야 한다면 나는 그것을 모른다." 나 역시 시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126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지금까지 분석한 세르반테스의 두 행에는 어떤 창조적 행위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시에 만약 창조적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세르반테스의 능력이 아니라 언어의 능력이다. 세르반테스의 행의 유일한 미덕은 사용한 단어들이 지닌 허위의 능력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언어에 대해 "우상의 광장"이자 대중의 속임수라고 일컬었다. 시란 바로 그런 곳에 사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케베도와 브라우닝, 휘트먼, 우나무노의 몇몇 시행을 제외하면 내가 아는 시는 모두 서정시일 뿐이다. 어제의 시, 오늘의 시 그리고 앞으로 존재할 미래의 시에 이르기까지 모두 서정시이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13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밀턴과 그의 운율 비판] 흔히 정형시와 자유시 사이에서 일어나는 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 모국어인 한국어의 특성상 이런 논쟁을, 더군다나 번역한 글을 통해서 이해한다는 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잘 와닿지 않을 수도 있고요. 한국어는 주어-목적어-서술어 순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특별하게 도치 구문을 쓰거나, 필요에 의해서 문장을 끝맺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문장을 "-(이)다"의 형태로 마무리합니다. 그에 반해 인도유럽어족의 많은 언어는 주어-서술어-목적어 순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문장의 마지막이 명사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이유로 정형시에는 각운을 일부러 맞추어서 그만의 독특한 운율과 음악성을 만들어왔습니다. 과거에는 입말과 글말을 나누고 입말에 더 큰 가치를 부여했던 시기가 있었음을 이해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런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시인들은 음악성에 과도하게 경사되기도 했습니다. 보르헤스의 언급처럼, 심지어는 시가 "상상력과 영혼에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은 채, 각운을 맞추는 식의 엄격한 형식성에 천착하였고 시를 "청각에 종속된 사물로 강등"시키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언급하는 쇼펜하우어와 밀턴 같은 이들의 주장도 비슷합니다. 시쓰기가 각운을 맞추어 음악을 얻고 새로운 이미지를 환기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불필요하고 쓸모없는 이미지가 너무 많이 생겨났고, 그 압축성도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뛰어난 고전주의 작가였던 밀턴과 쇼펜하우어는 이 첫 번째 측면에서 서로를 지지한다. 하지만 그들의 논문 역시 내게는 아무 감동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다. 그들 또한 각운주의자들과 동일한 실수를 범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를 상상력과 영혼에 속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청각에 종속된 사물로 강등시켜 버렸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136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공고라의 소네트에 대한 검토] 한 편의 뛰어난 시를 검토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이 글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는 논리적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고들 말하지만, 그 말은 반만 맞는 말입니다. 시를 둘러싼 상황 자체가 어떠한 논리의 지배를 받고 있다면, 그것을 우회할 길은 없습니다. 오히려 논리적으로 접근할 때에만 시는 논리를 염두에 둔 채, 그 논리에 구멍을 뚫을 수도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글의 목적도 바로 그것이고요. 본문에서 보르헤스가 설명하는 공고라의 시도 그러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공고라는 이 시를 쓰면서 많은 시인이 바다를 은빛으로 물들이고, 들판을 황금빛으로 물들인다고 썼던 것을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한편, 자신의 시로써 그 논리를 다시 한번 뒤집습니다. 앞서 다룬 ⟨모험과 규칙⟩을 다시 끌어오자면, 정통이 모험으로 반전되는 지점을 공고라의 시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마지막 두 연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가? 공고라는 여기서 그동안 열심히 노력한 세공사의 세계를 버린다. 그는 사랑을 위해 황금빛 태양과 은빛 바다는 물론 산에 햇빛을 비추고 꾸미며 색칠하는 것과 들판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것까지 포기한다. 하지만 그러한 희생을 밝힐 요량으로 자신의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경치만 다시 나열하기 때문에 사실은 포기하는 척 가장하는 것이다. (···) 논리의 힘을 빌리면 모든 시가 망가질 수 있다고, 논리 자체가 그런 거라고 누군가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단지 가장 위대한 시인의 빈약함을 통해 모든 시인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희망을 깨뜨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지만 위대한 걸작을 과도하게 믿지 않는다. 우리가 대가들의 작품을 이리저리 뜯어서 맛보고, 그 과정에서 불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이 땅에서 자랑스러운 작품이 탄생할 가능성도 그만큼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148-14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리딩 감옥의 발라드] 오스카 와일드가 동성애 스캔들로 고발당하고 수감된 뒤에 발표한 시집 제목입니다. 한국에는 ⟪레딩 감옥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시집이 있긴 한데, 시집 자체를 전부 번역한 것은 아니고 선집으로 보입니다. 출판사 서평에서는 이 책을 퀴어의 관점에서 번역(?)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 보면 읽어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오스카 와일드와 연관되어 언급되는 상투적인 수사들을 점검하지 않고 답습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는 퀴어였고 스캔들을 몰고 다녔으며, 그의 작품 세계와 앞선 요소들을 떼어 놓을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스카 와일드라는 인물을 특정한 정체성과 스캔들에 국한해서 읽게 한다는 것이 저에게는 꺼림칙합니다. 앞선 서평과 이 글을 비교해봐도 좋을 겁니다.
그의 문체는 완전히 변했는데, 그동안의 장식적 어구를 포기하는 대신 본국의 친근하고 단순한 말투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 하지만 누군가가 그 유명한 ⟪리딩 감옥의 발라드⟫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흥밋거리가 고작 와일드의 자전적 어조나 마지막 모습이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중대한 오류일 것이다. 나는 ⟪리딩 감옥의 발라드⟫야말로 진정한 시로, 모든 독자가 반복해서 감정을 고백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표현은 매우 엄격하고 간소하다. 우리는 중심인물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유일하게 아는 사항은 사형에 처해지리라는 것, 즉 부재에 관한 것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의 죽음에 감동한다. 간신히 존재하게 만든 인물을 효과적으로 부재시킬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치가 큰 업적이다. 와일드가 바로 그런 위업을 달성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152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아라발레로에 대한 비판] 부에노스아이레스 변두리 지역의 말씨를 아라발레로라고 합니다. 보르헤스가 설명하기로는, 도둑들의 교활은 은어를 다시금 흉내내는 것이 아라발레로라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은어는 언어의 풍부함을 보여주기보다는 그저 무리를 짓고 동류 의식을 고취하는, 일종의 기호로 전락한 언어의 사례를 보여준다고 봅니다. 축약어나 유행어, 더 나아가서는 소위 말하는 '업계 용어'도 마찬가지이고요. 한때의 유행어가 난무하는 오래된 책을 들춰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겁니다. 한때의 유행이었던 것들은 당시에는 세련하고 최신의 것으로 비춰지지만,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시대를 추인하기에 급급한 이의 조급증이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 점에서 보르헤스는 아라발레로를 비판했던 겁니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기호는 바뀌었지만 의미는 동일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휘의 풍부함이 아니라 변덕일 뿐이다. 실제로 아라발레로는 범죄자 집단이나 그들과 대화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동의어의 경연장일 뿐이다.”(155쪽) 한국 사회에서도 아라발레로가 있습니다. 군대에서만 통용되는 이상한 은어와 멸칭들('군바리', '짬찌'), 현장 노동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단어들('곰방', '공구리', '나라시', '한 대가리')처럼 소위 업계인들만 이해하는 언어에서는 폐쇄성이 도드라집니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어떤 단어들은 의도적으로 복잡하게 꼬여 있고 효율적이지도 않습니다. 셀러리맨들이 구사하는 기이한 용어들도 마찬가집니다. '퍼미션 클리어', '로그', '컨펌' 같은 단어들은 귀여운 정도입니다. 소위 판교 소재의 회사에 다니는 이들의 "판교 사투리"는 그 극점입니다. “아삽(ASAP)하게 주세요”, “고객의 니즈”, “애자일하게” 같은 기괴한 말들을 보세요. 그것들은 기호나 상투어로 전락한 언어, 의사소통이 아니라 무리짓기와 특권 의식에 봉사하는 기호의 특성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기호로 전락한 언어는 언제든 다른 것으로 갈아끼울 수 있으며, 그래서 유행처럼 가볍고 덧없습니다. 황현산 선생님은 유행에 민감한 한국을 두고 에세이를 쓴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은 언어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밤이 선생이다문학평론가 황현산의 첫 산문집. 삼십여 년의 세월 속에 발표했던 여러 매체 속 글 가운데 추려 이를 1부와 3부에 나눠 담았고, 그 가운데 2부로는 강운구 구본창 선생의 사진 가운데 이 책의 기저에 전체적인 비유가 될 수 있는 몇 컷을 골라 글과 함께 실었다.
농촌을 모르는 은어, 별을 바라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은어, 조용하고 기품 있게만 말해서 정열적인 영혼조차 표현할 수 없는 은어는 오직 기적을 행하는 도공이 영원의 그릇을 빚기를 바라는 푸석한 진흙과 같다. 그러므로 은어가 영원불멸의 생명력을 갖게 하기 위해서는 진실한 열정이 필요하다. 크리오요의 아이러니와 고통을 확신에 차서 발음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1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한국이 특별히 유행에 민감한 나라라는 것은 모든 것이 가장 빨리 낡아버리는 나라가 바로 이 나라라는 뜻도 된다. 어제 빛났던 물건이 오늘 낡은 버전이 되어버리며, 내일 내리게 될 구매 결정이 모레는 벌써 성급한 판단이었던 것으로 증명된다. 결혼을 하면서 그렇게 요란을 떨며 장만했던 가구와 전자 제품들은 손때가 묻기도 전에 돈을 들여 처리해야 할 쓰레기 더미로 전락하고, 10년을 살았던 아파트도 거기 쌓인 추억이 없다. 심지어는 주소를 기억하기조차 어렵다. 마음속에 쌓인 기억이 없고 사물들 속에도 쌓아둔 시간이 없으니, 우리는 날마다 세상을 처음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간다. 오직 앞이 있을 뿐 뒤가 없다. 인간은 재물만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저축한다. 그날의 기억밖에 없는 삶은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삶보다 슬프다.  이 슬픔이 유행을 부른다. 사람의 마음속에 세상과 교섭해온 흔적이 남지 않고, 삶이 진정한 기억으로 그 일관성을 얻지 못하면, 이 삶을 왜 사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삶이 그 내부에서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밖에서 생산된 기호로 그것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 가지가지 유행이 밖에서 생산된 바로 그 기호다. 밖에서 기호를 구해 의미의 자리를 메울 때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밖의 기호 속에는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진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행의 문화는 열등감의 문화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놓인다.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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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책 함께 읽기 vs 혼자 읽기
[이달의 소설] 2월 『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 함께 읽어요자유롭게 : '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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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도, 독자들도 샤이한 우리 매거진 *톱클래스를 읽는 여러분의 피드백을 듣고 싶어요. <서울리뷰오브북스> 7호 함께 읽기홍정기 작가와 <계간 미스터리> 79호 함께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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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한국인 저자가 들려주는 채식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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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인간을 깊이 있게 들여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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