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보르헤스 읽기]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1부 같이 읽어요

D-29
아직 초반 몇 개 읽었지만, 읽을수록 맞는말이라 다시 생각해보게되네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내 희망의 크기] 이 글은 1926년에 쓴 글입니다. 당시로서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세계적으로 그다지 조명받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을 감안하고 이 글을 읽으면, 당시의 보르헤스가 견지했던 '희망'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희망은 현실을 단순히 윤색해서 별천지의 그것처럼 인식하거나 막연한 공상을 키워가는 것과 다릅니다. 초반부에서도 보듯, 보르헤스는 고국인 아르헨티나를 "천형의 유배지로, 멀고도 낯선 것만을 동경하는 땅"이라고 말하면서 글을 시작합니다. 이 글이 19세기 독립 전쟁 이후 혼란하고 소요한 정치적 격랑기를 보낸 뒤,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뒤에 쓰여진 글임을 다시 한번 유념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보르헤스는 1926년 당시의 아르헨티나에서 돈 후안 마누엘이라는 독재자의 독재 정권을 겪었으면서도, 아르헨티나인들이 그를 가장 멋진 남성으로 기억하는 현실을 지적합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아직까지도 몇몇 어른들은 과거 군부 독재 시절을 향수하며 그 독재자들이 보여줬던 아집과 폭력에 가까운 독단성을 남성성으로 추켜올릴 뿐 아니라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으니까요.) 나아가, 20세기 초 아르헨티나의 상황에서 "단 한 명의 신비주의자나 철학자도 탄생하지 못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이 '없음'에서 희망을 보며, 이 부재가 보르헤스가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희망의 크기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앞서 말했지만 보르헤스는 그 누구보다 유럽적인 환경에서 자랐을 뿐 아니라, 크리오요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던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가 제시하는 희망은 비단 유럽적인 것을 품고 있음에도 유럽으로 환원되지 않는 독특한 무언가, 이민자적인 무언가가 있습니다. 이 글의 말미에서 보르헤스는 자신이 지향하는 희망이란, 유럽을 흉내내는 것도 아니고, 우리들만의 전통과 유구함이 있다는 환상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문을 걸어잠그는 기존의 크리오요주의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크리오요주의라는 단어를 새로 정의하고자 합니다. 보르헤스는 광활한 팜파스와 신념없는 텅 빈 신념 속에서 도래할 미래를 봅니다. 따라서 비어 있다는 것은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곧 채워질 미래를 견지하는, 그리하여 희망의 크기를 역설하는 장이 됩니다. 이 1926년 보르헤스가 가졌던 희망의 크기에서 저는 2024년 오늘 우리가 가져야할 희망의 크기를 봅니다. 희망은 언제나 급진주의적인 실천가가 말했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는 행위에서 비롯할 테니까요.
역사적으로 침묵은 동의로 인식되어 왔다. 그리고 이 경우, 동의는 현 체제에 대한 것이다. 조직가로서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의 세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부터 시작해 나간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모습으로 세상을 바꾸어 나가려는 우리의 바람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모습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필수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체제 내부에서 일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반양장) - 현실적 급진주의자를 위한 실천적 입문서 27쪽, 사울 D. 알린스키 지음, 박순성.박지우 옮김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반양장) - 현실적 급진주의자를 위한 실천적 입문서히피 선동가이자 미국 최대 노동조합의 창립자인 사울 알린스키. 1930년대 대공황으로 많은 사람이 하루아침에 절망의 늪에서 헤매게 되었을 때, 알린스키는 지역사회 조직가들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한편 가난한 지역사회를 조직하는 데 전념했다.
우리는 '선'이 우리가 그것을 원하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가치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살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불가피하게 다른 문제를 만들어낸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는 영원히 행복한 결말도, 영원히 슬픈 결말도 없다. 그와 같은 결말들은 환상의 세계, 우리가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세계, "그들은 그 뒤에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어요"라고 이야기하는 동화의 세계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서는 죽음만이 유일한 종착역으로 갖고 있는 사건의 흐름이 영원히 계속된다. 지평선에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다. 지평선이란 영원히 저 멀리에 있을 뿐이며, 우리를 앞쪽으로 손짓해서 부르고 있을 뿐이다. 이는 삶 자체를 좇는 것과도 같다. 이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고, 당신의 출발점이다.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반양장) - 현실적 급진주의자를 위한 실천적 입문서 53쪽, 사울 D. 알린스키 지음, 박순성.박지우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크리오요 ⟪파우스토⟫] 여담으로 시작하자면, 이 책을 읽은 사람은 '지금 한국에 사는 내가 왜 지정학적으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르헨티나 사람의 언어를 알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직면합니다.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각자 찾아야겠지만, 저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에서 굉장히 친근한 무언가가 읽혀집니다. 그래서 더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에 눈길이 가기도 하고요. 제가 잘 모르는 구불구불한 형용사와 생소하게 음차된 명사형의 단어를 파헤치고 들어가서, 그 안에서 우리라고 할 만한 것을 발견하는 행위는 언제나 두근거리고 재미있습니다. 이 글에서 보르헤스는 에스타니슬라오 델 캄포의 ⟪파우스토⟫라는 작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소개되어 있지 않은 작품을 제가 좋아하는 누군가를 경유해서 듣는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경험입니다. 저는 이 글에서 보르헤스가 순간과 전체를 반복해서 대비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인생 전체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짧은 순간이 역설적이게도 인생 전체를 대체하고도 남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흔히들 인생을 행불행으로 나누는 우리 사고방식에도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알다시피, 인생은 대부분 행복하지 않으면 불행한 순간으로 가득합니다. 그 와중에 행복은 음식에 치는 소금처럼 간혹 주어집니다. 이처럼 삶은 행복과 무관하지만, 종장에서 우리네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은 매우 드물게 주어졌던 행복한 순간들입니다. 보르헤스는 에스타니슬라오 델 캄포의 ⟪파우스토⟫에서도 비슷한 미덕을 봅니다. 작품 내외로 보아도 그러합니다. 에스타니슬라오 델 캄포는 인생 대부분을 군인으로서 야영지에서 보냈으며, 손에 총을 쥔 순간에 비하면 펜을 쥔 순간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보르헤스에게 그의 인생은 총을 쥔 순간이 아닌, ⟪파우스토⟫를 쓰려고 펜을 쥔, 전체 인생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그 순간으로 규정될 겁니다. 농담과 같은 일장춘몽으로써 인생 전체를 각성하는 양소유처럼요.
나는 아나스타시오 엘 포요가 호수의 신처럼 갑작스럽게 등장한 건 알지만 그 뒤에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가 행복했으리라고 믿고 싶다. 그처럼 순수한 사내들은 항상 행운을 목표로 직진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반 시간 동안 나눈 우정과 잡담이 의미 없이 보낸 수많은 시간보다 신성하다고 믿고 싶다. 언젠가는 나도 브라가도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곳 호숫가에서 중국 골동품에 둘러싸인 채 오래된 마테 차를 마시며, 그토록 영원한 인간의 죽음과 기적들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비록 낡은 동전처럼 흐릿하게일지언정 그들의 위업을 기억하는 사람들과 말이다. 예전에 나는 시야말로 인간에게 영원성과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해 준다고 생각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2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군모에 오른손을 넣은 채 파본에서 처음으로 총을 맞은 군인이었던 에스타니슬라오 델 캄포! 수많은 세월을 보낸 야영 생활 전체보다 잠깐 깨어 있던 낮잠 시간만을 영원히 기억하게 되다니 얼마나 희한한 일인가요! 이제는 신이 돼 버린, 상상 속의 두 친구가 낮잠을 자는 대신 반 시간 동안 털어놓은 그 불멸의 이야기 말입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32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팜파스와 변두리는 신의 모습이다] 흔히 변방성은 어떤 열악함을 대변합니다. 하지만 그 나름의 가능성으로 충만합니다. 중심된 공간의 구심력이 비교적 느슨히 작용하는 공간으로서 가능성을 열려 있는 곳, 바깥을 지향하는 원심력이 구심력을 이기려는 공간인 것입니다. 보르헤스는 팜파스와 변두리야말로 "신의 두 가지 현존 양태"라고 말하면서 글을 시작합니다. 팜파스와 변두리는 필요한 인프라가 모두 모여 오밀조밀 구축된 도심지에서 가장 먼 자리입니다. 이는 보르헤스가 ⟨내 희망의 크기⟩에서 역설적으로 찬양했던 어떤 '텅 빔'과도 연결됩니다. 그때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에서 철학의 부재와 자연의 장엄함을 대비시키며 에머슨을 인용했습니다. "아메리카는 우리 눈앞에 펼쳐진 하나의 시이다. 넓은 경관이 상상력을 현혹하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시적으로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한편, "팜파스와 변두리는 신의 모습이다"라는 제목은 여러 의미를 불러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봤을 때, 앞선 말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구원처럼 주어지는 신의 속성을 대변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흔히들 참혹한 비극 앞에서 "신은 있는가?" 묻습니다. 하지만 그런 태도야말로 신에게서 인격을 요구하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노출할 뿐입니다. 비극 앞에서 신의 존재를 물으며 울부짖는 사람들에게서 저는 신이 자신이 생각하는 인격에 부합해야 한다고 믿는 자의적인 해석과 오만함을 봅니다. 평상시에는 신의 속성이 불가해함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불행과 비극 앞에서는 신이 이해 가능하게 공감해주고 보살펴줘야 한다고 말하는 식인 것입니다. 신에게 그런 의무를 부여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서 보르헤스의 역전된 인식이 드러난다고 봅니다. 외려 변두리와 고통받는 그 구체적인 표정이야말로 신의 증거라는 거죠. 신의 부재에서 신의 존재를 보는 것, 그리하여 행복과 쾌락과 웃음 속에서는 신이 깃들 자리가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의미에서만 변두리는 신이 존재하는 방식인 것입니다. 저는 보르헤스의 종교적 지향점을 알지 못하므로 명확히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보르헤스가 생각하는 신이 흔히 말하는 인격신이 아님은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격신이 아니라고 해서 그것이 우리에게 대단히 비극적이지도 않다고도 생각하고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신과 공존하면서도 신에 개의치 않고 살아갈 수도 있을 테니까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카리에고와 변두리의 의미] 에바리스토 카리에고라는 당대의 시인에 대한 보르헤스의 짤막한 감상이 드러나는 글입니다. 카리에고라는 시인은 당시 보르헤스가 생각하는 '변두리'라는 단어에 가장 잘 부합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앞서 글에서 보았던 것처럼, 변두리는 단순히 좌절의 공간이 아닙니다. 표면적으로는 거칠고 무질서한 건달들이 활보하는 공간이지만 그 속에는 어떤 가능성이 부글거리고 있는 겁니다. 보르헤스는 오늘날의 탱고에는 비속어와 은어가 난무하는 생생한 현실을 보여주지만, 거기에는 변두리의 생활을 무기력하거나 게으르게 묘사하는 식으로 좌절의 레퍼토리만 있다고 본 것 같습니다. 반면, 과거의 카리에고가 노래한 탱고에서는 어떤 뻔뻔함과 무식하지만 용기만 과시하는 내용이 있지만 그 속에는 좌절을 밀어내는 힘이 있다고 본 것 같습니다. 요절한 카리에고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미국의 래퍼이자 프로듀서였던 XXXTENTACION이 떠올랐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험한 생활을 겪었고 그 속에서 돈을 벌게 되었는지를 뻔뻔하고 무식할 정도로 과시하는 노래를 들으면, 20세기의 엔트레리오스에서 탱고를 노래했던 시인들이 자연히 연상됩니다. 20살의 나이로 요절한 XXXTENTACION의 일견 우울하고 파괴적인 음악에는 이상한 슬픔이 묻어 있습니다. 그의 반항적이고 우울한 과거 이력과 범죄 행위를 보면 XXXTENTACION을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음악에서 보여준 자기 인식, 반성, 죽기 전에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했던 의지는 저에게 어떤 영감을 줍니다. 아마 보르헤스도 비슷한 것을 카리에고에서 느꼈던 게 아닐까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과거의 범죄 이력이 청산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가 죽기 전에 보여줬던 음악 속의 슬픔 이면의 어떤 의지와 희망은 진실한 것이라고 봅니다. 20세기의 엔르레리오스 거리가 보여주는 변방성은 이렇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정원에는 하늘도 잠깐 쉬었다 가는 미개간지가 있고, 파란 하늘과 포도 덩굴을 벗 삼아 소녀들이 뛰어놀았다. 달빛이 더욱 외로워 보이는 해질 무렵에는 가게 뒷방에서 강한 맥주 냄새와 함께 불빛이 새어 나왔고, 동네 어디에서나 늘 싸움이 벌어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동네가 '불의 땅'이라고 불리고 건달들이 칼을 휘두르며 팔레르모데산베니토의 핏빛 신화를 계승하는 걸 자랑스러워했다. 당시에는 콤파드리토들이 많았다. 사내들은 천박한 소리를 내뱉으며 휘파람을 불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시간을 흘려보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41-42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보랏빛 대지⟫] 보르헤스는 이 글에서 허드슨이 쓴 ⟪보랏빛 대지⟫라는 영문 소설을 아르헨티나 작품이라고 추켜올립니다. 왜냐하면 ⟪보랏빛 대지⟫에서는 보르헤스가 생각하는 크리오요주의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19세기 독재자 로사스의 철권통치 이후에 등장한 사르미엔토는 문명과 야만의 대립구도를 정립함으로써, "통치는 교육"이라는 자신의 정치 철학을 확보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가우초 문화는 유럽적인 것에 밀려나서 축출될 처지에 놓인 '야만'으로 규정되었습니다. 라틴아메리카가 유럽적인 것을 들여오는 과정에서 크리오오주의는 구체적인 무엇으로 정의된 것이 아니라, '비유럽적인 것', '유럽이 아닌 모든 것'으로 정의되었습니다. 야만이라는 단어만 봐도 알 수 있죠. 야만이란 단어를 자세히 보면 정확히 무엇을 정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문명의 부재일 뿐인 것이죠. 그러나 보르헤스가 보기에 "가우초는 문명에 소탈하고 충동적이고 규칙이 없는 자유분방한 삶"(49쪽)을 살았을 뿐이며, 그것은 한갓 '야만'으로 규정되지 않는 라틴아메리카의 독특한 정체성을 구성하는 없어서는 안 될 집단이었습니다. 크리오요주의야말로 문명의 '없음'이 아니라 유럽적인 것의 사각에서 존재하는 엄연한 문명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보르헤스의 생각에 잘 부합하게 가우초를 묘사한 소설이 바로 ⟪보랏빛 대지⟫였던 겁니다. 기존의 문학 작품에서 야만으로 대변되는 가우초들이 끝끝내 집과 학교, 교회, 법률로 규정되는 어떤 사회와 제도 속에 편입되면서 길들여지는 결말을 맺었다면, 영문 소설인 ⟪보랏빛 대지⟫에서 가우초들은 일시적일지라도 자신들만의 행복한 운명을 찬양하면서 끝내 길들여지기를 거부했다는 것이지요.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마르케즈의 ⟪백년의 고독⟫을 원작으로 한 8부작 드라마로 공개된 걸 아시나요? 공개되기 전만해도 기대 반 우려 반이었습니다만, 결론만 말씀드리면 매우 흥미롭게 보고 있습니다. 거기에도 비슷한 충돌을 잘 살려내고 있거든요. 마술적이고 연금술적인 세계와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적인 정치 상황이 서로 얼키고설키면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소설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어요. 한번 보시면 좋을 겁니다.
백년의 고독 1중남미 문학과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 작품은 첫 출간하자마자 세계적인 작품이 되었고, 마르케스에게 노벨상을 안겨주었다. 민음사에서 나온 번역판은 아르헨티나에서 처음 출판된 판본(1967)을 바탕으로 스페인어 전공자인 조구호 씨가 완역한 것이다.
백년의 고독 2중남미 문학과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 작품은 첫 출간하자마자 세계적인 작품이 되었고, 마르케스에게 노벨상을 안겨주었다. 민음사에서 나온 이번 번역판은 아르헨티나에서 처음 출판된 판본(1967)을 바탕으로 스페인어 전공자인 조구호 씨가 완역한 것이다.
가우초는 소탈하고 충동적이며 규칙이 없는 자유분방한 삶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사르미엔토가 언급한 야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사르미엔토가 유일하게 크리오요성을 구현했다고 비난한 마소르카 부대의 건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4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끝없는 언어] 보르헤스는 20세기 초반, 밀려들어오는 유럽의 언어 앞에 선 아르헨티나 언어의 운명을 고찰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세계 속에서 한국어를 고민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와 그리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보르헤스는 당대의 아르헨티나 언어 행위를 두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는 "프랑스 풍을 흉내 내는 사람들의 것으로, 그들은 일상적인 스페인어의 관습보다 새로움을 중시하지만 게으름뱅이처럼 이제야 막 연습하기 시작한"(53쪽)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성스러운 연방을 신봉했던 사람들처럼 스페인어가 완벽하다는 한림원의 주장을 신봉하는 순수주의자들의 행동"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세계 속에서 더 적극적으로 한국어를 고민해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고, 순수하고 고유한 한국어를 세련하고 정제하자는 소위 순한국말전용론자들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보르헤스도 말하듯이, 저 역시 순수하고 홀로 완벽한 모국어 같은 건 없다는 입장입니다. 순수한 한국말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외세에 오염된 한국어를 씻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진의를 폄훼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만, 그것이 올바른 기획일지는 강한 의문이 남습니다. 그들은 우리말이 오랜세월 한자와 서양말, 일본어에 치였기에 온갖 시련을 겪은 한국어에서 외세의 잔재를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건 뿌리를 탐구하는 일이 아니라 뿌리를 뽑는 일이 되고 맙니다. 제가 보기에 순한국말전용론자들의 주장은 '무엇을 해야한다'고 주장하기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식이기에 악독했던 저 통제의 시대를 연상케 합니다. (그건 일찍이 김일성이 “남조선에서 쓰고 있는 말에서 한자말과 일본말, 영어를 빼 버리면 우리말은 ‘을’, ‘를’과 같은 토만 남는 형편”이라고 지적하면서 말 다듬기 운동을 벌였던 논리와 비슷합니다. 그렇게 해서 살려낸 우리말은 아이스크림을 얼음보숭이로, 원피스를 달린옷으로, 도넛을 가락지빵으로 바꾸는 것을 넘지 못합니다. 그렇게 해서 완벽히 자족적인 한국어가 더 아름다울까요?) 길게 논의할 자리는 아니지만, 한자는 중국말이 아니라 범동아시아의 오래된 문자 언어입니다. 한자는 인도유럽어계열로 치자면 라틴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라틴어를 모르고서 인도유럽어계에 속하는 언어들의 어원과 변천사, 거기에 담긴 생각의 궤도를 추적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한자를 빼놓고서 한국적임을 논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죠. 게다가 어떠한 언어도 자족적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외부 언어와 접촉하고 경계면에서 역동적인 교환과 삼투가 일어나면서 세계 전체의 언어 레벨과 농도를 맞춰가는 것이 언어의 특성이 아닐까요. 따라서 외부의 언어와 무관한, 우리만의 고유하고 아름다운 한국어가 있다는 상상은 마치 한겨레, 한민족이 존재한다는 환상만큼이나 근거가 없습니다. 우리말이, 언어가 그렇게 완고한 철틀이기만 한 것이 아니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그 모습을 유연히 변화시켜왔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세계화의 행렬에 무비판적으로 동참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언제나 내가 처한 상황인 모국어를 응시하면서도 그 범위를 확장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얘기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태어났고, 돌아갈 자리는 모국어이니까요. 이즈음 와서는, 우치다 다쓰루 선생이 말한 외국어 공부의 의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외국어 공부의 핵은 단순히 다른 세계를 이해할 도구를 얻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모국어라는 감옥에 갇혀 있음을 자각하는 수단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 집에 있는 물건을 속속들이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집'이라는 허구적 관념이 집에 있는 물건을 바로 보지 못하는 죽은 시야를, 사각을 만듭니다. 누구나 손님을 들이게 되면 내 집에 있는 물건을 새로 보게 되는 경험을 해봤을 겁니다. 아이들은 평소 거들떠도 보지 않던 장난감을 놀러온 친구가 가지고 노는 것을 보면서부터 애착하게 됩니다. 언어에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는 모국어라는 이유로, 모국어로 생각한다는 이유로, 더 나아가 모국어를 읽을 수 있다는 이유로 안다고 안심해버립니다. 그러나 익숙한 것과 아는 것이 다르듯이 읽을 수 있다고 해서 다 이해하는 건 아닙니다(시집을 생각해 보세요).
문법만으로는 심금을 울리는 어휘를 만들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작가들이 언어의 결핍을 인식하도록 깨우치려 노력해 왔으며, 언어를 확장하고 변형하는 것이 우리 모든 작가의 의무이자 영광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려 노력했다. 의식 있는 모든 문학 세대들이 그래 왔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5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시어에 대한 장광설] 앞서 다룬 글에 이어서 언어에 대한 보르헤스의 엄밀한 태도를 보여주는 짤막한 글입니다. 보르헤스의 말처럼 "모든 명사는 사물의 요약"일 따름입니다. 명사는 언어의 보편적인 특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어떤 현상에 대한 일시적인 타협안이 됩니다. 우리는 '구름'을 말하면서 하늘에 떠서 기류에 따라 이리저리 흘러다니는 수증기의 응집을 연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정의이며,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개별적인 이미지를 대변하지는 못합니다. 목가적인 유년의 어느 날 따스한 날의 햇빛 아래서 보았던 평화로움을 환기하는 구름과 당장의 눈앞에서 폭우를 내리는 검은 구름은 분명 다릅니다. 따라서 명사는 어떤 의미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요, 이를테면 어느 브랜드명과 같아서, 그 안에서 디자이너가 펼치는 세목, 그 각각의 차이를 모두 설명해줄 순 없는 겁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의 말과 글이 더 길어지고 아름다워질 수 있었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오후에 저 멀리서 해가 지고 그때 워낭 소리가 집요하게 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왜 우리는 그것을 표현하는 새로운 어휘를 만들지 않았는가? 왜 새벽 거리의 파괴적이고 위협적인 모습을 표현하는 새로운 다어를 창조하지 않았을까? 아직 밝은 오후임에도 첫 번째 가로등이 켜졌을 때 그 가로등의 완벽한 무능력에 감동한 마음을 표현하는 새로운 단어를 왜 조합하지 않았을까? 비열함 뒤에 숨어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불신을 표현할 또 다른 단어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65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형용사의 활용] 보르헤스는 이전 글에서 명사를 두고 얘기했다면, 이번에는 형용사를 두고 자기 생각을 펼칩니다. 생전 단 한 편의 장편소설도 쓰지 않고 단편소설에 만족했던 보르헤스가 과연 썼을 법한 글입니다. 본문에서 보르헤스는 장식적인 형용사를 나태하게 내버려 두지 말자고 주장하는 한편, 그 논리적 적합성이나 부적합성을 살펴봐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조지 오웰의 ⟨정치와 영어⟩,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권위와 미국 영어 어법⟩이 떠오르는 글이었습니다. 이런 글을 읽을 때면 저도 모르게 뜨끔하게 되면서, 또 제가 쓴 글을 다시 살펴보게 됩니다. 앞서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모든 명사는 사물의 요약"일 뿐이기에, 구체적인 명사의 상태를 특정해주는 형용사는 중요합니다. 또한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뉘앙스를 전달해주는 데도 큰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과해지면 글을 "생기 없는 수다쟁이"로 만들고 맙니다. 당연하게도, 언제든 다른 것으로 갈아끼울 수 있는 기호로 전락한 형용사에는 힘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3을 쓰고, 다음에는 삼을, 그다음에는 III를, 마지막으로는 9의 제곱근을 쓴다고 해서 그 사람을 위대한 수학자로 여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표현을 바꾼 것이 아니라 단지 기호만을 바꾼 것이다."⏤71쪽.) 한편, 이 글에서 재밌게 봤던 점은 과거 프라이 루이스 데 레온의 문체를 논하는 부분에서, 과거에는 형용사를 일종의 '휴식'처럼 활용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소설에서도 화자가 갑자기 인물을 둘러싼 풍경이나 외양을 묘사할 때, 마찬가지 일이 벌어집니다. 여러 기법상의 이유가 있겠지만, 제가 생각했을 때 묘사의 주된 기능은 호흡을 조절해준다는 겁니다. 묘사가 이어질 때 사건은 일단 중지됩니다. 그것은 음악으로 치면 어떤 휴지기입니다. 너무 잦으면 흐름을 방해하고, 너무 없으면 듣는 이가 피로해집니다. 동시에 은밀하게 작품 전체를 떠받치는, 투명한 철골 구조가 됩니다.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조지 오웰의 에세이 29편을 묶은 책. 오랜 세월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서 생계를 꾸려간 조지 오웰은 엄청난 분량의 에세이와 칼럼, 서평을 썼다. 그간 소문으로만, 혹은 일부 발췌 번역으로만 접할 수 있었던 좀더 풍부한 조지 오웰의 명문들을 한국어 텍스트로 만날 수 있다. 모두 29편의 에세이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21편이 국내 초역이다.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미국 소설가다. 그는 천재적 재능으로 미국 현대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지만 3편의 장편소설, 3권의 소설집, 3권의 산문집을 남기고 2008년 46세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 책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에세이 선집이다. 그가 집필한 세 권의 산문집에서 9편을 골라 엮었다.
차가운 그늘. 거무칙칙한 늪. 무성한 숲. 쾌적한 휴식. 여기 형용사를 동반한 네 개의 명사가 있는데, 사실 형용사의 의미는 명사에 이미 포함돼 있다. 이것을 보고 프라이 스루이 데 레온의 작품에는 불필요한 사족이 많다고 이야기하고 싶은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지난 300년 동안 문학에서 게임의 규칙이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본 것으로 충분하다. 요즘의 시인들이 어휘를 풍성하게 하는 데 형용사를 활용한다면 옛날 시인들은 휴식을 주면서 의미를 강조하는 데 활용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6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우루과이의 나무 숭배] 바로 이런 글을 읽으려고 번역서를 펼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루과이의 풍경을 묘사하는 첫 문단을 읽으면, 지금 이 순간도 지구상의 전혀 다른 공간에서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 경이감이 듭니다. 같은 '산'이라는 명사를 쓰더라도, 그 각각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심상은 다를 겁니다. 한국적인 산은 오직 한국에만 존재하는 독특하고 아기자기한 풍경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산악지대로 둘러싸여서 하늘로 시선을 돌리기만 해도 산등성이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평선'이라는 개념을 진정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에 반해, 우루과이는 정반대라고 보르헤스는 씁니다. 평원은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라서, 우루과이에서는 평원이 바다처럼 여겨지며, 외려 울창한 숲으로 감싸인 지역은 섬으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멋진 표현입니다. 최근 넷플릭스 시리즈로 나온 ⟪백년의 고독⟫ 8부작 드라마를 보면서도 느끼는 것인데, 마꼰도라는 가상의 마을에 나오는 라틴아메리카의 마을 풍경을 보는 재미가 상당합니다. 마술적인 연출 방식도 마음에 들고, 그것이 마꼰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일상적인 배경처럼 놓여 있는 것도 좋아요. 당시의 라틴아메리카를 완전히 동떨어진 별천지의 마술 세계처럼 그리지 않는 점도 좋고요(개인적으로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너무 익숙한 명칭은 의심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낮은 담장, 커다란 야자수 잎사귀를 포개어 지붕을 엮은 모습, 아래 위로 길고 폭이 좁으며 여닫는 문이 없는 현관 입구, 벽의 판자를 성글게 덧대어서 마름질 된 나무의 모양을 따라서 빛이 새어나오는 풍경 따위를 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상적인 마을이었던 마꼰도에 죽음이라는 얼룩이 지고,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적 격랑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일련의 에피소드를 떠올려 보면, 인간이 집을 짓지만 종내에는 그 집이 인간을 짓게 된다는 멋진 말을 다시금 떠올려보게 됩니다.
우루과이 문학에는 나무뿌리처럼 촘촘하고 빽빽한 분위기가 있다. 커다란 나무와 기다란 능선을 따라 국가가 형성됐기에 세이바 나무 숲처럼 다양한 문학을 만들었다. 다양하게 굽이치는 강물이 이리저리 뒤섞이면서 부레옥잠을 끌고 다니듯 시간이 흐르면서 포도송이처럼 다양하게 모여든 밀림의 감성이 고동치는 문학인 것이다. 상쾌함이나 휴식이라고만 여겼던 그리스인의 숲이 아니라 다양한 생각으로 인해 수많은 갈등이 잔가지처럼 얽혀 있는 드라마틱한 숲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75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용호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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