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X포스텍 <STS, 과학을 경청하다>독서모임

D-29
안녕하세요, 말씀해주신 이야기들 흥미롭게 잘 들었습니다. 저 역시 @바나나맛우유 님 말대로 '표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과학적 체계를 넘어 실제 우리 사회에서 표준이 '적절'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 듯합니다. 표준 외모와 체형, 성적과 능력 등, 모든 면에서 표준을 삼고 그것에 맞게끔 우리의 위치를 규정한다면, 결국 다양한 인간의 면모들은 언젠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실험 기구들의 경우에는, 그것이 "표준에 맞는지 계속 측정을 하고, 잘 맞지 않으면 고치고, 정확한 표준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작업"(130)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인간은 도구가 아니니까요. 책에서는 인간-비인간의 공존을 재치있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저는 과도하게 발전된 과학기술이 인간을 삼켜버릴 것 같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계속해서 '표준'을 규정하고 척도화하는 일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고민이 되네요.
그렇기에 저는 '테크노사이언스'가 "인간의 내면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를 원하는 인문학의 일부"(48)가 되어야 한다는 데 매우 동의합니다. 기술에 한계를 두지 않되, 그것이 인간과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는지 끊임없이 사유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네트워크식 사고'라면, 분명 이는 유의미한 것이죠. 그러나 @DK 님이 알고리즘이라는 예를 들어 말씀해 주셨듯, 내가 맺는 관계들에 의해, 혹은 내가 보고 듣는 것과 그것들을 함께 좋아하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에 의해서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진다면 그 존재는 매우 단순하고 단편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관계가 바뀌면 '나' 역시도 달라질 텐데요, 여기서 '네트워크식 사고'는 '나'와 주변의 관계가 빠르고 쉽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듯합니다. 인간-비인간의 관계가 꼭 '역동적'이지만은 않지 않을까요. @달무리 님의 말씀처럼, 오히려 더 '편협'해지는 것 같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은 결코 '순수한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비인간은 인간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하기도 하고, 혹은 제약을 두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행위자'이며 우리 사회의 구성원일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의 핵심이기도 한 '비본질주의'에 무척이나 인상 깊었습니다. 저는 '네트워크식 사고'를 강조하는 2장을 읽으면서, 동시에 인간공학에 대한 페터 슬로터다이커의 저작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가 떠올랐습니다. 맥락은 조금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만, ‘불구(不拘)의 인간학’이라는 새로운 길을 모색한 이 책에서는, 불구자를 특색있는 사람으로 해방시킬 것이 아니라, 불구자가 “어떤 보호기구를 통해서만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제될 수 있다”(103)고 주장합니다. 즉, 정상성에 어긋나는 목발은 부러뜨려서 극복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것이고 그러한 조치들을 통해 ‘나’가 “직접적인 자기변모의 대상”(591)으로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목발이라는 비인간은 그렇게 한 인간과 관계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때의 인간은 독립적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수동적이기도 합니다. 인공눈물 없이 아침에 눈을 뜰 수 없는 저 또한 그렇고요. 이런 것들도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다면 저는 이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3주차) 안녕하세요 고려대학교 언어학과 조승준입니다 :) 지금까지 개인적인 사정으로 계속 토론에 참여를 못해 이점 너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ㅠ 남은 기간 동안 열심히 참여해보겠습니다! 우선 2주차 토론에서도 논의되었듯이 과학의 “표준” 혹은 “객관성”이 사실은 합의된 규범, 일종의 규약이라는 것이 가장 흥미롭게 다가오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3주차 과학철학적 탐색에서는 제가 예전에 흥미롭게 읽었던 장하석 교수님의 <온도계의 철학>이 제시되는데, 저희는 쉽게 ‘0도에선 물이 얼고 100도에서는 물이 끓지’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사실은 과학자들 간에 합의된 관념 혹은 신화라는 것이 핵심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즉 과학의 법칙들은 발견된 것이 아니라 발명된 것이라는 주장인데, 이와 비슷하게 수학 역시 발견이라기보다는 발명에 가깝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수학자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수리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언어 역시 유희적이고 그 텍스트를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단지 수학과 과학을 비롯한 학문만이 발명된 것은 아닙니다. E.H.카 역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본질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의 “기록”이므로 그 기록자의 주관적 해석이 반영된다는 점을 강조했고, 그 기록을 또 해석하는 현대 역사학자의 관점 역시 반영되기 때문에 다수의 의미 작용을 거쳐 저희의 눈과 귀에 들어온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고 논의했습니다. 사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진은 정확한 실재를 객관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개발된 기술이지만, 무엇을 선택적으로 보여주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위 맥락에서 롤랑 바르트는 광고 사진을 분석하며 어떻게 사진이 그 수용자 머릿속의 의미작용을 완전히 지배하는지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홍성욱 교수님은 과학이 객관적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며, 각기 다른 과학자들의 입장이 충돌하고 그곳에서 합의가 발생하여 보편성이 구성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마치 변증법적인 정반합의 과정과도 비슷하게 느껴지는 대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보편성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어 그 시기의 주된 과학사조가 되는 것이죠.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 사회와 연관된 질문이 생겼습니다. 과학의 문제만은 아니기에 개인적으로 책의 내용과 조금은 동떨어진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현대인들은 “객관성”이라는 신화에 너무 쉽게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사진은 객관적인 사진이 아닙니다. 역사도 “팩트”라고 부를 수 없는 학문이며, 통계 역시 그 표본집단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론이 도출될 수 있는 자료입니다. 언어 역시 세계를 있는 그대로 충분히 반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희는 객관적이라고 느껴지는 것들을 쉽게 믿고, 저희의 해석과 인지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명명백백한 사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례로 젠더 문제를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유전적으로 XX, XY 염색체에 따라 두 개의 성별이 있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개개인이 인지하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있습니다. 둘 중 어떤 의견이 적절한지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은 너무 어려운 문제이지만, 과학의 보편성이 충돌과 합의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어떤 지식도 온전히 객관적이지는 못하다는 점만큼은 상호 간에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지식은 객관적이야”라는 인식이 충돌과 합의로 구성되는 과학의 혼종적인 콜라주에 제법 큰 장애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까닭입니다. 그 누구의 지식도 온전히 객관적일 수 없다는 것이 정립되어 있어야만 자유롭고 상호존중이 적절하게 이루어지는 공론장에서의 토론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저는 이 “객관성의 신화”를 와해시키는 방법으로는 무엇이 있을지 여러분께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객관성의 신화라는 말이 흥미로웠습니다. 제가 과학을 좋아하는 것도 일까vs아닐까가 아니라 이다vs아니다로 나눌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명확했고, 그 결론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논리적이었거든요. @조이태 님께서 말씀하신 객관성의 신화라는건 니체가 죽인 신의 자리를 꿰차고 들어간 이성, 즉 과학의 신화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사람에의해 반박되고 토론을 거쳐 쌓아온 과학의 객관성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결론들을 개인이 해석하여 현실에 적용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예시가 책에 설명된 빈혈, 수질오염이라 생각됩니다. 여기엔 두가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 객관적 과학을 바탕으로 하였기에 결론도 객관적일거라 생각한다. 이점이 객관성을 신화로 만들어버리는 부분일 것입니다.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고 해서 결론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조이태 님께서 말씀해 주신것처럼 인간을 염색체로 구분하자면 여성과 남성 둘로만 나눌 수 있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유전병 제외) 하지만 이것을 근거로 성정체성까지 두가지로 결정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 있습니다. 염색체로 구분한 여성과 남성은 의학, 생명과학등 개체군 전체에는 적용할 수 있겠지만 개개인에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즉, 진실을 섞은 가짜가 과학을 신화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2. 과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고, 그걸 기반으로 논리를 펼쳐나가는 법칙들이 사실이 아닐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뉴턴의 법칙의 위배하는 경우를 설명하였고, 전하를 가진 전자의 흐름인 전류는 사실 전류와 반대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잘못되었다면 미래에 수정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과학에 객관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합니다. 객관성의 신화를 와해시키는 방법은 객관적인 것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야한 과학의 발전과 새로운 가설의 발견이 이뤄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스타그램 예시를 보니 우리 일상에서도 그 점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곧 질문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3주차) 안녕하세요 포항공과대학교 전자과 하현우입니다. 3장 내용에서부터 여러가지 레퍼런스로 이야기를 이어나가주셔서 흥미로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한 가지 부탁을 드리자면, 제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내용을 잘 알지 못해서, 이 소설의 어느 부분이 연관되어 있는지 말씀주시면 더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질문에 대하여서, 객관성의 신화를 와해시키는 방법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객관성의 신화가, 말씀하신대로 자유롭게 상호존중하는 공론장의 형성에는 방해가 되고 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과 '객관'이 그다지 사실이 아니고 객관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러한 사실과 객관이 존재할 것이라는 신화적 믿음이야말로 최소한의 토론을 가능케 하는 지지선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러한 믿음이 없다면, 어떠한 주장에 대한 객관적 근거를 마련해야 하는 필요 자체가 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객관적 근거라는 것이 아무런 지위도 설득력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공론장에 남는 것은 의미없는 메아리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객관성의 신화도 문제이지만 객관성의 신화조차 무너진 상태는 더더욱 문제라는 의견입니다. 그래서 저는 객관성의 신화를 와해하기 보다는, 객관성의 제2신화 정도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명명백백한 사실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은 여전히 갖고 있지만, 너의 사실과 나의 사실이 공존 가능한 것일 수 있다는 믿음을 추가하는 것이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관련하여 추가적으로 댓글 남겨봅니다! 앨리스는 토끼 굴을 통해 기존의 논리가 전혀 적용되지 않는 나라로 가게 되는데, 키가 커졌다 작아지고 목이 늘어나는 등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자 정신을 차리기 위해 구구단을 세는 장면이 있습니다. “4 곱하기 5는 12, 4 곱하기 6은 13......” 이런 식으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는 유클리드적인 수학과 논리학의 체계를 계속 변동시키는데, 이는 루이스 캐럴이 수학에 관해 가지고 있던 관점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의 구체적 예시를 들자면 무한의 크기도 서로 다르다는 칸토르의 주장이 있을 것 같습니다. 칸토르는 “수학의 본질은 자유에 있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자유로운 수학이 가장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책이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 감사합니다! ㅎㅎ @조이태 님이 말씀해주신 것을 토대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면 정말 색다르게 다가올 것 같아요! 상대적으로 과학이나 수학같은 체계적인 학문에서 '자유'를 상상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러한 관점이 반영되어 있는 소설을 예시로 드니 훨씬 더 이해하기가 쉽네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2주차 정리) 보편성의 환상에 대한 단상들, 과학이 만들어내는 표준의 역할을 다양한 예시를 통해 논의하였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3주차) 11.25(금)~12.1(목)까지는 본 책의 3장 <과학철학적 탐색>에 대한 토론이 진행됩니다. 자유롭게 토론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조이태 안녕하세요, 질문 감사합니다! 저 또한 @조이태 님의 말씀처럼 우리 사회에서 '객관성'이라는 신화에 쉽게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은 자연과학이 (적어도 인간의 고안 방법 하에선) 객관성이 높은 증명과정을 사용해서 객관성·진리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쨌든 과학이라는 학문은 ‘대개 그러하다’라는 표준을 구축하기 위해 매우 정밀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으니까요. (그 과정을 이 책에서는 충돌과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다고 표현하기도 했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과학이 객관성의 대명사처럼 인식되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인문학 전공자라 과학이 만들어 내는 ‘객관성의 신화’에 매우 회의적인 편이지만, ‘객관성’ 자체를 와해하고 부정해 버리면 결국 우리 사회를 지탱해줄 최소한의 객관성마저도 사라져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 견고한 ‘객관성’에 균열을 가해야 하겠지만, 꼭 과학의 보편성을 부정하는 방식이 되어야 할까요. 인문학과 사회학의 차원에서 또 다른 객관성을 지향하면 어떨까요. 예컨대 말씀해주신 성별의 경우, 자연과학에서는 XX, XY에 따라 두 개의 성별을 주장하지만 사회학에서는 성별이 이미 젠더라는, 즉 “젠더는 결정은 내적 본질이 아니라 형성 중인 구성물”(주디스 버틀러)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사회학에서는 성별의 구분을 뛰어넘는 ‘젠더’ 개념을 내세워 또 다른 객관을 정립하려고 하는 것이죠. 이렇듯 남성/여성 이외의 또 다른 젠더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과학의 객관성은, 또 다른 차원에서의 객관과 맞붙을 때 스스로 자신의 신화에 구멍을 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서로의 객관을 충돌시켜 보는 것이 더욱 생산적인 결과를 불러오지 않을까요. 너무 이상론적인 이야기가 되어 버린 듯하네요..!
흥미로운 이야기들 감사합니다. 특히 저는 @라다크아저씨 님이 2번에서 말씀해 주신 "지금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논리들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 또 그것이 언젠가 수정될 것이라고 믿는 것. 그 "과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신뢰"가 곧 "과학의 객관성"을 만든다는 생각에 크게 공감합니다. 위에서 제가 말한 내용과 맞닿는 부분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과학의 객관성을 그대로 인정하되, 또 다른 객관성을 지향하기. 그것이 곧 과학의 객관성만이 전부가 아님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 아닐까요.
객관성의 신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저는 219쪽의 사례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에 대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관점 차이에 주목하게 되었는데요. 여러분들은 어떠셨을까요? 과거에도 현재에도 물은 100도에서 끓지 않지만, 18~19세기를 거치면서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이 이야기에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사회과학자들은 공유한 근본 개념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하는 반면에, 자연과학자들은 합의한 것에 대해서는 결코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도대체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에서, 앞서 논의했던 '객관성의 신화'에 균열을 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책에서 이 부분에 대해 읽으면서 조금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라는 명제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정확히는 "물이 1기압에서 끓는 온도를 100도씨로 하고, 어는 온도를 0도씨로 한다." 그리고 그 간격을 100등분 한 것이 온도의 정의입니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만든 온도계들로 우리는 온도를 측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는 현상보단 정의에 가깝고 그렇게에 의심의 대상보다는 약속이라고 보는것이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척도에 대한 약속인것이죠. 그래서 책에서 설명한 것 처럼 섭씨 100도는 물을 금속용기에서 1기압에서 끓일때 증기의 온도..등등 많은 조건이 붙은 것이죠. 저는 작가가 이 부분을 신화로 해석한건(234쪽) 무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히려 책에서 소개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음바페효과, 기전력 차이와 같은 것들을 함부로 정의내리려 하지 않고 그럴싸한 가설과 근거가 나올때 까지 남겨두는 것이 과학의 신뢰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위 내용을 쓰다보니 우리가 정의한 온도, 시간과 같은 정의가 잘 못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책에서 소개한 잔지바르 효과처럼 얽히고 설킨 네트워크들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른채 우리의 과학을 지탱하고 있다면, 살아가는데는 문제가 없겠지만 좀 찝찝한 느낌이 들긴하네요... 이 생각이 과학은 완벽해야한다는 과학의 신화일 수 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1초, 1도씨라는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가 정의한 척도로 세상의 법칙을 만들고 잘적용된다는걸 확인하고 있으니, 우리만의 언어로 세상을 바라본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3주차) 안녕하세요 포항공과대학교 전자과 하현우입니다. 온도계의 철학을 비롯하여 3장에 실린 여러 사례들을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저는 '분류'가 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여쭙고 싶습니다. 명왕성의 행성 지위 탈락에 다수결이라는 투표 방식이 사용되었다는 사례가 책에서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나 명왕성의 행성으로 유지되거나 혹은 왜소행성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에 속한다고 해서 과학 이론, 학설, 원리, 사실들은 그다지 뒤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분류는 보다 편리하고 용이하게 개념을 이해하고 다루기 위해서 인간이 사용하는 하나의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도구일 뿐인 분류에 대한 사례를 들어 과학이 다수결에 의할 수 있고 민주주의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하는 것은 조금 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류는 과연 과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분류가 과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언급해주신 것처럼 명왕성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다수결의 원리가 개입하기도 하고 결정적인 부분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과연 분류가 과학적인가에 대한 비판적 의견이 제시될 수 있으며 이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다수결은 언제나 옳은 판단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예로 히틀러도 민주적 방식을 통해 다수결로 당선된 인물이었지만 그 결과는 우리가 알듯 비참했습니다. 물론 동일한 예는 아니지만, 다수결이 그 결과에 대한 보장을 하지 못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분류가 과학이느냐에 대한 답은, 그렇다가 될 것 같습니다. 다만, 분류가 과학인지에 찬성하는 정도는 100%가 아닌 50%에 더 가깝습니다. 완벽한 과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과학이라 생각한 것은, 분류가 과학서 담당하는 역할 때문입니다. 우리가 책에서 읽었듯 과학이라고 주어진 것은 절대적 원리가 아니며 가변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결정의 순간들이 있어야 합니다. 분류를 과학적이지 않다고 분석한다면 과학에 있어 결정이 이루어지지 않고 무엇이든 미결정 상태로 남아 추가적 논의가 어려울 것입니다. 과학의 영역서 분류가 일정 영역을 담당했으며 이를 통해 과학이 걸어온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류는 일어날 수 있지만, 충분한 검토에도 오류가 생겼다면 추후 언제든 수정의 기회가 열려있기에 분류는 과학이라 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생각거리 제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의견 감사합니다. 우선 @집중호우 님이 말씀해 주신대로, '객관성'이 아무런 지위도 설득력도 갖지 못한다면 과학이라는 학문은 설 자리가 없게 되겠죠. 저 역시 지표로서의 객관성, 즉 "최소한의 토론을 가능케 하는 지지선"인 객관성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꼭 '신화화'되는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어 과학을 '분류'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테크노사이언스' 자체에 대한 의문을 던져주셨는데요. 지적해주신 대로 이론을 정립할 때 사용되었던 도구적 방법론일 뿐인 '분류'가 민주주의적 측면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 자체를 과학이라고 보는 관점에 모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과학적 사실들은 변함없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이과생의 측면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지 매우 궁금했는데, 책 전반을 관통하는 이야기를 해 주셔서 잘 알 수 있던 것 같습니다. 다만 한편으로, 이 책에서는 과학 자체를 그대로 쓰여져 있는 자연, 혹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여진 법칙이 아니라, 여러 "변수들 사이의 연관관계(246)"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과학적 사실'들을 발굴하거나 발견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예술과 같이 창조해내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여러 사실들과 변칙들이 공존하는 그 관계를 '분류'라고 칭할 수 있는 건 아닐까요? 물론 과학이라는 학문을 온전히 '분류'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각각의 요소들과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더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인 듯 합니다!
@슈슈 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에 동의합니다! 자연과학에서 XX, XY라는 두 개의 성별을 주장하더라도 주디스 버틀러를 비롯한 사회학적이고 (혹은 철학적인) 관점에서는 성이라는 것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여기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라다크아저씨 님께서 말씀해주셨듯이 진실을 섞은 가짜가 과학을 신화화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적으로 제시되는 정보가 객관적이라고, 그러므로 보편타당한 진리라고 생각하여 실제로 다원적으로 나타나는 성별을 두 개로 묶어버리려는 논의의 경우, 과학이 객관성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에도 ”해석의 한계“가 있기는 해야할 것입니다. 그 어떤 객관성도 없다고, 어떤 정보도 보편적이지 못하다는 인식은 음모론을 비롯하여 허무맹랑한 주장들로 이어질 위험성을 가집니다. ”최소한의 토론을 가능케 하는 지지선“ 즉 ”해석의 한계선“이 필요하고, 그렇기에 어느 정도의 보편성에 대한 신뢰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 한계선을 어디에 그어야 할지, 어디부터 ”객관성의 신화“이고, 어디까지가 ”최소한의 토론을 가능케 하는 지지선“이고, 또 어디가 ”허무맹랑한 음모론”의 영역인지 구분하기 위한 논의와 담론들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3주차) 안녕하세요!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예리입니다. 그동안 사정때문에 토론에 활발히 참여하지 못해 아쉽습니다. 이제부터 열심히 활동하겠습니다! 저는 3강을 읽으면서 객관적이라고 여겨졌던 과학이 해석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상깊게 보았습니다. 책에서 제시된 빈혈의 진단이나 4대강 사업 후 녹조량의 변화는 과학과, 과학이 속해있는 사회가 상호작용한 예시입니다. 앞서 다른 학우분들께서 발언하신 것처럼 저 또한 과학이 상대적으로 객관적이고, 언제나 자연의 사실, 진리만을 추구하는 학문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과학도 어쨌거나 하나의 사회 속에 존재하기에, 사회문화적 맥락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의 발전으로 사회가 변화하는 지점도 있지만, 사회의 변화나 압력에 따라서 과학도 바뀌는 부분이 있고, 따라서 과학과 사회는 상호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전자의 경우는 사실 너무나 예시가 많습니다. 정보 과학의 발달로 인해 정보화 시기가 촉발되었다는 최근의 사례부터 먼 옛날 뉴턴의 만유인력 발견과 같은 과거의 사례까지 다양합니다. 후자의 경우는 우생학의 악용 사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유전자를 개량하여 인간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기 위한 과거의 생각은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 이용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하나의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과학은 이처럼 사회와 상호작용하면서 존재하는 학문인데, 객관성을 추구해야 하는 과학이 사회에서 어떤 집단의 정당성과 명분, 목적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과학은 객관성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사회에서의 쓰임은 주로 과학의 해석에서 비롯된 부분이 많을텐데, 해석마저 객관성을 추구해야 하는지가 궁금합니다. 더 크게 보자면, 과학의 객관성은 어느 부분까지 적용이 되어야 하냐 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객관성은 연구 부분에만 한정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해석까지 객관적이어야 하는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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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나눔][박소해의 장르살롱] 20. <고딕X호러X제주>로 혼저 옵서예[버터북스/책증정] <오늘의 역사 역사의 오늘> 담당 편집자와 읽으며 2025년을 맞아요[책증정] 연소민 장편소설 <고양이를 산책시키던 날> 함께 읽기[📕수북탐독] 7. 이 별이 마음에 들⭐수림문학상 수상작 함께 읽어요[도서 증정] 저자이자 도슨트인 유승연과 함께 읽는 <내셔널 갤러리에서 보낸 500일>
💡독서모임에 관심있는 출판사들을 위한 안내
출판사 협업 문의 관련 안내
그믐 새내기를 위한 가이드
그믐에 처음 오셨나요?[그믐레터]로 그믐 소식 받으세요중간 참여할 수 있어요!
11월 29일(금) 이번 그믐밤엔 소리산책 떠나요~
[그믐밤] 29. 소리 산책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이번에는 극단 피악과 함께 합니다.
[그믐연뮤클럽] 4. 다시 찾아온 도박사의 세계 x 진실한 사랑과 구원의 "백치"[그믐연뮤클럽] 3. "리어왕" 읽고 "더 드레서" 같이 관람해요[그믐연뮤클럽] 2. 흡혈의 원조 x 고딕 호러의 고전 "카르밀라"
우리 옆 동물 이야기 🐋🐕🦍
[현암사/책증정] <코끼리는 암에 걸리지 않는다>를 편집자, 마케터와 함께 읽어요![그믐북클럽] 14. <해파리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읽고 실천해요[진공상태]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이들 모여주세요![성북구 한 책 플랜 비-문학] ③ 『동물권력』 함께 읽기 [그믐북클럽Xsam]19. <아마존 분홍돌고래를 만나다> 읽고 답해요 [그믐북클럽] 4. <유인원과의 산책> 읽고 생각해요
읽는 사람은 쓰는 사람이 됩니다_글쓰기를 돕는 책 3
피터 엘보의 <글쓰기를 배우지 않기>를 읽고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요글쓰기 책의 고전, 함께 읽어요-이태준, 문장 강화[책증정] 스티븐 핑커 신간, 『글쓰기의 감각』 읽어 봐요!
국내외 불문, 그믐에서 재미있게 읽은 SF 를 소개합니다!
(책 나눔) [핏북] 조 메노스키 작가의 공상과학판타지 소설 <해태>! 함께 읽기.[SF 함께 읽기] 당신 인생의 이야기(테드 창) 읽고 이야기해요![책증정] SF미스터리 스릴러 대작! 『아카식』 해원 작가가 말아주는 SF의 꽃, 시간여행[박소해의 장르살롱] 5. 고통에 관하여
버지니아 울프의 세 가지 빛깔
[그믐밤] 28. 달밤에 낭독, <우리는 언제나 희망하고 있지 않나요>[서울외계인] 버지니아 울프,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읽기<평론가의 인생책 > 전승민 평론가와 [댈러웨이 부인] 함께 읽기
2025년을 위해 그믐이 고른 고전 12권!
[그믐클래식 2025] 한해 동안 12권 고전 읽기에 도전해요!
🏆 한강 작가의 책 읽기는 계속됩니다!
[한강 작가님 책 읽기] '작별하지 않는다'를 함께 읽으실 분을 구합니다![라비북클럽](한강작가 노벨문학상 수상기념 2탄)흰 같이 읽어요노벨문학상 수상 한강 작가 작품 읽기 [한강 작가님 책 읽기] '소년이 온다'를 함께 읽으실 분을 구합니다.
현대 한국 사회를 조명하는 작품을 작가, 평론가와 함께 읽습니다.
[📕수북탐독] 4. 콜센터⭐수림문학상 수상작 함께 읽어요[📕수북탐독] 3. 로메리고 주식회사⭐수림문학상 수상작 함께 읽어요[📕수북탐독] 2.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수림문학상 수상작 함께 읽어요[📕수북탐독] 1. 속도의 안내자⭐수림문학상 수상작 함께 읽어요
빅토리아 시대 덕후, 박산호 번역가가 고른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 3!
[박산호의 빅토리아 시대 읽기] 찰스 디킨스 ① <위대한 유산>[박산호의 빅토리아 시대 읽기] 찰스 디킨스 ② <올리버 트위스트>[박산호의 빅토리아 시대 읽기] 찰스 디킨스 ③ <두 도시 이야기>
미사의 누워서 쓰는 서평
무라카미 하루키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앨리슨 벡델 - 펀 홈시무라 타카코 - 방랑소년 1저메이카 킨케이드 - 루시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지금 읽기 좋은 뇌과학 책 by 신아
[뇌과학책 함께 읽어요] 3. 도둑맞은 뇌[뇌과학책 함께 읽어요] 2. 뇌 과학이 인생에 필요한 순간[뇌과학책 함께 읽어요] 1.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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