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차 정리)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 과학기술: 직업적인 측면에서 스 포츠/교육 분야에서는 대체되지 않을 것이나, 그렇다면 결국 인간의 삶에 의식하지 못한 채로 스며든 과학기술이 '인간성'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만이 고수할 수 있는 영역은 무엇일까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고려대X포스텍 <STS, 과학을 경청하다>독서모임
D-29
석희진
화제로 지정된 대화
석희진
(2주차) 11. 18.(금)~ 24.(목)까지 책의 2장 <네트워크로 보는 테크노 사이언>에 대한 토론이 진행됩니다! 분량 제한은 없고, 자유롭게 질문 및 토론을 전개해주시면 되겠습니다 :)
석희진
(2주차) 과학의 보편성에 대한 부분이 인상깊었습니다. 누구나 과학이 보편적인 것이고, 표준화되어 있다고 믿지만 사실 이는 엄청난 역사와 정치적인 개입이 필요한 것이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표준을 한번 만들었다고 해서 이게 영원히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표준을 그냥 놔두면 낡아지고 유용성이 떨어지게 되고 맙니다. (...) 정확한 표준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계속 관리하고, 조정하고, 간섭하고, 검토하는 일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131) 그렇다면 표준이라는 것은 왜 필요할까요? 이 것이 정말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할까요? 여러분의 생각도 궁금합니다.
바나나맛우유
안녕하세요. 포스텍 무은재학부 류나은이라고 합니다. 우선 조금 늦게 토론에 참여하게 된 점 죄송합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제 의견을 써보고자 합니다.
'표준'이라는 것은 객관적인 척도를 나타내는 것인 동시에, 계속 변동될 수 있다면 이것은 굉장히 주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객관성과 주관성을 가지는 모순적인 체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 모순적인 구조 사이에서 사람들은 적절한 위치를 고민하게 되며,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사람은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정해진 척도로 사람들은 원래의 상태를 복구하거나 기존의 상태를 보완하기도 하기에 표준은 인간에게 필요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석희진
반갑습니다! 지적해주신 대로 '적절함'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일 것 같고, 이 책에서도 그 적정 기준을 정하는 데 수반되는 생각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과학과 역사가 발전해 나갔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인간에게 필요한 도구를 정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무엇인지도 함께 고민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과학자들이 자기 분야의 전문성을 갖고 있다고 할 때, 이 기준을 정할 수 있는 인문학적 사고가 반드시 필요할텐데, 그것에 관한 교육은 또 어떻게 진행될 수 있을지도 대안이 필요할 것 같아요.
박유진
안녕하세요😊 고려대학교 언어학과 박유진입니다.
먼저 흥미로운 토론주제 제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생각엔 표준을 세계화와 관련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굉장히 세계화되었기 때문에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다양성 속에서 이전에는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사회를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표준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원활한 의사소통을 하기 굉장히 어려울 것입니다. 표준을 정해 놓지 않으면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내용이 청자가 이해하고 있는 내용과 동일한지 확인하기 매우 까다롭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순탄하게 진행되기 힘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세계화가 가져오는 많은 이점을 제대로 누릴 수 없게 될 것이며, 오히려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야기하는 다양한 갈등이 심화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표준은 ‘다양성 속의 기준점’으로서 꼭 필요한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쿤
과학은 당연하게 객관적이고,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어서, 과학에 대한 보편성을 고찰해본적이 없는데, 정말 그 이면에는 그동안 "당연하다"라고 생각해왔던 사실조차 어떻게 객관성이 확립되어 왔는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보편적이다"라고 생각하는 진리들도 언젠가는 뒤집힐 수 있는 일이니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은 객관적일 수 없기 때문에, 표준을 정하지 않기에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 복잡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구에 존재하는 사람들만 해도 문화에 따라, 의사소통 방식이 다르며, 언어만 달라져도 어떠한 사상을 인식하는 체계가 달라집니다. 저희가 소통을하고 함께 교류를 하며 발전하기 위해서는 결국 표준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 표준을 어떻게 정할지는 많은 사람들의 합의가 필요할 것 같지만, 그 합의 또한 어떻게 정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아야겠네요.
그리고 다음 내용과 이어지는 생각으로, 이러한 합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저희의 네트워크가 많은 작용을 하고 있을 것 같았습니다. @슈슈 님이 언급해주신 "목발"에 대해서 생각을 이어나가보자면, "목발"과 함께 자기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즉 "목발"과의 네트워크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 그룹 안에서는 비슷한 생각들을 표준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쉽게 생각해서 "COVID 19"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저희들이 "마스크"라는 물체와 함께 살아가면서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실내에 모일 때 마스크가 없으면 허전한,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하는 표준을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석희진
(2주차) "하나의 존재가 어떤 네트워크에 포함되어 있는지에 따라서 그것에 대한 설명과 이해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같은 대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해석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166) 과학의 역사와 그 맥락에 대해서 알고 보니 '인식론적, 존재론적 해석'이라는 말이 보다 구체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같은 의미에서 점차 초연결사회로 가고 있는,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현대 사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는데요. 친구가 600명인 페이스북의 세상, 내가 원하는 것만 나열할 수 있는 인스타그램으로 우리는 정말 초연결되어 있는 걸까요? 사실 내 옆의 친구나 가족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은데 말이에요. 점차 세계가 하나의 맥락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여겨지는 지금 시대에 생길 수 있는 문제가 무엇이 있을까(이번 카카오톡 오류문제 처럼요), 이때 과학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여러분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DK
조금 다른 내용일 수도 있겠지만 추천 알고리즘과 양극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배달의 민족과 같은 플랫폼이 한창 시작되고 관련 스타트업들이 줄줄이 등장하던 시기에, 학부 컴공과 프로그래밍 수업에서 프로젝트로 식사 추천 애플리케이션 개발을 했고 제가 맡은 파트가 추천 알고리즘이었는데요, 지금은 어느 정도 발전이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당시까지 모든 추천 알고리즘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되었습니다. 사용자가 선호하는 종류의 컨텐츠들의 요소를 많이 포함하는, 일종의 태그가 많이 겹치는 컨텐츠 추천 혹은 사용자와 선호도가 비슷한 다른 사용자들이 많이 선호하는 컨텐츠 추천이 바로 그것인데요. 여기서 전자는 음악이나 음식 등의 컨텐츠에서 어떻게 특정 요소, 태그를 잘 추출해낼 수 있는가와 그 기준은 무엇인가 등의 문제가 있었고 후자의 경우 방대한 데이터가 수반되어야만 가능한 추천방식이었습니다. 쥐꼬리만한 코딩 능력과 좁은 데이터풀에서 낑낑대면서 완성은 시켰지만 결과물은 처참했습니다.
그로부터 지금은 강산이 반 이상 바뀔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에 저희는 그야말로 알고리즘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데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서는 선호할만한 '친구' 혹은 '셀럽'을 추천해주고 성향이 비슷하거나 취향이 겹치는 사람들간의 네트워크를 구축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유튜브인데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유튜브를 이용하면서 컨텐츠를 생산하고 소비합니다. 그렇게 쌓인 방대한 데이터를 이용해 유튜브에서는 알고리즘에 저희가 선호할만한 영상을 추천하고, 그것을 소비하면서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죠. 그리고 이러한 상호작용은 전세계적으로 확대됩니다. 한국 농구리그 경기를 보면서 올해 뛰고 있는 필리핀 선수인 이선 알바노 선수에 대해 필리핀 사람들과 라이브 채팅을 나누고, 넥슨의 민트로켓이 개발 유통한 데이브 더 다이버라는 게임의 얼리엑세스와 관련해 미국 미주리 주에 사는 Kevin과 의견을 나누기도 하죠. 정말로 초연결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태그 한 줄은 추가해야 것 같습니다. '비슷한 취향과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초연결 사회라고 말이죠.
양극화가 꼭 지양해야만 하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중도 사상에 깊이 공감하지만, 때로는 변화를 위해서 극단이 필요할 때도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요즘에는 내가 알고리즘을 이용해 더 좋은 컨텐츠들을 즐기고 있는 것인지, 알고리즘에 의해 그 컨텐츠들이 좋다고 느끼도록 변해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보고 듣는 내용과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소통이 지속되면 저희는 그것에 닮아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좋아하는 것만 하고 즐기며 살기도 바쁜 세상이지만, 때로는 얼굴을 붉히며 싸우고 논쟁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절대 키배가 적어진 것 같아 무료한 것은 아닙니다 :)
석희진
말씀해주신 내용에 공감합니다. 실제 개발 경험을 하신 내용으로 들으니 신기하기도 하고요! 다만 사람들의 취향이라는 것에 자유가 없어지거나 그것이 획일화 된다면 문제적일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기업이 만드는 앱이나 알고리즘이라는 것이 돈을 벌기 위한 영리적 목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이 압력에 의해 '만들어질' 위험은 없나? 되물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알고리즘이 사실 편리할 때도 많고, 시간을 아껴준다는 생각도 들어서.. 명확히 한 입장을 정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달무리
안녕하세요, 포항공대 소속 기민정입니다. 먼저, 개인적 사정으로 인한 늦은 참여에 죄송하다고 말씀드립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이야기하는 '초연결'이 실제로 연결되었는지 아니면 연결되었다고 믿는 것인지의 차이를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앞서 DK님께서 언급해주신 유튜브 알고리즘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저의 생각에) 유튜브 알고리즘은 '추천' 영상을 통해 사용자를 플랫폼에 오랜시간 묶어두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플랫폼 점유를 높여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 기업의 기본적인 방향성이기 때문입니다. 사용자는 이 추천 알고리즘을 통해 세계 어디선가 만들어진 영상을 접하고, 지구 정반대편과 '초연결'되었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초연결은 오직 유튜브가 설정한, 점유율 확보를 위한 알고리즘을 매개로만 작동하게 됩니다. 알고리즘이 '비슷한 취향과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초연결 사회로 인도한다는데 공감합니다. 기술을 매개로 한 연결은 효율을 위하여 최적의 연결 기회만을 제공하여, 우리의 연결될 기회를 더 편협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석희진
안녕하세요~ 맞아요.. 그 기회 자체가 좁아진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또 다른 영상을 찾아보면 '역시 이건 내 취향이 아니군..'이런 생각이 드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생각할 수록 테크노 사이언스가 결국 우리 삶과 절대 떨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슈슈
안녕하세요, 말씀해주신 이야기들 흥미롭게 잘 들었습니다. 저 역시 @바나나맛우유 님 말대로 '표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과학적 체계를 넘어 실제 우리 사회에서 표준이 '적절'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 듯합니다. 표준 외모와 체형, 성적과 능력 등, 모든 면에서 표준을 삼고 그것에 맞게끔 우리의 위치를 규정한다면, 결국 다양한 인간의 면모들은 언젠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실험 기구들의 경우에는, 그것이 "표준에 맞는지 계속 측정을 하고, 잘 맞지 않으면 고치고, 정확한 표준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작업"(130)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인간은 도구가 아니니까요. 책에서는 인간-비인간의 공존을 재치있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저는 과도하게 발전된 과학기술이 인간을 삼켜버릴 것 같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계속해서 '표준'을 규정하고 척도화하는 일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고민이 되네요.
슈슈
그 렇기에 저는 '테크노사이언스'가 "인간의 내면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를 원하는 인문학의 일부"(48)가 되어야 한다는 데 매우 동의합니다. 기술에 한계를 두지 않되, 그것이 인간과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는지 끊임없이 사유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네트워크식 사고'라면, 분명 이는 유의미한 것이죠. 그러나 @DK 님이 알고리즘이라는 예를 들어 말씀해 주셨듯, 내가 맺는 관계들에 의해, 혹은 내가 보고 듣는 것과 그것들을 함께 좋아하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에 의해서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진다면 그 존재는 매우 단순하고 단편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관계가 바뀌면 '나' 역시도 달라질 텐데요, 여기서 '네트워크식 사고'는 '나'와 주변의 관계가 빠르고 쉽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듯합니다. 인간-비인간의 관계가 꼭 '역동적'이지만은 않지 않을까요. @달무리 님의 말씀처럼, 오히려 더 '편협'해지는 것 같습니다.
슈슈
주지하다시피 인간은 결코 '순수한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비인간은 인간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하기도 하고, 혹은 제약을 두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행위자'이며 우리 사회의 구성원일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의 핵심이기도 한 '비본질주의'에 무척이나 인상 깊었습니다. 저는 '네트워크식 사고'를 강조하는 2장을 읽으면서, 동시에 인간공학에 대한 페터 슬로터다이커의 저작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가 떠올랐습니다.
맥락은 조금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만, ‘불구(不拘)의 인간학’이라는 새로운 길을 모색한 이 책에서는, 불구자를 특색있는 사람으로 해방시킬 것이 아니라, 불구자가 “어떤 보호기구를 통해서만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제될 수 있다”(103)고 주장합니다. 즉, 정상성에 어긋나는 목발은 부러뜨려서 극복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것이고 그러한 조치들을 통해 ‘나’가 “직접적인 자기변모의 대상”(591)으로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목발이라는 비인간은 그렇게 한 인간과 관계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때의 인간은 독립적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수동적이기도 합니다. 인공눈물 없이 아침에 눈을 뜰 수 없는 저 또한 그렇고요. 이런 것들도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다면 저는 이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조이태
(3주차) 안녕하세요 고려대학교 언어학과 조승준입니다 :) 지금까지 개인적인 사정으로 계속 토론에 참여를 못해 이점 너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ㅠ 남은 기간 동안 열심히 참여해보겠습니다!
우선 2주차 토론에서도 논의되었듯이 과학의 “표준” 혹은 “객관성”이 사실은 합의된 규범, 일종의 규약이라는 것이 가장 흥미롭게 다가오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3주차 과학철학적 탐색에서는 제가 예전에 흥미롭게 읽었던 장하석 교수님의 <온도계의 철학>이 제시되는데, 저희는 쉽게 ‘0도에선 물이 얼고 100도에서는 물이 끓지’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사실은 과학자들 간에 합의된 관념 혹은 신화라는 것이 핵심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즉 과학의 법칙들은 발견된 것이 아니라 발명된 것이라는 주장인데, 이와 비슷하게 수학 역시 발견이라기보다는 발명에 가깝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수학자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수리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언어 역시 유희적이고 그 텍스트를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단지 수학과 과학을 비롯한 학문만이 발명된 것은 아닙니다. E.H.카 역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본질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의 “기록”이므로 그 기록자의 주관적 해석이 반영된다는 점을 강조했고, 그 기록을 또 해석하는 현대 역사학자의 관점 역시 반영되기 때문에 다수의 의미 작용을 거쳐 저희의 눈과 귀에 들어온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고 논의했습니다. 사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진은 정확한 실재를 객관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개발된 기술이지만, 무엇을 선택적으로 보여주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위 맥락에서 롤랑 바르트는 광고 사진을 분석하며 어떻게 사진이 그 수용자 머릿속의 의미작용을 완전히 지배하는지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홍성욱 교수님은 과학이 객관적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며, 각기 다른 과학자들의 입장이 충돌하고 그곳에서 합의가 발생하여 보편성이 구성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마치 변증법적인 정반합의 과정과도 비슷하게 느껴지는 대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보편성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어 그 시기의 주된 과학사조가 되는 것이죠.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 사회와 연관된 질문이 생겼습니다. 과학의 문제만은 아니기에 개인적으로 책의 내용과 조금은 동떨어진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현대인들은 “객관성”이라는 신화에 너무 쉽게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사진은 객관적인 사진이 아닙니다. 역사도 “팩트”라고 부를 수 없는 학문이며, 통계 역시 그 표본집단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론이 도출될 수 있는 자료입니다. 언어 역시 세계를 있는 그대로 충분히 반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희는 객관적이라고 느껴지는 것들을 쉽게 믿고, 저희의 해석과 인지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명명백백한 사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례로 젠더 문제를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유전적으로 XX, XY 염색체에 따라 두 개의 성별이 있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개개인이 인지하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있습니다. 둘 중 어떤 의견이 적절한지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은 너무 어려운 문제이지만, 과학의 보편성이 충돌과 합의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어떤 지식도 온전히 객관적이지는 못하다는 점만큼은 상호 간에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지식은 객관적이야”라는 인식이 충돌과 합의로 구성되는 과학의 혼종적인 콜라주에 제법 큰 장애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까닭입니다. 그 누구의 지식도 온전히 객관적일 수 없다는 것이 정립되어 있어야만 자유롭고 상호존중이 적절하게 이루어지는 공론장에서의 토론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저는 이 “객관성의 신화”를 와해시키는 방법으로는 무엇이 있을지 여러분께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라다크아저씨
객관성의 신화라는 말이 흥미로웠습니다. 제가 과학을 좋아하는 것도 일까vs아닐까가 아니라 이다vs아니다로 나눌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명확했고, 그 결론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논리적이었거든요. @조이태 님께서 말씀하신 객관성의 신화라는건 니체가 죽인 신의 자리를 꿰차고 들어간 이성, 즉 과학의 신화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사람에의해 반박되고 토론을 거쳐 쌓아온 과학의 객관성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결론들을 개인이 해석하여 현실에 적용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예시가 책에 설명된 빈혈, 수질오염이라 생각됩니다. 여기엔 두가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 객관적 과학을 바탕으로 하였기에 결론도 객관적일거라 생각한다. 이점이 객관성을 신화로 만들어버리는 부분일 것입니다.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고 해서 결론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조이태 님께서 말씀해 주신것처럼 인간을 염색체로 구분하자면 여성과 남성 둘로만 나눌 수 있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유전병 제외) 하지만 이것을 근거로 성정체성까지 두가지로 결정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 있습니다. 염색체로 구분한 여성과 남성은 의학, 생명과학등 개체군 전체에는 적용할 수 있겠지만 개개인에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즉, 진실을 섞은 가짜가 과학을 신화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2. 과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고, 그걸 기반으로 논리를 펼쳐나가는 법칙들이 사실이 아닐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뉴턴의 법칙의 위배하는 경우를 설명하였고, 전하를 가진 전자의 흐름인 전류는 사실 전류와 반대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잘못되었다면 미래에 수정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과학에 객관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합니다.
객관성의 신화를 와해시키는 방법은 객관적인 것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야한 과학의 발전과 새로운 가설의 발견이 이뤄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스타그램 예시를 보니 우리 일상에서도 그 점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곧 질문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집중호우
(3주차) 안녕하세요 포항공과대학교 전자과 하현우입니다. 3장 내용에서부터 여러가지 레퍼런스로 이야기를 이어나가주셔서 흥미로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한 가지 부탁을 드리자면, 제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내용을 잘 알지 못해서, 이 소설의 어느 부분이 연관되어 있는지 말씀주시면 더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질문에 대하여서, 객관성의 신화를 와해시키는 방법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객관성의 신화가, 말씀하신대로 자유롭게 상호존중하는 공론장의 형성에는 방해가 되고 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과 '객관'이 그다지 사실이 아니고 객관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러한 사실과 객관이 존재할 것이라는 신화적 믿음이야말로 최소한의 토론을 가능케 하는 지지선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러한 믿음이 없다면, 어떠한 주장에 대한 객관적 근거를 마련해야 하는 필요 자체가 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객관적 근거라는 것이 아무런 지위도 설득력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공론장에 남는 것은 의미없는 메아리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객관성의 신화도 문제이지만 객관성의 신화조차 무너진 상태는 더더욱 문제라는 의견입니다. 그래서 저는 객관성의 신화를 와해하기 보다는, 객관성의 제2신화 정도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명명백백한 사실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은 여전히 갖고 있지만, 너의 사실과 나의 사실이 공존 가능한 것일 수 있다는 믿음을 추가하는 것이죠.
조이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관련하여 추가적으로 댓글 남겨봅니다! 앨리스는 토끼 굴을 통해 기존의 논리가 전혀 적용되지 않는 나라로 가게 되는데, 키가 커졌다 작아지고 목이 늘어나는 등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자 정신을 차리기 위해 구구단을 세는 장면이 있습니다. “4 곱하기 5는 12, 4 곱하기 6은 13......” 이런 식으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는 유클리드적인 수학과 논리학의 체계를 계속 변동시키는데, 이는 루이스 캐럴이 수학에 관해 가지고 있던 관점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의 구체적 예시를 들자면 무한의 크기도 서로 다르다는 칸토르의 주장이 있을 것 같습니다. 칸토르는 “수학의 본질은 자유에 있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자유로운 수학이 가장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책이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슈슈
흥미로운 이야기 감사합니다! ㅎㅎ @조이태 님이 말씀해주신 것을 토대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면 정말 색다르게 다가올 것 같아요! 상대적으로 과학이나 수학같은 체계적인 학문에서 '자유'를 상상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러한 관점이 반영되어 있는 소설을 예시로 드니 훨씬 더 이해하기가 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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