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오후에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는 아침입니다.
고통에 맞서 한걸음 나가게 하는 힘은 작은 희망이 아닐까요?
아침에 출근하면서 저녁에 퇴근할 수 있다는 희망이...이런 작은 희망들이 작은 발걸음을 나아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착순 도서나눔] 중국 대표 작가 위화의 8년 만의 신작 《원청》! 출간 전 같이 읽어요
D-29
생물선생
호디에
음... 곰곰이 좀 길게 생각해봤는데요, 아무래도 가족인 것 같습니다. 가족으로부터 받는 응원과 위로가 도움이 되겠지만, 오히려 가족을 지키고자하는 힘이 지금의 고난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아요. 아마 가족 구성원 모두가 서로서로에게 저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마음들이 더 확장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잠시 했습니다.
오락가락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언가 재주가 하나쯤은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린샹푸의 목공기술처럼 먹고살 기술이 아니더라도 악기 연주나 그림 그리기같이 무언가 갈고닦을만한 종류의 재주가 있으면 스스로를 붙잡아주는 줄이 하나쯤은 생기는 기분입니다.
메롱이
청소년기가 끝나고 성장기가 끝나면서 계속되는 일상 속에서 누적된 어떤 루틴 같습니다. 자고 일어나고 일하고 식사하고 운동하고 잠자고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연쇄적으로 전개되는 관성의 흐름 때문에 어떤 고통이든 상처든 많이 생각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거 같아요. 대기권을 지나 우주의 진공계를 진입한 우주선도 등속의 항상성 때문에 궤도를 바꾸기 쉽지 않잖아요. 운석의 파편이 기체의 표면을 긁는다해도 우주선의 수명이 다하지 않는 이상은 계속 운항하는 것처럼 말이죠.
아이크
<원청> 매일매일 야금야금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매 페이지마다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는 문장을 만나서 행복하네요. 말씀하신 강인하게 살아가는 인물들에게서 대륙의 강인함이 느껴지며, 저 또한 하루하루를 살아낼 힘을 얻습니다. 주신 질문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요. 고통에 맞설 정도는 아니지만 매일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항상성이 저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 같아요.
까만콩
이제 막바지를 향해 가는 중입니다. 찰리 채플린이 그랬다죠. 삶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요. 제가 읽었던 위화의 초기작에서 위화는 멀찍이 서서 비극적인 인생을 희극으로 보여주었는데, <완청>을 읽으니 이번에는 인생을 아주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네요. 영특하고 진실하지만 아직 세상살이에 미숙하고 사람 보는 눈이 없던 도련님이 사랑을 하고, 그 사랑 때문에 고향을 떠나고, 전쟁의 와중에 마을을 지키는 이야기를 읽어가고 있습니다. <원청>의 주요 인물들이 대체로 진실하고 사람을 성심으로 대하는 인물들이긴 하죠. 그런데 린샹푸를 보고 있자니, 세상에 이런 남자가 어딨누... 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먼산)
위의 댓글들 중에 제가 아직 모르는 일들이 있을까봐 지금 눈을 게슴츠레 뜨고 이 아래까지 스크롤 했어요....
곧 책을 마지막 장을 덮으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푸른숲
작은 희망, 가족, 그리고 재능과 루틴 등 저도 공감이 많이 가네요. 위화 작가님의 작품에는 '그럼에도'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가족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네요. 특히 <원청>처럼 공동체가 다양화되기 전에는 삶을 지탱하는 기반에서 가족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았으리라 생각이 되기도 하고요. 시대에 따라 어쩌면 희망도 다르지 않을까 싶네요.
오늘도 질문을 드리려 합니다. 명문장을 꼽는 짧은 질문 하나와 비교적 긴 질문 하나를 준비했습니다.
D-4 『원청』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한 문장을 적어주세요.
D-3 『원청』의 배경이 되는 20세기 초엽 중국의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는 혼란한 시대입니다. 읽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편안하고 안전한 환경 속에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렇지만 『원청』의 사람들이 품고 누리는 어떤 마음들을 현대인들은 잃은 것 같기도 합니다. 세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나아지는 걸까요, 아니면 어떤 시대에 살건 사람들은 다 비슷한 무게의 짐을 지게 되는 걸까요?
오늘은 제가 먼저 운을 띄워보려 합니다. 제가 꼽은 명문장 중 하나는 후반부에 있습니다.
그녀가 수선한 곳은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아창이 수선한 곳은 흔적이 뚜렷하게 남았다. 그러자 아창은 자기 기술이 샤오메이만 못하다고 말하는 듯 웃음을 지었다. 샤오메이도 웃고 나서 자신은 찢어진 곳을 수선했지만 아창은 닳아서 터진 곳을 수선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찢긴 곳은 수선하기 쉽고 닳은 곳은 어렵잖아.”
_538쪽
챠우챠우
책을 다 읽고 동료에게 빌려주어서 정확한 문장은 떠오르지 않지만, 아창과 샤오메이가 사랑을 나누던 장면에 문장이 기억에 남습니다. 아창은 서둘러서 성급하게 샤오메이의 옷을 벗기고, 아창 본인의 옷은 천천히 벗었다는 문장.
문장 하나로 아창이라는 잘 나타낸 것 같습니다. 나쁜사람이라기 보다는 태생적으로 본인외의 사람을 배려할 줄을 모르는 사람. 살면서 아창 같은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생활력은 없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 그런걸 배운 적 없는 사람.
챠우챠우
절대적인 빈곤, 폭력을 걱정하는 사람이 줄어들었다는 점에서는 분명 세상이 나아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불안과 공허함이 사람들의 머릿속을 꽉 채우게 된 것 같습니다. 공허함이 머릿속을 채웠다니 웃긴 말이긴 합니다.
전에 근무하던 곳에서 농담처럼 했던 얘기가 탄천에 바륨(항불안제의 상품명)을 풀어야 해… 라는 것이었습니다. 제 편견이지만 소위 말하는 먹고살만한 동네일 수록 주민들의 불안감이 높은 것 같습니다.
호디에
p563
그들은 여름의 환한 햇살 속 거리에 서 있었다. 딸은 린샹푸의 품에 안겨 있고 린샹푸의 눈은 그녀를 찾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샤우메이는 가슴이 아프고 그리웠다. 그녀는 린샹푸 앞까지 걸어가, 먼지에 뒤덮인 머리카락에서 나뭇잎 조각을 떼어주고 그의 품에 있는 딸을 받아 자기 품에 안는 광경을 상상했다.
p572
그떄 샤오메이의 눈에 입을 벌린 채 자신을 향해 방긋방긋 웃는 딸이 보였다. 하얀 앞니가 두 개 자라나 있었다. 샤오메이는 눈물을 흘렸다. 그 두 줄기가 그녀의 몸에 남은 마지막 열기였다.
호디에
기준이나 처한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에 더 나아졌다, 그렇지 않다라고 단정짓기는 어려운 듯 합니다. 생활의 편리함을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당연히 살기에 더 나아졌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전쟁과 빈곤, 폭력적 차별에 놓여있는 상황이라면 얘기는 달라지지 않을까싶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세상이 분명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더 나은 방향을 지향하기에 인류가 지속해 왔고, 앞으로도 지속할 수 있다고 믿거든요.
수북강녕
매일 올려주시는 질문에 대해 두서없이 답해 봅니다.
d-6 <원청> 속 대부분의 인물들이 기억에 남지만,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샤오메이입니다 550쪽이 넘는 수십 년의 이야기 중 초반부와 마지막에만 등장하는데도 내내 미스테리에 쌓여 궁금했던 만큼이나, 결기와 아픔을 가진 인물이네요...
d-5 작품 속 인물들이 단순하지만 결연한 소신을 지니고 강인하게 고통을 감내하는 데 반해, 다면화되고 복합적인 현대인은 오히려 그러기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 자신이 얼마나 유약한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d-4 "아침에 바람을 쐴 때 인질 스물 두 명에게서 귀 스물 두 개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상대가 순식간에 많이 야위었다고 생각했다. p.228"
일제히 귀를 잃은 사람들이, 체중과, 균형, 멘탈과 자신을 잃은 상실의 모습이 한 문장으로 완벽히 표현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잔혹한 장면이 많이 등장하는데, 상황 묘사가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가운데, 인물들의 감정이나 서사를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독자의 폐부를 찌르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전후 좌우 맥락이 하나의 흐름으로 통하는 느낌을 줍니다. 인질들의 귀가 잘린 것은 그 사건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대신 희생시킨 리메이롄과 결국 이에 보답하는 린샹푸, 장도끼와 스님의 관계, 스님과 천융량의 의리, 천야오우에 대한 스님 모친의 돌봄과 보답, 복수의 마음으로 하나된 민병대, 도끼가 귀에 꽂히게 된 린샹푸, 그 도끼로 원수를 갚는 천융량에 이르기까지, 숨막히는 긴장이 어느 하나 누락 없이 짜임새 있게 맞춰지는 느낌입니다.
d-3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은 더 나아지는 걸까요, 과연? 얼마 전 4번째 그믐밤 모임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으면서도 결이 같은 질문을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 과연, 나아지는 걸까요?
푸른숲
안녕하세요! 좋은 주말 보내고 계신가요. 제가 스치고 지나간 좋은 문장이 정말 많네요. 호디에 님이 꼽아주신 문장은 저도 참 좋게 읽었답니다. 수북강녕 님이 꼽아주신 부분은 뭐랄까요. 그때의 햇살이 머리에 그려질 정도로 인상적인 장면이었죠.
오늘도 추가 질문을 남겨요!
D-2 『원청』을 읽고 생각난 다른 책이 있었을까요? 있었다면 어떤 면이 비슷했나요?
호디에
근래에 읽은 책 중에서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배반>, 자우메 카브레의 <나는 고백한다>가 생각납니다.
어떤 면이 비슷했다기보다 전체적인 분위기와 감정선이 저에게는 많은 부분 일치했습니다.
린샹푸와 샤오메이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처한 현실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을 했던 것처럼 두 작품의 인물들 역시 자신들의 선택이 비록 온전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더라도 비관하지 않거든요. 결이 다르다고 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세 작품을 읽으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여운도 길었더랬습니다. 다른 독자분들이 생각하는 책들도 무척 궁금하네요.
오락가락
아마 다른 분들도 느꼈겠지만 위화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서 비슷한 장면들을 보았던것같습니다. 아마 위화의 다른 작품들도 한번 더 읽어볼 기회가 아닐까 싶네요.
챠우챠우
저는 백년의 고독이 떠올랐습니다. 시대적으로 비슷한지는 모르겠지만 운명에 휩쓸려가는 한 가족을 다룬다는 점과 린샹푸와 아우렐리아노 장군이 겹쳐보인다는 점이 이유입니다. 약간 마술적인 순간들도 있었던 것 같고요~
푸른숲
네, 저도 <백년의 고독>이 어떤 부분에서 떠올랐는지 상상해볼 수 있네요. 위화 작가님께서 실제로도 이 작품이 어느 정도 환상성을 가미한 전기소설로 읽히길 바랐다는 점에서 더더욱요. 좋은 감상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람ㅎㅈ
아직 샤오메이가 떠났다 돌아온 부분까지밖에 읽지 못했지만 남매(맞을까요?)와 린샹푸가 만나는 장면에서 박경리의 <토지>가 연상됐습니다. 구천이와 아씨와의 만남이 역사와 가정사가 얽히며 전개되었듯 이들의 만남 역시 그러리라는 어떤 예감이 스쳤습니다. 그리고 무주구천의 안개와 ‘원청’이라는 도시의 미스테리함, 캐릭터의 남다른 모습들이 겹쳐 읽히네요.
바람ㅎㅈ
그리고 린샹푸가 업고 다니는 아기에서는 ‘서희’가 떠올랐습니다. 읽고 싶은 마음 한 가득이었는데 연말 업무와 부족한 체력 때문에 느리게 따라가다보니 어느새 마지막 날이라 아쉽습니다. 글은 못올려도 남겨진 그믐의 글은 읽을 수 있으니 <원청>과 함께 읽어나가려 합니다.
돌멩
책을 받고 마음이 바빠 미루다가 어제 오전에 책을 잡았는데 하루만에 다 읽었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위화 작가의 <인생>처럼 책장을 덮고 나서 마음이 이상하게 먹먹해졌어요. 책에서 다루는 공간, 시간의 범위가 넓어 조정래 선생님이 생각나기도 했고요.
D-7
운명이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는다는 건 현시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 위화 작가님이 다루는 시대의 인물들은 그 운명이 다 잔혹하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계급이 지금보다 더 선명하고 정치의 풍랑이 지금보다 더 거세서 그런 걸까요?
D-6
린샹푸. 처음 린샹푸라는 인물이 소개될 때만 해도 부잣집의 철모르는 도련님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노동을 대하는 태도, 톈다 형제들을 대하는 모습이 나오면서 굉장히 단단하고 강인한 사람이라는 점에 끌렸어요. 위기에 직면했을 때도 그걸 이겨내는 묵묵함은 말할 것도 없고요.. 가장 판타지적인 인물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D-5
소설 속 인물들은 생 그 자체를 이어가는 게 혹독한 시절이라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데 목표를 두고 강인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거 같아요. 지금은 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으면서 그 의미를 찾는 게 목표가 된 시대가 됐다고 생각하는데요.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더 어렵고, 허무에 빠지기 쉬운 시대인 것 같아요. 편집자분의 질문에 고통에 맞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게 해주는 힘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쉽게 답이 나오질 않네요ㅠ
D-4
그 뜬구름 같은 원청은 샤오메이에게 이미 아픔이 되었다. 원청은 린샹푸와 딸의 끝없는 유랑과 방황을 의미했다.
(이 책의 제목이 의미하는 게 뭔지를 책을 받기 전부터 궁금해서 입안에 굴려가면서 발음해보아도 가늠도 못하겠더라고요. 그런데 책을 읽고나니 '원청'이 너무 아프게 느껴졌어요. 샤오메이에게는 더 죄책감으로 다가오겠죠. 그 마음을 잘 표현한 문장이라 꼽았습니다.)
D-3
따뜻한 커피를 두고 편안하게 앉아 이 책을 읽다보니 지금의 시대가 얼마나 편안하고 안전한지를 새삼 느끼게 되더라고요. 20세기의 그들과 현대인이 떠안는 삶의 무게는 쉽게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런 책을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건 전쟁과 그로 인한 사회질서의 붕괴, 토비로 대표되는 야만을 떠올려봤을 때 지금 시대가 그때보다는 단언코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을 해요. 다만 전쟁이 없다기엔 제가 발딛고 있는 이 곳에서만 전쟁이 없는 것이지 러우 전쟁도 끝이 보이질 않으니, 지금 시대가 20세기 초엽 중국보다 낫다고 쉽게 이야기하기도 망설여지네요...
D-2
뜬금없이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이 생각났습니다. 같은 시대지만 공간에 따라 너무 다른 삶이 펼쳐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중국 강남 지역에선 토비로 사람들이 잔인하게 죽어나가는데 동시에 상하이에선 전차가 다니고 사람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가죠. 아청과 샤오메이를 통해서 독자들은 양쪽의 모든 삶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보니 더 대조적으로 느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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