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보면 자기합리화, 희망회로를 돌리는 일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편에서 보면 이게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도, 능력있는 사람이 되는 방법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최근 보기 시작한 일본 드리마 <무능한 타카노>의 주인공 타카노의 속절없는 무능함이 오히려 어느 순간 솔루션이 되기도 하는 이야기를 매회 보노라니, 그런 생각이 더 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느지막
밸런스게임! 저는 '고통은 없지만 패배자로 무기력한 나'요.
언젠가는 고통 없이도 쓸모 있는 내가 될 수 있을거에요
현대문학
🐰 : 지금은 패배자로 무기력하지만 언젠가 찾아올지도 모를 희망(쓸모 있는 내가 될 수 있으리라는)에 걸어보겠다는 말씀이시지요~! 오,, 그 역시 생각해볼 만한 답일지요..!
siouxsie
1. SF적인 다양한 상상을 할 수 있는 이번 장을 읽으며 생각나는 영화가 있을까요?
전 영화보다는 요새 침대 선전인 거 같은데 버려진 로봇이 무섭게 중얼거리는? 광고가 생각났어요.
예전에 스필버그 감독의 <A.I.>도 떠올랐고요.
인간은 무생물에 대해서는 전혀 성의나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것 같아요.
쓰고 버리면 된다는, 그리고 우리가 마구 유린해도 죄책감을 느낄 필요없다는...
하지만 제 생각은 모든 '존재'에 성의를 가지고 조심스럽게 대해야 하는 마음부터 시작해야 궁극적인 존중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작은 존재(특히 물건)라고 하찮게 대하기 시작하는 것이 무엇이든 '함부로' 대하는 마음의 시작인 것 같습니다.
2. 누군가 독자님에게 새로운 몸을 준다고 한다면, 그게 기계의 몸이라도 받아들일 건가요?
전 뇌 빼고는 다 바꿀 의향이 있습니다. 특히 아무리 노력해도 살이 찌고 노화가 진행되는 몸을 보면 다 바꿔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뇌가 사라지면 존재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니 몸만 바꾸고 싶어요. 얼마나 편할지 상상만해도 좋습니다.
3. ‘존엄을 누릴 가치가 있는 삶’. 독자님이 생각하는 존엄이란 무엇인가요?
저의 어휘 실력이 정말 짧아 이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하지만, 내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괜찮다'고 생각하는 삶이라고 생각해요. 가끔 무시받고 억압받을 때도 있지만, 하루를 아무일 없이 일상적으로 보낼 수 있는 삶이요.
매일을 어떤 괴로운 일에 속박 당하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일상이 깨진 삶'의 괴로움...그 때 제 존엄을 잃는 것 같아요.
책 속 주인공도 별 것 아니었지만, 유진과 아이와의 삶에서 괜찮다고 느꼈을 때 가장 존재가치를 느꼈던 것 같거든요.
저의 생각과 삶이 참 좁네요. ^^;;;
현대문학
🐰 : '일상'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는 부분이 무척이나 마음에 남아요! 존엄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 더 상위의 가치처럼 느껴져서 보통 큰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일상이 무너진 삶... 아주 사소한 일로도 일상은 무너질 수 있고 또 전쟁이나 예상치 못한 사건, 사고로 일상은 무너질 수 있죠. 그리고 그에 따라 존엄이 훼손당할 여지도 얼마든지 있을 거고요. 새삼 하신 말씀을 다시 곰곰이 곱씹어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뒤집어서 일상이 깨질 것 같은 순간에도 있는 힘껏 일상을 유지해보려는, 보수해보려는 노력도 나의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작지만, 또 큰 노력일지도요...!
황모과입니다
> '일상이 깨진 삶'의 괴로움...그 때 제 존엄을 잃는 것 같아요.
지난 12/3 밤 이후 목격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siouxsie님 생각이 전혀 좁다고 느껴지지 않고 너무도 당연합니다.
강츄베베
1. 많은 SF영화들이 있지만 저는 2018년에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레디 플레이어 원이 생각납니다. 당시에 이런 세상이 정말 존재한다면 어떨까 상상하며 봤던 기억이 있는데 이 곳에 나오는 오아시스가 과연 사람들이 꿈꾸는 곳일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많은 것을 상기하게 된 기억이 있습니다.
2. 새로운 몸인데 기계의 몸이라고 한다면 거부하고 싶습니다. 그 때가 되면 기계의 몸에서 감정이라는 게 존재할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고유함을 간직하며 유한한 인생을 살다가고 싶습니다.
3. 존엄이란 단어를 품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의 인격 자체를 높이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만을 위한 삶이기 보다는 모두에게 이롭게 하기 위해 진정 본인을 희생하고 기꺼이 위험도 감수할 수 있는 용기가 함께 할 때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밸런스 게임]
죽을만큼 엄청난 고통을 겪지만 쓸모 있는 나
요즘은 이 사회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활동을 하고 온전히 나를 위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지만 주변의 이웃들을 돌아보고 가치있는 모습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이를 통해 내가 진정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습니다.
레디 플레이어 원2045년, 암울한 현실과 달리 가상현실 오아시스에서는 누구든 원하는 캐릭터로 상상하는 모든 걸 할 수 있다. 웨이드 와츠의 유일한 낙은 오아시스에 접속하는 것. 어느 날 오아시스의 창시자인 괴짜 천재 제임스 할리데이는 자신이 가상현실 속에 숨겨둔 3개의 미션에서 우승하는 사람에게 오아시스의 소유권과 막대한 유산을 상속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그가 사랑했던 80년대 대중문화 속에 힌트가 있음을 알린다. 와츠가 첫 번째 수수께끼를 푸는 데 성공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현실에서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IOI라는 거대 기업이 뛰어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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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모과입니다
강츄베베 님
"요즘은 이 사회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활동을 하고 온전히 나를 위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지만 주변의 이웃들을 돌아보고 가치있는 모습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이를 통해 내가 진정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습니다."
이 말씀에 특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도요! 삶은 무언가의 도구가 아니지만 타인의 도구가 될 때 비로소 스스로의 존엄이 지켜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하금
노아의 목소리는 간절했지만 내게는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았다. 나는 노아가 말하는 그 돔이나 방공호 안에 갇히고 싶었다.
『언더 더 독』 pp.60-61, 황모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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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한때 사육장으로 들어섰을 때 부끄러움에 죽을 것 같았던 걸 떠올리자니 비-편집인으로 태어난 일 그 자체에는 존엄이 있었던 모양이다.
『언더 더 독』 p.67, 황모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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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 나는 모든 목숨 붙은 것들이 지닌 생명의 경중을 판단할 수 없었다. 인간의 목숨이 동물보다 중하다 할 수 없듯, 인외종이나 외계 생명체의 목숨이 인간보다 중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나도 나 자신이 중하지 않은데, 누가 나를 중하게 여기지도 않는데, 내가 왜 이를 판단해야 하나. ”
『언더 더 독』 pp.85-86, 황모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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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1. SF적인 다양한 상상을 할 수 있는 이번 장을 읽으며 생각나는 영화가 있을까요?
주인공 한정민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면서 노아를 만났어요. 신체에 대한 자유와 권리를 포기한 상태에서 노아를 만나 1장에서 이른바 ‘통 속의 뇌‘가 되잖아요. 2장은 한정민이 스스로 사고할 권리를 포기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고를 포기하고 자아를 지울 단계가 되어서야 쫓겨나듯 3장으로 밀려나게 되는거죠.
1장이 주인공의 신체를 지워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면, 2장은 인간과 그 외 존재의 자유의지를 지우는 단계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2장을 읽으면서 ‘데이빗‘ 생각이 참 많이 났어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에이리언:프로메테우스]의 등장인물 데이빗은 8세대 인공지능 로봇이에요.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최초의 모델이죠. 표정과 몸짓, 어투에 감정을 담는 그야말로 인간 같은 뛰어난 인공지능 로봇. 영화 속 인간들은 그의 바로 그 지점을 역겨워해요. 진짜를 느끼지도 못하고 흉내나 낸다는거죠. 아마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자기들의 말이 사실과 다른 억지 주장(억까!)에 가깝다는걸 알고 있을 것 같아요. 데이빗은 인공지능이잖아요. 입력 된 정보를 이해하고 분석해서 적용하는 것이 데이빗의 일이죠. 데이빗은 정말 느꼈기 때문에 표현했을 뿐이에요.
인간과 보다 원활히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인간이 그렇게 시스템을 디자인했더니 되려 인간이 그를 더 미워하게 된 아이러니함. 더 큰 아이러니는 프로메테우스의 다음 작품인 [에이리언:커버넌트]에서 나타나요. 커버넌트에서는 데이빗의 다음 모델, 8세대 모델에서 자유의지를 제외한 모델이 등장해요. 인간과 강점적 상호작용은 가능하되 보다 인간 의존적으로 개편한 버전의 인공지능. 모든 존재가 보다 인간 의존적이게 된다는 점에서 언더 더 독이 말하는 다운그레이드와 비슷한 것 같아요.
언더 더 독의 다운그레이드는 말 그대로 ‘등급을 낮춤‘. 즉, ‘인간 이하로 등급을 낮춤‘이라는 말처럼 들려요. 인간 이하의 등급을 규정하는 특징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 사고를 위탁하는 존재를 뜻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스스로 사고하지 않고 남에게 판단을 맡기는, 혹은 맡길 수 밖에 없는 존재. 하달 된 업무를 해내는 것에만 의의를 두는 존재. 2장의 한정민은 반복적인 노동 속에서도 그 나름의 의미를 찾지만 결국엔 그를 빼앗기고 나중에는 ‘트라우마 치료‘라는 명목으로 의미를 찾을 기억조차 빼앗기잖아요. 경험을 빼앗겨 매순간이 미숙한 처음일 수 밖에 없는 존재. 메모리칩과 다를 바 없는 통 속의 뇌.
하금
생각 정리가 어려워서 글이 횡설수설하네요!ㅎㅎ 기간 중에 시간이 되면 또 다시 답해볼게요. 그 외에 떠올랐던 작품이 있어서 같이 적어놔요.
넷플릭스 러브데스로봇 시리즈 중 ‘얼음‘, 그리고 ‘팝 스쿼드‘. 각 20분 내외로 짧은 단편이에요. 전자는 신체 개조인과 비개조인 형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후자는 자본으로 영생에 가까운 수명을 획득한 기득권이 한정된 자원 보존과 본인들의 안락한 향략을 위해 비기득권의 출산을 금지하는 세계관이라는 점에서 언더 더 독이 떠올랐어요.
현대문학
🍅: 하금님 안녕하세요! 에이리언 프로메테우스와 커버넌트를 봤는데.. 분명 봤는데! 질문을 만들면서 생각해보지 못한 영화예요. 그리고 설명해주시는 부분이 너무나 흥미롭네요. 😊 에이리언을 다시 봐야할 것 같아요.. !!
활자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많이 아팠어요. 사람이 뭔가 대단해야만 사는 것은 아닌데 어쩌다
인류는 거대한 목표를 두고 거기에 닿기위해 현재를 사랑하지못하게 되는지 모르겠어요.
1.태어날때부터 그랬을까요. 아님 편집된 인류의 유전자의 혜택(?)이 였을까요.더 나은
후손을 남기기위해, 더 오래살기위해 스스로 진화하는 과정일까요.
자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자기애부터 바로 서고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인류는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요.
2.제가 본 영화 가타카, 아일랜드, 네버 랫 미고 등이 생각났어요. 이 모든 영화들은 각각
유전조작, 유전 선택, 그 유전자 조작과 카피로 인간성에 대한 질문들을 던지죠.
3. 기계의 몸이라... 현재 실제 부분적으로 인공관절로 대체하고 있죠. 곧 인류는 로봇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기술이 발전되어 로봇이 아니라 인간의 몸으로 제 영혼과 정신을 옮길 기회가 온다해도
별로 바꾸고 싶지않아요. 그냥 늙고 싶어요. 자서전 같은, 동료같은 이 노구랑 같이 관에 눕고 싶어요.
4. 존엄이라는 것, 내 스스로 선택한 삶이 인정되는 것이라 생각해요. 제 삶의 방식이 다른이의 삶에 피해를
주지않는 선에서요. 제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것은 소설 속 사회자체가 이미 존엄이 없는 곳이에요.
시작부터 불평등은 어쩔 수 없다해도 인간이 인간이 아닌 개와 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사회구조,
선택조차도 할 수 없게 만든 사회의 문제가 눈에 들어왔어요.
아. 슬픈 것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우리 사회도 만만치 않다는 거에요. 유전자를 편집하지
않아도 이미 너무 다른 시작이네요. 그럼에도 책보다 현실에 기대를 조금해봅니다.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고 손내밀어서 같이 가는게 인간의 존엄성의 시작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저는 늘 모든것은 다른 이에 대한 사랑이, 인간에 대한 사랑이 그 모든 문제의 해결점이라고 믿어요.
현대문학
🍅: 활자님 안녕하세요! 활자님이 남겨주신 '소설 속 사회 자체가 이미 존엄이 없는 곳'이라는 말에 무한 공감합니다. 정민이 너무나 안타까우면서 활자님 말씀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다르지 않아서 무척 슬펐답니다. 🥲 '다른 이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이 모든 문제의 해결점'이라고 하신 말이 인상적이여요. 언제부턴가 혐오가 만연한 세상이 되어버렸지요. 비난하기에 급급한 세상에서 활자님 말씀처럼 우리가 조금더 서로를 사랑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황모과입니다
활자님 많이 아픈 소설이었다고 말씀하셨지만 함께 읽어주시고 의견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이 뭔가 대단해야만 사는 것은 아닌데 어쩌다 인류는 거대한 목표를 두고 거기에 닿기위해 현재를 사랑하지못하게 되는지 모르겠어요." 저도 100프로 찬성하는 의견입니다.
"소설 속 사회자체가 이미 존엄이 없는 곳"이고, 현실의 "우리 사회도 만만치 않다는 거에요. 유전자를 편집하지 않아도 이미 너무 다른 시작"이라는 말씀도 저의 집필 의도와 완전히 겹쳐집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그 모든 문제의 해결점"이라는 말씀처럼 제도적/구도적 문제를 바꿔나가는 것에도 가장 약한 자들에 대한 이해와 연민, 그리고 사랑이 전제되길 저도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2024/12/6 이후 탄핵 표결과 촛불 행동이 이어질 예정인데 국민에게 총구를 겨눈 정치 세력을 단호히 처벌하고 세계를 회복시킬 때 그저 계엄 이전으로(만) 돌아가지 않길 바라고 있습니다. 혐 오로 세워진 힘이기에 힘을 무너트리면서 혐오가 함께 무너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활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요.
하금
2. 누군가 독자님에게 새로운 몸을 준다고 한다면, 그게 기계의 몸이라도 받아들일 건가요?
아무 이유 없디 대뜸 기계 몸을 준다고하면 고민은 해보더라도 결국은 거절할 것 같아요. 한 평생 같이 살아온 이 몸과 친해지기까지도 너무 어려웠는데, 기계 몸은 이보다 어려우면 어려웠지 쉬울 것 같진 않아요. 몸이 아프다는 감각이 들 때는 병원을 가야할까, 아니면 가까운 자동차 정비소로 가야할까? 그 고민부터 해야할 것 같은데... 제 건강보험은 그럼 어떻게 되는걸까요?
하지만, 반대로 현대의학이 해결할 수 없는 질병을 갖게 되었다면 대뜸 제안 받은 그 기계의 몸을 선택 할 것 같아요. 어떤 식으로라도 삶을 연장하고 싶은 욕망이 아직은 커요. 아직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아쉬워서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하는 공포에 질려서 기계 몸으로 절 이식할 것 같아요. 그리고 앞선 상황과 달리 나의 생명을 연장할 이유로 선택한 기계의 몸이라면 되려 행복하지 않을까? 싶어요. 일단 목숨은 연장했으니, 기계몸이 되고서 겪을 정체성의 혼란은 나중의 문제로 치부할 것 같은데... 그런 주제로 강연을 하는 사람이 되어도 좋을 것 같아요.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서 인공 관절이나 장기로 신체를 대체하는 사람들이 많아질테니 저와 공감하는 관객들도 많아지지 않을까요?
현대문학
🍅: 저번부터 느꼈지만 하금님.. infp 이실까요? 기계 몸을 갖고 강연하는 상상까지 어떻게 하시는 걸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