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소설이 좋아서 2> 고영범 소설가와의 온라인 대화

D-29
동교동 서교동은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이 두 가닥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지금 '걷고 싶은 거리'라고 관에서 이름을 붙여놓고 버스킹 같은 걸 많이 하는 넓은 길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동교로'라고 불리우는 넓은 길입니다. 동교동과 서교동은 계획 주택단지라 바둑판처럼 반듯반듯한데, 지도에서 보면 그 두 길만 유난히 넓고 불규칙한 걸 알 수 있습니다.
재미있어요. ^^ 얘기해주신 것 보고 위성 지도를 열어서 동교로를 검색했더니 불규칙한 선이 눈에 띄네요. 서교동이 원래 세교동이었다는 얘기도 얼핏 들은 적 있었던 것 같아요.
예. 그 불규칙한 선이 망원동을 관통해서 한강까지 가죠. 그게 원래 물길이었습니다.
아마도 세교동이 서교동이 된 건 동교동 쪽이 개발되면서 행정구역을 나눌 필요가 있었기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튼 동교동이나 서교동은 두 개의 개천이 동에서 서로 길게 관통하고 있어서 문자 그대로 잔다리, 그러니까 작고 좁은 다리들이 많이 있었어요. 이런 하천과 다리들은 서울시내 여기저기에 많이 있었는데,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에 대부분 덮였습니다. 이런 하천들을 '복개천'이라고 불렀죠.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말이죠. 이 말 자체는 무언가로 덮인 개천을 일컫고 있는데, 그러나 무언가로 덮였기 때문에 그 개천은 더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거기에 개천에 있었다는 소문을 지칭할 뿐인 거죠.
잔다리 찾았습니다. 성미산도 찾았구요. 성미산이 야트막한 산이라고는 하셨는데 저는 거기 지나다니면서 산이라고 생각해보지를 않았네요. 생각 없이 지나가면 언덕인 줄도 모를 정도잖아요.
예. 성미산은 저 어릴 적에도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홍익사대부속여고가 그리로 옮겨갈 때 분란이 일면서 처음 이름이 알려졌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뒤로 상당히 강력한 지역공동체를 상징하는 이름이 됐죠.
몇 해 전에 서울에 갔을 때(저는 십 몇 년 전부터 외국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을 써보겠다고 기억에 남아있는 길들을 찾아다녔던 적이 있습니다. 화곡동에도 하천이 있었는데, 그 하천, 혹은 하천의 흔적은 결국 못찾고 말았습니다. 덮여서 사라진 하천을 찾아다니면서 다른 기억 하나를 떠올렸습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에 모하비라는 이름의 사막이 있습니다. 네바다 주로 이어지죠. 최인호 작가의 빼어난 중편 <깊고 푸른 밤>에 등장하는 Death Valley가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아무튼, 모하비 사막에는 공중전화가 하나 있었습니다. 예전에 그 사막에 채광굴이 하나 있었고, 그곳의 광부들을 위해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가 채광굴은 폐쇄되었고, 그래도 공중전화는 남아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서교동에 살고 있는 주민입니다. 전 이 동네 토박이? 입니다. 합정동에서 태어났고, 서교초등학교 다녔고... 대학교도 근처에서 다녔고요. 책 제목에 반가워서 저도 모르게 제 이력을 읊고 있네요.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아, 반갑습니다.^^
모하비 사막의 공중전화 이야기를 좀 더 할게요. 할 말이 없어서 아무 말이나 시작한 거긴 하지만, 이 이야기도 언젠가 쓸 생각이니까, 일단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미국의 공중전화는 수신도 가능합니다. 전화번호가 전화기 전면에 부착되어 있죠. 누군가가 그 전화번호를 보고 가서 소문을 퍼뜨렸고, 사람들이 재미삼아 그 번호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 공중전화를 구경하러 갔던 누군가가 마침 걸려온 전화를 받아서 대화를 합니다. 그런데 전화는 때로는 독일에서, 스페인에서 걸려오기도 하고, 전화를 받는 사람이 멕시코에서 온 사람인 경우도 있습니다. 서로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못알아듣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합니다.
이 전화는 좀 더 유명해졌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전화국에서 공중전화를 철거하고 맙니다. 이 전화는 연결하지 않아도 되는, 서로 연결될 일이 없던 사람들이 의지를 가지고 연결을 시도했던 상징인데, 연결의 제도적 상징이자 실질인 전화국에서 이걸 끊어버린 겁니다. 여러가지 변명을 제시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의 어떤 근본적인 비극성을 읽어냈습니다.
저 역시 그랬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그 자리를 찾아갔습니다. 전화기가 있던 자리. 비극성의 현장. 하지만, 사막 한 가운데에 전화기가 있었다고 해도 찾아낼 깜냥이 제로에 가까운 자가 그것이 사라진 자리를 찾아낸다는 건 말이 안되는 거죠. 그래서 비실비실 웃으면서 아무 데나 배회하다가 돌아왔습니다.
그 정도라면 소설 소재로도 훌륭할 텐데... 그걸 소재로 한 소설이 있음직한데 말입니다. 이미 구상하고 계신 거 아닙니까?
이 이야기는 몇 해 전에 서울에서 공연한 <방문>이라는 희곡에 한 에피소드로 삽입시킨 적도 있고, 앞으로 쓸 소설에서도 써볼 계획입니다.
그러셨군요. 엮으면 꽤 재미 있는 주제가 되겠는데요.
사막은 없음, 사라짐, 이런 손에 잡히지 않는 이야기를 손에 잡힐 수 있는 것처럼 보여주는 막막한 힘이 있죠. 너무 막막해서 손가락 새로 다 빠져나가고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기도 하지만요. 하지만 그 과정을 통과하는 경험 자체도 놀라운 데가 있습니다.
사라진 하천을 찾다가 그 생각이 난 거죠. 그런데 아마 충격적으로 새롭게 떠오른 기억, 이런 건 아니었습니다. 거리에서 구체적인 건물들과 사물들이 지워진 모습, '사막'이라는 관념은 사실 늘 있었던 거거든요. 화곡동이라는 사막, 서교동/동교동이라는 사막.
----- 의견을 묻고 싶습니다. ----- 저는 <한국 소설이 좋아서 2>라는 서평책에 대해 무척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부러 마음을 낸 그 호의, 선의가 신선하고 감격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써서 마련해 주신 이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아무런 제약도 없는 너른 마당이라는 게 사용하기가 마냥 만만한 건 또 아니네요. 그렇다고 해서 굳이 울타리를 치거나 장치를 만들 필요까지는 없을 거 같고, 다만, 한 번쯤은 시간을 맞춰서 실시간 온라인 미팅 같은 형식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아보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그냥 아이디어일 뿐이니까 부담없이 의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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