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소설이 좋아서 2> 고영범 소설가와의 온라인 대화

D-29
작가님 시간 편하실 때를 알려주시면 좋을거 같습니다~^^ (처음 시작 단계에서 1번 그리고 끝나는 시점에서 1번 정도는 있으면 좋겠습니다~) 작가님과의 대화는 읽는 독자들에게는 정말 귀한 시간이랍니다~
그렇다면, 화요일이나 수요일 저녁 아홉시쯤이 어떨까 싶네요. 주말에는 다른 일들이 있으실 거 같고, 저녁식사 마치시고 나서 조금 여유있게. 다른 날이나 다른 시간도 좋습니다.^^
화요일에 하시지요. 제가 수요일은 시간이 맞지 않아서요
저도 화요일 9시도 가능합니다~^^
제목 정하는 게 늘 어렵습니다. 소설은 이번이 처음인데, 희곡을 쓸 때에는 늘 대충 정하는 편이었습니다. 첫 작품이 <태수는 왜?>였는데, 그 작품이 등장인물인 태수의 어떤 행위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그렇게 붙였습니다. 그 다음 건 <이인실>이었는데, 이건 이인실 병실에서 시작된 이야기라고 그랬고요. <방문>은 동생이 오랜만에 형을 방문하는 이야기라서, <에어콘 없는 방>은 에어콘이 없는 호텔 방에서 벌어진 일이라서... 대략 그런 식입니다. 물론 중요한 공간, 중요한 사건에서 따온 것이라 나름대로 중의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팽팽하게 맞서는 중의성이 아니라 뒤에 슬그머니 숨어 있는 중의성이죠. 제가 이런 걸 선호하는 편인 듯합니다.
<서교동에서 죽다>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서교동에서 이야기가 시작이 됐고 마무리를 서교동에서 하는데, 그곳에서 이 아이는 내적인 죽음을 경험합니다. 처음에 떠나기 전에 그랬고, 돌아왔을 때 다시 한 번 그렇습니다. 처음에 이야기를 쓸 때에는 돌아오고 나서 아이의 내적 죽음에 대한 부분이 좀 장황하게 기술되어 있었는데, 그 장황한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계속 옆눈으로 흘겨보다가 결국은 빼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고 나니 제목이 조금 허공에 떴는데, 이미 그 제목으로 연극 공연이 결정되어서 책도 그대로 가게 됐습니다. 그야말로 어영부영 그렇게 된 경우죠.
제목에 관한 한 두 가지 맥락에서 약간의 후회가 있습니다. 하나는 동사원형을 쓰는 게, 뭐랄까, 너무 열어놓는다는 점에서 조금 비겁하다는 느낌이 있고요, 다른 하나는, 비슷한 맥락일 수 있는데, 종결부의 그 서술을 빼버리면서 제목의 의미가 모호해졌다는 겁니다.
작가님의 긴 답변글 너무너무 영광입니다!!^^ 보통은 책을 읽을 때 궁금한 점들이 있어도 혼자 상상하거나 그냥 넘겨버려 아쉬운 점이 많은데 정말 작가님께 직접 여쭤볼 수 있고 그러면서 작품을 다시 살펴볼 수 있어 너무 좋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느낀 점은 어쩌면 글이 이렇게 매끄러울수 있을까 신기했습니다 음 걸리는 부분없이 고급 승용차의 광고문구처럼 '도로위에서 흔들림없는 최고의 승차감' 같아요~^^ 작가님 소개글을 보니 번역과 시나리오를 작업하셨던데 그래서 일까 혼자 예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1974년 서교동의 모습이 너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네요 작가님의 답글을 보니 주로 해외에 계셨다고 하셨는데 이런 구체적인 묘사는 자료를 통해서 일까요?? 아니면 픽션일까요?? 진영이 아버지의 사업위기가 이제 나오기 시작하네요~ 그냥 밝은 성장소설인가 했는데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걱정됩니다~~ㅜㅜ
제 동생이 막내인데, 세상에 나가기 전까지는 소설 속의 진구처럼 엄마 치마 끝에 매달려서 지내는 아이였습니다. 진영이의 집이 부자집으로 묘사된 건, 근대화가 한창 진행되고 살림살이가 대체로 조금씩 나아지는 시점이었지만 사회적 안전망이 전혀 없었던 사회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에 집안에 중환자가 생기면 그 집안은 그 환자를 포기하지 않는 한 대책없이 몰락할 수밖에 없었죠. 특히나 그 환자가 가장이라면 끔찍해지는 거죠.
88년에 상계동 철거민들을 몇 명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스토리가 대체로 비슷합니다. 빈농(의 자식)으로 살다가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중반 사이에 서울로 올라옵니다. 청계천이나 양동, 도화동 같은 빈민촌에 자리를 잡고 부부가 일을 합니다. 대개 처는 가정부, 남편은 막일을 하죠. 이게 벌이가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특히 서울에 건설이 붐인 시대였고, 막일은 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이를 (더) 낳으면서 처의 벌이가 없어지거나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아이가 두셋 이상 되면 여자들은 도시환경에서는 현실적으로 일을 하는 게 불가능해집니다. 형편이 조금 나아지는 듯하면서도 빈민의 형편을 벗어나기는 여전히 어려운 거죠. 그러면서 남자도 나이가 들어가고, 그러면서 숙련공이 되어 조금 안정되는 경우도 있지만, 혹시라도 다치게 되면(그런데 이런 일이 상당히 자주 일어납니다) 그 집은 불과 한두 달만에 완전히 몰락합니다. 유일하게 벌던 사람은 사라지고 가장 많이 써야 하는 사람이 하나 생기는 거니까요. 이제 막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은 학교에서 빠져나오게 되죠. '근대화 과정에서의 빈부 격차의 심화'라는 추상적인 표현은 이런 구체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운이 좋으면 이런 상황을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가장이 다치지 않는다든가, 아이들이 이미 큰 상태라든가, 아이들이 유난히 영특하다든가, 그런 경우죠. 사회적인 안전망과 전혀 관계 없이 그저 운이 좋은 경우들입니다.
저는 그 시대를 그리되, 제가 속속들이 잘 아는 세계를 통해서 접근해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실향민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는 말은 일종의 농담입니다. 90년에 한국을 떠나서, 중간에 육칠 년 돌아가서 살기도 했지만, 계속 외국에서 살고 있거든요. 부모님의 고향이 평안북도인데, 제가 거길 그리워할 이유는 없지만 그곳을 그리워하던 부모님의 마음은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향이 부모님한테 그리움과 기억으로만 남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리고 저 역시 제가 마음을 두고 있던 곳들과 멀어져 있는 이유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건 서울이라는 공간의 질적이고 외형적인 변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고, 저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을 겁니다. 이중의 실향이죠.
88년도에 상계동 철거민들을 인터뷰 하셨다니 대단하시네요~ 근대화 과정에서 빈부격차 심화를 직접 보셨다니 궁금합니다~ 운이 좋아 가장이 다치지 않거나 아이가 유난히 영특해야 이런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니~ 아직도 개인의 빈곤문제를 개인의 능력으로 짐지우는 경우가 많은데 새로웠습니다 저도 가끔 TV 속에서 그런 모습을 볼때마다 한평생을 부지런히 사셨다는데 왜 저렇게 힘드실까 의아했었거든요~ 미디어에서는 개천의 용들의 신화들만 방송하구요~ 작가님의 답글을 보니 아직 읽고 있는 중이지만 어떤 내용들이 펼쳐질지 궁금합니다^^
작가님 책을 이제 읽기 시작했습니다 <서교동에서 죽다>란 책 제목은 좀 스릴러물 같은데 앞표지의 자전거 타는 모습이나 첫 내용은 성장소설인가 하는 궁금증을 자아냈습니다 우선 이책이 끌린 이유는 '서교동'이란 동네명 때문입니다 직장이 이 근처라 항상 다니지만 고향이 아니고 직장이라 그냥 아는 정도라 좀더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은 배경이 1974년쯤인데 낯선 단어도 별로 없고 편하게 읽기 좋습니다 앞부분 주인공의 자전거 여행 묘사는 아기물고기가 혼자 여행하는 모습 같았습니다 ^^(니모를 찾아서처럼) 아직 초반이지만 처음부터 재미있었습니다 자전거를 얻게 된 과정이 엄마가 고의적으로 고장냈다고 여겨 억울한 장면, 막내의 얍삽한 모습 묘사(혹시 동생분 묘사는 아니지요??^^;;), 그리고 부유한 집인가봐요?? 친구들이 다 잘사네요 전가복, 해삼탕,호텔 수영장등(전태일열사와 동시대지 않나요??) 트럭 기사들이 자전거타는 국민학생을 일부러 죽이고 싶어한다는 내용도 흥미로웠습니다 (하긴 이 때는 아동권이 거의 없었을거 같습니다) 26인치 바퀴의 신품 사이클이니 당연히 도로에서 타야한다는 내용도 참 안전만 주장하는 어른들과 반대되어 재미있었습니다 식모 구희누나 음~ 음악을 좋아하는 도도한 구희누나의 묘사가 좋았습니다(실제 모델이 있는건가요??) 그리고 작가님 소개글에 현재 미국에 살면서 집안의 실향민 전통을 이어간다고 하셨는데 어떤 일들이신지도 궁금합니다~^^
엇, 제가 너무 늦게 봤군요. 그럼 이번 주에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차를 두고 나누기로 하고, 다음 주 화요일 저녁 9시에 뵙는 걸로 하겠습니다.
진영이의 다른 동네 '알라'의 묘사도 재미있었어요 그 지역 친척들이 계셔 생생하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마귀할멈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도. 이 당시에는 왜 이런 분들이 많이 계셨을까 의문이 드네요 저도 학교다닐 때 특히 초등학교 때 아이들에게 부모님 소득별로 차등대우하던 선생님이 떠오르더라구요 참 착한 친구였는데 가난해서 혼났던 친구도 떠올랐어요 그래도 요즘은 공립학교 선생님들이 참 좋으세요 사명감갖고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하시더라구요~
진영의 채변봉투 제출 사건도 생생했어요~ 책을 읽는동안 저도 스릴러보는 줄 알았네요^^;; 영상으로도 1974년 진영을 재현하고 감동을 줄수 있는데 확실히 글으로 표현하면 세세하게 더 묘사하고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네요~ 단지 사람들이 영상보다 책에 더 진입장벽이 높다는 단점이 있지만요~ '사회적 안전망'에 대해서는 큰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보통은 누군가가 잘못되면 개개인의 잘못이라고 교육하고 미디어에서도 그렇게 노출하지요~ (10.29 참사처럼) 책을 읽는동안 이 부분을 곰곰히 생각하며 다시 읽어봐야 겠습니다~
잘 읽혔다니 반갑네요. 전 90년, 그러니까 이십대 후반에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살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외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반추의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국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기억보다는 다른 길을 택했을 것이고, 같은 이야기를 쓰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썼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게다가 저는 반응이 좀 느린 편입니다. 이를테면, 삼십대의 십 년은 이십대를 반성하는 데 보냈고, 오십대는 사십대의 십 년을 반성하는 일에 보낸 식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반성이라는 건 기억을 중첩시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이십대를 반성하는 삼십대의 내 의식의 결과를 가지고 살아온 사십대의 일을 다시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인 거죠. 이런 게 습관이 되면 사람이 좀 멍해집니다. ㅎㅎ 어떤 사건에 대해 재빨리 윤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일도 좀 어려워지고, 머릿속으로 독백이 길어지는 상태가 되는 거죠. 정신병리학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약간의 소시오패스 성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요즘은 소시오패스를 아주 끔찍한 반인류적 병증으로 받아들이는 듯한데, 제 생각에는 이것 역시 일종의 스펙트럼이고, 사람은 누구나 이 특성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다만, 소위 '정상인'들 중에서도 그 경향이 아주 가벼운 사람이 있고, 그보다는 약간 중한 사람이 있을 테고요. 그런데, 자신을 시간과 공간적인 면에서 분리시켜서 사고하는 일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이런 경향이 좀 더 강해지는 듯합니다. 대표적인 게 종교인들인 것 같아요. 삶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초월성이 그것이죠. 다만 이들의 경우에는 그런 분리가 이뤄지는 이유 자체가 고도의 윤리성에 바탕하고 있어서 반사회성보다는 초사회성에 가깝게 나타나는 것 같고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제 경우에는 이 간극--과거의 나와의 간극, 외부와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다양한 표현매체를 동원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젊은 시절에는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보다 직접적으로 말을 걸고 싶어했고, 차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매체 쪽으로 움직여 왔습니다. 이야기라는 건 다른 말로 하자면, '비슷하게 만들어낸 세계'이자 '다르게 만들어낸 세계'인 거 같아요. 알레고리나 메타포라는 용어에는 이 두 가지 성격이 같이 섞여 있죠. 이 두 가지 성격을 조망하고 만들어내면서 그 간극, 사이를 자꾸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거죠. 아주 공들여서 이상한 일을 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건 누군가가 동의해 준다면(=읽어준다면) 꽤 의미있는 일이 될 수 있지만, 외면당하는 순간 지극히 허망한 일이 되는 것 같아요. 매우 취약한 상태인 거죠. 외부의 반응에 존재의미를 걸고 있는 소시오패스. 좀 자극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되겠네요. 자기모순적인 말이에요.
이 자기모순을 다른 말로 옮기자면, 사회라는 것의 숙명성 정도 될 거 같아요. 중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외국어를 배우고 어느 정도 익숙해진 뒤에 제일 먼저 한 일이 저만 아는 언어를 만드는 일이었어요. 어떤 특정한 규칙에 근거해서 알파벳을 만들고 문법은 영어와 우리말을 대충 뒤섞은 것이었는데, 이건 물론 일기를 쓰기 위한 것이었죠. 나 말고는 누구도 읽거나 쓰지 못한다는 점에서 반사회적이고 반언어적인 언어였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레 소멸되었습니다. ㅎㅎ 18세기 즈음의 영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작업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 언어를 공유했고, 소통이 가능했습니다. 이 언어체계로 쓰여진 일기들이 꽤 남아있는데, 이걸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어서 번역출판도 되고 그랬죠.
마음 편하게 이 얘기 저 얘기 하다보니 하염없이 길어지고 있는데, 더 길게 얘기하고 싶은 걸 참고 마무리하자면, 저는 그래서 마음 속을 더듬어가는 이야기, 그리고 그 마음이 내다보는 풍경을 찬찬히 서술하는 일에 관심을 둡니다. 자전거 타는 이야기, 주변의 풍경 이야기를 그렇게 길게 쓴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과거라는 독립된 세계를 가능한 한 풍성하게, 손에 잡히게 말하고 싶었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한테는 그 세계를 향해서 손을 뻗는 게 글을 쓰는 아마도 가장 큰 이유일 겁니다. 그게 다는 아닐 것이고, 조금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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