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읽기> 전쟁과 사회

D-29
혼자 차근차근 읽어가려합니다.
일찍이 프리드리히 니체는 우리가 어떤 것을 칭하는 방식은 실제 그것이 어떤 것인가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다. 즉 한국전쟁을 어떻게 부르는가 하는 것은 한국전쟁의 진실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즉, '6.25'라는 이름에는 그 전쟁에 대한 공식적 기억, 정치적 의미부여, 그리고 남한 시민에 대한 역사교육의 방향이 담겨 있다. '6.25'라는 명칭에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평화로운' 남한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는 점, 그리고 전쟁이 낳은 모든 불행과 고통은 전쟁을 도발한 국제공산주의와 그들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책임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6.25'라는 개념 규정은 모든 남한 사람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상기하자 6.25, 무찌르자 공산당"이라는 구호를 연상케 하는데, 거기에는 전쟁의 발발, 즉 개전의 책임자가 누구인가, 어떤 세력과 이념집단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민족적 비극을 겪었는가를 두고두고 되새김질하자는 문제의식이 강하게 깔려 있다. 그 결과 온 대한민국은 지난 50여 년 동안 개전일자인 6.25를 기념하고 있으며, 서울의 한복판 용산에는 평화기념관이 아닌 웅장한 '전쟁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그리하여 남한 사람들은 개전일자는 너무나 잘 알아도 휴전일자는 알지 못한다.
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p.70, 김동춘 지음
한국전쟁 후 남한에서는 전쟁 자체에서 온 피해와 고통, 그리고 북한 인민군의 남침으로 인한 직접 피해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으나, 미군과 국군이 준 피해는 감히 언급조차 할 수 없었다. "미군과 한국군도 못할 짓을 많이 했다"는 전쟁기 체험은 오랜 세월 동안 유언비어로만 돌아다녔다. 그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렇듯 유언비어로 돌아다니는 민중들의 전쟁 체험 및 기억들은 바로 미셸 푸코가 말한 '예속된 앎'이다. 이 '예속된 앎'은 지배적 앎과 마찬가지로 전투에 대한 기억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그 전쟁 이후 남한에서 우익의 지배가 공고화되자 '예속된 앎'은 이제 '불온한 생각'으로 간주되었으며, 이웃과 자식에게도 감히 발설하지 못하는 엄청난 비밀이 되었다. 심지어는 피해자들조차 자신도 체험한 사실을 의식적으로 부인하거나 망각하려고 몸부림쳤다.
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김동춘 지음
'왜 전쟁이 발생했으며'(기원),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발발)라는 질문 역시 전쟁의 성격 규명을 위해 매우 중요한 것이기는 하나, 이 질문은 '전쟁이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전쟁 수행을 위해 국가는 무엇을 하였는가', '전쟁 중에 군인과 국민들은 어떻게 행동하였는가', '전쟁 후 국가는 어떻게 되었고 누가 권력을 얻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보완되지 않고서는 아주 불충분한 대답이 될 것이다. 결국 정치행위는 그 동기는 물론 과정과 결과로 평가받아야 하며, 특히 민중들에게는 전자보다 후자가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p. 101, 김동춘 지음
따라서 필자는 한국전쟁의 전모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 교전 당사자들이 자신을 '과시하는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단순한 군사적 측면이 아닌 전투와 작전을 관장하는 정치에 주목해야 함을 의미한다. 국가의 정치적 민주주의 수준, 법과 제도의 정비, 지배 엘리트의 구성과 그들의 이데올로기, 정당성의 기초, 국민의 정치참여 수준 등 국가 내의 정치 과정은 모두 전쟁의 수행 과정으로 곧바로 연결될 것이다. 따라서 당시 현명한 정치가나 학자라면 1950년 6월 25일 전면전이 발생하기 이전에 장차 전쟁이 발생한다면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고, 당시 남한 내 소수의 지식인들이나 정치가들은 실제 그러한 진단을 하고서 크게 우려한 바 있다.
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p. 101~102, 김동춘 지음
'한국전쟁은 어떤 전쟁이었나'라는 질문을 '한국전쟁은 남북에 각각 어떤 국가, 어떤 사회를 건설했는가'라는 질문과 결합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이 위기에 처한 이승만 정부와 대한민국을 '구출'하여 그 권력을 반석 위에 올려 놓은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지만, 대한민국의 '성공'이 장기적으로 억압과 통제를 위주로 하는 군사형 사회, 국가예산의 30% 이상을 군비로 지출하는 경제, 그리고 외국군이 상시 주둔하고 그들이 국군의 작전권을 소유한 외세 의존 상태를 야기했다는 측면을 함께 보아야 한다. 즉 한국의 분단국가는 전쟁으로 이해 반석 위에 서게 되었지만, 그 성공은 끊임없는 정치적 불안정과 도덕적 혼미, 폭력과 갈등을 낳게 되었다.
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p. 108, 김동춘 지음
북한이 '조국해방'을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켜 이제 남한 민중들이 이승만 정권에서 벗어날 기회가 생겼는데도, 이들이 그냥 앉아서 인민군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수년 동안 좌우대립과 양측의 충성 요구에 민중들이 극도로 지치고 위축되어 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빨치산 활동 지역 내에 살던 농민들은 사실상 생존을 위해 낮에는 대한민국의 국군과 경찰에게, 밤에는 '산사람'들에게 각각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산을 내려올 수도, 또 국가를 떠날 수도 없는 '퇴출' 불가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남한의 군과 경찰이 '강요에 의한 주민의 협력'을 봐줄 정도의 아량과 여유를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한번 유격대에 협조했던 사람은 이후 생존을 위해 유격대가 될 수밖에 없는 경우도 많았다.
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P. 142, 김동춘 지음
그들에게 삶의 철학이 있었다면 오직 어느 측에서도 처벌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사회주의자나 자본주의라는 이념보다 더 중요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들은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는 인민군에게, 국군이 들어왓을 때는 국군에게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전쟁 통에는 섣불리 피란 가는 것보다는 쥐 죽은 듯이 잘 숨어 지내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P. 142, 김동춘 지음
현대에 들어와서 전쟁이 전면전과 유격전의 양상을 지닌다면, 전투 공간은 민간인이 거주하는 생활 공간 전체로 확산되고, 유격대가 출몰하는 지역의 민간인은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된다. 만약 유격대가 도시와 농촌 어느 지역에서 민간인과 구별되지 않게 잠복해 있다가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출몰한다면, 영토 내의 모든 주민은 잠재적인 적으로 취급될 수 있다. 이때 유격대에 협력했거나 협력자를 방치한 민간인은 곧 적 또는 적과 내통하는 자로 분류되며, 그들을 살해하는 것은 전쟁의 목적 달성을 위한 불가피한 과정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 시 적에 협력한 사람, 나아가 장차 적에게 협력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 대한 처벌과 학살은 전투의 한 과정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실제로 이승만은 여순사건 이후 경찰은 경사 계급까지, 군인은 소위계급까지 '좌익 폭도'에 대한 현장 즉결처분권을 주었다고 한다. 그것은 전시하에서 사실상 모든 군인이나 경찰들이 '적'으로 의심되는 민간인을 죽일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p.333, 김동춘 지음
혁명과 전쟁은 말 그대로 법의 효력이 정지되는 상황이므로 혐의가 있는 사람을 "즉각 총살해도 책임이 없는" 경우도 발생한다. 그것은 사실상 권력이 가장 적나라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상황이다. 권력의 본질은 사실상 폭력이며, 국가가 폭력에 기초하고 잇다는 사실은 전쟁 시에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하여 무력, 곧 권력은 자신을 반대하거나 반대할 개연성이 있는 세력을 적으로 돌려 살해하거나 완전히 배제시킨다. '공권력'의 집행자인 인간은 감정적인 존재이다. 앞장에서 말한 것처럼 '작전'은 사실상'보복'과 결합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시 어디서 적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내전이라는 특수 상황이 죽음의 위협에 놓인 군과 경찰을 감정 개입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 경우 개별 군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살기 위해 상대방을 완전히 죽여 없애야 한다는 공포와 압박에 시달린다.
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p. 334, 김동춘 지음
결국 미군정의 의도하에 진행된 친일 경찰의 등용이 저항적 폭력의 시발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의 편에 서서 동포들을 못살게 굴던 경찰들이 해방 후 또다시 치안을 담당하게 되자, 이에 격분한 민중들이 폭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당시의 모든 기록은 민중의 분노가 대구 10.1 사건의 도화선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 따라서 원인 제공의 측면에서 본다면 미군정의 진주로 인한 현상유지정책과 미군정의 적극적인 친일 경찰 기용이 남한에서 폭력을 불러일으킨 일차적인 배경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6.25 이전의 학살은 이처럼 좌익 일반과 우익 일반이 대립한 결과가 아니라, 이미 국가 건설 작업을 서두르던 미군정이 1947년경부터 분명한 목표와 방향을 갖고 좌익과 민족주의 세력을 배제하기 시작하면서 일제 관료, 군, 경찰이 재등장하게 된 상황에서 발생했다.
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p. 341, 김동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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