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기 마음을 글이나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한다. 그것도 꾸준하고 치열한 연습이 필요하다.
영원한 천국
D-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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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 말만 들어
성욕을 유발하는 드라마를 하는데
여자들끼리 성적인 얘기를 노골적으로 하고
남자가 여자의 엉덩이를 만지는데 그게 자기 마누라다.
여자는 성적인 얘기를 함부로 맘대로 노골적으로
해도 되고 마치 여자를 성희롱하는 짓 같은 것도
부부 사이엔 괜찮은 것이다.
다 여자의 생각과 입장의 드라마라 그런 것 같다.
여기에 남자의 시선 같은 것이 조금이라도 가미되면
그건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이 든 여자들은 질투심이 작용해 전에
자기들이 살 때는 그런 것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고, 아니 못했다고 생각해서
지금의 유난이 상당히 고까운 것이다.
성적인 희롱보단 이게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이다.
인간의 속은 아무도 모르지만, 그냥 덮어가는 것도
인간들이 사는 사회엔 너무나 많다.
약자들 편만 무조건 들더라도 나이 든 옛날 여자가
더 약자인가 요즘 여자들이 더 약자인가.
헷갈려 누구 편을 더 들어주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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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은 분노를 야기한다. 공포는 분노의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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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구청장 내려놓은 거 한국일보 사설하고 중알일보하고 거의 비슷한데 이거 이래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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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선 임경주에게 여자들이 경계를 전혀 안 하고 달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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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서 을이 되면 쩨쩨해지고 상처를 많이 받는다. 온 신경이 그리로 가기 때문이다. 쿨하게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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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취직이 안 되어 편의점 알바가 많이 나오고 유통기간 막 지난 도시락을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드라마 장면도 바뀌어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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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는 작가의 약자
작가는 대개 약자를 대변하는데 주로
자기가 놓이고 겪은 것에 준해 쓴다.
주관적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자기가 약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약자다.
그는 바로 자기의 상처와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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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으로 남는 게 낫다
한 분야에서 성공하면 그 틀에 갇히기 쉽다.
누구나가 다 어린애의 말을 더 잘 듣고 믿는다.
그들이 더 있는 그대로 말하고 뭔가 재면서 말하지 않아
진실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선진국도 선진국으로 누린 모습이 있고 자기들도
그걸 알아 거기에 맞게 글을 쓰려고 한다.
이것도 한 틀로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일본이 그렇기 때문에 영화 <어느 가족>이
칸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지만
자기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영화라서 인정을 안 하려고 한다.
왜 굳이 그렇게 안 좋은 면을 드러내려고 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자체가 예술적으로는 대단한 흠이다.
그런 말 자체가 안 나오는 사회가
예술적 토양이 비옥한 사회다.
우리나라는 아직은 그런 틀이 생기지 않아서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이 나올 수 있던 것이다.
우리의 상처를 드러내는데 아직은 거침이 없다.
주렁주렁 달린 게 없고 지킬 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체면 구길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유명 배우가 잘나갈 때는 아무 작품에나 출연하지 않는다.
“내 가오가 있지.” 하는 것이다.
자타가 공히 만들어낸 연기의 틀 안에 안주한다.
리즈시절이 지나 불러주는 곳이 어디에도 없을 때
다 내려놓고 망가지는 작품에도 출연하는데 의외로 그게
장기 인기 비결을 창출하기도 한다.
자기의 숨었던 끼가 발산되어
연기의 정점에 오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건 틀을 걷어내고 시청자를 의식 안 하고
진정한 자기 연기에만 몰입했기 때문이다.
곁가지는 걷어내고 핵심에만 전념하기 때문이다.
한 분야에서 인정받아 감투를 쓰고 그 분야에 기여한 공로로
상을 받으면 그때부터 오히려 자유로운 글을 쓰지 못하는
작가도 흔하다.
그것보다는 더 잘 써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글을 함부로 내놓지 못하고 그 안의 권위라는
틀 안에서 써야 한다는 울타리가 쳐져
자기 글의 방향을 미리 잡아놓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자꾸 자기와 주변을 살피면서 쓰게 된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예술가에게 이보다 더
열악한 집필 환경도 없다.
작가에게 틀에 갇히는 건 생명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며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외치며 몸부림쳤던 거 아니겠나.
종교라는 껍데기를 깨고 나가려고.
작가에게 틀에 둘러쳐지거나 스스로 틀을 만들면
그는 그 안에서밖에 생각을 못 해 항상 그런 글만 생산한다.
아무것도 의식 안 하고 붓 가는 대로 쓰는 예술가가
가장 행복하고 그런 가운데-클레셰 없는-
세상에 없는, 미증유의 걸작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은 그걸 잣대로
현상을 평가하기 때문에 이미 그 틀에 갇힌 것이다.
그 사람은 거기서 나오기 쉽지 않고 평생
그 말밖에 모를 수 있고 그걸 듣는 상대는 상당히 거북하다.
철이 들고 세상 물정을 알면 자기를 감싸는 틀을
고려하고 의식하며 말하기 때문에 진실과 거리가 멀 수 있다.
그대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세상 때 묻지 않은
아이가 그래서 더 믿음이 가는 것이다.
글도 어떤 분야에 궤적을 남겨 그 틀에
아직은 안 갇힌 글이 더 자유롭게 글을
맘대로 쓸 수 있어 그 글이 더 순수할 수 있다.
그래서 아직은 틀에 갇히지 않은 청년의 글이
더 진실되기 때문에 더 낫다고 보는 것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뭔가를 고려하는,
자기 검열의 속박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런 소년의 글이 그래서 더 귀하고 가치 있다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청년으로 요절한 이상문학상을 가장 알아주고
일본에선 청년으로 자살한 아쿠타가와상을 그래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여기는 거 아니겠나.
오직 순전히 문학만 생각한 깨끗하고 맑은 영혼을
기려 그런 상을 만든 것 아니겠나.
상을 받는 후배 작가들에게 그 정신을 오래도록 간직하라고.
청년 시절의 글이 더 순수와 진실에 가깝고
표현의 한계와 아니 아예 틀에 아직은 갇히지 않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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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세 가지를
나는 이걸 생각해 봤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뭘까?
인간은 건방지게도 우주의 흐름을 그 사는 날이 작아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일부 자기 전공(專攻)에 미친 자들만 빼고.
그 삶의 이전과 그 이후가 훨씬 더 많은데도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잠시 잠깐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할 것만 생각해서 어리석은 짓을 서슴지 않는다.
물론 너무 결정론적으로, 운명적으로만 살면
자기의 현생을 활기차게 못 산다는 건 있다.
그렇더라도 냉정히 말해 자기의 운명은
한낱 먼지에 불과한 것인데도
그 잠시 잠깐의 생에 매몰되어 어리석은 짓을 마다하지 않는다.
현생에서의 나와 우주에서의
자기 자리를 제대로 알자는 것이다.
결국 아무리 해봐야 망망대해의 한 물살에 불과한 게
인간 생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그렇다면 “그 허무를 모르는 게 낫지 않냐?” 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자기의 작은 생에 빠져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다.
그렇게 되면 결국 자기 현생과 미래,
남의 생까지도 망쳐놓을 수 있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대개 자신의 위치를 모르거나
망각한 데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전체에서의 자기를 냉정히 보지 못한다.
자기 객관화가 안 되어 있다.
자기 운명을 알고 그 속에서 최선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전체에서의 자신의 위치, 자리를 모르니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마는 것이다.
우주에서의 자기 자리를 냉정히 보면서 현생에서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지 찾아내야 한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한낱 조각배에 불과한 자신의 운명을
알고 그 조각배로 어떻게 항해할지 궁리해야 한다.
이게 우주 앞에서 겸손하면서 현생을
열렬히 불태울 수 있는 첩경이다.
겸손(謙遜)은 자신이 광막한 우주 속 미세한 먼지에
지나지 않음에서 얻어지는 것이고,
자신의 산화(酸化)는 자신의 생은 반드시 끝난다는
유한함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후자는 프란츠 카프카가 한 말이기도 하다.
우주 공간의 위태롭고 외로운 조각배인 나는
과연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할까, 하고
자신과 자기 자리를 찾아 헤매게 된다.
보잘것없는 짧은 생에서 뭔가 찾아내려고 몸부림친다.
이런 생각을 하면 쓸데없는 짓을 할 시간이 없다.
“그래,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나?”
이대로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다.
나 자신을 활활 불태우고 싶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여 그걸 하려고 덤비면 달성도 못 하고
그걸 하면서도 행복하지 않다.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해도 망망대해의 한 조각 파도에 불과한
자기를, 지금 여기에 새길 방법은
운명적으로 타고난 자기를 알아차리고 그걸 살아 있는
잠시 잠깐만이라도 실현하는 것이다.
자신을 현생에서 불살라 버리는 것이다.
생에서 자신의 타고난 것만 하면 물론 즐겁고 뿌듯하다.
즐기는 것이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거기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흥이 없다. 짧은 생에서 이것만 하면 뭔가
억울하지 않은가. 자기 의무만 하면.
뭔가 자기 권리를 찾아야 한다. 고요 속의 태풍을.
한 사람의 인생도 성실하기만 하면 재미가 없고
퇴폐미가 있어야 매력적인 삶이랄 수 있다.
정해진 코스를 벗어나야 호기심이 일어 흥미진진해진다.
일상에서 자기를 구현하려면 일탈이 필요하다.
꾸준한 지식의 축적과 함께 이걸
흐트러뜨리겠다는 자신감과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
인류의 위대한 발명도 성실한 연구 끝에 거기서
잠시 벗어난 우연한 발견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굴곡이 인간 생엔 필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평탄한 건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인생의 묘미는 모순이다.
파이는 게 있어야 솟아나는 게 있는 것이다.
고랑이 있으면 이랑도 있는 법이고,
썰물이 있어야 반드시 밀물이 다가온다.
일상에서 벗어나 일탈을 해야 일상의 소중함도 알고
그것을 더 잘 꾸려나갈 수 있다.
인간 세상엔 뭐든 다 상대적이다.
밤이 없으면 낮도 없고, 불행이 없으면 행복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탈이 있어야만 일상의 잔잔함도 존재하는 것이다.
일탈에 잠시 탐닉하고 일상에서 자기를 제대로 실현하자.
지금 일고 있는 일탈, 욕망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걸 참을 필요는 없다.
지금의 마음이 나를 그리로 이끌었다.
이건 현생을 사는 데 꼭 필요하다.
인간은 쓸데없는 짓을 해야 더 창조적일 수 있다.
그러니 그 쓸데없음이 쓸모없는 게 아니다.
아니 쓸데없음이 반드시 인간에겐 필요하다.
그래야만 정체가 아닌 진보(Progress)가 계속 뒤따른다.
욕망, 일탈은 즉 마음이기 때문에 곧 지나간다.
일탈, 욕망은 일시적이고 루틴(Routine)은 상시적이다.
상시적인 것을 위해 잠시 잠깐의 욕망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 욕망을 외면 말고
한껏 빠지라는 것이다.
하고 싶은 걸 하고 그래야만 최소한 후회가 없고
짧은 생이 좀 덜 허무할 것이다.
“인생 뭐 있어?”
이걸 할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그때 가서는 하려고 해도 이미 달아나 자기 곁에 없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자기 전(全) 생애에 걸친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제대로 발현하고
지금 이는 욕구를 맘껏 즐겨라.
운명적인 것을 잊지 않으면서-이건 겸손과 초심에
영향을 준다-자기에게 이는 욕망을 억지로
막지 말고-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그걸 자양분 삼아 자기
생에서 자신만 가지고 있는 것을 맘껏 체현(體現)하면서
진정한 행복을 누려라.
생의 본질인 모순(절제 속의 향유)-운명 안에서
누리는 자신만의 진정한 욕망-을
깨닫고 이생에서,
자신의 고유 자원(Temperament)을 신명 나게 구현하라.
‘아, 이 세 가지를’ 하면
좀 살다 갔노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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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계시라면서 전쟁으로 사람을 엄청나게 죽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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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은 항상 도사리고 있다. 평소엔 그럴 리 없는 비행기가 바로 내가 사는 집을 덮쳐 화재가 일어나 비행기 속 사람들과 내가 사는 아파트가 화염에 휩싸여 사망자가 수십명 에 이를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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