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K드라마와 K대중음악만 각광받아왔는데 이젠 K문학도 세계에 각광을 받게 되어 말할 수 없이 기쁘다. 성인 절반 이상이 일 년에 책 한 권 안 읽고 문해력이 떨어지는 이런 척박한 독서환경 아래서 이룬 성과라 더욱 값진 낭보인 것 같다. 이를 계기로 침체된 한국 문학에 대한 붐이 일었으면 좋겠다.
영원한 천국
D-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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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세계에 정보가 떠다녀 인간이 영원히 산다면 거기에 누굴 포함시킬까? 그 집이치우고 그냥 자연 상태대로 살다 제때에 가는 게 백배 낫다. 인간도 그냥 자연의 일부로 살다 가는 게 백배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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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대개 가장 최근에 쓴 작품을 가장 아낀다. 글도 지금 쓰는게 가장 잘 쓰는 것 같다. 지난 글을 다시는 다시 읽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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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은 역시 위대하다. 한국 드라마에 배경으로 나오는 한글을 보고 외국인들은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다고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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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라마는 여자에게 막 하면 심한 저항과 항의를 받으니까 이제 거꾸로 만만한 찐따 같은 남자를 여자가 자기 장난감 다루듯 마구 다룬다. 이래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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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태풍 전야의 고요라고,
새 책 출간이 안 되고,
(가장 최근작인 『작별하지 않는다』가 2021년 출감됨)
주변에서 “아직은 아니다.”라는 소리가 자꾸 들려오고,
여러모로 요즘 한강이-원래도 조용했지만, 책 출간도 그래서-
조용한 것 같아
(그런데도 이상하게 서점에 한강 책이
사라지기는커녕 자주 눈에 띄긴 했다.
아마도 출판사들에선 발표하는 10월을 겨냥해
내부적으론 “혹시?” 하고 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요즘 글 쓰는 걸 힘들어하나?” 했는데
그 예상을 뛰어넘어 상을 타게 되어 너무나 기쁘다.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벅차오르고,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이 끓어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긴 문장이나 텍스트보다는 짧은 영상에 더 익숙해
문해력(文解力, Literacy)이 떨어지고
성인 절반 이상이 1년 가야
책 한 권 안 읽는 열악한 독서 환경과 얇은 독자층 아래서
이룬 성과라 더 값진 것 같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도 독서 열풍이 불기를
책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열렬히 바라는 바다.
독서의 강점에 대해선, 책 한 권 분량을 훌쩍 뛰어넘는
분량이라 여기서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한강은 자기 작품 중『작별하지 않는다』를
제일 먼저 읽어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가장 최근 작품이라서란다.
맞는 것 같다.
책엔 요즘 자기 최대 관심사가 안 들어갈 수 없으니
그걸 가장 아껴 그런 것도 있겠고, 가장 최근 것이니
가장 자신 있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책에 담아낸 자기 생각을 아직은 다른 책보다 더 많이
간직하고 있어 그런 것도 있다.
작가가 아직 그 책의 기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다른 책을 내놓을 때까지 그 현상은 지속될 것이다.
작가는 지금 쓰는 글을 가장 잘 쓰는 거라고, 생각하며 쓴다.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자세와 마음으로 책을 써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지난 자기 글은 뭔가 다시 접하기 힘든 것도 있다.
아마도 그것엔 지금보다 부족함이 많아 부끄러워
그런 것도 있겠다.
그리고 『흰』을 두 번째로 추천했는데,
자기 자서전적인 작품이라 그렇단다.
세상은 또 알 수 없는 게 진보 정권(Progressive Regime)에
받았다면 더 환영받았을 일인데,
지금까지 잘 자리잡아 가고 있던
사회 시스템이 여기저기서 파괴되고
국격이 끝없이 추락하는 요즘에 노벨문학상 낭보라니,
이런 걸 보면, 세상은 마냥 좌절만 할 것도,
그렇다고 평화와 기쁨이 한없이 이어지는 것도 아님을,
새삼 실감하게 되는 요즘이다.
그런데,
과연 대통령이 한강을 부를까? 아니면 안 부를까?
귀추가 주목되는 가운데, 한강은 또
여기에 응할까 아닐까에도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다.
솔직한 심정은,
대통령실에서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으면 한다.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좋겠다.
자기들에게 불리한 블랙리스트 작성,
유해 도서로 선정되어 학교 도서관에서 치워지고,
(주변에 만연한 모든 폭력에 맞서 그 누구에게도
무해한, 오히려 도움을 주는 존재(나무)로만 거듭나려는
그로테스크한 몸부림이 본질임에도 그걸 보는 안목 없이
그저 곁가지만 보면, 그런 그들 눈엔 그 책이
충분히 유해 도서이긴 할 것도 같다.)
문화 예술 카르텔 압수수색,
사실 솔직히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자기 자랑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지금껏 독서 활성화,
출판문화 예산을 삭감해 왔으면서 무슨 염치로.
예술을, 정권의 입맛대로 재단해선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예술은 권력, 시대, 장소를 초월하는 영역이라는
고상한 이유 말고도 냉정하게 말해 예술이 정권보다
더 오래 간다.
더 오래 살아남는다.
정권은 짧고 예술은 길다.
어린애가 어떻게 100세 노인을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평할 수는 있겠으나, 과연 그게 올바른 평가일까?
그러니 정권은 지원만 하고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아마도 기자회견을,
“지구촌이 지금 전쟁통인데 잔치를 할 수 있느냐?”처럼
서로 물밑 조율해서-만약 초대했는데 거절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는 날에는 상당히 모양 빠지는 일이니까
(서로 지향점이 다르기 때문에
-한강은 제주 4.3사건을 소환하는 소설을 썼고 대통령은
그 추념식에 불참했다-이것도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그런 것은
없는 것으로 가닥을 잡을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또 막후에서 어른거리는 불굴의 그,
진짜 비선(秘線) 실세의 의중이 여기서도
상당히 중요하다고 보는데,
그의 생각에 따라 이번 건도 결판날 것 같기는 하다.
그렇지만 한강의 수상 소감은 꼭 듣고 싶다.
그건 아마도 시상식이 열리는 12월 10일,
노벨의 기일에나 기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쉽지만 그때까지 기다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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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상대적이다
인간은 자기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본다.
같은 것도 이 사람과 저 사람 시점에 따라 다르다.
장애인의 관점이면 나는 비장애인이 되는 것이고,
내 관점이면 내가 정상인이고 장애인이 비정상인이다.
이렇게 인간 세상은 절대적인 것은 절대 없고
항상 상대적인 개념만이 존재한다.
그걸 누가 보느냐에 따라 모두 다르다.
나는 이게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게 싫다.
균형 잡기를 바라고 그렇게 되도록 약한 쪽을 지원할 것이다.
인간은 그냥 놔두면 힘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다.
그래 무슨 형태로든 한쪽은 지배하고 한쪽은 지배를 받는다.
이렇게 안 되게 하는 노력을 끝없이 해야 한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살지만,
한쪽이 너무 독식하게 그냥 둬선 안 된다.
그 둘의 차이가 크면 줄이는 조치를 끝없이 해야 하고
그것을 방지하는 견제와 감시와 균형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서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삶을 지키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서로가 너무 차이 나면 인간은 상대적 박탈감이 큰 상처이므로
이를 방지하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다 우주적으로 하찮기 때문에 누가 더 우월하다는
것엔 의미가 없다.
그 차이가 너무 미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차이 나게 하려는 모든 시도를 막아야 한다.
그 시도를 보다 바람직한 곳에 쓰도록
유도하는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인간이 꾸미는 세상은 절대적인 건 없고
자기가 세력이 좀 크고 다수일 때만 자기들 관점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
자기들 목소리만 키운다.
지배당하는 쪽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들으려고도 안 한다.
지구상에서 지금은 아직도 남성 백인의 관점이 우세한데
이런 걸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이게 인간의 이상향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서로 힘의 균형 잡기
그래서 너무 한쪽으로 힘이 치우치지 않게 하기.
모든 개인과 조직이 다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한다.
이게 진정한 균형이고 평등이다, 힘과 세력의 분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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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에 대한 호기심
“나는 골방에 앉아서도 세상을 볼 수 있다.”
노자가 말한 것처럼 나는 곧 우주요,
우주는 곧 나인 것이다.
나의 확장은 타인이다.
“타인은 지옥이다.”
장 폴 사르트르의 말과는 다르게 그래도
인간과, 비슷한 문화 공동체를 공유하는 사람끼리는
공감하지 않을까 해서 글을 세상에 내놓게 되는 것 같다.
아무도 공감 못 하는 글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린 공감하는 사람에게 더 끌리게 되는 것 같다.
좀 살아본 한 인간에게,
“과거로 다시 돌아가고 싶으냐?” 물으면
대부분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자기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한 시점으로는
잠깐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건 무방하지만.
난 4살 무렵 초가집 뒤뜰에서 병아리들과
놀런 때로 돌아가고 싶다.
노란 병아리들과 뒤섞인 개나리가 울타리를 온통 휘감고
어머니가 심어놓은 채송화와 봉숭아꽃,
돌나물이 파릇하게 깔린 화단과 장독대,
마치 우리 집 역사와 함께한 장승처럼 언제나
우리를 지키는, 구불구불하게 하늘로 솟은 듬직한 살구나무,
개구리들이 첨벙 뛰어드는 미나리꽝,
그 아련한 풍광 속으로 다시 스며들고 싶다.
조금 용기를 내 걸음을 옮기면 어느 뭇 산소엔
할미꽃이 수줍게 고갤 숙이고
송장 메뚜기, 사마귀, 여치가 튀어 올라
내 얼굴을 따갑게 때리는, 나비와 꿀벌이
나풀나풀 윙윙 이꽃 저꽃으로 옮겨 다니고
두더지가 어둠 속에서 잠자고 있던 축축한 흙을
마침내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그 평화롭고 따스한 세계로.
어릴 적 꿈같던 한때로 돌아갔다 오는 건 좋지만
내 과거의 전부가 되풀이되는 삶은 그리 달갑지 않다.
아마도 다시 돌아가도 다른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는 한
그게 다시 되풀이될 거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리라.
만약 어떤 알 수 없는 작용으로 돌아갈 수는 있더라도
그 비슷한 삶이 결국 무한 반복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 삶이 수레바퀴 돌 듯 영원히 순환되는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떤 형벌이 연상되기 때문이리라.
아직 도래하지 않은 앞날도 실은
지금까지의 삶의 확장에 지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단지 아직 살아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뭔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가 전개될 것 같은 그 호기심이
더 강해 지금까지의 삶의 되풀이와는 다르게
불안감 속에서도 그 삶을 더 원할 것 같다.
인간 내면은 반복의 지루함이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에 결국 굴복하는 것 같다.
이렇게 아직 해보지 않은 미지가 인간에게
살아갈 수 있는 의지에 영향을 더 많이 주는 것 같다.
여행도 일상의 반복에서 벗어나는 해방감 때문에
호기심을 갖고 설레는 마음으로 떠나는 것 아니겠나.
그러나 여행도 돌아옴을 전제로 한다.
요즘 이런 게 자주 보이는데,
인간에게 만약 영생하고 싶은지 물으면
대개는 그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니까 그런 연구도 쉼 없이 시도되는 것이고
SF 드라마나 영화, 소설도 계속 나오는 거 아니겠나.
그러나 그 형태가 과거의 무한 반복의 삶이어도
괜찮겠냐고 물으면 똑같이 그렇다고 답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이걸 보면 인간은 그게 비록 즐거운 한때라도
그것의 무한 루프보단 뭔가 새로운 것을,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신비에 쌓인 미지의
긴장과 불안, 설렘과 기대가 혼재된 모순된 감정을 포함한
‘미지에 대한 호기심’을 더 추구한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미래도 실은 과거와 별반 다를 게 없을 거라고 보는
사람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처럼 자기의
그렇고 그런 흔적과 자취조차 똑같이 소중히 여겨,
결국 인생은 그럴 수밖에 없다고 보고
그것을 되새기고 기록까지 하지만,
그래도 인간의 속성은 그런 게 아니라서
삶은 유한하고 아무리 좋은 것도 한 번으로 족하고
이런 것에, 인간 본성이 더 끌리는 게 틀리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성적 머리로는 아니라고 해도 결국 더 긴장 섞인 호기심이
발동하는 곳으로, 무의식과 몸의 본능, 기저(基底)에서
잠자던 마음이 이미 그리로 향하고 있는 것을
우린 종종 목격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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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과제
내 글은 전부 어떻게 살 것인가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그 방향은 거의 전부 내 안을 깊이 파는 작업이다.
전부 나에 대한 것이다.
누가 내 글을 안 알아줘도 상관없다.
나를 위한 거니까.
그리고 할 수 없다.
나는 결국 글로 귀환하게 되어 있다.
이곳이 내 안식처이고 영원한 고향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과 삶과 그들이 추구하는 것과
현실과 이상에 대해 나만의 질문을 던지고
나름대로 답을 찾아 계속 생각하는 글을 쓸 것이다.
끝끝내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아마 그러다가 죽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 답을 찾는 시도를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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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기 마음을 글이나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한다. 그것도 꾸준하고 치열한 연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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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 말만 들어
성욕을 유발하는 드라마를 하는데
여자들끼리 성적인 얘기를 노골적으로 하고
남자가 여자의 엉덩이를 만지는데 그게 자기 마누라다.
여자는 성적인 얘기를 함부로 맘대로 노골적으로
해도 되고 마치 여자를 성희롱하는 짓 같은 것도
부부 사이엔 괜찮은 것이다.
다 여자의 생각과 입장의 드라마라 그런 것 같다.
여기에 남자의 시선 같은 것이 조금이라도 가미되면
그건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이 든 여자들은 질투심이 작용해 전에
자기들이 살 때는 그런 것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고, 아니 못했다고 생각해서
지금의 유난이 상당히 고까운 것이다.
성적인 희롱보단 이게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이다.
인간의 속은 아무도 모르지만, 그냥 덮어가는 것도
인간들이 사는 사회엔 너무나 많다.
약자들 편만 무조건 들더라도 나이 든 옛날 여자가
더 약자인가 요즘 여자들이 더 약자인가.
헷갈려 누구 편을 더 들어주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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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은 분노를 야기한다. 공포는 분노의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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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구청장 내려놓은 거 한국일보 사설하고 중알일보하고 거의 비슷한데 이거 이래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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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선 임경주에게 여자들이 경계를 전혀 안 하고 달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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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서 을이 되면 쩨쩨해지고 상처를 많이 받는다. 온 신경이 그리로 가기 때문이다. 쿨하게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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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취직이 안 되어 편의점 알바가 많이 나오고 유통기간 막 지난 도시락을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드라마 장면도 바뀌어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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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는 작가의 약자
작가는 대개 약자를 대변하는데 주로
자기가 놓이고 겪은 것에 준해 쓴다.
주관적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자기가 약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약자다.
그는 바로 자기의 상처와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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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으로 남는 게 낫다
한 분야에서 성공하면 그 틀에 갇히기 쉽다.
누구나가 다 어린애의 말을 더 잘 듣고 믿는다.
그들이 더 있는 그대로 말하고 뭔가 재면서 말하지 않아
진실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선진국도 선진국으로 누린 모습이 있고 자기들도
그걸 알아 거기에 맞게 글을 쓰려고 한다.
이것도 한 틀로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일본이 그렇기 때문에 영화 <어느 가족>이
칸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지만
자기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영화라서 인정을 안 하려고 한다.
왜 굳이 그렇게 안 좋은 면을 드러내려고 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자체가 예술적으로는 대단한 흠이다.
그런 말 자체가 안 나오는 사회가
예술적 토양이 비옥한 사회다.
우리나라는 아직은 그런 틀이 생기지 않아서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이 나올 수 있던 것이다.
우리의 상처를 드러내는데 아직은 거침이 없다.
주렁주렁 달린 게 없고 지킬 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체면 구길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유명 배우가 잘나갈 때는 아무 작품에나 출연하지 않는다.
“내 가오가 있지.” 하는 것이다.
자타가 공히 만들어낸 연기의 틀 안에 안주한다.
리즈시절이 지나 불러주는 곳이 어디에도 없을 때
다 내려놓고 망가지는 작품에도 출연하는데 의외로 그게
장기 인기 비결을 창출하기도 한다.
자기의 숨었던 끼가 발산되어
연기의 정점에 오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건 틀을 걷어내고 시청자를 의식 안 하고
진정한 자기 연기에만 몰입했기 때문이다.
곁가지는 걷어내고 핵심에만 전념하기 때문이다.
한 분야에서 인정받아 감투를 쓰고 그 분야에 기여한 공로로
상을 받으면 그때부터 오히려 자유로운 글을 쓰지 못하는
작가도 흔하다.
그것보다는 더 잘 써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글을 함부로 내놓지 못하고 그 안의 권위라는
틀 안에서 써야 한다는 울타리가 쳐져
자기 글의 방향을 미리 잡아놓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자꾸 자기와 주변을 살피면서 쓰게 된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예술가에게 이보다 더
열악한 집필 환경도 없다.
작가에게 틀에 갇히는 건 생명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며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외치며 몸부림쳤던 거 아니겠나.
종교라는 껍데기를 깨고 나가려고.
작가에게 틀에 둘러쳐지거나 스스로 틀을 만들면
그는 그 안에서밖에 생각을 못 해 항상 그런 글만 생산한다.
아무것도 의식 안 하고 붓 가는 대로 쓰는 예술가가
가장 행복하고 그런 가운데-클레셰 없는-
세상에 없는, 미증유의 걸작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은 그걸 잣대로
현상을 평가하기 때문에 이미 그 틀에 갇힌 것이다.
그 사람은 거기서 나오기 쉽지 않고 평생
그 말밖에 모를 수 있고 그걸 듣는 상대는 상당히 거북하다.
철이 들고 세상 물정을 알면 자기를 감싸는 틀을
고려하고 의식하며 말하기 때문에 진실과 거리가 멀 수 있다.
그대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세상 때 묻지 않은
아이가 그래서 더 믿음이 가는 것이다.
글도 어떤 분야에 궤적을 남겨 그 틀에
아직은 안 갇힌 글이 더 자유롭게 글을
맘대로 쓸 수 있어 그 글이 더 순수할 수 있다.
그래서 아직은 틀에 갇히지 않은 청년의 글이
더 진실되기 때문에 더 낫다고 보는 것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뭔가를 고려하는,
자기 검열의 속박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런 소년의 글이 그래서 더 귀하고 가치 있다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청년으로 요절한 이상문학상을 가장 알아주고
일본에선 청년으로 자살한 아쿠타가와상을 그래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여기는 거 아니겠나.
오직 순전히 문학만 생각한 깨끗하고 맑은 영혼을
기려 그런 상을 만든 것 아니겠나.
상을 받는 후배 작가들에게 그 정신을 오래도록 간직하라고.
청년 시절의 글이 더 순수와 진실에 가깝고
표현의 한계와 아니 아예 틀에 아직은 갇히지 않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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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세 가지를
나는 이걸 생각해 봤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뭘까?
인간은 건방지게도 우주의 흐름을 그 사는 날이 작아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일부 자기 전공(專攻)에 미친 자들만 빼고.
그 삶의 이전과 그 이후가 훨씬 더 많은데도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잠시 잠깐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할 것만 생각해서 어리석은 짓을 서슴지 않는다.
물론 너무 결정론적으로, 운명적으로만 살면
자기의 현생을 활기차게 못 산다는 건 있다.
그렇더라도 냉정히 말해 자기의 운명은
한낱 먼지에 불과한 것인데도
그 잠시 잠깐의 생에 매몰되어 어리석은 짓을 마다하지 않는다.
현생에서의 나와 우주에서의
자기 자리를 제대로 알자는 것이다.
결국 아무리 해봐야 망망대해의 한 물살에 불과한 게
인간 생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그렇다면 “그 허무를 모르는 게 낫지 않냐?” 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자기의 작은 생에 빠져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다.
그렇게 되면 결국 자기 현생과 미래,
남의 생까지도 망쳐놓을 수 있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대개 자신의 위치를 모르거나
망각한 데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전체에서의 자기를 냉정히 보지 못한다.
자기 객관화가 안 되어 있다.
자기 운명을 알고 그 속에서 최선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전체에서의 자신의 위치, 자리를 모르니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마는 것이다.
우주에서의 자기 자리를 냉정히 보면서 현생에서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지 찾아내야 한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한낱 조각배에 불과한 자신의 운명을
알고 그 조각배로 어떻게 항해할지 궁리해야 한다.
이게 우주 앞에서 겸손하면서 현생을
열렬히 불태울 수 있는 첩경이다.
겸손(謙遜)은 자신이 광막한 우주 속 미세한 먼지에
지나지 않음에서 얻어지는 것이고,
자신의 산화(酸化)는 자신의 생은 반드시 끝난다는
유한함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후자는 프란츠 카프카가 한 말이기도 하다.
우주 공간의 위태롭고 외로운 조각배인 나는
과연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할까, 하고
자신과 자기 자리를 찾아 헤매게 된다.
보잘것없는 짧은 생에서 뭔가 찾아내려고 몸부림친다.
이런 생각을 하면 쓸데없는 짓을 할 시간이 없다.
“그래,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나?”
이대로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다.
나 자신을 활활 불태우고 싶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여 그걸 하려고 덤비면 달성도 못 하고
그걸 하면서도 행복하지 않다.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해도 망망대해의 한 조각 파도에 불과한
자기를, 지금 여기에 새길 방법은
운명적으로 타고난 자기를 알아차리고 그걸 살아 있는
잠시 잠깐만이라도 실현하는 것이다.
자신을 현생에서 불살라 버리는 것이다.
생에서 자신의 타고난 것만 하면 물론 즐겁고 뿌듯하다.
즐기는 것이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거기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흥이 없다. 짧은 생에서 이것만 하면 뭔가
억울하지 않은가. 자기 의무만 하면.
뭔가 자기 권리를 찾아야 한다. 고요 속의 태풍을.
한 사람의 인생도 성실하기만 하면 재미가 없고
퇴폐미가 있어야 매력적인 삶이랄 수 있다.
정해진 코스를 벗어나야 호기심이 일어 흥미진진해진다.
일상에서 자기를 구현하려면 일탈이 필요하다.
꾸준한 지식의 축적과 함께 이걸
흐트러뜨리겠다는 자신감과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
인류의 위대한 발명도 성실한 연구 끝에 거기서
잠시 벗어난 우연한 발견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굴곡이 인간 생엔 필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평탄한 건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인생의 묘미는 모순이다.
파이는 게 있어야 솟아나는 게 있는 것이다.
고랑이 있으면 이랑도 있는 법이고,
썰물이 있어야 반드시 밀물이 다가온다.
일상에서 벗어나 일탈을 해야 일상의 소중함도 알고
그것을 더 잘 꾸려나갈 수 있다.
인간 세상엔 뭐든 다 상대적이다.
밤이 없으면 낮도 없고, 불행이 없으면 행복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탈이 있어야만 일상의 잔잔함도 존재하는 것이다.
일탈에 잠시 탐닉하고 일상에서 자기를 제대로 실현하자.
지금 일고 있는 일탈, 욕망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걸 참을 필요는 없다.
지금의 마음이 나를 그리로 이끌었다.
이건 현생을 사는 데 꼭 필요하다.
인간은 쓸데없는 짓을 해야 더 창조적일 수 있다.
그러니 그 쓸데없음이 쓸모없는 게 아니다.
아니 쓸데없음이 반드시 인간에겐 필요하다.
그래야만 정체가 아닌 진보(Progress)가 계속 뒤따른다.
욕망, 일탈은 즉 마음이기 때문에 곧 지나간다.
일탈, 욕망은 일시적이고 루틴(Routine)은 상시적이다.
상시적인 것을 위해 잠시 잠깐의 욕망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 욕망을 외면 말고
한껏 빠지라는 것이다.
하고 싶은 걸 하고 그래야만 최소한 후회가 없고
짧은 생이 좀 덜 허무할 것이다.
“인생 뭐 있어?”
이걸 할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그때 가서는 하려고 해도 이미 달아나 자기 곁에 없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자기 전(全) 생애에 걸친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제대로 발현하고
지금 이는 욕구를 맘껏 즐겨라.
운명적인 것을 잊지 않으면서-이건 겸손과 초심에
영향을 준다-자기에게 이는 욕망을 억지로
막지 말고-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그걸 자양분 삼아 자기
생에서 자신만 가지고 있는 것을 맘껏 체현(體現)하면서
진정한 행복을 누려라.
생의 본질인 모순(절제 속의 향유)-운명 안에서
누리는 자신만의 진정한 욕망-을
깨닫고 이생에서,
자신의 고유 자원(Temperament)을 신명 나게 구현하라.
‘아, 이 세 가지를’ 하면
좀 살다 갔노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Bookmania
신의 계시라면서 전쟁으로 사람을 엄청나게 죽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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