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진은 나와 그래도 문체가 맞는 것 같다. 지금 이 소설은 그렇게 인기 있는 것 같지 않지만 나와 좀 문체가 맞아 서점에서 손에 들었다. 무슨 얘길 하는지 들어나 보자고.
빛과 멜로디
D-29
Bookmania모임지기의 말
Bookmania
여류 작가의 글은 끝까지 다 들어봐야 안다. 말을 빙빙 돌려 말한다. 그건 아마도 습관이 되고 여자의 습성이고 남에게도 세련되어 보이게 해 자기 글을 무시하지 말라는 신호 같기도 하다.
Bookmania
인간은 자기를 떠날 수 없다
인간은 자기 앞날에 할 것을 한,
사람만 존경한다고 말한다.
이런 이간의 특성을 깊이 새기고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인간에게 안 좋은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가 그 분야를 모르거나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같다.
인간들은 간사하고 결국 자기중심적이어서
자기의 앞날을 밝히는 사람만 존경해 마지않는다.
자기가 지금 야구 선수면 이승엽만이 그런 것이다.
절대 작가인 김훈이나 한강이 아니다.
Bookmania
소설에는 멀쩡하게 생기고 그런 멀쩡한 삶을 살아온 주인공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게 주로를 이룬다. 주인공은 절대 특이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 아니다. 평범 그 자체다.
Bookmania
이걸 알아야 한다. 일단 인간은 자기 위주다. 의사들이 그러는 것은 나라의 의료 환경이 걱정이 되어 그러는 것보다는 자기 위상이 위태로워 그런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말을 그대로 들으면 그들이 이익만 대변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의사건 뭐건 일단은 자기 밥그릇이 우선인 것이다. 그들이라고 사람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Bookmania
인간이 사는 세상엔 그런 인간의 마음이 작용하는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냥 받아들이는 게 장땡이다.
Bookmania
여자의 내숭
여자는 섹스하고 싶어도 남자 앞에선
직접적으로 말을 안 한다.
이것엔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선 여자가 자가보단 상대 마음,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에 맞게 행동하는
즉 관계 지향적이라는 본능 때문이고 그래서
만일 섹스하고 싶다고 바로 말해버리면 그녀는
바람기에 있고, 쉬운 여자로 새겨질까 봐, 상대에게
그렇게 자기를 생각할까 봐 그게 겁이 나서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신 직접적으로 말로 하지 않고 몸으로 말한다.
말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본능적인 몸짓은
그것을 숨길 수 없으니까 그녀의 행동으로 그녀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파악할 수 할 수 있다는 거다.
만일 여자가 헤프고 아무 남자에게나 들이댄다고 생각하면
일단 남자는 그녀가 질리고 결국 싫어지게 된다.
여자로서의 매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여자는 지조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옛날 생각지만,
내숭을 떨어야 더 매력이라는 게 고리타분하지만
그러는 게 다 통하는 이유가 있다.
일단 여자가 너무 헤프면 그녀에게서 나은 자식이
그녀는 자기 자식임을 분명히 알지만 남자는
그런 여자가 나온 자식이 자기 자식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녀를 소중히 대하지 않고
하찮게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남자가 그런 여자를 싸구려 취급하고 또 여자는
그런 자기를 경계하고 좋아하는 남자에게 가능하면
숨기고 안 그런 척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에,
본능에서 우러나와 그런 것 같다.
여자도 남자의 이런 불안이나 여자에 대한 의심을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자기는 쉬운 여자가 아니고
지조 있는 여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속은
안 그렇지만 헤픈 여자가 아닌 척 내숭을 떠는 것이다.
이런 게 다 본능적으로 그러는 것이다.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는 가능하면 화장을 안 고치고
-대신 거기서(안 보는 데서) 고치려고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예쁘고 매력적인 모습만 보여주려고 한다.
뭔가 안 좋은 모습을, 좋아하는 남자 앞에선
가리려는 심리가 작용하는 것이다.
그게 원래 난 예쁘고 매력 있다고 하는 것만
보여주기 위해 여자의 내숭이 겉으로 나오는 것이다.
Bookmania
인간이 멸종 안 된 건 남자의 공
이런 말을 하면 요즘 젊은 여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들 거지만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지구상에 이렇게 인류가 퍼진 것에선 여자보단
남자의 공이 더 큰 것 같다.
우선 몸의 구조를 보자.
남자는 사랑이 없어도, 별로 상대를 선호하는 편이 아니어도
여자와 섹스를 한다.
아무나 섹스하는 남자도 실은 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어떤 여자와 지금 섹스를 하고 있어도 사랑하는
여자와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모르는 여자에게 자기 정액을 뿌리는 것이다.
이건 남자의 본능이다.
지금은 불법이지만 법이 없던 원시 시대엔 강제로도 했다.
그래 섹스를 한 그 여자를 통해
자기 자식을 세상에 퍼뜨리는 것이다.
강제로든, 서로 눈이 맞아 하든, 하여간 남자는
시도 때도 없이 여자와 할 수 있다.
건강만 허락한다면 하루에 열 번도 할 수 있다.
그게 다 성공하면 열 명의 자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평생에 걸쳐 수만 명의 자식을
생산할 수 있다, 남자는.
그러나 여자는 멈추지 않고 계속 임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여자의 특성상 마음이 동해야 남자와 하는 것도 있지만
그게 아니고 남자처럼 아무 때나 할 수 있다고 해도
여자 몸 구조적으로 그게 가능하지 않다.
우선 여자가 어떤 남자와 하고 싶다고 했을 때,
남자라면 그냥 성기를 세우고 넣으면 된다.
그러나 여자는 하고 싶어도 남자가 호응해 주지 않으면
삽입이 안 된다.
즉 남자는 여자 뜻에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여자는 남자의 욕구, 즉 발기가 안 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평생 낳을 수 있는 자기 자식이 한정되어 있고
때문에, 사람이 모두 여자 같은 구조였다면
인간은 퍼지지 못하고 멸종되었을 수도 있다.
아마도 이런 특성 때문에 남자는 시도 때도 없이
자기 새끼를 만들 수 있게 몸의 구조가 그렇게 만들어졌고
한 여자뿐 아니라 여러 여자와 호감과는 관계없이
할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고
남자가 그러고 싶어 그러는 것보단
그렇게 이미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걸 보면,
남자는 섹스한 후 사랑하는 것이고
여자는 사랑이 있은 후 섹스한다는 말도 다
본능에 기인한 것 같다.
거기에 무슨 의지나 그런 게 작용하는 게 아니고
본능에 따른 행동인 것이다.
성욕에서, 여자가 더 자제할 줄 알고
남자는 참을성이 없는 게 아닌 것이다.
그렇게 하라고 프로그램된 것을 실행하는 것뿐이다.
여자는 배임기와 폐경이 있지만
남자는 그게 없어 나이가 들어도
생산할 수 있는 구조로 탄생한 것 아니겠나.
멸종 없이 남자에게 계속 사람을 만들어내라고.
이건 아마 인류의 멸종의 공포 때문에
남자에게 그런 의무가 주어진 것이리라.
그러니 지구상에 인류가 멸종되지 않고 이렇게나
많이 퍼진 것엔 여자보단 남자의 공이
더 크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Bookmania
이스라엘이 독일에게 당한 것을 그대로 가자지구에 하고 있다. 그러니 인간은 모순 투성이이고 믿을 수 없는 존재이고 자기 위주로 뭐든 생각하고 정당화한다. 이게 인간의 본질이다.
Bookmania
이런 귀중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약자만을 찾아 떠난다. 가자 지구로, 우크라이나로. 그들이 전에 강자였어도 지금은 그들이 약자이면 그들을 찾는다. 그들을 돕기 위해. 이건 자기 만족이라기보단 자기가 약자였을 때를 기억하고 그들을 돕는 것이다.
Bookmania
살아갈 힘, 서로 주고받기
특히 직장 생활을 처음 하거나 소중한 사람과
영영 헤어지거나, 이처럼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고 그때 그가 한 말 중에서
그걸, 내가 다시 살아갈 힘으로 삼는 경우는 흔하다.
힘들 때 힘이 되었던 사람과 말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나도 남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한 걸 꼽자면 뭐가 있을까?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내게 다가와 손을 잡아줘
다시 살아갈 의지와 의미가 생기게 한 것이고
그걸 내게 심어준 사람, 그는 내겐 가장 소중한 사람이고
내가 그래서 살아가지만, 그 사람 때문에 또
나도 혹시 남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그러려고 노력하는 삶 아닐까.
누구 때문에 살고, 그가 한 그것 때문에
나는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거기서 벗어난 것이고
나는 그에게 그런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나도 그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남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그런 삶을 살려고 하는 게 가장 소중한 것 아닐까.
그 사람으로 인해 내가 다시 살아갈 용기가 생기고
남에게도 그걸 주려고 하는 것.
실은 그게 대개 자식인데, 그를 겨냥해 내가 그를 어려움에서
살리는 사람이고자 하나, 실제는 그는 그걸 수동적으로 받은
그 사람(부모)에게서 그런 힘을 얻는 경우보단 다른 사람에게서
그 힘을 얻어 살아갈 수 있는 경우가 더 많고
감히 나도 누굴 겨냥해 그에게 살아갈 힘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 나름대로 열심히 살지만,
그는 나에게서 그걸 받는 경우보단
생각지도 못한 다른 사람에게서 그 힘을 대개는 얻는
경우가 대부분인 게 또 삶의 아이러니 아닐까.
주려는 사람에게선 안 받고, 주려고
생각지도 않은 사람으로부터는 충분히 받을 수 있다.
이건 사람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내게 주는 사람이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일 수도 있고
시대나 장소에 있어 너무나 멀리 떨어진 사람일 수도 있다.
또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에게서도 내가 살아갈 힘을
얻을 수도 있고, 말뿐 아니라 글로도 영화나 그림,
음악으로도 나는 그걸 얻을 수 있다.
내가 그런 것처럼 당연히 남도 그렇다.
또 많은 사람이 따르는 그런 사람이 내게도 같이 힘을
줄 수도 있지만 진짜 과연 내가 그에게서 얻은 힘으로
살아갈 힘을 얻은 것인지-단지 자기와 실제로는 안 맞지만
많은 사람이 따르는 사람이라 내가 착각하는 건 아닌지-
내게 꼭 맞는 그 사람을 찾아내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내가 수렁에 빠졌을 때 진짜로 나를 거기서 건져준 사람을.
진정 내게 힘을 준 사람을.
그는 한낱 거리의 노숙자일 수도 있다.
그가 누구든 그는 내게 그런 힘만 주었다.
이렇게 인간 세상에선 누가 누구에게 힘을 주고받는지
알 수 없게 얽히고설키며 삶을 꾸려나가는 것 아니겠나.
그러면서도 내가 나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것도 가능하리라.
자기가 진정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스스로 강한
존재 이유를 찾고 그것 자체를 하는 것에서
나를 다시 살아가게 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가 얻은 것을 남에게 우연히,
그가 어려움에 처한 것 같을 때, 위로 한마디가
그에게 살아갈 힘이 될 수도 있고 내가 남긴 그 무엇으로
모르는 남이 우연찮게 그것으로 살아갈 힘을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게 누구에게 언제 어떤 역할을 할지 모른다.
이건 일부러 만들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자신을 살리고 남을 동시에
살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건 모른다.
그러니 자신이 지금 하는 일에 충실할 수밖에.
Bookmania
실은 평번하게 사는 게 유일한 목적인 인간들도 많다. 이런 건 여자에게 더 많다. 안정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그게 뭐나 나빠? 하면 정말 할말이 나는 없다.
Bookmania
원래 여자라 그런가 하여간 남이 잘 꾸며놓고 시원하고 환하고 깨끗하고 뭔가 편리한 것만 골라서 그런 소문을 어디서 들었는지 그런 곳은 항상 만원이다. 그걸 만들려고는 안 한다. 남이 힘들여 해놓은 것만 골라 아주 잘 써먹는다.
Bookmania
이 글은 여러 사람의 시각으로 각각 이야기를 하고 있어 한 사람의 일방적 주장이 아닌 게 되어 좀 색다르다.
Bookmania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국민 중에 제대로,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그들은 신이 뭐라고 그렇게 살아 있는 동안 사라람을 죽이는 전쟁을 끝없이 하는 걸까? 그게 뭐라고? 하여간 인간은 미친 짓거리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존재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이 지구상에서 별로 필요없는 존재들이다.
Bookmania
자연을 알고 자신을 알자
인생은 감정만으로 대응할 수 없다.
그 흐름이 인간에게 이는 감정대로 안 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고유하게 가진 감정을 갖고 가면서도
세상은 그대로 안 되는 것을 동시에 알아야 한다.
인간은 할 수 없어 의지와 목적을 갖고 살아야 하나.
이게 인간만이 가진 특징이기 때문이다.
뭐든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십분 활용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내가 살면서 배운 통찰이다.
Bookmania
자연에 따르는 게 가장 좋은 것 같다
마음과 몸은 둘이 아니다.
하나다.
마음이 울적하면 몸도 기운이 빠진다.
몸이 쇠약해지면 속도 좁아진다.
그래 늙으면 잘 토라지는 좀생이가 되는 것이다.
젊은 날은 기운이 넘쳐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을 때가 종종 있다.
그냥 이유 없이 기분이 좋다.
홍제동 호프집에 가서 생맥주 500CC를
노가리와 함께 들이켜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후엔 정말로 기분이 좋다.
발걸음도 가볍다.
전엔 술을 잔뜩 마시고 푹 자고 일어나면
그다음엔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어느 때는 공부하다가 너무나 기분이 좋고
흥분된 상태여서 야구 하는 종합운동장으로 뛰어나가
그냥 무료하게 앉아 있는 아무나 붙잡고
“술 한잔 하자.”며 그의 얘기를 듣고 그러다가 너무나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그와 결국 싸우고 헤어지고
과연 그와 처음에 –별 의미 없는 소리지만-나눈 얘기만
기억나는 것과 마지막에 필름이 끊겨 과연
우리가 어떻게 헤어진 지도 모르게 술을 마시던
날도 하루 종일 자고 일어나면 단지 젊으니까
다음날은 지금까진 실컷 술만 마셨으니까 마음을 새롭게
다잡고 공부에 매질할 때가 바로 젊을 때였다.
푹 잔만큼 기분이 좋았다.
지금은 몸이 쇠약해져 술을 안 마셔도 어느 순간 잠을
푹 자고 일어나도 기분이 예전처럼 좋지 않다.
그런 날은 앞으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기분이 좋은 날이 별로 없고 기운은 없고
그런 게 다 이제 갈 때가 되었다고 자연이
나에게 자극을 주며 신호를 보내는 것이리라.
누구나가 다 이걸 어기면 안 된다.
몸에 가해지는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인간 사회라고 생각한다.
생명을 자연스럽지 않게 억지로 연장하는 건
좋은 사회가 아니라고 본다.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Bookmania
살아갈 힘, 서로 주고받기
특히 직장 생활을 처음 하거나 소중한 사람과
영영 헤어지거나, 이처럼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고 그때 그가 한 말 중에서
그걸, 내가 다시 살아갈 힘으로 삼는 경우는 흔하다.
힘들 때 힘이 되었던 사람과 말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나도 남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한 걸 꼽자면 뭐가 있을까?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내게 다가와 손을 잡아줘
다시 살아갈 의지와 의미가 생기게 한 것이고
그걸 내게 심어준 사람, 그는 내겐 가장 소중한 사람이고
내가 그래서 살아가지만, 그 사람 때문에 또
나도 혹시 남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그러려고 노력하는 삶 아닐까.
누구 때문에 살고, 그가 한 그것 때문에
나는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거기서 벗어난 것이고
나는 그에게 그런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나도 그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남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그런 삶을 살려고 하는 게 가장 소중한 것 아닐까.
그 사람으로 인해 내가 다시 살아갈 용기가 생기고
남에게도 그걸 주려고 하는 것.
실은 그게 대개 자식인데, 그를 겨냥해 내가 그를 어려움에서
살리는 사람이고자 하나, 실제는 그는 그걸 수동적으로 받은
그 사람(부모)에게서 그런 힘을 얻는 경우보단 다른 사람에게서
그 힘을 얻어 살아갈 수 있는 경우가 더 많고
감히 나도 누굴 겨냥해 그에게 살아갈 힘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 나름대로 열심히 살지만,
그는 나에게서 그걸 받는 경우보단
생각지도 못한 다른 사람에게서 그 힘을 대개는 얻는
경우가 대부분인 게 또 삶의 아이러니 아닐까.
주려는 사람에게선 안 받고, 주려고
생각지도 않은 사람으로부터는 충분히 받을 수 있다.
이건 사람이 다 다르기 때문이리라.
내게 주는 사람이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일 수도 있고
시대나 장소에 있어 너무나 멀리 떨어진 사람일 수도 있다.
또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에게서도 내가 살아갈 힘을
얻을 수도 있고, 말뿐 아니라 글로도 영화나 그림,
음악으로도 나는 그걸 얻을 수 있다.
내가 그런 것처럼 당연히 남도 그럴 수 있다.
또 많은 사람이 따르는 그런 사람이 내게도 같이 힘을
줄 수도 있지만 진짜 과연 내가 그에게서 얻은 힘으로
살아갈 힘을 얻은 것인지-단지 자기와 실제로는 안 맞지만
많은 사람이 따르는 사람이라 내가 착각하는 건 아닌지-
내게 꼭 맞는 그 사람을 찾아내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내가 수렁에 빠졌을 때 진짜로 나를 거기서 건져준 사람을.
진정 내게 힘을 준 사람을.
그는 사람들이 다가가기 꺼리는 거리의 노숙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내게 그런 힘을 주었다.
이렇게 인간 세상은 누가 누구에게 힘을 주고받는지
알 수 없게 얽히고설켜 만들어진 것 같다.
그러면서도 내가 나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것도 가능하리라.
자기가 진정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스스로 강한
존재 이유를 찾고 그것 자체를 하는 것에서
나를 다시 살아가게 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가 얻은 것을 남에게 우연히,
그가 어려움에 처한 것 같을 때, 위로 한마디가
그에게 살아갈 힘이 될 수도 있고 내가 남긴 그 무엇으로
모르는 남이 우연찮게 그것으로 살아갈 힘을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 언제 어떤 역할을 할지 모른다.
이건 일부러 만들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자신을 살리고 남을 동시에
살릴 수도 있는 것이다.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자신이 지금 하는 일에 충실할 수밖에.
Bookmania
이제 욜로는 가고 요노가 온다
카푸어,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은 없고
차만 삐까번쩍하면 뭐하냐, 실제는 편의점
4,300원짜리 도시락으로 겨우 때우는데.
고물가와 고금로리 살기 힘들면 일단은 먹고사는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가성비 높은
실속 제품이 많이 나가게 되어 있다.
인간은 일단 가장 중요한 생존과 안전이 위협받으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뭔가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의 일환으로 하나면 충분한 선택과 집중,
소유(자랑)보단 가치(실속)를 중시하고,
삶의 본질-진짜로 내게 도움이 되는 것-에 집중하며
환경 보호와 자원 절약에도 기여한다는 명분과 대세가
요노(You Only Need One)족이 탄생한 배경일 것이다.
인간은 의미 두는 걸-그렇게 안 한다 해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욜로(You Only Live Once, 투데이족)족으로 지금만
잘 살면 그만이고
마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도 그 현재를
먹고 마시는 것으로만 허비하면 뭔가 인간의
생김 구조상 허무가 뒤따르게 되어 있다.
젊은 사람들이라면 후회라도 하게 되어 있다.
그렇게 살면 필연적으로 곧 현재 생활이 괴롭기 때문이다.
오늘은 천국이지만 바로 쫓아오는
내일은 지옥의 생활이기 때문이다.
지금 펑펑 쓰면 곧 자기에게 남는 게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인간의 속성인 허무가 찾아오게 된다.
지금 절약하고 그래 미래에도 남고 뭔가 손에 쥐어지는
것이 있는, 뭔가 의미 있는 게 중요함을 깨닫는다.
욜로만 고수하면 곧,
지금의 어려운 현실에서 곧 방문하는 생활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의미 없음을 더 실감 하게 되는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는 허무가 찾아온다.
그걸 겪었으면,
“계속 이러면 의미 없음, 허무가 찾아오겠지.”
“절약 기반의 선택과 집중을 하자.”
해서 요노가 등장한 것이다.
인간은 구조상 그게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뭔가 남는, 의미 있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다.
살면서 자기 의미 찾기를 끝없이 한다.
이게 망가지면 다른 것에서 찾든지 망가진 것을
안 망가졌다고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거기서
어떤 의미를 멈춤 없이 찾으려 한다.
그래 인간이 소홀히 하거나 내팽개친다는 건
그것에서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이다.
인간에게 의미 없음으로 판명이 났다는 말은
그건 곧 버리질 운명에 처해진다는 것이다.
쉬운 예로 남녀 갑을 관계에서,
을 쪽은 잘해보려고 상대에게
의미(목적) 있는 연락이나 문자를 정성으로 보낸다.
그러나 갑 쪽은 그냥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심지어 귀찮아하며, 혹시 별로 호감도 없는 상대가
내 어떤 반응을 호의로 받아 들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함께 연락도 안 하고 문자를 씹거나 하는 등
어떤 반응도 하지 않는다.
여지나 틈을 보이지 않으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관계를 그만 끊고 싶은 것이다.
손절하려는 것이다.
자기에게 의미가 없으니까 버리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에게 의미가 있어야
뭔가 하려고 한다.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 때 행동이 시들해진다.
모든 행동의 뿌리와 연원(淵源)은 인간에겐 의미다.
관계에서 내가 을 쪽임에도 버려지고 싶지 않으면,
상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면 된다.
자기 기질 상 욜로를 택하든 요노를 택하든
그건 자유지만, 인간에게서
의미 찾기는 그 누구에게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것에 상관없이 이미, 그 이전에 인간이기 때문에
의미 찾기를, 떼어서 인간 존재를 생각할 수 없다.
뭔가 살아보려고 하는 인간이라면,
그래 그가 그것에서 더이상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면 언젠가는 그건 그의 곁에 있을 수 없게 된다.
그게 없이,
인간이 동물 마냥 그냥 지금만 생각하고 살았다면
인간에게 진보는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대로 다른 동물처럼 계속 본능에만 충실해 살아
현 상태만 유지하려고 했다면
이미 다른 생물에게 지배받으면 사육당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인간의 의미 찾기 때문에 인간은 지금
이 상태가 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진보한 것은 지금만 먹고 마시면 그만이라는
이런 본능에 기초한 것이 아니고 의미를 둬서
미래를 생각하고 준비하는 그런 인간의 본성으로 인간이 진화해
지구상에서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의미 찾기는 인간의 본성을 넘어선
본능에 가까운 특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걸 무시하고 지금만 즐기면 된다는 카푸어나 하우스푸어의
생활을 접고 이젠 뭔가 미래도 생각하는 요노족이
인간 곁에 찾아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요노족이 지금의 현실이 어려우니까 생존을 위해 찾아온 것도
있지만, 인간의 본성인 의미 찾기 때문에
결국은 찾아왔다고 보는 게 더 맞다.
언젠가는 찾아왔을 거지만 현실의 극복 과정에서
좀 일찍 찾아온 것이다.
참고로 인간의 의미 찾기, 허무를 견디지 못하는 특성
때문에 물질적인 것 외에 생각해 낸 것이
인간에게만 유일하게 존재하는 정신적인 가치인데
그 일환으로 종교가 탄생한 것이고 같은 맥락으로
정신적인 것의 결과물로 예술이 인간과
떨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같이 해온 것이다.
정신과 의미를 떼어놓고는
사실 인간을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정신적인 가치들이 인간 역사와 함께 해왔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미 찾기, 만물에 대한 인간의 독특한 해석인
예술과 종교는 그래서 인간 역사와
맥을 같이 해왔다고 볼 수 있다.
정신적인 인간에게 의미는 중요하다.
인간에게 정신적인 것이 제거되지 않는 한
의미, 가치, 예술, 종교는 인간 존재와 함께할 것이다.
작성
게시판
글타래
화제 모음
지정된 화제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