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소설_가을]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함께 읽기

D-29
나는 너에게 알맞은 불쏘시개를 주었고,이제 너는 너 혼자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그리고 그 불을 멈추는 것은 더 이상 내 소관이 아니었다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P221,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두 차례의 이혼을 겪고 아버지가 다른 세 아이를 양육하면서 내가 배운 건 건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좋은 관계의 열쇠라는 거야. 남자하고든 여자하고든, 심지어 자식하고도. 기본적으로 누구와도 그래.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367쪽,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어제 드디어 마지막을 읽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기뻐서, 혼자 알기에는 너무 설레서 기사를 단톡방에 퍼올렸습니다. 학창 시절 빌보드 차트는 딴 나라 이야긴 줄 알았는데 BTS가 거기서 1등에 오르는 걸 보고는 그러나보다 했습니다.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고, 넷플릭스에서 1위하는 드라마가 나와도 그런가보다 조금 기쁘다 말았습니다. 그런데 노벨상이라뇨? 특히나 우리나라 경기도 교육청에서는 한때 금서로 지정하기도 한 책의 가치를 세상이 알아줬다는 게 정말 기쁩니다. (정말 후진 정치죠? )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5.18과 4.3의 아픈 역사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작품으로 전 세계로 뻗어나갈 걸 생각하니 가슴이 떨립니다. 아울러 지금 제가 읽은 이 작품 역시 영어로 쓰여진 글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는 게 신기합니다. 일제강점기, 위안부, 한국전쟁, 멍키하우스, 스파이 등으로 우리나라 근현대를 훑는 내용인데 기꺼이 서양의 독자들이 주목해 줬다는 것도요. 한 단계 국격이 상승한 느낌은 저만 가지는 건 아니겠지요? 일곱 가지 인생으로 보았을 때, 여덟 번째 인생에서 극중 화자인 나와의 대화에서 '사낙'이 언급되었을 때 소설의 마지막을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묵 할머니다운 방법으로 마지막을 장식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용을 떠나서 변방의 지극히 한국적인 내용과 문체가,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듯하여 작가 이미리내와 한강 작가를 응원합니다. 오늘은 기쁜 날입니다. 또 그믐에 눈팅만 하다가 처음으로 이런 모임에 참석하여 따끈따끈한 신간을 읽을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그러게요 정말. BTS 기생충 오징어게임... 과는 뭔가 느낌이 좀 다른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아픈 역사들을 다뤄온 한강 작가의 선정이라는 점이 좀 더 각별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마침 우리가 읽고 있는 소설 역시 말씀하신 것처럼 영어로 먼저 쓰여지고 영어권에서 주목 받았다는 사실이, 불과 2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묵미란 어르신께서 이새리 부고작가에게 건네는 어투가 흥미로왔어요. 화자가 청자를 자신보다 낮게 보되 무례할 정도는 아닌 존중의 하게체. 이 부분은 번역자 정해영 선생님의 솜씨겠지요? 그 하게체가 썩 매력적이었어요. 묵미란 어르신의 단단한 성정과 꼿꼿한 태도 그리고 청자를 존중하는 마음이 한 번에 느껴졌어요. 예전에 지도 선생님께서 저에게 자네라고 하시며 하게체를 쓰셨는데 존중받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듣는 존재. 이새리. 위안소에서 용말의 이야기를 탐닉하듯 들었던 묵미란, 남편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새기듯 듣는 가짜 용말, 김일성 대학 기숙사에서 남몰래 남한의 것들을 보고 있는 미희, 성미의 이야기를 듣는 루처럼 소설 속 청자들은 모두 성실합니다. 국정원의 요원까지도 성실하게 하나하나 새겨 들어요.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지 묵미란 어르신이 다른 이름과 다른 운명으로 어떻게 살았는지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들어내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소설에서 배웁니다. 온 마음으로 타인의 삶을 들었던 사람은 모든 것에서 확연히 달라지지요. 들은 만큼 이해하게 되고 들은 만큼 깊어지니까요. 더 잘 듣고 오래오래 곱씹어 보려고 합니다.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심도이니까요.
맞아요 하게체, 영어와는 다른 한국어 문체의 느낌을 번역가 선생님께서 잘 살려주신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만약 작가님이 소설을 한국어로 썼다면 어떤 선택을 하셨을지 궁금해지기도 하고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이제 2주간의 함께 읽기가 끝나고 1주일 동안의 토론 시간이 시작되었는데요, 소전서림에서는 다섯 개의 ‘고전 지수’ 항목을 통해 우리가 읽은 소설이 새로운 고전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고 해요. 이런 항목들인데요. 1) 주제의 보편성 2) 구성의 탁월함 3) 문체의 예술성 4) 인물과 사건의 새로움 5) 해석의 다양성 내일부터 각각 하루에 하나의 항목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아요! 물론 그밖에 책을 다 읽은 감상과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여타 떠오르는 생각들 나눠주셔도 좋고요! 일단 오늘은 책을 늦게 받으신 분들은 더 읽어주시고, 이미 책을 다 읽은 분들은 앞으로 돌아가서 프롤로그와 여력이 있으시다면 첫 번째 장까지 다시 읽어보시며 감상을 정리하는 시간을 보내도록 해요. 이건 저만의 작은 팁인데, 한 책을 끝까지 완독한 다음 곧바로 처음으로 돌아가서 앞부분을 다시 읽으면 전에는 몰랐던 부분이 보이기도 하고 새로운 것들이 다시 보이기도 하거든요. 물론 그러면서 새롭게 밑줄 친 문장이나 생각들 자유롭게 올려주셔도 좋습니다!
확실히 이 책은 2번 읽어야 하는 책 같아요. 한 번읽고 재독하면 숨어 있던 발견하지 못한 사건의 내용이 보일 거 같아요. 마치 이언매큐언의 속죄처럼요..
그는 속이는 것도 사랑을 나누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가 있어야 이루어지는 행동임을 깨닫는다. 어떤 농락도 농락당해줄 사람이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얼마나 믿고 싶었는가. 얼마나 기꺼이, 얼마나 절실하게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p. 176,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결국 다른 정체성을 갖는다는 건 다른 언어를 말하는 것과 같아요. 외국어를 배울 때 그저 단어만을 습득하는 게 아닙니다. 습득 과정에서 분위기외 버릇, 그리고 무심코 말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화술도 흡수하죠. 내가 정말로 어떤 언어를 장악하게 되었다고 느끼기 시작하면, 마법처럼 그 언어 또한 나를 장악합니다. 단순히 말하는 방식을 바꾸기만 해도 낯선 사람들이 될 수 있어요. 새로운 분위기를 입게 되죠.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의 역사 속으로 슬그머니 들어갈 수 있어요.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p. 222,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그럼 먼저 ‘주제의 보편성’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이 소설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다양한 이야기가 얽혀 있는 만큼 하나로 딱 잘라 말하기는 힘들 것 같아요. 각각의 인생 이야기들이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며 저마다 다른 주제를 가지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해요. 하지만 그럼에도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말한다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생각을 기다립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가자”가 아닐까요? 타인이 자신을 휘두르게 두지 말고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자. 물론 도중에 우연한 일도 생기고 미처 대비하지 못한 위협도 있겠지만 원하는 바를 실현해 보자는 게 주제일 거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자신의 말로 해보자, 써보자. 말하지 않은 이야기는 땅 속에 묻힌 돌멩이 같은 것. 뭐라도 차근차근 이상하고 부족하더라도 또박또박 말해 보자. 저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묵미란 어르신의 모든 인생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울컥하기도 했어요. 온힘을 다해 살아낸 사람이 보였기 때문에. 그리고 부고작가인 이새리 선생의 성실하고 진지한 태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야기꾼과 글쟁이의 다른 듯 닮은 모습. 열심히 또 살아가자, 그런 다짐을 하게 됩니다.
온갖 풍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것, 그리고 그런 인생을 버티게 해주는 이야기의 힘. 이렇게 쓰고 보니 과연 미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마린님과 거의 똑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라가 소설의 주제인거 같습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기'가 이 소설의 주제일 수 있겠다는 마린님의 말씀이 인상적이네요. 저는 그 내 삶을 '스스로 개척하기'에서 이야기가 갖는 힘, 더 정확히는 '이야기꾼'이 되는 일의 힘을 말하고 있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묵미란의 인생 이야기가 과연 진실인지, 아니면 뇌종양 환자가 환상에 의해 꾸며낸 이야기인지... 전적인 거짓 혹은 전적인 진실이 불가능해지는 자리에서 '이야기'가 형성된다고 한다면 묵미란의 서사에서 진실은 어디까지이고 또 거짓은 어디까지일지, 내 삶을 서사화하는 데 거짓이 필요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지... 관련해 정말 많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소설은 그 이야기하기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구원한 누군가의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고요. 호디에님께서 "주인공의 죽음이 이렇게 안타깝지 않기는 드물지 않을까 싶"다고 말씀해주셨는데, 그의 죽음이 말씀대로 안타깝거나 비극적으로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도 이야기꾼의 자리와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여러 분들께서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축하해주셨는데, 매우 특수한 역사적 트라우마를 대면하는 한강 작가의, 나아가 그의 소설이 지닌 태도가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그러한 '이야기의 힘'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기... 좋네요. 저도 제 인생을 구원할 이야기를 찾아봐야겠어요... 하루빨리...
저는 언어인거 같아요. 제목의 여덟가지 인생이 챕터정도 라고 생각했는데. 저는 여덟단어로 수렴되는 인생의 이야기의 서사라는 점에서 삶이란 단어의 씨줄과 날줄이 서로 엮이면서 만들어 가는 거 아닌가...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인생이라는 시간을 이해 가능한 언어로 바꾸는 행위가 ‘이야기하기’인 것 같아요.
저는 <'나'로 살아가기>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사실 소설에서 묵 할머니의 진짜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딸조차 묵 할머니의 본명을 모르는데요, 타인의 이름을 빌어 살면서 닥친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으나 매순간을 자신의 삶으로 만들어갔다고 생각합니다.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았던 마지막 순간까지도요.
우리는 흔히 ’나‘를 사회적인 기준이나 타인이 나를 판단하는 시선 속에서 생각하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묵 할머니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심지어 다른 이의 이름을 빌려 살아가면서도 끝끝내 ’나‘를 잃지 않고 ’나‘로 살아왔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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