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가은님의 대화: '첫 번째 인생' 파트에서는 '외국어'에 대한 지식, 조금 더 근본적으로는 언어와 힘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이때의 '힘'은 양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은데요...
사실 저는 처음 이 파트를 읽을 때, 어머니에 관한 묘사에 비해 아버지에 대한 묘사가 조금 투박하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전형적인 악인으로서 가부장을 묘사하는 방식 같았달까요. 이후 화자의 선택(살인)을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 같은 것으로 다가오기도 했고요. 그런데 다시 읽으며 생각해보니,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놓여 있는 '외국어' 혹은 '고급 어휘'의 문제가 허구리 거주민들에게 '외국어'가 갖는, 나아가 한국인들에게 '외국어'가 갖는 보다 복잡하고 모순적인 의미와 연결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아버지는 "교육의 중요성을 믿지 않는 문맹의 어부"로서, 애초에 언어와 언어를 통한 앎을 획득해보지 못한 인물입니다. 그런 그에게 있어 힘이란 곧 약자에게 즉각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물리적, 신체적인 폭력 행위와 같은 것이고요. 한편 어머니는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서, "똑똑하고 아름답고 교양 있고 자애로"운 사람인데 그런 그녀에게는 풍부한 어휘 뿐만 아니라 "맛과 향을 구별하는 재주"가, 나아가 언어를 통해 세계가 확장될 수 있다는 믿음이, 말하자면 그런 특수한 종류의 앎이 있어요. 언제나 아버지에게 폭력의 대상이 되는 어머니는 신체적으로는 절대적 약자이지만 지적으로는 아버지에 비해 우월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모르는 어려운 말을 할 때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향해 느끼는 공포는 권력 관계의 역전에 대한 인지와 두려움으로 보여요.
이는 '두번 째 인생'에서 일본 군인들이 절대로 입을 다물지 않는 용말의 앞니 두 개를 부러뜨리는 이유와도 연결되는 것 같은데요. 이때 언어는 기존의 권력 관계를 전복시키는 힘이기 때문에 약자들에겐 무기이자, '죄'가 되는 것이겠고요.
그런데 이 '죄'가 허구리 사람들이라는 (나아가 한국인이라는) 약자 공동체에게 '외국어'를 아는 일과 연결될 때 그것은 민족에 대한 일종의 배신이고, "영혼을 파는 것"이며, 권력에 영합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세 번째 인생' 파트에서 화자는 이렇게 말하는데요. "나는 누구를 섬길 것이냐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따뜻한 식사를 제공하고 나를 때리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자건 공산주의자건 상관없었다. 내게는 무엇보다 생존이 중요했다." 그러니까 기울어진 힘의 관계에서 누군가에게 언어는 그 자체로 생존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이죠.
'나'에게 미군 '하우스'에서의 생활은 영어를 매개로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었고, 영어를 통해 '나'는 '생존'합니다. 영어는 '나'가 "작은 이빨로 서서히 네 귀퉁이를 갉아 먹는 몹쓸 벌레"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 말하자면 공모자이자 전복자로서의 '생존'을 행하는 데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되는데요. '나'는 하우스의 여자들을 착취하는 데 공모하고, 그 공모를 통해 하우스의 벽을 썩어 문드러지게 만드니까요. (말하고 보니 언어가 정말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진 소설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한국의 근현대사가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인 이유도 있겠고요. 갑자기 전혀 다른 내용이지만 <꺼삐딴 리> 생각도 나는...)
오..그렇네요..
신기하게도 한국사람이 영어로 쓰고 다시 한국어로 번역 된 글을 우리들이 읽고 있는데..
이 책 내내 언어가 숨어 있었네요.
언어의 힘이 상당히 무섭습니다.
결국 어쨋거나 강요당한 일본어도 생계를 위해 우월한 수단으로 쓰이게 되었을 때 그 느낌은 어땠을까 싶어요.
자존감을 지키게 위해 위안부 시절에도 쓰고 싶지 않았던 일본어를 뭔가 고가품을 팔 때 상대를 맞춰주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니 말이예요.
어제 한강 작가님이 노벨문학상 타시고 우리도 이제 노벨문학상을 원어로 읽는 국민과 국가가 되었다라는 댓글을 보고.. 언어라는게 이렇게 중요하구나..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