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의 서재로 📙 읽기] 11. 아우스터리츠

D-29
더 이상 대조도 없으며, 차이도 없고, 오로지 빛이 관통하는 유동적인 변화 과정, 모든 찰나적인 현상들이 다시 한 번 나타나는 윤곽의 흐려짐, 그리고 기이하게도 이 모든 현상들의 순간성이 그 당시의 내게 영원이란 감정을 불러일으키던 것을 나는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지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불행한 삶을 끝내는 것에서마저 실패하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 있을지,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아우스터리츠가 피츠패트릭 가, 안드로메다 롯지(이곳에 대한 묘사도 아름답지만 이 이름 너무 이쁘지 않나요? 마치 다윈의 갈라파고스 같은 정말 이런 곳이 있나?하고 검색해봤어요. 안타깝게도 이건 허구였던 것 같습니다.)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정말 낮에도 꿈을 꾸는 것 같은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데요. 마치 알폰소 삼촌의 수채화같아요. 이런 지상 낙원도 결국 찰나의 순간처럼 지나가고 자신이 제작한 기요틴을 이용해 자살한 목수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아우스터리츠가 내뱉은 말부터 분위기가 극적으로 변하는데요.. 특히 시간의 인위성에 대해 반발하는 듯 장황한 설명에 빠져드는 그의 말이 예전에 안트베르펜 정거장에서 그가 상징적 이미지들 가운데 최고의 위치에 있는 시계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게 생각나네요. "이 시계가 차지하는 중심부에 의해 모든 여행객들의 움직임이 감시당하고, 거꾸로 여행자들은 모두 시계를 올려다보며 그것에 자신의 행동 방식을 맞추도록 강요받지요." / "시간에 의해 규정된 일정을 지키는 동안 우리는 서로를 분리시키는 거대한 공간들을 서둘러 지나갔어요. 물론 여행에서 경험하는 것처럼, 시간과 공간의 관계, 즉 뭔가 환상주의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은 오늘날까지 다른 곳에서 돌아올 때마다 우리가 정말 떠나 있었는지를 확실하게 알지 못하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시간의 인위적이고 강제적인 성질 외에도 인간을 서로 분리시키는 공간과 시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그는 집착하고 항의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시간의 흐름과 역사의 허무함을 느낄 수 있는 폐허와 무쓸모의 건축물에 집착했을까요? 특히 이어 말하는 "시간 밖에 존재한다는 것", 즉 단절되고 고립된 사람들의 불행에 대한 그의 열변은 바로 그 자신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리네요.
시간 밖에 존재한다는 것, 다시 말해 얼마 전까지 자기 나라에서 남겨지고 잊혀진 지역이나 발견되지 않은 해외의 대륙에 적용된 것이 예나 지금이나 런던 같은 시간의 수도에서조차 적용되는 것이지요. 죽은 사람들이나 죽어 가는 사람들, 자기 집이나 병원에 누워 있는 많은 환자들은 그러니까 시간 밖에 있는 것이고, 단지 그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를 모든 과거와 모든 미래로부터 단절시키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불행으로도 충분하지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전 자기 정체나 뿌리에 대해서도 모르고 역사에서 배제된 듯한 아우스터리츠가 이 시간의 수도 런던 (런던 하면 빅벤 시계가 생각나는 것처럼)에서 절망감을 느낀 것처럼 애시먼이 아이버 그로브에 돌아와서 시간이 비껴간 듯 모든 게 그대로 있는 그 방에서 느꼈던 힐러리의 혼란감, 그리고 애시먼이 시계탑을 공기총으로 쏘게 된 분노 등이 겹쳐 보였어요.
시계가 내게는 항상 우스꽝스러운 것처럼, 근본적으로 뭔가 기만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마도 내가 스스로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내면의 충동에서 시간의 권위에 항상 저항하고, 오늘날 생각하는 것처럼 시간이 흐르지 않고, 흘러가지 않아서 내가 그 뒤로 돌아갈 수 있다면, 거기서 모든 것이 과거처럼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좀 더 정확히 말해 모든 시간의 순간들이 동시에 나란히 존재하거나 혹은 역사가 이야기하는 것 중 그 어느 것도 옳지 않았으면, 일어난 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다른 순간에 비로소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른바 시대적 사건에서 나를 배제시킨 때문일 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되는 비참함과 결코 끝나지 않은 고통의 절망적인 미래를 열어 주기 때문이에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우리가 뒤로 한 세월이 여전히 미래에 놓여 있는 것처럼 거역할 수 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이곳에서는 정지한 것 같았고, (...) 힐러리는 시간과 날의 흐름으로부터, 그리고 세대가 바뀌는 것으로부터 그렇게 오래 차단된 공간 속에서 역사가에게까지 엄습해 온 기이한 감정의 혼란에 대해 언급했지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 회사가 제작한 차량들로 된 장난감 기차와 홍수로부터 구조된 동물들이 쌍쌍이 얌전하게 내다보는 방주는 보는 것만으로도 자기 앞에 시간의 심연이 열려 있는 듯, (...) 똑같은 분노가 다시 일어나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깨닫기도 전에, 뒤뜰로 나가 공기총으로 창고의 작은 시계탑을 여러 차례 맞혔고, 그 시계의 숫자판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흔적을 볼 수 있다고 말했어요. (...) 내가 애시먼과 힐러리, 아이버 그로브와 안드로메다 별장에 대해 생각한 모든 것은 내 속에서 분리된다는 느낌과 바닥 없는 심연의 느낌을 불러일으켰어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여기서 나온 기차와 노아의 홍수의 방주는 여러번 소설에서 나오는 것 같은데요. 이 둘이 처음 만난 기차역도 그렇고 기차역은 도착 및 출발 시간이 규정된 시간에 묶여 있고 공간과 공간 사이를 오가는 장소죠. 그리고 이전에도 그레이트 이스턴 호텔에서 3층으로 된 방주와 부리에 푸른 가지를 문 비둘기가 막 그곳으로 돌아오는 모습의 상징물을 페레이라가 보여주던 모습이 비둘기가 날개를 다쳐도 결국 돌아오는 homing instinct를 연구하고 싶었던 제럴드에서도 나오는데 이것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레인딘 마을처럼 홍수 속에 영원히 가라앉았는지 여전히 남아 있는지도 불확실하고 막막한 그의 고향이 어딘지 몰라도 언젠가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방주와 비둘기로 표현한 것 같아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생각에 점점 더 많이 사로잡히고, 어쩌면 이 로잔의 작은 장례 행렬처럼 어떤 것이 기억에서 떠오를 때, 몇 번의 붓질로 금방 다시 사라지는 환상들을 재빨리 붙잡아 두려는 시도였지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자신이 극복해야 할 분명히 엄청난 거리에 대한 예감으로 두려워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그처럼 위험한 허공을 항해하도록 보내진 이 새들이 어떻게 자신의 근원지를 찾는지는 오늘날까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그 당시 내가 아우스터리츠에게는 시작도 끝도 없는 순간이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 그에게는 자신의 전 생애가 아무런 지속도 없는 하나의 맹목적인 순간처럼 보인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좀 더 침착하게 기다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한 발을 다른 발 앞으로 어떻게 옮길지 알지 못하는 공중 줄타기 곡예사처럼 나는 내 밑에서 플랫폼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고, 시야의 가장자리에서 훨씬 벗어나 번쩍거리는 균형 막대의 끝이 더 이상 이전처럼 나의 등불이 되지 못한 채, 나를 밑으로 떨어지게 하는 불길한 유혹이라는 사실을 경악하며 깨닫게 되었지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극단적인 정중함만이 최종적으로 나를 사람들과 묶어 놓았는데, 그것은 오늘날 생각해 보면 그때그때 몇 안 되는 상대방에게 적용되어서, 그들은 항상 피할 수 없는 절망감의 바닥에 서 있다는 생각으로 나 자신을 닫아 버리는 것을 허락해주었지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만약 그 당시에 누군가가 나를 처형장으로 데려가려 했다면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마치 카스피 해를 지나는 증기선에서 몹시 심하게 멀미를 앓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갑판 밖으로 던져 버리겠다고 했을 때 아무런 저항도 보이지 못하는 것처럼, 눈도 뜨지 않은 채 그 모든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었을 거예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우리는 확실치 않은 내적인 움직임에 따라 생애의 거의 모든 결정적인 걸음을 내딛게 되지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이 감옥의 환상이자 해방의 환상 속에서 내가 이 폐허 가운데 있는지 아니면 막 생겨나려는 미완성 건물 속에 있는지 하는 질문이 나를 괴롭혔어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나는 단지 벤치에 앉아 있는 소년을 보았고, 뻣뻣하게 마비된 채 내버려진 상태가 과거의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내 속에 가져온 파괴를, 그리고 한 번도 진짜로 살지 않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제 처음으로 태어난 것 같은 생각 속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죽기 전 날 같은 엄청난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결국 나는 모국어가 사라지는 것과 주의를 기울이면 매번 놀라서 중단되고 침묵하는, 한동안 내 안에 갇힌 그 뭔가가 긁거나 두드리는 소리가 한 달 한 달 점차 잠잠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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