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의 서재로 📙 읽기] 11. 아우스터리츠

D-29
이런 웅장하고 멋진 건물들도 실은 화려한 외양이나 인간이 의도한 바와 다르게 오히려 더 인간의 불안한 내면을 드러내고 최선의 계획이 결국엔 쓸모없어지거나 폐허가 될 거라는 허무함을 아우스터리츠는 대화에서 계속 내비칩니다. 그만큼 그가 이런 것에 집착하는 계기가 될 만한 그의 과거가 있겠죠? 아마 2차 세계대전의 Kindertransport 계획에 의해 나치 독일에서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 등으로 이동된 아이들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합니다. 이런 그의 이야기는 그 자신도 스스로 무의식 속에 억누르고 있었던 것 같네요. 반면 아버지가 나치 독일 군이었던 화자는 장 아메리, 클로드 시몽, 가스토네 노벨리처럼 나치에 의해 고문당하고 괴로워하는 그들의 글과 그림에서 생각이 맴돌고 그 기억이 마치 자신의 기억인 양 무의식이 흔들리고 겹쳐지는 듯 합니다. 차라리 못 알아차리고 귀를 막고 눈이 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자신도 죄책감과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지만 그런 그이기에 그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아우스터리츠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주었고 그렇기에 아우스터리츠가 자기 자신에게조차 터놓지 못하는 무의식 속에 묻혀버린 기억의 파편을 끄집어내는 듯합니다.
저는 원서를 참고해가며 읽고 있는데요, 확실히 을유문화사 번역이 많이 아쉬운 것 같아요. ㅠㅠ 쉼표로 끝없이 이어가며 길게 늘어뜨리는 문장은 독일어의 특성이고 또 그것이 좋은 독일어 글쓰기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걸 한국어로 그대로 옮기는 데는 문제가 있고, 그렇게 해서는 사실상 좋은 한국어 문장을 만들어내기가 불가능하지 않나 싶습니다... ㅠㅠ 처음에 화자의 대사인지 아우스터리츠의 대사인지 헷갈렸던 문제의 경우에는, 저는 혹시라도 원서에는 어떤 특정 문법적 장치(인용할때 쓰이는 Konjunktiv 1)를 사용한 것인데 번역 시 그것을 고려하지 않은 것인 줄 알고 찾아보았더니, 그렇지 않고 원서에서도 똑같이 헷갈리게 써 놓았더라고요. ㅎㅎㅎ 다만 책이 진행될수록 아우스터리츠가 거의 화자의 역할을 넘겨받게 되면서 왜 그랬는지 조금은 이해가 갔습니다. 녹투라마도 저는 동물원 이름이 "녹투라마 동물원"인줄 알았어요! ㅎㅎㅎ 그런데 원서로 읽어보니 읽는 즉시 바로 속시원하게 해결이 됐습니다. 이런 부분에는 각주라도 달아 주셨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죠. ㅠㅠ
아, 길게 늘어지는 문장인 건 독일책들 (또는 프루스트같은 완연체의 책들)에서 익숙한데요, 그걸 제대로 한글로 옮기지 않으면 주술도 헷갈리고 일단 독일어가 아닌 부분들 (중간 중간에 있는 프랑스어 등)에서도 좀 문체가 매끄럽게 해석이 안 된 부분은 있더라구요. 하지만 지금 전 그의 다른 작품들과 스테판 츠바이크의 작품들을 번역해서 좋은 평을 받고 있는 Anthea Bell의 영역본도 같이 읽고 있는데 너무 좋아요! 그리고 제발트의 다른 작품들(현기증, 이민자들, 토성의 고리, 등등) 은 번역이 잘 되어있다는 평입니다. 그리고 초반에는 좀 헷갈리지만 다시 아우스터리츠와 재회하고부터는 거의 아우스터리츠의 성장기를 따라가며 아주 술술 읽힙니다.
맞아요 ㅎㅎ 번역이 뭐랄까 엄청 꼼꼼하게 하셨다는 생각이 잘 안든달까요. ㅠㅠ 저도 아우스터리츠 이야기 나오면서부터는 그냥 다른 성장소설들 처럼 잘 읽히는 듯 합니다:)
레인딘의 홍수참사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하네요. 여기 나온 사진들이 다 실제 사진들같아서 이게 소설인지 실화인지 헷갈리는 부분이 많아요.. 그래서 아우스터리츠를 입양했던 일라이어스가 보여준 앨범 속에 강아지와 소녀의 사진은 마치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 속의 무슨 심령사진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의 어릴 적부터 이렇게 얄궂은 운명의 장난 같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는 인간의 생명과 문명의 위태로움이 여기서도 느껴집니다.
질병과 죽음을 시험과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과 죄와 결부시키던 일라이어스와는 반대로, 에반은 적절하지 않은 때 죽을 운명을 가졌던 망자들이 자신들의 몫을 받을 때 속은 것을 알고는 다시 삶으로 돌아오기를 엿보고 있다고 말했어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그리고 저도 파리에 살았던 적이 있어서 이 책 제목을 보자 Gare d'Austerlitz(파리 13구의 기차역), 그리고 그 기차역이 이름을 따온 나폴레옹의 Austerlitz 전투가 생각났어요. '전쟁과 평화'에서도 정말 인상깊게 나왔죠. 또한 웬지 앞에서 나온 SS요원들의 고문장면 때문인지 아우슈비츠도 생각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고 스스로 가장 사소한 것까지 주목했다고 믿는 사람들까지도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자주 무대 위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닌 소도구 역할을 하지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힐러리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우리 머릿속에 이미 완성되어 새겨진 그림들을 다루는 것으로, 진리가 어딘가 다른 곳에서 그 누구에 의해서도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그 그림들을 응시한다는 거예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사진 작업에서는 현실의 그림자가 무에서부터 감광지에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항상 나를 사로잡았는데, 그것은 한밤중에 내 속에서 떠오르다가 붙잡으려 하면 너무나도 빨리 사라져 버리는 기억처럼, 오랫동안 현상 욕조에 담가 둔 인화지와 다름없었어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그것은 그런 비현실적인 현상에서, 말하자면 비현실적인 것이 현실 세계에서 번쩍이거나, 우리 앞에 펼쳐진 풍경 속에서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 속에서 특정한 빛이 효과를 발하거나, 우리의 깊숙한 감정에 불을 붙이거나 어쨌거나 우리가 그렇게 믿는 것이라고 알폰소가 말했지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더 이상 대조도 없으며, 차이도 없고, 오로지 빛이 관통하는 유동적인 변화 과정, 모든 찰나적인 현상들이 다시 한 번 나타나는 윤곽의 흐려짐, 그리고 기이하게도 이 모든 현상들의 순간성이 그 당시의 내게 영원이란 감정을 불러일으키던 것을 나는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지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불행한 삶을 끝내는 것에서마저 실패하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 있을지,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아우스터리츠가 피츠패트릭 가, 안드로메다 롯지(이곳에 대한 묘사도 아름답지만 이 이름 너무 이쁘지 않나요? 마치 다윈의 갈라파고스 같은 정말 이런 곳이 있나?하고 검색해봤어요. 안타깝게도 이건 허구였던 것 같습니다.)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정말 낮에도 꿈을 꾸는 것 같은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데요. 마치 알폰소 삼촌의 수채화같아요. 이런 지상 낙원도 결국 찰나의 순간처럼 지나가고 자신이 제작한 기요틴을 이용해 자살한 목수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아우스터리츠가 내뱉은 말부터 분위기가 극적으로 변하는데요.. 특히 시간의 인위성에 대해 반발하는 듯 장황한 설명에 빠져드는 그의 말이 예전에 안트베르펜 정거장에서 그가 상징적 이미지들 가운데 최고의 위치에 있는 시계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게 생각나네요. "이 시계가 차지하는 중심부에 의해 모든 여행객들의 움직임이 감시당하고, 거꾸로 여행자들은 모두 시계를 올려다보며 그것에 자신의 행동 방식을 맞추도록 강요받지요." / "시간에 의해 규정된 일정을 지키는 동안 우리는 서로를 분리시키는 거대한 공간들을 서둘러 지나갔어요. 물론 여행에서 경험하는 것처럼, 시간과 공간의 관계, 즉 뭔가 환상주의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은 오늘날까지 다른 곳에서 돌아올 때마다 우리가 정말 떠나 있었는지를 확실하게 알지 못하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시간의 인위적이고 강제적인 성질 외에도 인간을 서로 분리시키는 공간과 시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그는 집착하고 항의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시간의 흐름과 역사의 허무함을 느낄 수 있는 폐허와 무쓸모의 건축물에 집착했을까요? 특히 이어 말하는 "시간 밖에 존재한다는 것", 즉 단절되고 고립된 사람들의 불행에 대한 그의 열변은 바로 그 자신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리네요.
시간 밖에 존재한다는 것, 다시 말해 얼마 전까지 자기 나라에서 남겨지고 잊혀진 지역이나 발견되지 않은 해외의 대륙에 적용된 것이 예나 지금이나 런던 같은 시간의 수도에서조차 적용되는 것이지요. 죽은 사람들이나 죽어 가는 사람들, 자기 집이나 병원에 누워 있는 많은 환자들은 그러니까 시간 밖에 있는 것이고, 단지 그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를 모든 과거와 모든 미래로부터 단절시키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불행으로도 충분하지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전 자기 정체나 뿌리에 대해서도 모르고 역사에서 배제된 듯한 아우스터리츠가 이 시간의 수도 런던 (런던 하면 빅벤 시계가 생각나는 것처럼)에서 절망감을 느낀 것처럼 애시먼이 아이버 그로브에 돌아와서 시간이 비껴간 듯 모든 게 그대로 있는 그 방에서 느꼈던 힐러리의 혼란감, 그리고 애시먼이 시계탑을 공기총으로 쏘게 된 분노 등이 겹쳐 보였어요.
시계가 내게는 항상 우스꽝스러운 것처럼, 근본적으로 뭔가 기만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마도 내가 스스로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내면의 충동에서 시간의 권위에 항상 저항하고, 오늘날 생각하는 것처럼 시간이 흐르지 않고, 흘러가지 않아서 내가 그 뒤로 돌아갈 수 있다면, 거기서 모든 것이 과거처럼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좀 더 정확히 말해 모든 시간의 순간들이 동시에 나란히 존재하거나 혹은 역사가 이야기하는 것 중 그 어느 것도 옳지 않았으면, 일어난 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다른 순간에 비로소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른바 시대적 사건에서 나를 배제시킨 때문일 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되는 비참함과 결코 끝나지 않은 고통의 절망적인 미래를 열어 주기 때문이에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우리가 뒤로 한 세월이 여전히 미래에 놓여 있는 것처럼 거역할 수 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이곳에서는 정지한 것 같았고, (...) 힐러리는 시간과 날의 흐름으로부터, 그리고 세대가 바뀌는 것으로부터 그렇게 오래 차단된 공간 속에서 역사가에게까지 엄습해 온 기이한 감정의 혼란에 대해 언급했지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 회사가 제작한 차량들로 된 장난감 기차와 홍수로부터 구조된 동물들이 쌍쌍이 얌전하게 내다보는 방주는 보는 것만으로도 자기 앞에 시간의 심연이 열려 있는 듯, (...) 똑같은 분노가 다시 일어나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깨닫기도 전에, 뒤뜰로 나가 공기총으로 창고의 작은 시계탑을 여러 차례 맞혔고, 그 시계의 숫자판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흔적을 볼 수 있다고 말했어요. (...) 내가 애시먼과 힐러리, 아이버 그로브와 안드로메다 별장에 대해 생각한 모든 것은 내 속에서 분리된다는 느낌과 바닥 없는 심연의 느낌을 불러일으켰어요.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여기서 나온 기차와 노아의 홍수의 방주는 여러번 소설에서 나오는 것 같은데요. 이 둘이 처음 만난 기차역도 그렇고 기차역은 도착 및 출발 시간이 규정된 시간에 묶여 있고 공간과 공간 사이를 오가는 장소죠. 그리고 이전에도 그레이트 이스턴 호텔에서 3층으로 된 방주와 부리에 푸른 가지를 문 비둘기가 막 그곳으로 돌아오는 모습의 상징물을 페레이라가 보여주던 모습이 비둘기가 날개를 다쳐도 결국 돌아오는 homing instinct를 연구하고 싶었던 제럴드에서도 나오는데 이것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레인딘 마을처럼 홍수 속에 영원히 가라앉았는지 여전히 남아 있는지도 불확실하고 막막한 그의 고향이 어딘지 몰라도 언젠가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방주와 비둘기로 표현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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